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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형제들로 인해 언제나 한 걸음 물러나야 했던 아이 오빠 공부시키고 나면 너도 꼭 고등학교 보내주마 하며 미안해하시던 어머니의 표정 지킬 수 없는 약속 줄줄이 태어나 입을 벌리던 동생들 어린 나이에 타지로 가 돈을 벌 수 밖에 없던 운명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10분의 휴식시간에서만 쏘일 수 있던 한낮의 햇살 줄지어 공장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들 끊임없이 돌아가던 미싱 분주한 손길 앳된 얼굴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손바닥만한 방에 끼어 자던 여섯 명의 사람들 더운 여름날엔 땀으로 목욕하고 추운 겨울날엔 연탄 값이 아까워 서로의 팔을 붙잡고 온기를 나눴던 그들 적은 월급에서 입을 것 먹을 것 아껴 시골집으로 보내던 돈 딸을 잘 부탁한다는 숙모의 편지 한 통 늘어나는 식구들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난 그런 시절을 겪지 않고 살아왔다. 작가의 나이는 나보다 어머니와 가깝다. 그녀가 열여섯 서울 가는 기차에 올라 직업훈련원에 들어갔을 무렵 어머니는 이미 결혼을 해 언니를 낳았다. 내 주위에 그녀와 같은 연령으로 그녀와 비슷한 인생을 살아온 사람을 찾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난 계속해서 자문해 본다. 너는 어떻게 할래? 서른일곱 개의 방 서른일곱 개의 인생들 꿈들 그 속에서 너는 어떻게 할래? 고된 일터 나사를 박느라 분주해진 손 적은 월급 피로에 찌든 얼굴들 그들을 사람이 아닌 기계 취급하는 회사의 높으신 분들 그 안에서 넌 어떻게 할래? 라고.
외딴방을 구입한 건 몇 해 전이지만 지금껏 펼쳐 보지 못한 이유는 사실 내가 그녀의 작품을 피했기 때문이다. 자전적 소설이라니 그건 마치 타인의 방에 허락 없이 들어가 예상치 못한 것을 보리라는 예감과도 같았다. 책상 한켠에 놓여 있던 외딴방은 고개를 돌릴 때마다 내 시선을 한동안 붙들어 놓았다. 이젠 읽을 때가 되었을까. 난 언니가 먼저 읽고 갖다 놓은 외딴방을 들고, 언니의 표정을 확인하고 나서야 책을 읽을 결심을 했다. 이번 책은 후유증이 심하지 않나보다 하는 안일한 생각을 하면서.
어서 이 무료한 고장을 떠나 도시의 큰 오빠에게 가는 상상을 하는 열여섯의 소녀. 아직은 어리고 부모님 품안에서, 그래도 굶지 않고 자라온 한 소녀가 있었다. 꿈에 그리던 상경을 했지만 조직의 생산부 라인에 들어가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적은 월급을 가지고 서른일곱개 중에 하나의 외딴방에서 큰오빠와 외사촌과 살림을 꾸려 나가게 된 소녀. 책은 열여섯에서 열아홉까지의 그녀의 성장과정과 어른이 된 현재 서른둘의 그녀 이야기가 함께 진행 된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전 세대 이야기라 하기엔 너무나 생생한 느낌. 크나큰 아픔. 아마도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이 세상이 그 이야기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 누가 이 이야기들을 남의 이야기라고 외면할 수 있을까. 이것은 나의 어머니 이야기이며 나의 언니 이야기이며 나의 친구이야기이기도 하고 나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벗어나지 못한 아픔을 향해 빙빙 돌아가는 동안 깊은 물에 잠겨 있는 것처럼 숨이 막혔다. 책을 읽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런 기분을 느꼈는데 십육 년 동안 그 일들을 마음에만 담아 놓았던 작가는 어땠을까. 언제라도 툭 터질 듯, 어설프게 봉합해버린 그녀의 상처가 수면 위로 올라오기 까지 참 긴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나이 열아홉에 멈춰버린 어린 그녀가 있었다.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그녀에게 어른이 되기를 요구했고 어른이 된 그녀는 외딴방의 4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린 채 살아왔다. 계기는 희재 언니의 죽음. 그로 인한 관계 맺기의 두려움. 책임감. 죄책감들이 그녀 내부에서 회오리 졌지만 그 모든 감정을 묻어둔 채 잊으려고 노력한 채 그녀는 서른을 넘겨버렸다. 하지만 그녀는 말해버렸다. 그리고 글은 완성 됐다. 가슴 속에 살아온 희재 언니를 보내고 자신의 아픔을 어루만지고 이제는 앞으로 나아갈 때가 왔다고 말하고 있다.
작가는 이제 알았을까? 그녀에게 글쓰기가 무엇인지를.
이제 내 가슴을 떠나 그녀가 어디로 가는 지. 그곳이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소용돌이나 퇴적물이나 정적 속은 아닐 것이다. 내 가슴에 소망스런 다른 이야기들이 이렇게 솟아나고 있으니. (p.405)
읊조리는 듯 때로는 절절하게 외치는 듯 흐르는 그녀의 랩소디를 들으며 나는 생각한다. <엄마를 부탁해>를 읽고 나서 며칠 잠을 설치던 날들 그런 날이 반복되는 건 아닌가 하고. 그리고 작가로서 신경숙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그 이유는 그녀의 소설을 읽고 이리도 자신의 아픔처럼 앓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