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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
롤랑 바르트 지음, 변광배 옮김 / 민음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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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작품을 쓸 수 없을 것 같고, 더 이상 써야 할 작품이 없으며, 내가 써야 할 유일하게 남은 것은 써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바르트는 이런 식의 작품에 대한 작품의 담론을 피해야 한다고 말한다. “작품은 내가 그것에 대해 말해야 할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바르트가 말하는 메타담론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지만, 나도 그렇다. 리뷰를 쓸 수 없을 것 같고, 내가 유일하게 쓸 수 있는 것은 쓸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 작가들은 왜 쓸 수 없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읽고도 이해한 것이 별로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내가 이 책에 대해 말해야 한다면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롤랑 바르트? 몇 번 들어본 이름이지만, 그다지 호기심도 없었고 아는 것도 없었다. 다만 <콜레주 드 프랑스 강의 노트>라기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푸코의 강의는 매우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라고 할까. 재미는 둘째 치더라도 어려웠다. 특히 1부는 더 그랬다.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는 2부로 되었다. 1부는 “소설의 준비: 삶에서 작품으로”란 제목으로 1978년 12월부터 1979년 3월까지 진행된 강의이고, 2부는 “소설의 준비: 의지로서의 작품”으로 1979년 12월에서 1980년 2월까지의 강의다. 바르트는 “소설의 준비” 강의를 마치고 이틀 후인 1980년 2월 25일에 교통사고를 당해 한 달 후에 세상을 떠났다.

 

“소설의 준비”는 말 그대로 소설을 쓰기 위한 준비 작업이다. 작가들이나 작가지망생들에게는 매우 실용적인 강의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일반적 의미의 “실용”을 생각하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다. 작법에 관한 강의도 책도 접해본 적은 없지만 그래도 그런 것들과는 다를 것 같다. 작가의 기본적 태도?, 가치관? 이라고 해야 할까?

 

1부의 대부분은 ‘하이쿠’에 대한 칭송(?)이다. 하이쿠, 하이쿠, 하이쿠!

“5, 7, 5의 3구(句) 17자(字)로 구성되는, 일본 고유의 단시(短詩). 극소수의 단어로 많은 것을 표현하고 암시하는 예술이다.” 하이쿠의 사전적 의미다. 바르트가 인용하는 많은 하이쿠는 내가 보기에 참 평범하다. “겨울바람이 불어오자 / 고양이들의 눈이 / 깜박댄다.”

 

바르트는 하이쿠를 일종의 ‘메모하기’ 로 본다. 메모 하기는 소설의 전 단계, 글쓰기의 최소 행위다. 여하튼 하이쿠에 대한 과도한 찬사를 보며 드는 느낌은 이런 것이다. 이사람 저사람 술꾼의 손에 돌고 돌던 술병을 두고 수억이 넘는 조선 최고의 백자라 감정하는 <TV쇼 진품명품>을 지켜보는 15세기 주모의 심정이라고나 할까. 하이쿠 때문에 1부는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도 참 웃기다. 이해를 못하니 흠집을 낸다.

 

1부가 하이쿠라면 2부는 프루스트다. 발자크, 플로베르, 말라르메, 카프카도 있지만 단연 프루스트다. 마침 《잃어버린 시절을 찾아서》 1,2권은 읽은 터라, 하이쿠보다는 훨씬 낫다. 그런데 펭귄클래식 코리아는 1,2권이 나온 지가 언젠데, 아직 3권을 내놓지 않는다. 7권까지 읽으려면 몇 년을 기다려야 할지 모르겠다. 프루스트가 전권을 쓴 기간보다 전권 번역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다. 여하튼 2부에는 조금 알아들을 수 있는 내용도 있고 심히 공감되는 부분도 있다. 가령 글쓰기 욕망.

 

바르트는 글쓰기의 편집증적 욕망에 대해 말한다. 카프카는 밤의 ‘낙서’를 자신의 욕망으로 여겼고, 플로베르는 ‘글쓰기라는 길들일 수 없는 환상’에 대해 말했다. 작가는 “궁둥이에 욕망을 달고” 산다. 편집증적 욕망은 우스꽝스럽지만, 우스꽝스러움이란 그 자체가 배제와 고독인 만큼 대단한 면이 있다. 특히 원고는 순수한 욕망의 덩어리다. 모든 원고가 지루한 것은 이 때문이다. 타인의 욕망과 소통하고 타인의 욕망에 흥미를 갖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출간된 작품과 원고는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의 욕망을 매개한 작품은 그에게서 그의 욕망을 조금 빼앗습니다. 내가 독자로서 그 욕망을 견딜 수 있도록 해 주기 위해서입니다. p241”

 

어쩌면 우리가 밤에 쓴 편지처럼 순수한 원고는 다음날 아침 우리를 질식시킬 지도 모르는 걸까? 타인의 순수한 욕망만큼 감당하기 힘든 것도 없다.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쓰기와 읽기의 관계다. 바르트는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즉 글쓰기가 읽기에서 기인한다면, 이 두 행위 사이에 강제가 있다면, 어떻게 쓰도록 강제당하지 않은 채 읽을 수 있을까요? 달리 말하자면, 이 질문은 괴물과도 같은 다음 질문입니다. 어떻게 작가들보다 독자들이 더 많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읽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글쓰기 행위로 이행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어떻게 위대한 독서 애호가가 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억압일까요? 나는 이 질문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단지 이 질문이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만을 잘 알 뿐입니다. 결국 나는 항상 독자들이 있다는 사실에 놀랍니다. 다시 말해 글을 쓰지 않는 많은 독자들이 있다는 것에 놀랍니다. 여전히 같은 질문입니다. 소통 불능의 본질인 질문입니다. (‘메시지’가 전달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어떻게 타인의 욕망을 이해할 수 있을까요?(어떻게 이 욕망 -이 쾌락- 에 동일화될까요?) 관대한 태도 (이해하지 못하는 욕망을 이해하려는 척하는 태도)에 의해 묻혀 버린 전형적인 질문입니다. p242」

 

나도 가끔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읽기 위해 읽는가, 쓰기 위해 읽는가? 작가도 아니고 작가가 될 의지(능력)도 없지만, 내 안에 글쓰기의 욕망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서둘러 책을 읽으며, 머릿속에 리뷰를 먼저 쓸 때가 있다. 어떤 문장이 내 기억을 강제할 때 (프루스트 식으로), 나는 책 내용보다 기억을 따라 가기를 즐긴다. 바르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글쓰기를 하고자 하는 한 주체의 이야기’ 라고 한다. 스크립투레 (글쓰기-의지)의 소설이다.

 

 

 

나는 이 리뷰에서 『롤랑 바르트, 마지막 강의』의 거의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말 하지 말았어야 했지만, 책을 제공받은 대가로 내가 무엇을 말하는지도 모르면서 말하고 있다. 이 글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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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예술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이번달에는 조금 얇은 책이 되었으면 한다. 3월 신간평가단 책에 살짝 어금니를 깨물고 있다. 너무 두껍고 무겁다 흑;;  인문사회 분야의 책은 호불호가 분명한 편이라 취향을 빗나간 책은 부담이 두배다. 혼자 읽을 때는 몰랐는데, 이렇게 공동으로 선정해 의무적으로 읽어야하고 보니, 일반적으로 읽기 좋은 책이 어떤 것일까를 생각해 보게 된다.

 

 

첫 번째 책은 지젝의 『신을 불쾌하게 만드는 생각들』 이다.  작은 크기에 100쪽 정도의 책으로 매우 가뿐하고 가볍다. 사실 나는 읽었지만, 이 책을 두고 장정일과 이택광이 한겨레를 통해 한바탕 논쟁을 치루는 것을 보고, 한번 더 읽어볼까 싶다. 사실 지젝의 입장은 매우 분명한데 무엇때문에 그렇게 싸우는지 모르겠다. 지인의 말을 들어보면 전부터 두 사람 사이에 지젝을 놓고 트윗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 것과 관계없이 샤를리 에브도 사건과 IS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하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전근대적 현상이 아니라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외설적 증상이라는 지젝의 진단은 찬반여부를 떠나 생각해볼 만하다.

 

 

두번째 책은 솅크먼의 『우리는 왜 어리석은 투표를 하는가』다. 솅크먼은 물론 처음 듣는 이름이다.  기자, 프로그램 진행자 등 다양한 경력을 가진 역사학자로, 현재 미국 대학의 역사학과 부교수인 것 같다. 순전히 제목을 보고 선택한 책이다. 서민들이 새누리당을 찍는 것도 어리석어 보이지만, 나 역시 마찬가지다. 맨날 입에 욕을 달고 있으면서도 보수적인 야당을 찍는다. 새민련이 호남의 새누리당 혹은 정부여당에 반대하는 새누리당일 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정작 투표 용지 앞에서는 또 어리석은 미련을 떨치지 못한다. 나는 왜 그렇게 어리석은 것일까?

 

 

마지막으로 주래프스키의 『음식의 언어』다. 400쪽이 살짝 넘지만, 음식이 삼분의 일쯤 차지한다고 추측하면, 그다지 힘든 분량은 아니지 않을까 싶다.  저자는 언어학 교수인데, <음식의 언어>는 스탠퍼드 대학의 대표적 교양 강의라고 한다. 말하자면 강의록이겠다.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만큼 유명한 강의인지는 모르겠는데, 일단 제목만으로는 샌델보다 재미는 있겠다 싶다.  "음식의 언어에 주목하며, 이를 탐구함으로써 인류의 역사와 세계의 문화, 사회, 경제를 다시 쓰고 인간의 심리, 행동, 욕망의 근원을 파헤친다." 고 출판사는 주장하고 있다. 과연 음식의 언어로 세계를 얼마나 다시 쓸 수 있는지 조금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확인해 보고는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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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의 탄생]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한자의 탄생 - 사라진 암호에서 21세기의 도형문까지 처음 만나는 문자 이야기
탕누어 지음, 김태성 옮김 / 김영사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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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TBC TV <비정상회담>의 번외 편으로 보이는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는 첫 방문지로 장위안의 고향인 중국 안산을 찾아갔다. 경유지인 리장에서 똘똘이 타일러와 사교왕 줄리안은 나시족의 동파문을 발견하고는, 털썩 주저앉아 즉석에서 간단한 ‘동파문’ 필담을 주고받는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 정도면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지 않을까? 동파문은 현재도 쓰이고 있는 나시족 고유의 상형문자라는데, 한자와는 기원이 다른 것 같다.

 

그러나 한자도 처음에는 상형문자로 시작했다. 한문 시간에 가장 먼저 배웠던 것이 한자를 구성하는 여섯 가지 원리로, 상형․ 지사․ 회의․ 형성․ 전주․ 가차였다.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가 표현의 한계에 부딪히면서 한자는 점차 추상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갔다. 만약 한자 역시 동파문자처럼 상형에만 머물렀다면, 한자가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까? 그 대신 공자도 맹자도 없었을지는 모르겠다.

 

대만 최고의 문화 비평가라는 탕누어가 쓴 『한자의 탄생』은 탄생, 즉 기원을 찾아 거슬러 오른다. 맨 처음 만나는 것은 물론 동파문자와 비슷해 보이는 상형문자들이다.

 

침상 위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모양, 夢, 꿈 몽의 갑골문자다. 너무 귀엽고, 가만 들여다보면 夢과 닮아 있다. 탕누어는 이렇게 갑골문자에서 시작해 현재의 한자로 변화되어 온 과정을 추적한다. 물론 이 책은 학술서가 아니기 때문에, 당연히 모든 한자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것은 아니다. 몇몇 사례를 들어 변천의 일반적 과정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갑골문에 특별한 애정을 가진 듯 보이는 저자는 현대 중국의 문자 간화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간화란 저자의 말을 빌면 이렇다.

 

  

 

「온갖 두려움에 휩싸여 촌음을 다투는 신경질적인 혁명 정당으로서 중국공산당은 문자사용에 있어서도 시간을 절약하고 빨리 손에 익히는 방법을 고안하기로 결정했고, 이에 따라 전면적인 문자 간화를 실행했다. 그다지 쓰기 편치 않은 ‘진塵’자도 간화의 철퇴를 피해 갈 수 없었다. 1,000여년이 넘도록 운 좋게 살아남은 이 사슴도 중국공산당에 의해 멸종되기에 이른 것이다. 대신 아주 간단한 회의자인 ‘진’(자판을 찾을 수 없어 그냥 한글로 ;;) 자가 생겨나게 되었다. 아주 작은 먼지 알갱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p269」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첫 번째 ‘진’ 자는 사슴 세 마리가 뛰어 노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두 번째는 우리가 한문이라고 배운 ‘진(먼지)’이며 중국에서도 가장 많이 사용되어 온 ‘진’자다. 세 번째는 중국 공산당에 의해 간소화된 ‘진’ 자다. 사슴 세 마리가 먼지를 일으키며 뛰어 가는 아름다운 글자는 무미건조하게 되어 버렸다. 실용성이라는 이름으로.

 

물론 간화된 문자는 원형을 간직한 갑골문이나 초기 형상이 상당히 보존된 복잡한 한자에 비하면 의미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만큼 기호화되었다. 그런데 저자가 주장하는 것처럼 한자의 간화라는 것이 단지 ‘빠르게 쓰기’에만 그 목적이 있는 것일까? 루쉰의 《아Q정전》의 마지막에는 글자를 모르는 아Q가 사인 대신 붓으로 큰 동그라미를 그리는 장면이 있다. 그 동그라미마저 삐뚤삐뚤해 아Q는 몹시 신경을 쓰지만, 정작 자신이 동그라미 한 그 문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죽임을 당한다. 중국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한자는 무척 어려운 글자다. 한자는 우리나라 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생판 외국어라고 할 수도 없다. 그런데도 매우, 매우 어렵다. 나만 그런가? 세종대왕도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맞지 않다고 했지만, 단지 말과 문자가 다를 뿐 아니라 한자는 글자 자체가 몹시 어렵다. 한글 창제 당시만 해도, 한글은 똑똑한 사람은 한나절이면 배우고, 바보라도 열흘이면 깨친다고 했다. 그렇게 배운 한글로 쓰지 못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한자는 죽었다 깨어나도 열흘 만에 다 배울 수는 없다. 어쩌면 중국 공산당이 만든 간화도 원래 한자만큼 어려운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탕누어는 간화에 대해서 획수를 줄여 빨리 쓰게 만든 글자라는 식으로 말한 걸까? 간화는 전혀 알지 못하므로 무어라 말할 처지는 아니지만, 상식적으로 획수가 줄어들면 당연히 배우기도 쉽고 기억하기도 좋지 않을까?

 

탕누어가 간화를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것은, 어쩌면 공산당에 대한 반감인가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표음문자 보다 표의문자를 우위에 놓는 듯한 인상과 맥이 닿아 있다. 이 책의 번역어로는 ‘병음문자’ 라고 하는데, 소리를 모방하는 영어 같은 문자 체계는 상형의 한계에서 자신을 버리고 부호화에 투항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중국 문자는 변화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실상의 세계에 명맥을 유지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 p39” 다. 그 결과 역사의 맥이 끊긴 후에 발견된 병음문자는 전혀 해석이 되지 않은 채 사장되었지만, 갑골문자는 문자 안에 의미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어 어렵지 않게 해석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가령 지금의 문화가 완전히 파괴된 1000만년 쯤 후에 우연히 영어와 한자가 동시에 발견된다면 어떻게 될까? 영어는 의미 파악이 불가능해 버려지겠지만, 한자는 똑똑한 후대인들에 의해 충분히 이해될 수 있어, 인류의 역사를 고스란히 전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충분히 그럴듯한 말이다. 그러나 언어는 후세에 대한 전달력이 아니라 당장의 효율성이 더 중요한 것은 아닐까? 탕누어는 ‘어린 백성’ 을 위해 ‘쉽게 익혀서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라는 세종대왕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을까? 많은 민족들이 직관적인 상형을 버리고 병음을 채택한 것은 세종대왕과 같은 마음에서가 아닐까? 문자 보다 사람이 먼저여야 하지 않을까?

 

탕누어의 『한자의 탄생』은 기본적인 세계관에서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지점이 있지만 , 그냥저냥 읽기에 나쁘지는 않은 책이다. 인문학적 비평을 지향하는 것으로 보이는 저자는 마르케스와 보르헤스를 비롯해 라이프니츠와 비트겐슈타인에 벤야민까지 다양한 지성을 끌어 모은다. 아주 깊이가 있거나 감탄할 정도는 아니지만, 부분부분 흥미로운 점이 없지 않다. 특히 벤야민의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염두에 둔 이런 묘사는 재미있다.

 

「파리의 한가한 구경꾼들에게 백화점이나 쇼윈도 같은 구경을 위한 회랑 공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갑골문의 대로 양쪽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양식과 기능, 의미가 각기 다른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이다. 점유하는 땅이 비교적 크고 권력을 장악한 사람이 그 권력을 행사하는 궁궐도 있었고, 제사를 위한 묘당도 있었으며, 일반인들의 주택 사이로 높이 솟은 호화 주택도 있었다. p170~1」

 

궁궐 宮, 묘당 享, 호화주택을 의미했던 京 혹은 高는 어느 것일까? 갑골문의 거리를 천천히 걸며 노니는 것, 그것이 『한자의 탄생』이 주는 참 재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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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연대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시간 연대기 - 현대 물리학이 말하는 시간의 모든 것
애덤 프랭크 지음, 고은주 옮김 / 에이도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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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이과 출신인 나는 과학 네 과목을 모두 배웠다. 화학, 생물, 물리, 지구과학. 가장 점수가 안 나왔던 것은 지구과학이었고, 전혀 이해를 못하는데도 희한하게 점수만은 만점이 나오던 것이 물리였다. 물리는 문제는 어렵고, 답은 쉬운 그런 과목이었다. 아마도 그 젊은 여선생님은 사물의 이치를 깨우쳐 주는 것보다는 답을 찾는 요령을 가르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1980년대 중반의 대학은 학문보다 운동이 더 중요했던 시기였지만, 내게 학문은 운동만큼이나 충격적이기도 했다. 1학년 교양 수학 시간에 나는 처음 알았다. 내 머리는 소위 학문을 할 수 있는 그런 종류가 아니라는 것을. 교수의 말도 알아들을 수 없었고, 문제도 전혀 손 댈 수 없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풀 수 없는 수학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가장 좋아했던 과목 ‘수학’은 넘사벽이 되었지만, 사실 내가 절대 넘을 수 없으리라고 생각한 것은 물리였다. 그런데도 언제부턴가 나는 천체물리를 동경하고 있었다.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공부는 얼마나 행복할까, 천체물리학과라는 말만 들어도 부러웠다. 다행히 내 머리의 한계를 잘 알게 된 이후라, 그걸 해보겠다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하늘의 별처럼, 아득히 멀지만 그 빛만큼은 마음속에 반짝였다.

 

애덤 프랭크의 『시간 연대기』가 신간 평가단 리뷰 도서에 선정된 것을 보고 기쁘면서도 한편 걱정이 되었다. 읽기에는 너무 좋겠지만, 리뷰를 쓰기에는 결코 만만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막상 도착한 책은 걱정에 무게를 더했다. 하드커버에 500쪽이 넘는 분량, 물리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은 고생이 많겠다는, 주제 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번 주 내내 『시간 연대기』에 매달렸다. 3월이 되면서 이것저것 일들이 시작되고, 그만큼 절대 시간이 부족하기도 했지만, 책 자체가 꽤 많은 시간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아주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어렵지 않고 재미있어서, 두 세 시간 꼼짝하지 않아도 힘겹거나 지루하지 않았다. 예전에 시간에 관한 책을 두 세권 읽기는 했다. 호킹의 《시간의 역사》도 읽었고, 제목도 생각나지 않지만 시간 어쩌고 하는 책도 읽었다. 그 책들은 그다지 쉽지도 않고, 물리학적 지식을 꽤 요구하는 것들이었다. 그 책들에 비하면 『시간 연대기』는 차라리 반은 인문학이라 해도 좋을 만하다. 물리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도 호기심으로 몇 장 넘겼다가, 빨려들듯 읽게 될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저자 프랭크가 시간을 푸는 방법에 있다.

 

“이 책은 시간, 즉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을 다룬다. p12”

 

물리학이 다루는 ‘시간’은 거의 우주의 시간이다. 시간이란 무엇인가, 시간은 왜 화살처럼 방향을 갖고 있나 등의 너무 자명해 보이는 개념부터 아인슈타인의 시공간, 빅뱅, 팽창하는 우주 등등이다. 그런데 『시간 연대기』의 저자 프랭크는 일반인에게는 너무도 추상적으로 들리는 이 우주의 시간이 우리가 실제 생활에서 경험하는 일상의 시간과 얼마나 밀접하게 얽혀서 변화해 왔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우주론과 우주의 시간에 대한 생각이 변화하면, 인간의 시간도 함께 변화한다는 것이다. p15”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는 뉴턴의 과학적 발견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에 근본적 변화를 일으킨 산업혁명이다. 뉴턴의 물리학 법칙이 별들의 움직임을 새롭게 이해하도록 했고, 뉴턴 역학은 산업혁명의 토대가 되었다. 노동자들이 줄지어 출근 도장을 찍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새로운 생활양식은 행성들이 중력법칙과 운동법칙에 따라 시계처럼 궤도 운동을 하는 우주를 반영했다.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은 짝을 이루며 서로를 변화시켜왔다. 우주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은 언제나 긴밀하게 서로 얽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p15”

 

그러므로 『시간 연대기』는 물리학이자 동시에 역사학이다. 시간에 대한 인간 인식의 변화는 그대로 인간의 역사이다. 구석기 시대부터 SNS 시대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체험은 혁명적 변화를 거쳐 왔다. 구석기 시대에는 그 누구도 秒 혹은 分 심지어 時라는 시간을 경험하지 않았다. 1300년대 초, 유럽의 여러 도시에 시계탑이 등장하면서 비로소 인간은 時라는 시간을 인식하게 되었다.

 

시계는 중세 수도원의 규칙적인 성무일과라는 필요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수도원들 덕분에 … 모든 인간의 정신에 시계의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박자가 공통으로 생겨났다고 누군가 말을 한다고 해도 사실을 왜곡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p123” 규칙이 별 의미가 없던 일반인의 생활에도 시계가 등장하면서, 시간이 질서정연한 생활의 배경이 되었다. 추상적인 시간은 생활의 새로운 도구가 되었다. “15세기 말 무렵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시간을 알려주는 시계에 의해 완전히 통제되었다. 지역주민들은 커다란 시계 종소리와 시침에 따라 움직이는 노예나 마찬가지였다. p128” 시계에 의한 삶의 변화는 뒤이어 혁명적 우주론의 등장을 촉발했다. 코페르니쿠스, 케플러, 갈릴레오가 등장한 것이다. 이들의 등장은 우리를 다시 우주의 시간으로 데려갔다.

 

그렇다면 수 천 년, 길게는 수 만년에 걸쳐 인간의 시간과 우주의 시간이 얽혀 변화되어 온 시간이란 놈, 시간이란 개념은 이제 완성 되었는가? 우리는 시간에 대한 불변의 진리를 얻었는가? 저자 애덤 프랭크가 『시간 연대기』를 쓴 이유는 그 답이 ‘아니오!' 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 과학상식에 의하면 시간은 빅뱅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런데 최첨단의 우주론은 이렇게 말한다. “빅뱅이론의 시대는 지나갔고, 우리는 아직 무엇이 빅뱅이론을 대체하게 될지 모른다. p13” 137억년 동안의 우주 진화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 이제 더 이상 확실성을 담보하지 못한다. 우주의 나이는 137억년이 아닐 수도 있다. “시간과 우주는 한 가지 유형만 있는 것이 아니다. 태초라는 개념을 버리고 연구를 다시 시작하려 한다. p26”

 

빅뱅이론의 위기는 ‘특이점’에 있다. 물리학자가 아니라도 누구나 가질 수 있는 의문이 바로 특이점이다. 빅뱅 이후 137억년의 진화 과정은 모두 그럴 듯하다. 과학자들이 찾아놓은 증거들도 강력하다. 그런데 도대체 빅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누가, 왜, 어떻게 불꽃을 당겼는가? 빅뱅이론에서 우주와 시간은 아무런 설명 없이 시작되었다.

 

“빅뱅이 일어나기 이전에는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p366” 21세기와 함께 과학자들은 태초의 순간에 대한 급진적인 시각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고차원의 주기적 우주론과 다중우주론이 대표적이다. 이 이론들은 시작도 끝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우리가 볼 수 없는 접혀진 7차원, 막으로 된 우주, 영원한 인플레이션, 무수한 주머니 우주들에 대한 극한의 사고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관한 물음은 여전히 존재한다. 문제는 빅뱅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냐가 아니라, 이전 혹은 이후라는 말 자체다. 물리학과 우주론이 갖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시간’이다. 단적으로 “시간이라는 것은 없다.” 고 주장하는 과학자도 있다. ‘지금’들만 존재할 뿐 연속성을 가진 시간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말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생각나게 하는 ‘시계의 불확정성’ 이론도 있다. 어떤 시계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우주 자체가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계가 불확정적이란 것은 우리 모두가 그토록 바라는 구체적인 물리법칙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각 우주마다 한가운데 앉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기 전에는 어느 법칙이 어느 특정한 우주에서 생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p449”

 

빅뱅이전에 대한 급진적 사고들은 저것이 과연 과학일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 우리가 볼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우주에 관한 이야기는 공상과학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물론 빅뱅이론의 대안들은 공상의 산물이 아니라 과학적 사고의 극한에서 탄생했다. 하지만 여전히 추상적 사고의 결과일 뿐 물리적 증거를 획득하지 못했다. 어쩌면 인간의 물질문화가 획기적 혁명을 거듭한 끝에 접혀진 7차원의 세계에 들어가는 방법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우리가 10차원의 공간을 경험할 수 있다면, 우주와 시간에 관한 우리의 인식도 혁명적 변화를 겪을 것이다. 시간이 벤자민 버튼에게서처럼 거꾸로 갈 수도 있고, 한 순간에 여러 개의 우주에서 동시적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흥미로운 상상에 그칠 수도 있다. 아직은 누구도 알지 못한다. 다만 “과거에도 수없이 일어났던 것처럼, 새로운 제도와 새로운 물질적 개입이 이뤄지면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시간을 상상하게 될 것이다. p472" 그러나 그 시간 역시 어쩌면 ‘시계의 불확정성’ 원리가 말하는 것처럼, 단지 우리가 믿게 된 혹은 선택하게 된 하나의 시계가 가리키는 시간에 불과할 수도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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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배 문자가 와 있다. 2월 신간 평가단 책이 올 모양이다. 날도 짧고 설도 있었고, 일할 시간이 넉넉치 않았을 것이다. 알라딘 담당자가 두어번 양해 문자를 보냈다. 그렇게 2월 책을 보기도 전에 3월 책을 고르게 되었다.

 

 

 

한병철의 《심리정치》 다. 책 소개를 보기전에 일단 보관함에 넣어 놓았던 것이다. 한병철의 생각을 다 동의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것도 있지만, 현대 사회의 주요한 면을 압축된 문장으로 보여주는 장점이 있다. 그 압축된 문장이란 것이 사실 만만하지는 않다. 이번에는 또 얼마나 많은 철학자들이 구겨(?) 넣어져 있을지 궁금하다. 무엇보다 주목신간으로 선택한 것은 유명세가 있으니 일단 많은 분들이 추천할 것 같고, 둘째는 문지가 책 지원을 잘 해줄 것 같고(근거는 없다;;), 셋째 책이 작고 얇을테니 분량에 대한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피로사회》, 《투명사회》와는 달리 '정치'를 콕 찍어 대상으로 하고 있고, 그것도 '심리 정치' 라니, 흥미가 더 인다.

 

 

<마르크스 vs 이진경, 세기를 잇는 철학의 대결 > 이라는 문구가 턱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이진경이다. 동구권 몰락 이후의 서구 좌파 사상을 이진경만큼 대중적으로 그리고 선구적으로 소개한 사람이 있나 싶다. 물론 들뢰즈주의자로 정평이 나있고, 들뢰즈의 유목론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이진경의 책은 늘 읽을만 했다. 이 책은 10년 전의 《자본을 넘어선 자본》의 마르크스와는 많이 다를 것 같은 느낌이다. 예전 책이 경제적 관점을 중심으로 했다면, 이 책은 철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마르크스, 현대로 소환한 마르크스 철학의 의미, 뭐 그런 내용으로 보인다. 읽기에도 더 쉽고 재미있을 것 같다. 이야기를 푸는 형태는 초창기의 《굴뚝 청소부》와 더 가깝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읽어봐야 알겠지만 ^^;; 

 

 

 

 저자 맹정현은 언젠가 하이킥에 출연한 적이 있다. 지붕킥에서 정보석의 친구로 나왔던가?, 확실하지는 않지만, 그랬다. 그가 운영하는 <정신분석클리닉 혜윰>의 간판을 선명하게 보여 주었더랬다. 그것을 보고 한번 찾아가 볼까 생각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정신분석가 과정을 열어 전문가 양성도 했는데, 잘 되고 있는지 모르겠다. 파리 8대학, 7대학에서 석사, 박사를 했고, 라캉의 《세미나 11》을 공동 번역하고, 브루스 핑크의 책도 번역하고, 직접 몇 권의 정신분석 책을 썼다. 프로이트-라캉의 정신분석에 관한한, 매우 활동적이고 신뢰할만한 우리나라의 정신분석가가 아닐까 싶다. 일반인이 읽기에 책도 그다지 어렵지 않다. <애도와 멜랑꼴리>는 프로이트의 논문이라고 한다. 애도와 우울에 관한 각종 이야기들이 아마도 여기에서 시작되었지 싶다. 나도 가끔 애도와 우울의 차이에 대해 말하지만, 자세히는 모른다.  이 책은 프로이트에서 시작해 라캉을 거쳐, 우울에 관한 주체의 여러가지 태도, 가령 신경증적 우울증과 정신병적 우울증 등에 관한 이야기로 뻗어 나간다. (고 한다.) 재미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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