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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 - 조직론으로 본 한국 자본주의의 본질적 위기와 그 해법 우석훈 한국경제대안 4
우석훈.박권일 지음 / 개마고원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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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서야 대학생활에 약간의 아쉬움이 있다면, '경제경영학'을 외면했던 내 마음가짐이다. 오붓하고 단란하게 두런두런 강의를 나누던 철학수업에 비해, 빠글빠글 미어터지는 경영학 수업은 비용대비 효율적인 측면에서 아무런 매력이 없었다. 게다가 전형적인 문과쟁이라 숫자놀음에는 '감동'이 없다고 쉽게 단정지었다. 약삭빠르게 처세를 익히기 보다는,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탐구하겠다는 철없던 시절의 객기덕분이다. '저널리스트'가 되겠다고 잡다한 분야를 닥치는대로 들쑤시긴 했지만, '경제경영'과 '과학기술'은 영 범접하기 어려운 미지의 영역이었다. 그나마 내가 떠드는 소박한 지식들은 다 '우석훈'님과 '강양구'님으로부터 가능했고, 인식의 지평을 단단하게 넓혀주었다.

 '대안경제학시리즈 2권'이라고 밝힌 '샌드위치 위기론은 허구다'는 이전의 '88만원 세대'에서보다 구체적인 사례들로 위기를 진단하고 설득력있는 해법을 제시한다. "이건 뭔가 잘못되었다"라고 막연하게 느꼈던 것들이 어떤 맥락과 이유로 '문제'를 유발하는지, 그 영향력의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에 대한 전망이 '조직론'의 틀안에서 이루어진다. 내가 외면했던 경영학과목 '조직론'에서 말이다. 효율성이라는 좌표가 조직논리와 내부경재으로 양분된 지표위에서 협동진화로 수렴하기 위한, '주식회사 모델' 역시, '주식'이라는 말에 '투자열풍'만을 떠올리는 내 척박한 인식에 반전의 계기가 되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라'는 명제가 기업의 '영속성'을 어떻게 위협하는지, '성과'로 촉발되는 내부경쟁이 조직의 '협동진화'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두가지 발제를 염두하고 이 책을 살핀다면, 아마 지금 당장 바로 뭔가를 하고 싶은 마음이 꿈틀거릴 것이다. 실제 중국과 일본이라는 외부적인 요소에 경제침체의 원인이 있다라면, 변화를 추동할 운신의 폭은 넓지 않다. 변화의 가능성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은 끊임없이 쏟아지는 '성공지침서'의 제1계명이 아니던가.

 예술적 감수성으로 무장하고 경제학을 도구삼아 거침없이 썰을 푸는 우석훈님 블로그와의 인연은 바야흐로 4년째에 접어들었다. 그의 블로그에는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이 자동기술되어 감정의 편린이 노골적이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의 글은 명쾌하지만 수려하지 않고, 그의 입장은 분명하지만 이념적이지 않다. 그가 오랫동안 블로깅해주기를 기대하며 부지런히 그의 글을 리뷰하러 한다.

 

 - 밑줄긋기 -

 사실 주식회사는 그 형태나 운영방식 자체가 다른 형태의 회사에 비해서 상당히 사회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고, 다른 어떤 형태의 경제조직보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공개절차 및 사회적 감시체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주식회사는 1인 소유주가 존재하지 않고, 일종의 회의체-이것을 이사회라고 부른다-에 의해서 운용되고, 중요한 결정은 소유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총회에서 결정하게 되어 있다. 주인이 무한의 책임과 동시에 전권을 갖는 무한책임회사와의 다른 방식으로 운용되는 주식회사는 그 자체로 상당히 민주주의적인 운용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고, 역사만을 따지면 프랑스 혁명 이후의 민주주의 역사보다도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 p.94 )

 앞으로 수 년 동안 지방에서 진행될 토목공사에 풀려나가서 수도권의 아파트 투기로 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돈만 간단히 계산해도 수십조 원 규모는 넘고, 적당한 일자리만 있다면 일하겠다고 하는 대졸 이상의 예비 실업자가 수백만 명이다. 지금 한국경제의 틀에서 부족한 것은 노동이나 자본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것들을 결합해서 '생산'이라는 아주 위험한 도약을 수행하는 바로 그 조직이다. 지금은 세계은행에서 자관을 받아 JP가 국내 업체들에게 차관 나누어주던 시절 같은 '차관경제'의 시절도 아니고, 외국에 유학 간 한국 학생들을 카이스트에 어렵게 유치하면서 과학기술의 기반을 만들어가던 시대도 아니다. 지금 우리에게 결여된 것은 오히려 기업의 또 다른 속성인 조직에 대한 기술과 관리에 관한 기법들이라고 할 수 있다.

 5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한국 조직은 아직 노동자들과 대화하고 노조에게서 협조를 끌어내는 방법을 잘 모른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잘 교육되고 훈련된 한국의 여성드로가 일하는 법도 아직은 잘 모른다. 그리고 20대와 일하는 법을 모르고, 고령노동자들의 지식을 활용하는 법을 잘 모른다. 술 마시지 않고 조직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 법을 잘 모르고, 접대를 하거나 봉투를 건네지 않고도 정부 기관과 협의하고 협조를 이끌어내는 법을 잘 모른다. 조직 내부에 다양한 방식으로 생겨난 비공식 조직들을 제어한느 법을 잘 모르고, 사회로부터 신뢰를 얻는 방법을 잘 모른다.

 한국의 생산부문에 제조업으로부터 시작된 이러한 위기가 증폭되어 이제는 사회적 위기로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간 것도 사실이다. 박정희가 국민경제 모델을 채택한 이후로 기업의 위기가 곧 생산의 위기고, 이러한 위기가 어쩔 수 없이 사회적 위기가 되는 것은 구조적인 문제이다. 1차적인 위기 요소를 내부에서 찾지 않고, 결국 외자유치가 최고의 방법이라는 일부의 주장은 좀 황당하고, 그야말로 연목구어가 아닐 수 없다. 국내에도 잉여자본이 넘쳐나고, 투기적 용처를 찾아다니는 돈들이 길을 잃고 부동산과 코스닥을 끊임없이 넘나들며, 결국 일본 부동산을 비롯해서 해외로 나가는 이 마다엥 외자 유치가 안 되는 것이 우리나라 경제의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얘기는 정말 이상하다.

 산업자본에 위기가 온 것은 국민경제 모델의 역사적 흐름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는 하지만, 이 위기를 대처하는 방법에서 문제가 생겼고, 그래서 이런 것들이 돌고 돌아서 더 큰 위기로 증폭되었다고 해석하는 편이 훨신 더 논리적이며 일관된 설명이다. ( p. 146 -147 )

 

 한국과 일본의 조직들은 다양성이라는 심각한 도전을 받고 있는 셈인데, 이들과 경쟁 중인 미국 기업들은 이들과는 반대로 전세계에서 가장 다양성이 높은 집단이다. 유색인종은 물론이고, '핸드캡드handicapped'라고 표현되는 소수 민족들의 조직 내 구성도가 상당히 높고, 당연히 여성진출도 활발한 편이다. 1990년대에는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마초집단이었던 미국 해군이 소수민족과 여성들에게 보다 조직의 문을 크게 열었고, 이렇듯 경제적 약자들이 조직 내에서 가지고 있는 핸드캡을 극복하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상층부가지 진출할 수 있도록 하는 누에 보이지 않는 조직 내 배려가 생각보다 강려갛게 작동하는 것이 최근 흐름이다. 유럽 기업들의 경우도 이민자들과 여성의 기업 참여는 당연히 우리나라에 비해서 월등히 높다.

 이에 비하면 한국의 기업들은 상당히 높은 균질도와 '비非성과 경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마피아 모델에 가까운 빨간펜형 구조가 오히려 강화되는 편이다. 아직 골프를 즐길 만큼의 경제적 여유가 없는 여성직원들도 입사 초기에 골프부터 배우고 폭탄주도 배워야 하는 상황은 '퇴행'이라고 부르는 역방향의 진화에 해당한다. 물론 이러한 주류 집단의 힝위 모델에 대한 의태가 개인 전략으로서는 중요할 수 있지만, 조직 자체로 본다면 다양성을 현저하게 약화시켜 오히려 40-50대 빨간펜들의 '역할 모델'이 강화되는 흐름을 만들게 된다.

 소위 '조직의 마이너'라고 부를 수 있는 여성, 지방대 출신, 그리고 저학력 숙련노동자들을 어떻게 제품개발을 비롯한 다양한 경영활동에 참가시키고 조직의 다양성을 높일 것인가는 포스트 포디즘 시대의 한국 조직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현 상황에서 그냥 내버려두면 조직은 당연히 40대 빨간펜들에게 더 편한 방식으로 진화가 강화될 수 밖에 없다. 구 동구권의 조직들에게서 발생했던 내부 조직의 문제가 자본주의라고 해서 발생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모든 조직은 자연 발생적인 내부의 힘에 의해서 제어되지 않고 방치되면 언젠가는 관료화의 경직성과 내부 마피아에 의한 권력 독점이 발생하게 된다. ( p.189 - 190 ) 

 

 한국에서는 유럽보다 20년 정도 늦게 한국형 포디즘이 작동하게 되는데, 이 기간 동안 유럽의 심리상담소와 같은 사회적 장치가 등장하지 않았고, 이들의 빈 자리를 채웠던 것이 교회와 점집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근대사를 관통하는 주요 종교기관인 기독교와 가톨릭 그리고 불교의 전통적 경쟁은 그대로 남아 있지만, 1990년대에 급격히 강화되기 시작한 '대형 교회 현상'은 왜 한국 사회에서 1960~70년대의 자본주의형 계몽시대에는 곧 사라질 것 같아 보였던 점집이 1990년대 이후에 오히려 대성공을 거두게 되었는가라는 질문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포디즘의 강황에 의해서 생겨난 개인들의 비정상 상태에 대해서 대형 교회와 심리상담소 그리고 점집은 대체적 재화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심리적 안정과 대화'라는 특수 서비스와 관련시켜 볼 때 심리상담소가 네오 케인지언 전통이 강했던 유럽 사회가 제시할 수 있었던 공공적 해법이었다면, 한국의 대형 교회는 공적 장치 없이 포디즘을 강화시킨 시대의 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구도에서 대형 교회가 포디즘의 방식으로 볼 때 집단적인 심리상담소라고 한다면, 점집은 포스트 포디즘에 적합한 명품 브랜드 방식에 의해서 운용되는, 그야말로 '하이엔드 마켓'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차별화된 고품격 심리상담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집은 대형 교회에 비하면 맞춤형 고급 서비스인 셈이다. 대통령에 출마하고자 하는 대선 후보들에서부터 새로운 투자를 앞두고 초조해하는 대기업의 총수들, 그리고 그야말로 별 몇 개를 달고 있는 군대의 장군들가지 자신들의 심리적 위안과 미래에 대한 고민을 상담하기 위해서 찾는 곳은 많은 경우 점집이다. ( p. 2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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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 미국 진보 세력은 왜 선거에서 패배하는가
조지 레이코프 지음, 유나영 옮김 / 삼인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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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은 진정 '실무지침서'였다. 행여나 내가 '정치행동'을 작정했다면 별다섯개를 줬을만큼 구체적인 전략들이 가득하다. 이젠 다만 삶의 정치를 마음먹은고로 별 하나는 나에게 주기로 했다.

 나는 '어쩌다' 너와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가지게 되었나. 에 대한 질문을 놓지 못한 적이 있더랬다. 조지 레이코프님이 분류한 '엄격한 아버지'와 '자상한 부모'도 고려되었던것 같고, 심지어는 '성악설'과 '성선설'이라는 애초의 철학적 질문으로 회귀하기도 했더랬다. '정치외교학'이라는 전공이 치명적인 계기였지만, '반골'근성의 이유가 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다 정치적 설득이 필요한 순간에는 나 역시 비슷한 종류의 욕망을 가진 갑남을녀, 장삼이사임을 강조하면서 '합리적'인 공통의 근거들을 만들고자 했다. 그러다 '벽'에 부딪혀 좌절하기를 여러번, '마이너'기질로 정리하고 나대로 살아내는 중이다. 주변에 '마이너'천지라 외롭지 않다는게 그나마 다행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합리'와 '불공정'은 날 화나게 하였으므로, 소통을 통해 '우리편'을 만들고 싶다는 절실함은 여전하다. '즐거운 불편'이나 '자발적 가난'이라는 생태관련 도서들의 제목을 인용해 주변의 '동의'를 구해봤지만, "그대의 꿈은 가상하나 현실에는 부합하지 않는다"라는 평가만 돌아왔다. '불편'이나 '가난'이라는 부정적인 어휘에 선뜻 마음이 움직인다면 그건 '정치'가 아닌 '종교'의 영역이었던게지. 이제서야 간신히 세속의 정치를 알아낸 기분인게다.

 졸업 논문 주제에 '이미지 정치'가 한창 유행이었다. 정치학 4년을 공부했는데 '문제는 내용이 아닌 포장이야'라고 말하는 듯한 세태가 살짝 슬펐다. 하지만 현대사회의 개인이 정치사회적 통찰력을 가지고 정책과 공약을 엄밀히 분석해 합리적인 결정을 내린다는건 정치교과서에나 등장할법한 이상향이다. 아젠다를 선점하고 유리한 언어프레임을 구축하는것. 풍부한 내용을 채우는 것 만큼이나 주도면밀한 전략이 수반되어야 할 과제임을 인정하기로 했다. 미국대선, '성경'에 근거해서 '동성애'가 정당할 수 있다고 주장한 '버럭 오바마'의 선전이 입증하고 있지 않은가.

 18대 총선이 코앞이다, '가난'을 몸소 체험해 공감하고 정책에 반영할 수 있는 사람을 뽑겠다는 주장에 "가난한 놈이 더 해먹더라"는 화살이 날아왔다. "국회의원이 똑같이 해먹어도, 당신처럼 가난했던 사람이 출세해서 해먹는게 못마땅한거 아니냐"는 까칠함으로 응수했으니 나도 아직 멀었다.

 

 - 밑줄긋기 -

 "우리 부모들은 세금을 통해 우리와 그분들의 미래에 투자했습니다. 그분들은 장거리 고속도로에, 인터넷에, 과학연구 및 의료 체게에 우리의 통신체계에, 항공체계에, 우주개발 계획에 그분들의 세금을 투자했습니다. 그분들은 미래에 투자했고, 우리는 그분들이 투자한 세금에서 얻어지는 혜택을 거두어들이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그분들의 현명한 투자로 얻어진 자산-고속도로,학교와 대학, 인터넷, 항공 등-을 지니고 있습니다." - 이러한 광고가 몇 년에 걸쳐 수없이 반복하여 게재되고 방송된다고 상상해 봅시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세금은 미래를 위한 현명한 투자다'라는 프레임이 확립될 것입니다.( p.62 )

 언론은 우익의 프레임을 받아들일 필요가 없다. 기자들은 "게이 결혼에 찬성하십니까"라고 묻는 대신에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주 정부에서 주민들에게 누구와 결혼하거나 결혼하지 말라고 명령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또는 "원하는 사람과 결혼할 자유가 법 앞의 평등에 관한 문제라고 보십니까?" 또는 "결혼이 평생의 헌신을 통한 사랑의 실현이라고 보십니까?" 또는 "사랑하는 두 사람이 공식적으로 평생을 약속하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됩니까?" 프레임을 다시 구성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할 일이다. 특히 기자들의 임무는 더욱 막중하다 ( p.105 )

 나는 정치의 인지적 측면을 이해하는 것이 엄청나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의 개념적 프레임이 무의식적인 형태를 띠고 있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은유적 사고를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사람들은 나를 '인지적 운동가'라고 부르며 나도 그 딱지가 나한테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한다. 교수로서 나는 정치의 언어적, 개념적 쟁점을 분석하되, 가능한 한 정확하게 분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분석적 행동은 정치적 행동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인식이다. 어던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똑똑히 알고 말할 수 있다면 지금 벌어지는 일은-최소한 장기적 견지에서-변하게 할 수 있다. ( p.143 )

 이라크 전쟁이 근본적으로  - 석유 자원, 지역 경제, 정치적 영향력, 군사적 기반에 대한 - 이기적인 통제를 위한 것이라면. 이는 자기 방어도 이타적 해방도 아니다. 부시 대통령은 우리 군인, 의회, 미국 국민들의 '신뢰를 배신'했다. 배신이 쟁점으로 되었을 때, 단순한 거짓말은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다. ( p. 149 )

 소송개혁을 예로 들어 보자. 기업 대상 소송 변호사들은 사실 '공공 보호 변호사'이고 불법 행위법은 공공 보호를 가능하게 하는 법으로서, 다시 말해 공공보호법이다. 불법행위법에서 손해배상 청구와 합의금의 상한을 제한하려 한다면, 이는 배심원의 권리를 빼앗는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미국은 공개 재판에서는 손해배상 액수를 배심원이 결정한다.-옮긴이) 이는 법정의 문을 닫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공개 법정이 아닌 비공개 법정을 만드는 것이다. 배심원이 있는 공개 법정에서 배심원들은 기소된 사건이 공공 보호의 문제인지 아닌지 여부를 결정할 수 있다. 대규모 배상금은 당면한 소송의 문제를 초월하는 공공 보호문제와 결부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공개 법정은 공중이 부도덕하거나 무책임한 기업과 전문직에 맞서는 마지막 보루이다. 보수주의자들이 집단 소송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냥 '아뇨, 그건 천박한 소송이 아니에요"라고만 말하지 말고, 공공 보호와 공개 법정과 배심원의 결정권, 그리고 부도덕하거나 무책임한 기업에 맞서는 최후의 보루에 대해 이야기하라. ( p.201 )

 진보주의 사상이야말로 가장 미국적인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정치적 평등을, 좋은 공립학교를, 건강한 어린이들을, 노인을 위한 보살핌을, 경찰의 보호를, 가족 농장을, 숨 쉬는 공기와 마실 물을, 개천의 물고기를, 거닐 수 있는 숲을, 새소리와 개구리를, 살기 좋은 도시를, 윤리적 경제 활동을, 진실을 말하는 언론인을, 음악과 춤을, 시와 예술을, 일하는 모든 사람들이 최소한의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일자리를 바란다. 최저 임금을 위해, 여성 권리를 위해, 인권을 위해, 환경을 위해, 건강을 위해, 유권자 등록을 위해 일하는 진보주의 활동가들은 모두 미국의 애국자들이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 미국의 근본적인 가치와 원칙에 맞서 세상을 만들기 위해 이타적으로 헌신하며 일하고 있다. ( p. 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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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류지향 -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
우치다 타츠루 지음, 박순분 옮김 / 열음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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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뜨끔하다. '니트족'이든지 '88만원세대'든지 허술한 나를 조준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금새 날을 새우고 맞짱뜰 태세를 한다. '하류지향'의 선정적인 부제 "공부하지 않아도, 일하지 않아도 자신만만한 신인류 출현'도 같은 맥락에서 비판적 책읽기를 자극했다. 만, 내용은 120% 공감하는 바이다.

 '왜 배워야 하죠?'라는 질문에 담긴 '등가교환'의 거래관계, 소비주체로 사회에 진입하는 현세대는 '자기찾기 이데올로기(!)'를 강요받고 자기결정.자기책임론으로 완성된다.

 요는 이런말이다. 학생들은 '교육'을 '권리'가 아닌 '의무'로 취급하고, 그들이 불편한 '의무'를 감수했을때 돌아오는 '댓가'의 타당성을 검토한다. 과거에는 '노동'을 통해 가족으로부터 '유용한 사회적 존재로 승인'받는다는 보상을 받았다. 하지만 가사노동이 축소되고, '공부'의 의무만이 주어진 상태에서 쥐어진 용돈을 통해 '소비'는 그들이 주체로 인정받는 경험을 제공한다. 돈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다. 나이나 식견, 사회적 능력따위의 속인적 요소는 따지지 않고 '용도'와 '유용성'에 부응하는 상품을 제공한다. 교육이 제공하는 이익은 즉각적인 호환성이 없기 때문에 '소비주체'에게 교육은 흥정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심지어 그들은 수업이라는 고역을 '불쾌함'이라는 '화폐'와 교환한다고 설명한다. '수많은 불쾌함을 견디고 가게를 꾸리고 있다'는 아버지로부터 '남편이라는 불쾌감'을 견디어 내는 어머니로부터 불쾌감이라는 화폐를 배운다.(적나라하지만 사는게 그렇다) 자기선택과 자기결정을 통해 감당하는 자기책임은 사회적 상호협력관계에서 개인을 고립시킨다. 이렇게 외로운 아이들이 자라난다.

 '왜 일해야 하나요?' 자발적 실업자들은 지극히 합리적으로 결정한다. 알량한 일당에 불쾌함을 파느니, 평온하게 살테다. 그리 사는게 나의 뜻이니 상관말아라. 논리전개에 아무런 모순이 없다.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파이프를 통과해도 직장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노력에 대한 확실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 않는 편이 속편하다. 구조적 약자는 성취의 경험이 많지 않다. 그런 까닭에 쉽게 포기한다. 충족한 조건에서 성취감을 만끽한 강자는 실패의 리스크가 크지 않아서 도전의 여지가 많고, 결국엔 성공한다. 양극화는 확장된다. 이게 바로 '시크릿'이라고 불리는 '자기개발서' 혹은 '자기최면술'의 실체이다. 그래서 자기개발서는 희망이기도 하고, 고문이기도 하다.

 '88만원세대'의 결론과 공히 소리높이는 해결책은 '상호연대'이다. '중간공동체'의 회복이라던지, '사제관계의 회복'이라던지 결국은 '시장경제'에 휘둘리지 않는 '교육'의 회복이기도 하다. 결국 나는 양심의 거리낌없이 쭈욱 2류지향이 되기로 했다. 2008년 대한민국에서는 2류이기도 쉽지 않다만.

 

- 밑줄긋기-

 아이들은 먼저 '변화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학습 과정에서 무엇보다 먼저 '외계의 변화에 대응하여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 '학습'의 인류학적 의미는 여기에 있다. '학습'의 역사는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되었다. 이에 비하면 시장경제와 등가교환의 원리가 인간 세계에 도입된 시기는 극히 최근의 일이다. 따라서 시장원리를 들어서 학교 교육에 맞서는 아이들은 말하자면, 인류학적인 진화의 흐름에 역행하여 싸우는 것이다. 자신의 유아적 욕망을 가슴에 품고, 결코 성장.변화할 일이 없는 소비주체에 안주하는 것. 시장원리는 아이들에게 그렇게 하도록 요청한다. 하지만 이 요청은 아이들을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게 아니다. 아이들을 외계의 변화에 적응하여 살아남게 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럼에도 아이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 p.80-81 )

 만약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로 알고 싶었다면 자기를 잘 아는 사람들에게 (예컨대 부모라든가) 묻는 편이 훨씬 유용한 정보를 입수할 수 있지 않을까? 굳이 외국까지 가서, 문화적 배경이 전혀 다른 곳에서, 언어도 통하지 않는 상대와 대화하고, 그 결과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는 말을 나는 믿지 못하겠다. 고로 '나를 찾는 여행'의 진짜 목적은 '만남'에 있지 않고, 오히려 나에 대한 지금까지의 외부평가를 재설정하는 데 있다고 본다. ( p.82 )

 자기밖에 있는 목표를 향하여 행동하기보다도 개인의 흥미와 관심에 따른 행위를 더 바람직하게 여기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널리 유용하다고 인지된 가치일지라도 '내 입장으로 봐서' 유용성이 확증되지 않았다면 미련 없이 버린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으로 가치를 매기는 일이 모든 상황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이 교육 붕괴의 가장 근본이 있다고 본다. ( p.83 )

 일반 기업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 아르바이트 사이에 학력과 능력에서는 거의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우 면이나 장래의 전망에서 커다란 차이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우 면이나 장래의 전망에서 커다란 차이가 발생하는 사례를 우리는 무수히 본다. 노력에서 아주 작은 투입차가 성과에서 거대한 산출차를 낳은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 p.97  )

 리스크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이들은 '살아남을 것을 집단의 목표로 내걸고, 상부상조하는 집단에 속한 사람들'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리스크 사회를 살아간다'는 의미는 항간에 이야기하듯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진다'는 것을 원리로 하여 사는 게 결코 아니다. 자기가 결정하고 그 결과는 혼자 책임지라는 말은 리스크 사회가 약자에게 강요하는 삶의 방식(또는 죽음의 방식)이다. ( p.120 )

 기업에서도 한때, '성과주의'라고 해서 컨설턴트를 고용하여 다양하게 성과를 평가하고자 시도하였다. 적절하지 않은 평가를 내림으로써 조직이 입어야 할 손상을 생각하면 웬만큼 정밀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지 않으면 성과주의에 입각한 인사고과는 오히려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그러나 신뢰성이 높은 정밀한 평가 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방대한 자원과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적절한 인사고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객관적으로 사물을 보고, 냉정하고, 능력이 좋아서 어떤 일을 맡겨도 척척 처리해 낼 수 있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기업 입장에서 볼 때 가장 귀중한 인재를 모조리 끌어다 평가활동에 투입해 버리면 기업은 사업 수행에 지장을 초래한다. 실제로 모든 기업이 어느 단계까지 해보다가 '성과주의는 포기하자'는 분위기로 가고 있다. 개인의 성과를 평가하는 건 좋은 일이지만 평가 비용이 평가가 가져올 이익을 초과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 p.189 )

제가 전문가도 아니면서 교육론과 니트론을 재구성하는 게 급선무라고 했던 이유는 니트를 고립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노령에 이른 니트를 향해 "자기책임이니 당신들 맘대로 굶든지 죽든지 하라"는 논리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가 결정한 것은 자기가 책임진다'는 논리가 니트를 만들어냈다고 믿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니트가 된 사람은 자기책임이니까 당신들 맘대로 굶든지 죽든지 하라"는 논리를 정론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사회는 앞으로도 계속 무수한 니트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너희들을 부양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은 물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그 '너희들'이 격증한다는 역설적인 사태 가운데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굶어죽을 리스크를 자기결정을 했기 때문에 감수하겠지만, 우리는 너희를 굶어죽게 두지는 않겠다."는 논리를 '상식'으로 등록하는 길만이 니트가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을 최소화할 수 있습니다. ( p. 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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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를 팔다 - 우상파괴자 히친스의 마더 테레사 비판
크리스토퍼 히친스 지음, 김정환 옮김 / 모멘토 / 200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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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해야 할 이름, 크리스토퍼 히친스. 모두가 'YES'라고 말할 때, 혼자만 'NO'라고 말하는 사람. 그가 마르크시스트이던 트로츠키스트이던 심지어 네오콘일지라도, 난 그의 '소수의견'을 지지한다.

 힘과 유머와 풍자가 가득한 그의 글은 분명하고 단정적인만큼 위험했다. 그렇게 강경한 어조로 감히 마더 테레사를 욕보였을땐, 그에게도 그만의 무기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공격적이면서 설득적인 논리, 종교라는 성역안에서 무색해지는 인간의 이성은 크리스토퍼의 힘으로 되살아난다.

 무정치를 핑계로 정치적이었던 일련의 일들이 떠올랐다. 가깝게는 청와대 부대변인 김은혜를 출연시키며 '오락프로그램을 정치적으로 보지 말아'달라는 방송, 멀게는 비운동권을 표방하며 당선되기 무섭게 이명박 강연회를 개최한 총학생회. 도무지 내게는 비정치적인게 없는데 대개의 사람들은 비정치적인것을 옹호한다. 마더 테레사는 그런 풍조의 수혜자였고, 나는 이런 풍조의 비주류일 따름이다.

 그래서 참 감사하다. '무지'를 방패삼아 '권력자'를 두둔하고, '용서'를 권유해서 '불합리'에 힘을 실어주는 그녀의 역할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생명'이라는 지고지순한 가치를 옹호하기 위해 피임과 낙태라는 불가피한 선택을 용서하지 않았다. 이 책은 그녀를 '제대로 알게한 것만으로도 별 다섯개를 받아야 마땅하다.

 

- 밑줄긋기-

 마더 테레사가 전 세계에서 벌어들이는 수입은 벵골 지역에 일급 진료소 여럿을 차리고도 남을 액수라는 점을 잊지 말자. 만약 의료업계의 어느 분야에서든 그렇게 운영했다면 항의와 소송 세례를 받았을 게 분명한 마구잡이식 날림 시설을 운영키로 결정한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다. 목적은 고통을 성실하게 덜어주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고통, 그리고 굴종에 기반한 일종의 신흥종파를 선전하는 것이다. 마더 테레사(그녀 자신은 심장 질환 및 노환과 싸울 때 서양에서 가장 우수하고 값비싼 병원들에서 치료받았다는 사실에 유의하자)는 언젠가 촬영한 인터뷰에서 속내를 드러낸 적이 한 번 있다. 그녀는 말기암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던 한 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더 테레사는 미소 띤 얼굴로 카메라를 보며 자신이 그 환자에게 한 말을 되풀이했다. "당신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처럼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러니 예수께서 당신에게 입 맞추고 있는 게 분명합니다." 이 아이러니가 지불해야 할 대가를 짐작하지 못한 채 그녀는 환자의 대답을 전했다. "그렇다면 그 입맞춤을 제발 멈추라고 말해주세요." 너무도 절박하고 고통스러운 극한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마더 테레사에게 바라온 바는, 그녀가 저러한 형이상학적 포옹을 좀 삼가고 실제 고통에 더 귀를 기울여달라는 것이다. ( p.68-69 )

 부유한 세계의 사람들은 누군가가, 어딘가에서, 무언가 제3세계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 믿기를 좋아하고, 믿기를 원한다. 이런 이유에서, 아무리 대리적일망정 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있기만 하면 그의 동기와 실천을 너무 깊게 파고들려 하지 않는다. 위대한 백인의 희망이 거대한 블랙홀을 만나며, 이교도를 향한 사명이 플로렌스 나이팅게일이라는 위안이 되는 신화와 뒤섞인다. 늘 그렇듯이, 선교가 배달되는 진짜 주소는 후원자와 기부자의 자기만족이지 짓밟힌 자들의 필요가 아니다. 의지할 데 없는 아기들, 버려진 낙오자들, 나환자와 말기 환자들은 동정의 과시를 위한 원자재들이다. 그들은 불평할 입장이 전혀 아니다. 그리고 그들의 수동성과 비천함은 훌륭한 면모로 여겨진다. 이 거짓된 위안의 세계적이고 지도적인 대변자, 마더 테레사 자신의 우중선동가이며 우민정책가이고 세속 권력의 하수인이라는 점을 인식해야 할 때다. ( p.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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