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자기 앞의 생
에밀 아자르 지음, 마누엘레 피오르 그림, 용경식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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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빈민가에서 엄마의 얼굴도 자신의 진짜 나이도 모르는 채 살아가는 모모의 삶은 결코 아름답지 않다. 또한 이 소년을 둘러싼 사람들 역시 모두 사회의 중심에서 소외된 존재다. 모모를 돌보는 로자 아줌마는 아우슈비츠에서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고 ‘엉덩이로 벌어먹으며’ 살아와 같은 처지의 여자들이 낳은 모모같이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돌본다.

 

아랫집에 사는 롤라 아줌마는 남녀의 성징을 한몸에 지녀 매춘으로 먹고 살며, 친구도 가족도 없이 세상에서 잊혀가는 하밀 할아버지는 모모의 유일한 친구이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조숙한 소년 모모, 그는 점점 늙고 정신을 잃어가는 로자 아줌마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워한다.

어느 날, 찾아온 모모의 아버지는 정신병으로 엄마를 죽이고 정신병원에 갇혀있다 이제야 죽기 전에 아들 얼굴을 보겠다며 찾아왔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열 네살임을 알게 된다. 모모의 등에 지워진 삶의 무게는 어린 그에겐 가만히 서 있기도 쉬운 것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가슴 아픈 것은 어린 모모의 인생을 짓누르는 그 삶의 무게가 힘들다고 주저앉아 운다면, 발버둥치며 제발 이런 인생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면 다행이라 여겼을 것이다. 작품을 읽는 내내 힘이 드는 것은 '어린 모모'가 그 무거움을, 너무 일찍 알아버린 인생의 슬픔을 내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진 것 없고 무시당하는 남루한 삶 속에서도 인종과 나이, 성별을 초월해 사랑을 주고받는 모모의 모습은 단 한 줄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가혹하고 고된 삶에서 우리는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그렇다, 우리 모두 사랑해야 한다.

 


모모는 오늘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사랑 없이도 살 수 있나요?'



산다는 것은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 책을 읽다보면 의문이 든다. 산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과연 어떤 '가치'가 있을까?
이것은 또한 내가 가진 딜레마이자, 오랜 궁금증이기도 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그것도 이렇게나 무겁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예를 들어,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으로 태어나 수용소에 끌려가 여전히 경찰과 군인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고, 살기 위해 매춘을 하다가 나이가 들어서는 아이를 키울 수 없는 매춘부들의 아이들을 키운다. 그러면서도 로자 아줌마는 매일같이 자신의 삶을 서러워하며 운다. 이 고통스러운 삶에 죽음이 닥쳐오자 그녀는 정신을 놓고, 똥오줌도 가리지 못한 채 죽음을 기다린다. 이것으로 그녀의 삶을 다 말할 수 없겠지만 객관적인 그녀의 삶의 무게이다.

모모의 삶, 롤라의 삶, 하밀 할아버지의 삶도 마찬가지로 저마다 주연이었던 그들의 삶이 있다. 주연이었던 그들의 삶이 내가 보기에는 무거운 짐같은 것이다. 어떤 누가 이런 삶을 숭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삶이 아름답다고, 그래서 그의 고된 삶도 빛이 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 또한 이런 딜레마에서 쉽사리 벗어나지 못했다. 불행을, 행복을 어딘가에 기준삼아 비교할 수는 없지만 나는 내 삶이 너무 고되다고 느꼈다. 내가 사랑받고, 사랑하고, 배우고, 나누는 것보다 내가 짊어져야할 부분들이 상대적으로 더 크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최근에야 고민해보니 오래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부터였던 것 같다. 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아버지의 무게를 물려받은 고등학생 장녀였다. 누군가 나에게 책임을 쥐어주지도, 누군가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지도 않았지만 삶은 늘 그랬다. 그저 무거웠다. 내가 평생 어깨에 짊어져야할 몫이. 그래서 나는 너무 빨리 알아버렸다. 아버지의, 가장의 무게를. 매일 손에 사들고 오던 간식이 그 날의 고됨을 말해주고, 쑥쑥 자라는 나를 위해 이 삶을 견뎠음을.

 


명작이란 무엇일까?
명작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딪히는 딜레마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답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작품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여전히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 것은 어쩌면 나 뿐만 아니라 누구나 이 삶이 무겁기 때문이다.


그리고 누구나 우리는 깨닫는다. 우리가 그런 사랑을 받고 자랐음을. 모모가 로자 아줌마를 그리워하는 것처럼 나도 내 아버지를 그리워함은 내가 그 사랑을 받고 영양삼아 자랐기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밖에도 많은 선생님과 친구들, 동네 사람들의 응원과 격려를 받으며 자랐다. 모모처럼-


그럼 다시 본래 질문으로 돌아가면,

어떤 누가 이런 삶을 숭고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렇게나 무겁고 고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포함하여 많은 이들과 관계를 맺고, 그들을 통해 스스로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법을 배운다. 현실은 달라지지 않겠지만 세상에 상처를 받아가며, 그리고 그 상처를 스스로 치유해가는 법을 배워가며 사람들과 서로 마음을 주고 받으며 살아간다. 그게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이자 '가치'가 아닐까?


처절하고 고독한 삶의 조건 속에서도 슬프고 아름다운 사랑을 피워올리는 인간의 모습이야말로 하나의 예술 작품과 같다고 생각한다. 누군가에게 손내미는 법을 배우고, 누군가의 손을 잡을 줄 아는 것. 그래서 우리는 '사랑'없이 살 수 없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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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농담이다 오늘의 젊은 작가 12
김중혁 지음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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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할 때 '빛'이 있으라 라고 '말'하니 빛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의 우주가 탄생한 역사적 사건이자 창조적 사건이다.


'말'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보통 '말'을 생각하는 경우는 '아, 말 실수 했어. 오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혹은 '그 말은 하지말걸.' 등 내뱉어진 것을 주워담을 수 없을 때이다. 왜냐하면 '말'이라는 것은 보이지도 않고, 내뱉으면 사라지는 무형의 행위이자 소리이지만 이것은 '하나의 우주'이기도 하다.


우리도 하나님처럼 말로 하나의 우주를 탄생시시키기도 하고, 소멸하기도 한다. 이 책에는 5개의 우주가 등장한다. 송우영이라는 우주, 세미라는 우주, 강차연이라는 우주, 이일영이라는 우주, 엄마의 우주. 이 우주들(=말)은 서로 닿기도 하고, 스치기도하고, 멀어지기도 한다.


송우영과 세미는 '말'을 직업으로 삼는 스텐딩 코미디언이다. 이들의 농담은 재미있기도 하지만, 자기 치유적이기도 하고, 서로의 말이 만났을 때 섹슈얼하기도하다. 이 둘의 우주는 분명 맞닿아있다.

우영은 평생 농담 속에 살면 좋겠다고 말한다. "내가 했던 웃긴 농담만 남고 내 몸과 마음과 정신은 사라졌으면 좋겠어. 내 농담이 전 우주를 떠돌고 있으면 얼마나 기쁘겠어"


우영은 얼마 전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되었지만 어머니가 남긴 편지의 원래 주인을 찾으려 애쓰고, 어머니가 남긴 말을 담아 엄마의 우주와 이부형제인 일영의 우주가 서로 닿아 만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리고 그 두 우주가 만나 서로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사람은 죽으면 어떻게 되는걸까?

이 세상에서는 엄마와 일영은 죽었지만 사실 그들은 죽지 않았다. 엄마의 편지와 일영의 목소리를 통해 여전히 '말'이 되어 우주에 남아있는 것이다. 어머니, 왜 이제야 우주에 왔어요. 아들아, 나는 원래 문자(=편지)였는데 목소리로 변환되어서 오느라고 좀 늦었구나. 괜찮아요, 어머니, 우주에서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일영은 우주에 있다. 어릴 때 헤어져 오랜만에 다시 만난 어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노력한 시간을 배신하지 않으려 우주로 떠났다. 비행을 하기 전 지구에서 죽는 상황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수차례했지만, 막상 죽음이 눈앞에 있자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어둠뿐인 우주에 홀로 존재하며 지구의 누군가에게(사랑하는 사람들) 자신의 말(=우주)이 닿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의 죽음 앞에서 홀로 외로이 자신의 우주를 지켜가는 일영. 그는 지구에서 보았더 동생, 우영을 떠올리며 우주선에서 어설픈 스탠드업 코미디를 하며 선보인다. 그 무엇도 할 수 없지만, 관제센터를 향한 말로서 존재하며, 그 말로 자신과 사랑하는 이와 맞닿아간다. 그는 존재하지않지만 그의 말로 존재한다.  이 우주에서 남자최대한 먼 곳까지 나아가며 사랑했던 사람들을 떠올리며 마음을 전한다. 그 메세지는 곧 일영 자신이다.


'말'이라는 것, '소통'이라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고도 말(=우주)가 닿지 않는 경우들이 많다. 흔히 우리는 '말이 안통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나의 세계와 그의 세계는 닿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의 말과 나의 말은 만나지 못했다.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만.


어머니의 편지와 아들의 말이 우주에서 만날 수 있을까?
나는 만났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얼굴을 마주하고 있지 않지만, 그들의 우주는 닿아있으니까. 서로를 향한 그리움으로 가득한 말이 만나 그 우주에서 오래오래 머물 것이라 생각한다. 얼굴을 마주하지 못하지만.


나는 누구의 우주와 닿아있을까?
그리고 나는 마주하는 누군가와도 닿지 못하고 스쳐갈까. '죽음'을 마주하더라도 우리는 '말'로 세계에 끊임없이 머문다. 내가 누군가에게 던진 비수가 되어 남을 수도 있고, 무심하게 던진 말 속의 진심으로 남을 수도 있지. 그렇게 죽지 않고 부활해서 우리는 우주 속에 머문다.


당신의 우주에 나의 우주는 농담과 같은 모습이길 바란다. 유쾌했던 기억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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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쩐지, 도망치고 싶더라니 - 변화를 가로막는 내 마음의 정체는 무얼까?
뇌부자들 지음 / arte(아르테)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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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내담자와 의사의 상담 형식으로 쓰여진 심리 소설로 다섯 명의 내담자와 다섯 명의 의사가 등장한다. 처음에 의사를 찾아올 때 그들은 자신의 심리상태에 대해 인지하지 못한다. 그저 자신이 하는 '어떠한 패턴의 행동'이 불편하여 상담을 하기 시작하고, 그 상담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게 된다.

 

이 소설에 다섯 명의 내담자는
- 탈고를 미루는 시나리오 작가
- 아이에게 이유없이 화를 내는 초보엄마
- 갑자기 공황을 겪은 취업 준비생
- 폭식을 반복하는 만화가
- 불면증에 시달리는 성형외과 의사

 

 

내담자는 치료자의 안내를 따라 자기 마음을 온전히 들여다보고, 그 마음이 거부하고 있는 것, 두려워하고 있는 것, 부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하나둘 알아 간다. 그리고 서서히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내면의 불안과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내가 생각해온 나는 자존감이 높고, 사람들을 좋아하고,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떠한 일에도 머뭇거리지 않고 의사를 표현하고 그래서 꽤 일을 잘 한다는 말도 많이 들어왔다. 꽤 평범하지만 좌절할 만한 상황에 놓이지는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책과 관련된 일을 하며 얻는 만족감도 크고, 인복도 있어서 주위에 좋은 선배, 동료들도 많이 있다.

 

하지만, 나는 불안을 자주 느낀다. 사실 나는 내가 '불안'을 느낀다는 사실을 잘 인지하지 못했다. 자주 어지럽고, 가끔 숨이 차는 증상이 나타나 내과에 자주 방문했지만 신체적인 문제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그 신체적 증상들을 외면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하지만 작년부터 나는 내 자신을 조금씩 직면하게 되었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이 직면의 시작은 '혼란'에서부터 시작되었는데, '나는 누구인가?'라는 사춘기적 질문 앞에 놓인 것이다. 나는 나라는 사람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나에대해 아는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피하고 싶은 내면의 불안과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책 속에 등장하는 다섯 명의 내담자가 가지고 있는 자신들의 마음과 행동패턴이 나에게도 조금씩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들이 사용하는 방어기제는 나도 자주 사용하는 방어기제여서 나도 종종 회피하고, 감정을 타인에게 투사하고, 나쁜 감정을 외면하며 격리시키기 때문이다.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워 불안해하고, 내 마음의 심리적 안전기지를 찾지 못해 우울할 때도 있다. 이 다섯 명의 모습이 조금씩 나와 닮아있어 나도 이런 도망을 치고 있지 않은 지 꽤 오래 곰곰히 책을 읽었다. 그리고 나도 내 불안을 조금씩 인정하기 시작했다.

 

난 절대 불안하지 않아! 난 담대한 사람이야. 다 잘 되고 있어! 라는 강한 긍정을 내려놓고, 나도 불안할 수 있어. 난 지금 긴장했어. 이 상황은 내가 두려워하는 상황이야. 라고 말이다. (강조해서 말하지만, 쉽지 않았다.)

 

나는 최근에 다니던 퇴사를 그만두었다. 그 회사를 퇴사하는 과정은 내 인생에서 매우 독특한 상황이었다. 나는 단 한 번도 회사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적 없이 잘 다니고 있었는데, 업무적으로 무리해야하는 상황이 닥치고 내 힘으로 상황을 핸들링할 수 없는 상황이 오자 나는 불안해졌다. 나는 이 전에 한 교육회사에서 4개월 가량 짧게 근무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짧은 4개월의 시간이 나에게는 굉장히 힘든 시간이었다.

 

나는 밤낮가리지 않고, 주말도 반납하며 '혼자서'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회사의 시스템이나 텃세로 인하여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았다. 도움을 청할 곳 없는 나로서는 처음으로 백기를 들고 포기하게 되었는데, 나에게는 이 퇴사가 내 인생에 첫 번째 실패처럼 여겨졌다. 나에게 남은 것은 번아웃된 뇌와 너덜너덜해진 마음뿐.

 

그런데 또 다시 무리해야하는 상황이 닥치니 번아웃되었을 때의 내 모습이 생각났다. '잠시만 고생하면 잘 될 수 있어.' 라는 긍정적인 생각은 한 번도 들지 않았다. '나는 또다시 소비되고 소진될거야. 그래서 또 지쳐버리고 말거야.'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두려웠다.

 

사람의 마음이란 신기해서 지난 일이고, 잊은 것 같아도 또 같은 상황이 되면 그 기억을 끄집어내어 나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그래서 도망쳤다! (후회하지는 않지만, 나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나는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오랫동안 청취한 청취자이다. 그리고 출간되자마자 책을 구입했고, 최근에 진행된 별마당도서관 강연회도 참석했었다. 그곳에서 책 속 인물들에 대한 설명과 방어기제에 대해 소개해주셨는데, 허규형 선생님께서 소개해주신 책 속 인물 '신욱'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또다시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도 저런 모습이 있었던 것 같은데.
나도 신욱씨처럼 마음 깊은 곳에 격리해둔 작은 방이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그 방 근처에 다가오는 누군가가 있다면 그 때마다 나는 외면하거나 도망치고 있지는 않았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잊고있던 하나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지 않아서, 이 모든 탓을 하나님에게 돌려 원망하기도 했고, 나 자신을 탓하는 게 힘들어서 감정을 격리하고 없던 일처럼 태연하게 행동하기도 했다. 공개적으로 쓰긴 어렵지만, 나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잊고 싶었던 억압된 감정에 조금씩 다가가고 나의 불안을 조금은 지지하게 되었다.

 

사실 아직 과정 중이다. 나도 내가 어디까지 직면할 지 알 수 없지만, 책 속의 인물 '신욱'씨는 상담에 실패하고 만다. 자신을 직면하기 두려워 상담을 포기해버린 것이다. 조급할 이유는 없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다. 지금 도망친다면 언젠가 다시 나를 아프게 할테니까.

 

완벽한 사람은 없고, 완벽한 가정 또한 없다. 친구는 다양한 수많은 사람들을 겪을 수 있지만, 가정은 내가 살면서 단 한 가정만 겪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모두 서툴고 마음같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아파하며 힘들어했던 친구들에게도 이 책을 권하고, 선물하기도 했다.

 

이유없는 불안도 없지만 쓸모없는 상처도 없다.
괜찮다, 그럴 수 있어. 라는 말로 위로해주는 힐링 에세이는 정말 많다. 하지만 그 잠깐의 위로가 나를 달라지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 다섯 명의 면담 과정을 통해 나에게도 이런 방어기제가 없는지 돌아보고, 자신을 바로 알 수 있도록 이 책을 권해보고 싶다. 책이 아니라면, 팟캐스트 <뇌부자들>을 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그 불안과 상처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으니까.
자주 꺼내서 읽어보며, 도망치고 싶을 때 내 마음을 지지해주는 소중한 책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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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죽으러 갑니다
정해연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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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죽기 위해 모인 다섯 명의 자살자,
그러나 이중에 한 명은 살인마다!

 

기억을 모두 잃은 채 병원 침대에서 눈을 뜬 태성이 자신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사업 실패로 자살을 하려던 부모가 아들을 먼저 죽이려고 자신의 방에 번개탄을 밀어 넣었다는 사실과 기초 생활 수급자라는 고달픈 현재 신분 뿐이다.

 

그러던 중 동반 자살 카페 '더 헤븐'을 발견하게 된다. 사연을 올린 태성에게 ‘메시아’라는 사람이 함께 동반 자살할 사람을 구하고 있다고 접근해 온다. 그리고 한 장소에서 다섯 명이 모였다. 10대임에도 누구보다 죽음을 원하는 최린, 삶의 기력을 다 잃어버린 민서라, 유난히 건들거리는 태도의 정태오, 그리고 부유해보이는 '메시아' 한동준을 만나, 숲 깊은 곳의 한동준의 별장으로 가게된다.

 

'더 헤븐'의 메시아 한동준, 그는 죽기 전 그들이 원하는 것을 모두 들어주겠다며 죽음을 5일간 미루기를 제안하고, 그들이 삶에서 원했던 것들을 떠올린다.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던 최린,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하고도 가족에게 외면 받았던 민서라, 동반 자살을 위해 번개탄을 밀어넣고 달아난 태성, 그리고 의뭉스러운 태도의 태오와 한동준.

 

모두가 죽음을 원하지만 이들 중 한 사람은 자신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 자살을 핑계로 살인을 일삼던 연쇄 살인범이었다. 죽고싶지만, 살고싶다! 그는 누구일까?


죽고 싶다는 생각에 대해.
태성은 기억을 모두 잃은 채 홀로 판자촌에 머물고 있다. 가족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서 배고픔과 추위, 그리고 외로움에 죽음을 원한다. 이것이 그에게 닥친 현실이다. 그런데 사실 알고보면, 실제 기억의 사건은 훨씬 비참하다.

 

어렴풋이 남아있는 기억을 떠올려보면 그곳에는 번개탄이 피어오른다. 형에게 방해가 될 지 모르니 같이 가자는 말과 함께 번개탄을 밀어넣는 부모의 모습, 그리고 한 번이라도 부모님의 뜻을 들어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죽음을 받아들이는 나. 그러나 깨어나보니 나는 끝내 살아남았다. 정말 죽음을 떠올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가장 어두운 표정의 10대 소녀 채린은 유서에 자신을 따돌린 친구들을 원망하는 글을 써놓았다. 그것이 채린에게는 죽음을 택할 만큼 가혹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외면당하는 외로움과 억울함이 그를 괴롭혔다. 민서라는 삼촌에게 성폭행을 당했다. 하지만 더 상처였던 것은 부모님이었다. 사실을 알고 '원인을 제공한 것이 아니냐'는 말 (피해자에게 흔히 하는 비수)로 인하여 무너졌다.

 

자살, 물론 절대 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그들에게 손내밀어 주는 이가 아무도 없다면 그들은 그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 누군가가 이런 상황에 있을 수 있다. 내가 즐겨듣는 팟캐스트 <크라임>의 배상훈 프로파일러는 실제 동반 자살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삶이 죽는 것만큼 괴롭기에 자살을 택하지만 혼자 죽는 것은 두려운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은 심리스릴러이다. 작가는 ‘집단 자살’이라는 주제를 통해 OECD 국가 중 자살율이 1위라는 한국 사회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준다. 조명하고 있다. 그리고 친구들에 의해, 가족들에 의해 상처받고 고통스러워하는 사람들을 세밀하게 보여준다. 단순히 살인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고통스러운 부분을 통해 진실을 알아가고 자신을 직면해나간다. 기억을 잃은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기억을 잃었는가.

 

처음부터 죽음을 원했던 그들. 하지만 그들이 원한 죽음은 끔찍하게 누군가에게 살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도망쳐야하고, 살아 남아야한다. 그리고 살고싶다.

 

악은 또 다시 반복되고, 결국 우리는 악을 이기지 못한다.
섵부른 희망적으로 독자에게 해피엔딩을 선사하지는 않지만, 반전의 반전과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에 쾌감이 있다. 그리고 ‘놀라운 페이지터너(page turner)’라는 평을 받는 정해연 작가의 작품답게 처음부터 끝까지 간결하게 읽힌다. 심리 스릴러를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재미있게 읽을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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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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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는 비가 내리는 내내 성실했다. 그는 비가 내리기 전에도 성실했다. 지금처럼 성실하다면 그는 곧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베터리도 없고 충전기도 없었다. 충전기는 어디로 갔을까? _ 66p

 


성실하게 출퇴근하는 회사원 E는 일상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무료한 생활을 무료하단 자각도 없이 반복한다. 크리스마스 즈음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연락하고 (그러나 연락되지 않고) 새해가 되는 날엔 일출을 보러 산에 가고 (그러나 정상에 오르진 못하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상사를 욕하며 술을 마신다.

 

이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주말, 출근, 산책, 그리고 주말, 출근.


출근이 오고, 동료들과 내일이면 기억하지도 못할 대화를 나누고, 퇴근길에 간단한 술을 마시고…….

그러는 사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가령 직장 동료 a가 실종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사라진 a에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a의 실종을 궁금해하는 E를 의아해한다. a의 자리는 곧바로 d라는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고 a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E는 이 모든 것들이 어딘가 모르게 폭력적이고 권태롭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암전.
설정만을 보여 주고 암전.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고 다시 암전.
암전. 암전은 무대 위의 유일한 개연성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많은 일을이 벌어지고, 벌어지고, 벌어졌다. 무대 위에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책임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E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도 재미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인내와 노력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소모적이군. E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_98p

 


 

 

이 책은 굉장히 특별했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 이 권태로운 일상에서 언젠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장까지 읽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달려드는 허탈감, 그것이 이 책이 당신에게 건내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이름조차 없는 주인공 E. 그리고 그의 동료들 a, b, c, d.

 

그들은 평범한(평범한 게 뭘까?) 삶을 영위하며 식욕, 수면욕, 성욕 등 기본적인 욕구만 소심하게 추구하며, 무의미하고 반복적이며 성취 없는 일상을 무한한 반복한다. 주인공도 읽는 독자인 나도 점점 감정이 사라진 것만 같은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는데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왜냐하면, E는 바로 나였기때문이다.

기억할 만한 특별한 일도, 의미화할 만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가치’ 그 자체인 세계. 이것이 지금 세대에게 주어진 지옥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은 이 '무가치'의 세계를 견딜 수 없어 가슴을 치며 분노해보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도 견딘다는 의식조차 없이 이 세계에 주저앉아 있겠지.

 

이 책은 그 어떤 강력한 사건들로 채운 '청년 실업문제', '개인화 문제', '폭력의 시대'를 표현한 소설들보다 나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공허함, 이 허탈함, 이 가치없음이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서 느낀 것을 글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싶다. 그래야 작가가 쓴 한 줄, 한 줄에 서린 고독함이 느껴질 수 있을테니까.

 

돌아보면 나도 있었는데.
세상에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왜 우리는 가치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권태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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