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출근, 산책 : 어두움과 비 오늘의 젊은 작가 8
김엄지 지음 / 민음사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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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는 비가 내리는 내내 성실했다. 그는 비가 내리기 전에도 성실했다. 지금처럼 성실하다면 그는 곧 그가 원하는 삶을 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베터리도 없고 충전기도 없었다. 충전기는 어디로 갔을까? _ 66p

 


성실하게 출퇴근하는 회사원 E는 일상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무료한 생활을 무료하단 자각도 없이 반복한다. 크리스마스 즈음엔 여자를 만나기 위해 연락하고 (그러나 연락되지 않고) 새해가 되는 날엔 일출을 보러 산에 가고 (그러나 정상에 오르진 못하고) 퇴근길에 동료들과 상사를 욕하며 술을 마신다.

 

이 모든 것들은 계속해서 반복된다.
주말, 출근, 산책, 그리고 주말, 출근.


출근이 오고, 동료들과 내일이면 기억하지도 못할 대화를 나누고, 퇴근길에 간단한 술을 마시고…….

그러는 사이 크고 작은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는데, 가령 직장 동료 a가 실종된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사라진 a에 신경 쓰지 않고 오히려 a의 실종을 궁금해하는 E를 의아해한다. a의 자리는 곧바로 d라는 새로운 인물로 대체되고 a의 존재는 자연스럽게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진다. E는 이 모든 것들이 어딘가 모르게 폭력적이고 권태롭고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지만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암전.
설정만을 보여 주고 암전.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고 다시 암전.
암전. 암전은 무대 위의 유일한 개연성이었다.

 

무대 위에서는 많은 일을이 벌어지고, 벌어지고, 벌어졌다. 무대 위에서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E는 무대에서 벌어지는 무책임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재미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서. E는 생각했다. 그는 이렇게도 재미없는 것을 만들기 위해 필요했을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인내와 노력 같은 단어가 떠올랐다.
소모적이군. E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_98p

 


 

 

이 책은 굉장히 특별했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반복되는 권태로운 일상. 이 권태로운 일상에서 언젠가 특별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까 기대하는 마음으로 마지막 장까지 읽었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달려드는 허탈감, 그것이 이 책이 당신에게 건내고 싶은 이야기일 것이다.

 

하나도 특별할 것 없는, 이름조차 없는 주인공 E. 그리고 그의 동료들 a, b, c, d.

 

그들은 평범한(평범한 게 뭘까?) 삶을 영위하며 식욕, 수면욕, 성욕 등 기본적인 욕구만 소심하게 추구하며, 무의미하고 반복적이며 성취 없는 일상을 무한한 반복한다. 주인공도 읽는 독자인 나도 점점 감정이 사라진 것만 같은 권태로움을 느끼게 되는데 왠지 모르게 슬퍼진다. 왜냐하면, E는 바로 나였기때문이다.

기억할 만한 특별한 일도, 의미화할 만한 그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는 ‘무가치’ 그 자체인 세계. 이것이 지금 세대에게 주어진 지옥이 아닐까? 그래서 지금은 이 '무가치'의 세계를 견딜 수 없어 가슴을 치며 분노해보지만, 결국 시간이 지나면 나도 견딘다는 의식조차 없이 이 세계에 주저앉아 있겠지.

 

이 책은 그 어떤 강력한 사건들로 채운 '청년 실업문제', '개인화 문제', '폭력의 시대'를 표현한 소설들보다 나는 강렬하게 다가왔다. 이 공허함, 이 허탈함, 이 가치없음이 우리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나서 느낀 것을 글로,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싶다. 그래야 작가가 쓴 한 줄, 한 줄에 서린 고독함이 느껴질 수 있을테니까.

 

돌아보면 나도 있었는데.
세상에 내가 주인공이라고 생각하던 때가.
내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던 때가.

 

왜 우리는 가치없이 반복되는 일상을 권태롭게 살아갈 수 밖에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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