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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빼기 3 - 어느 날… 남편과 두 아이가 죽었습니다
바버라 파흘 에버하르트 지음, 김수연 옮김 / 에이미팩토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어느 날...남편과 두 아이가 죽었습니다.'
그 어느 위로도 못할 만큼, 힘내라는 말도 못할 만큼, 독자는 이 한 줄의 문장에 그저 입을 다물 수 밖에 없다.
사랑하는 가족이 어느 날 갑자기 나의 옆에서 사라짐을 겪는 불행에 대해, 그 누가 이러쿵저러쿵 해석하고 위로를 하고, 아는 척을 할 수 있을까?
타인은 이렇게 말한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
하지만 『4-3』을 읽는 내내 그 위로의 말조차 감히 할 수 없는, 불행을 겪어보지 못한 독자들의 호강스러운 단어처럼 느껴진다.
저자, "남편과 두 아이가 죽었습니다."라고 담담하게 말하는 여인 바버라 파흘 에버하르트는 평범한 독일의 주부이자, 아내이자, 엄마였던 여인이다. 사랑하는 남편과 너무너무 사랑하는 두 아이와 행복하게 살아가던 평범한 여인이다.
어느 날, 남편이 몰던 피에로가 그려진 노란 버스는 건널목에서 열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당하고 남편과 아이들을 마지막 한마디도 제대로 해주지 못하고 멀리 떠나보낸다.
『4-3』은 남편과 두 아이를 떠나 보낸 끔찍한 경험을 하고 난 5일 후, 주변 사람들에게 장문의 이메일을 보낸다.
From: 바버라 파흘 에버하르트
Date: 2008년 3월 25일 화요일 17시 25분
To: 이 편지를 받을 모든 이들
Re: 죽음, 그리고 작별
지난 며칠간 따뜻한 말과 글로 저를 위로해주고, 제 곁을 지켜주면서 함께 기도해준 사랑하는 친구와 지인들!
저는 지난주 목요일부터 월요일인 어제 동안 교통사고로 남편 헬리, 그리고 두 아이 티모와 피니를 잃었습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있지 않습니다. 떨어진 곳에 있었기에 무사합니다.
여러분은 이런 처지에 놓은 제게 무얼 해줄 수 있을지 고민하실 겁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
그녀의 편지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녀는 편지 속에서 남편 헬리와 함께 했던 마지막 시간을 천천히 달콤하게 떠올리면서 가족과 작별하기 몇 주 전의 행복함을 떠올린다. 그녀의 사랑으로 예쁘게 자라는 두 아이의 추억을 떠올린다.
바버라는 이 편지로 자신이 얼마나 가족을 사랑하고 있었는지, 그들을 어떻게 떠나보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녀의 삶이 흔들리고 있는지, 앞으로의 날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에 대해 무덤덤한 느낌으로 적어내려 간다.
마치 이렇게라도 떠올리지 않으면 내일은 사라질 것 같은 느낌이 있었을까?
그때는 지나쳐버린 그 모든 기억을 기억하고 또 기억한다. 잠시라도 기억을 하지 않으면 그녀의 가슴에 남아 있는 남편과 두 아이의 흔적이 없어져 버리는 것처럼..
독일 국민을 감동시킨 실화라는 평을 받고 독일 아마존 50주 연속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한 『4-3』
독자들은 왜 이 책을 읽으려고 하고 바버라를 알려고 하는 것일까?
너무나도 비극적인 슬픔에 차라리 무너지는 바버라의 모습이 보였다면 슬픔에 대한 당연한 표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늘 타인에게 웃음을 주는 피에로를 하던 바버라는 이 지독한 슬픔 앞에서 너무도 담담하게 서 있다. 슬픔을 너무 희망적으로 말하기에 독자는 더욱 그녀가 안타깝고, 또 안타깝다.
바버라는 그녀의 생각대로 가족의 영혼을 떠나보내는 장례식을 치른다. 그곳에 초대되는 이들에게 부탁한다. 영원히 떠나보내는 것이 아니라 잠시 먼저 떨어져 있는 것이기에, 그리고 지금 이 순간 아내의 의식 속에, 엄마의 의식 속에 살아 있고,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의식 속에 살아 있기에 멀리 떠나보내는 장례식이 아닌 '영혼의 축제'를 열어준다.
가족을 떠나보내는 아픔은 누구나 겪어야 할 삶의 순서이다.
하지만 건강하고 행복하던 나의 가족이 한꺼번에 내 곁을 떠난다는 것은 삶의 순서라고 하고 싶지 않다. 이것은 고통이고 슬픔이고, 나 자신이 서야 할 바탕이 없어지는 것이다.
물론 이런 슬픔을 겪지 못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저 그녀가 담담하게 써내려가는 일기를 보면서 지금 내 곁에 있는 남편과 내 아이들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그 존재감 자체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게 해줘서 고맙다고 해야 할까?
흔한 말로, 산 사람은 살게 되어 있다고 한다. 참...얼마나 냉정한 말인가.
하지만, 삶은 그렇다. 냉정하지만 정답인 것, 그리고 앞에 놓인 이정표라는 것.
바버라는 지독한 슬픔을 안으로 감추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소리 내 울지 않아도, 왜 나를 혼자 두고 떠났느냐고 분노의 고함을 지르지 않아도 또 다른 표현으로 바버라는 비극의 슬픔과 분노와 원망과 공포를 보이고 있다.
독자들은 이것을 느낄 수 있기 때문에 더 가슴 아프고 가슴 저림을 느끼게 된다.
그녀가 삶의 시간을 보낸 후 어떤 슬픔의 여운을 갖고 있느냐는 언급할 필요가 없다. 그녀의 분신인 남편과 두 아이를 그녀 스스로 각인 시키는 것만으로도 벌써 어떤 방향으로 가는지..., 스스로 정했기 때문이다.
가족이 떠남으로 그녀에게 남겨진 커다란 구멍이 있다면 그들을 기억하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구멍을 메워갈 것이다.
그래서 독자들이 그녀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어하고, 그녀의 글을, 그녀의 이메일을 읽으려는 지도 모르겠다.
사랑한다.
내 가족에게 이 말이 결코 늦어지는 후회가 되지 않기를 생각하면서 오랜 여운을..., 슬프지만 그래도 감동의 여운을 간직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