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 -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
이광수.최희철 지음 / 알렙 / 201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사진이 묻고 철학이 답하다'라는 제목이나 '사진 찍는 인문학자와 철학하는 시인이 마주친 모나드'라는 소제목이나 추상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사진'이라는 '찰나'의 시간의 물음에 대해 '철학'이라는 '삶'의 시간들로 답하다 라는 의미로 해석해 보려 하지만,

이 마저도 영 자신이 없어 쭈뼛거리는 고로, 이 책을 읽고난 후의 느낌은 한마디로 '어렵다' 정도가 되겠다.

 

그동안 나는,

소설가는 소설속에서, 음악가는 음악속에서, 미술가는 미술작품 속에서, 그리고 사진가는 사진이라는 형식을 통하여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해당 분야의 작품들을 통하여 자신이 얘기하고자 하는 바를 녹여내는 행위 자체가 '예술'이기 때문에,

자신의 예술을 보게 되는 다른 사람 내지는 자신의 예술 영역 밖의 다른 영역의 사람들이 얼마든지 다르게 볼 수도 있고 다르게 해석할 수도 있으며,

작품을 만드는 예술가도 그렇고, 작품을 감상하는 감상자도 그렇고, 얼마든지 중의적인 표현이나 해석이 가능하다고 생각했었다.

때문에 모든 예술가는 예술작품으로만 얘기해도 상관없다는 입장이었다.

예술가가 작품 외적인 공간에서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이야 본인의 자유의지겠지만 썩 좋게 보지 않았던 연유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진가는 자신이 찍은 그 사진 행위와 그 결과물에 대해 말을 잘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려 든다. 왜 이 사진을 찍었는지, 무슨 생각으로 이 사진을 찍었는지, 그때의 느낌은 어땠으며, 어떤 이미지로 만들고 싶었는지, 이미지가 만들어지고 난 뒤의 느낌은 어떠한지, 사진을 보고 든 생각은 어떠한지, 다른 사람들은 이 사진을 보고 무슨 생각을 가질 것 같은지 등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 그냥 이미지만 보면서 좋네, 멋지네, 잘 찍었네, 하는 따위의 별 의미 없는 반응만 보일 뿐,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그것을 가지고 또 다른 이야기의 세계로 들어가 보기도 하고, 더 넓은 삶을 생각해 보기도 하고 지나간 시간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이런 거 하기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7쪽)

 

때문에 이 책의 <들어가는 글>에서 '산다는 것, 본다는 것'이란 제목으로 '사진 찍는 인문학자'이신 '이광수' 님이 제기하신 이 문제가 다소 의아했었다.

한참을 읽다가 책날개 안쪽에 적힌 프로필을 되짚어 읽은 후에야,

'사진 찍는 인문학자'가 아니라 '인도사를 전공한 교수이자 사진비평가'에 방점이 찍혀야 한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 한 나라의 역사를 공부를 공부하다가 사진이 중요한 사료가 될 수 있겠다 싶어,

사진을 이론부터 공부했으며 결국 사진비평가라는 직함을 얻은 '이광수' 님이기에 가능한 일이란 걸 인식하게 되었다.

 

거칠게 얘기해보자면,

자신이 찍은 사진들의 기법이나 테크닉에 대해 얘기하는게 사진가의 몫이라면,

생각이나 느낌을 '얘기하는건' 겉으로 보기엔 '인문학'이나 '철학'의 몫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사진 찍는 인문학자'이신 이광수 님과 '철학하는 시인'인 최희철 님은 그런 의미에서 중첩된다고 생각했었다.

 

나중에 이광수 님이 '사진을 가지고 하는 인문학적 '이라고 하셨을 때에서야,

이론과 실제,지식과 경험, 거기에 생각과 느낌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그렇지만 어려운 일인지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철학하는 시인'인 '최희철' 님을 자신과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하지 않고 존중해야할 지향점으로 삼고 생각의 놀이를 같이 하고자 한게 참 멋지게 느껴졌다.

최희철 님은 철학하는 시인이시지만,

항해사인 경력이 있으신, 배 타는 일과 닭 잡아 파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고,

녹색과 잡종의 세상을 지향하는,

삶 자체가 인문학적이고 철학적인 분이다.

이광수 님은 최희철 님을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이지 않다고 하시는데,

난 이말이 어렵거나 현학적인척 하지 않는다 정도로 읽혀서 좋았다. 

 

개인적으론, 

사진을 찍는 인문학자 이광수 님의 글이 고차원적이고 관념적으로 느껴졌다면,

철학하는 시인 최희철님의 경우 철학적인 걸 시각적으로 형상화시켜서 알기 싶게 설명하려 노력하여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다.

 

가령 길이가 다른 두 개의 선분이 있다고 해보자. 선분의 길이는 비교할 수 있다. 그런데 선분은 점들이 모여서 된 것이므로 한 개의 선분에는 길이와 상관없이 무한 개수의 점들이 있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두 선분은 모두 '무한'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두 무한 중에 어느 게 더 큰 무한일까? 무한을 비교할 수가를 물은 것이다. 보통은 길이가 긴 선분의 무한이 더 크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사실 두 무한은 비교할 수 없다. 그래서 어느 무한이 더 크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길이가 긴 선분의 무한이 더 크다고 생각했을까? 그건 아마도 우리가 무한을 본 게 아니라 그 무한을 함유하고 있는 선분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즉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켰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을 본 것과 같다.(25쪽)

 

난 앞으로도 사진을 포함한 다른 예술 작품을 향하여서도,

좋네, 멋지네, 잘 찍었네, 따위의 말들만을 늘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이광수 님처럼이 아니고, 최희철 님처럼 쉽게 쉽게 가려고 노력할 것이다.

 

존재를 존재자로 보질 않고 존재로 볼 때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 가 보이기 시작한다는 최희철 님의 말씀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세상 모든 건 기준을 무엇으로 보느냐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고 다르게 보일 수 있다.

인간을 절대자로 보는 것 또한 인간 중심의 독선이니까 말이다.

다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세상은 얼마든지 아름다워 질 수 있고,

실패와 패배에 대해서도 보다 넉넉하고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될테니까 말이다.

 

이 책은 이런 의도로 쓰여진 책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내 지식과 깨달음의 깊이가 요 정도인걸~(,.)

안분지족의 묘를 느끼게 해준 책이다.

 

드라마 '대장금'에서 장금이가,

'홍시 맛이 나서, 홍시라 생각한 것이온데... 어찌 홍시라 생각했느냐 하시면...'하던 대사가 생각나는,

그런 요상한 책이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6-07-09 18: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7-26 09: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yureka01 2016-07-09 20:32   좋아요 1 | URL
ㅎㅎㅎ 리뷰 너무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읽었는데 리뷰는 차일피일
미루었던터라서..리뷰가 더 와닿네요..^^..ㅎㅎㅎㅎ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하기보다는
어떻게 보느냐가 더 중요한 시선의 관념성...

저도 늘 사진을 그렇게 찍고 싶었던 이유입니다..

잘봤습니다..^^..^^

양철나무꾼 2016-07-26 09:27   좋아요 1 | URL
고맙습니다, 귀중한 댓글에 덧글이 많이 늦어버렸네요.
그렇지 않아도 사진에 관한 책이어서,
님의 코멘트가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이렇게 댓글로라도 만나게 되니, 궁금증이 많이 줄었습니다.

어서 리뷰 올려주세요~ㅅ!^^

2016-07-25 09:16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