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논어
주대환 지음 / 나무나무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고백하자면, 이 책을 시작하기전 난 '논어'를 비롯한 사서에 대하여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어찌 어찌하여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읽을 기회라도 생길라 치면,

책마다 해석이 다르게 되어있는데,

그게 한자는 까막눈이니 그렇다 치고,

한자뒤에 붙어있는, 'OO이고 OO이니,'하는 추임새, '이른바 '현토'라는 것이 책마다 다르게 되어 있고,

이 '현토'가 어떻게 쓰이느냐에 따라서,

해석도 '귀에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되는 걸 너무 여러번 경험하였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 책'좌파 논어'에서도 언뜻 비쳐지고 있는 내용인데,

주자가 달아놓은 주해가 '논어'의 그것과 꼭 일치하지는 않는지,

그동안은 책을 읽다보면 공자가 찌질이 못난이이거나, 일관성이 없는 사람인줄 알았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면 성백효의 번역에 대한 언급으로 보나,

이권우가 방현주에 나와서 얘기한 '진정성'에 관한 언급으로 볼때,

뭔가 새로운 해석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하여 흥미로웠다.

 

그러던 난, 책머리에 노랑으로 밑줄친 부분의 이 구절을 보며 지레 실망을 하였었다.

 

'좌파 논어'라는 제목 자체가 그만의 어떤 독특한 개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좌파'라는 단어에서 '급진적'이고 '혁신적'이라는 이미지를 연상하였던 나는,

그의 논어 해석(풀이)라는 것이 기존의 논어 해석(풀이)과 비교하여 크게 파격적일 것이리라 생각했었나 보다.

책머리에 '주자의 논어 집주를 완역하신 성백효 선생님께 감사드린다'는 저 구절을 보는 순간,

주대환의 좌파라는 것이 세월을 비껴가지는 못한게 아닐까 또는 세월이 흐르면서 바랜게 아닌가 싶어,

내지는 논어 해석(번역)이라는 것도 큰 틀에서 보면, 하나의 번역의 세계인데...

성백효라는 큰 조류의 흐름을 어찌할 수 없는게 아닌가 싶어,

안타깝고 씁쓸했다.

 

하지만, 결론을 얘기하자면, 내 기우였다.

주대환 이 분은, 당신이 하고자 하는 얘기를 과장하거나 수사를 사용하지 않고,

본인의 과거 경험에서 우러나온 담담하고 진솔함들로 풀어나가고 있다.

때문에 논조는 다소 약하고 부드러운듯 느껴지지만,

진실은, 곧 진정성은 힘이 세다.

 

그래서였을까?

'책머리에'의 이구절이 그 어느구절보다 강한 울림으로 내게 와닿았다.

이 세상을 살면서 좌절하고 상처받은 사람이 어디 나뿐이겠는가? 인간관계를 잘 풀지 못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 사람은 사회를 떠나 살 수 없다. 나는 이 책을 통하여 보다 많은 분들이 나처럼 위로와 격려를 얻기를 바란다.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용기를 얻기를 바란다. 청년들에게 이 책이 희망의 메신저가 되기를 바란다.(8쪽)


전에 까뮈의 이방인 번역 때도 얘기한 적이 있지만,

이런 고전 번역이나 고전 해석또는 풀이에서 내가 하고싶은 말은,

그동안의 케케묵은 학계나 관행의 답습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대환은 한문학자나 역사학자가 아니기 때문에...기존의 이론이나 해석에서 좀 자유롭지 않았을까?

 

그래서인지,

나의 이런 풀이는 학자들의 전통적 해석과 많이 다르다. ㆍㆍㆍㆍㆍㆍ(솔직히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35쪽)

 

이런 나의 해석은 주자의 해석과 다르다.(39쪽)

 

遠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 멀다는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나와 관계가 멀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61쪽)

 

초나라의 접여라는 광인은 단순히 미친 사람이 아니라, 도가 계통의 사상가로서 일부러 미친 척하는 무정부주의자였던 것 같다.(71쪽)

 

여기서 소인(小人)은 마무와 노예 등 하인을 가리킨다고 주자는 설명했다. 하지만 나는 어린아이로 읽고 싶다. 여하튼 여기서만은 소인이 군자의 반대말이 아니다.ㆍㆍㆍㆍㆍㆍ사실 타지고 보면 사람이란 누구나 "가까이하면 불손하고 멀리하면 원망하는"데 말이다.(82쪽)

 

*여기서 五十이란 두 글자는 卒(마칠 졸)자를 누군가 잘못 베껴 쓴 것으로 본다. 加는 假(빌릴 가)의 오기(誤記)로 본다.(130쪽)

여기저기서, 넘나드는 그의 견해는 경계가 없는것이, 그물에 걸리는 않는 바람같이 자유분망하다.

내가 개인적으로 하고싶은 말은,

학계의 그것이 주류여서 정설이고, 주대환의 그것은 주류에서 벗어난 것이니 일고의 가치도 없는것이다...

뭐, 그런 얘기가 아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수 만큼이나 얼마든지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자유로운,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는 것이고,

다양한 해석과 접근법은 획일성과 통일성을 지양한다는 면에서,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기존의 그것에 반하는 다양한 해석이나 접근법에서 우리가 방점을 찍어야 할 것은,

기존의 그것이 아닌 '다양한 해석과 접근법'이고,

이것은 곧 학계나 주류의 그것에 대항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인정하는 삶인 것이다.

 

암튼 좌파공자를 읽다보면 그동안 알아오던 딱딱한 학문, 유교와는 많이 다르다는 걸 깨닫게 되는데,

그게 저자 주대환의 개인적 경험에서 연유한 것이란 걸 깨닫는 순간 더 설득력 있어진다.

 

많은 얘기들이 나오는데,

주대환의 개인적인 경험이 묻어나는, 그러면서도 독특하고 재밌는 풀이를 몇개 소개해보자면,

 

위정편 21장, '왜 정치를 하지 않으십니까?'와 관련하여,

누군지 눈치 없는 사람이 참 곤란한 질문을 했다. 난들 왜 정치를 하고 싶지 않겠나?ㆍㆍㆍㆍㆍㆍ내가 벼슬하고 싶어서 무슨 짓을 했는지, 그 부끄럽고 잊어버리고 싶은 행위들을 일일이 다 얘기해줘야 하나?

ㆍㆍㆍㆍㆍㆍ유학자들은 이 구절에 너무 심오한 해설을 달았다. 하지만 딴청을 피우면서 곤란한 질문을 피해가는 말씀일 뿐이다.(194쪽)하는 구절은 진솔해서 매력적이다.

 

그동안 유교와 공자라고 하면, 조선의 완고한 성리학자들의 모습을 떠올렸었는데,

그런 유교와 공자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하게 된 것은,

공자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지 않는, 고집스럽고 완고한 무리들을 싫어했다고 하며,

그동안의 학자들이 공자님의 말씀을 두루뭉술하고 하나마나한 소리로 만들고 있다(44쪽)고 한탄하는 부분에서였다.

 

가장 독특한 깨달음은, '충(忠)'이란 글자가 군신 간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고, '누구를 위해서나 마음을 다한다'는 뜻으로 모든 인간관계에 해당되는 덕목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이런 구절 말고도,

때론 고지식하고 때론 융통성 없는 용어 선택(예를 들면, 필부 따위, )으로 나를 혼란스럽게 했던 누군가가 생각났다.

참고로, 그동안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읽을라치면 잠이 먼저 한달음 달려와 나를 마중했던 그동안의 관행으로 미루어,

언제던가 잠이 안오던 어느날,

논어를 비롯한 사서를 시조나 창처럼 외우는 이에게 자장가를 청하였더니,

정태춘, 박은옥의 '사랑하는 이에게'를 시조나 창처럼 들려주었다.

그 노래를 시조나 창처럼 듣던 난,

시대를 초월하여 '진정성은 하나로 통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매한 입장을 취하면 당장은 편할지 모르지만, 발전이 없을 뿐더러...

사물의 본질이나 물자체, 바꾸어 말하면 진정성엔 다다르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지식하거나 모르는 것이 순간에 쪽 팔릴지는 모르지만 문제가 될건 없다.

단지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거나 아는것을 모르는 척 하는 건,

'기다'를 '아니다'라고 우기거나 '아닌것'을 '기다'라고 우기는 게 반복되는 건,

진정성에 저해되니 문제다.

반성한다.

 

암튼 좋고 재미난 구절 들로 넘쳐난다, 스스로 읽어 깨닫는 기쁨을 누리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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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5-22 00: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5-27 1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북극곰 2014-05-22 11:39   좋아요 0 | URL
오늘 주문합니당~!! ㅋ Thanks to 나무꾼님. ^^

양철나무꾼 2014-05-27 11:32   좋아요 0 | URL
땡큐는 제가 외쳐야죠, 북극곰님~^^
잘 지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