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린 마음으로는

여울진 세상 살기가 어려웠어라

언제부턴가 짊어진 두꺼운 갑옷

더듬이 내밀었다가 상처 받으면

돌아가려 마련한 안식처다

 

험한 물살에 떠밀려

잠시도 한 곳에 머물지 못했다

구르고 구르며 떠내려 온 세월

골뱅이는 온 몸이 푸르게

짙푸른 멍 자국으로만 남았다

 

강물이 푸른 것은

찐득한 울혈 죽음으로 토해

강심에 켜켜이 쌓아 놓은거라

도도한 흙탕 큰물로도

씻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창강 행정나루터

서산말 청춘들이 담력으로 멱감는 냉골(陰谷)

오늘 또 몸을 던졌다

여자들은 마지막 가는 길 어째서

강을 택할까

 

강물이 푸르도록 몸뚱어리 희게 풀어놓고

모래에 묻히는 골뱅이 빈껍데기

자갈밭엔

주인 없는 신발 한 짝

 

강물이 깊을수록 끝도 모르게

쌓아 내려뜨린 물색의 무게

장막 두꺼운 침묵의 사연들

검푸른 나락에서 울부짖는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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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강

    

 

저 강 좀 봐

긴 여정에 아우성치던 심장

도닥도닥 재우고선 이제는

유유히 흐르는 저 강물 좀 봐

 

풀어질 줄은 알지 깨어질 줄 몰라

산그늘 노송 품고

구름도 슬쩍 불러

산수화 구도를 맞추는 저 강물 좀 봐

 

바람 불면

별과 잠깐 놀아주다

설레던 은빛 촉수

안으로 잠글 줄 아는 저 강물을 좀 봐

 

멈춘 듯 느린 걸음

불 꺼진 마을 지나

돌아보지도 않고 덤덤히 가는

한스럽게 깊푸른 저 강물을 좀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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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시간을 설거지 하듯

계절의 잔해가 모인다

살아온 죄로 허리가 잘려

나란히 포개 층층이 눕는다

 

퇴비장은 무덤

삶과의 거리는 꼭 한 길 높이다

내년 봄

과일 나무 밑에서 부활할 수 있을까

 

2

백년은 지난 고분이 되었다

누그러진 날을 잡아 뒤집어 준다

마지막 호흡을 도와야 하기 때문이다

 

수직 콧대 세웠던 풀줄기

오만한 심을 녹이는 오체투지 중이다

너무 서두르는 걸음은 뒤섞어

발맞추라 한다

목마른 육신들 마지막 한 잔은

물뿌리개로 촉촉한 음복

 

검은 비닐 제단에서 올리는 번제

육신을 태우는 뜨거운 김이 오른다

향유 없이 소신공양하는데 필요한 온도는

섭씨 600

 

3

푹 삭은 거름은

낮의 무지개를 품은 밤의 색

복추, 추희, 초하, 은풍

홍로에서 양광까지

생명을 잉태한 마법의 재료다

 

4

이승을 살아온 시간은

편도가 아니고 항상 왕복이다

귀향의 포실한 맨발을

쇠스랑으로 삼태기에 옮긴다

 

난향이

찰나 가슴에 스친다

 

5

과일 향이 왜 달콤한지 아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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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빈 운동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난 빈자리엔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두가 집으로 돌아가면 비로소 찾아오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네는 빈자리로 기다리고 있었다

 

열려있는 교문에 이끌려 한 소녀가 운동장에 들어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네에 앉았다 소녀는 무심히 앉았지만 기다리며 늘어진 줄만큼 그네는 출렁였다 운동장에 차오르는 어둠에 발이 젖어서일까 땅을 차던 소녀는 신발 끝으로 밀어 조금 물러났다

 

발끝 쐐기를 풀자 그네는 출렁이며 직선 같은 짧은 호()에 소녀의 무게를 허공으로 실었다 조그만 출렁임에 소녀의 눈에 물기가 출렁 넘쳐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묻었다 그네도 호의 가장 낮은 한 점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지만 소녀의 가슴에서 오는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네 줄은 진동을 멈추었다

 

소녀는 다시 발끝으로 그네를 뒤로 밀었다 이번에는 까치발 끝이 닿는 힘껏 밀어 추진력을 모았다 그네 줄은 팽팽한 반동으로 소녀를 밀어 올렸다 소녀는 한 손을 빼 줄을 잡았다 소녀는 그네의 활공에 고개를 들더니 두 손 다 줄을 잡았다 소녀는 땅을 차던 발끝을  가슴으로 힘껏 잡아당겨 그네에 힘을 실었다 그네는 예각을 벌리며 호를 긋더니 이내 둔각으로 솟아올랐다 소녀가 가벼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밤의 무게를 벗어나 비상했던 소녀는 그네에서 폴짝 뛰어 내려 손수건을 꺼냈다 안경을 벗고 마른 눈물자국을 꼼꼼하게 지웠다 무심한 별빛을 바라보더니 옷매무새를 만진 후 거리로 나섰다

 

그네는 소녀가 떨구고 간 눈물의 무게 때문에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눈물을 날려 보낸 후에야 비로소 가벼워 질 수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에는 심해처럼 어둠이 엉기고 빈 그네는 수초처럼 혼자 몸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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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2017-04-01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쉬면서 다시 읽어보고 있습니다. 좋네요~
 

네가 사는 곳에 폭설이 내렸다고 한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없기에 낭떠러지에 매달린 목소리가 사진을 보내라고 했다 내가 보내달라는 것은 사진이 아니라 따뜻한 체온으로 내리엮은 참바였다 나도 너처럼 혼자서는 추위를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너는 카메라 렌즈를 보았는가 렌즈 너머 나를 보고 있는가 카메라는 1초를 250등분하여 그 중 한 순간만 가슴을 열었다가 찰나를 닫았다 육안으로 감지할 수 없는 순간 너의 마음은 빛살이 되어 심안에 꽂혔다 사진에 박힌 마음을 뽑아 전하는 통신은 없다 그런대도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은 눈구름보다 높은 성층권에 난대성 기류가 흐르기 때문이다

 

사진 속 너를 본다 너의 사진을 보는 것이 아니라 폭설을 건너서 너를 만나는 것이다 엊그제 마주 할 땐 보여주지 못한 용기가 너를 응시한다 너의 눈빛이 북채가 되어 16분음표로 고막을 난타한다 내가 추위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사진 너머 가슴도 북소리에 공명하기 때문이다

 

너에게로 가는 길을 모른다 아마 통행이 금지된 한계령 겨울처럼 폭설이 쏟아지는 캄캄한 빙판일 것이다 그렇지만 길을 잃은 고라니 한 마리 쉴 곳을 찾아 가도록 별빛처럼 비추어 줄 것이다 쓸쓸한 그 눈빛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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