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호는

빈 틈 없는 구도로 겨울 풍경을 그리고 있다

 

하늘엔 바림 넣은 비층구름이 두꺼운 암막원단으로 겨울 빛을 차단한다 선염(渲染)에 딱 알맞은 날씨다 바다는 수감색 파도 끝에서 흰 거품을 뽑아내며 스스로 묵향을 숙성시킨다 모래사장은 맨살을 드러낸 채 파도소리를 가슴으로 쓴다 도끼로 내리패듯 한 붓 그은 침식단애 노근법(露根法)으로 굽은 노송이 일렁이는 물안개를 행운법(行雲法)으로 다스린다

 

노송 품은 암벽, 짙은 먹색으로 좌편향 구도로 세우고

묵호 바다는 남은 수평을

무한한 여운으로 까마득히 풀어 놓아 화폭의

공간을 무시하고 있다

인간은 찰나의 영상을 화선지에 모사하지만

파도는 물안개 어우러져 무량 출렁이고

구름을 흘려 넣는 수려한 구상

온전한 감상을 위해서 영겁을 허락 받아야만 한다

 

작품의 백미는

몽당붓으로 주름 넣은 바위 끝에

날개 쉬는 갈매기 한 마리

바닷물에 멱감은 회색 깃털, 보기에 흡족하도록

팽팽한 생기를 불어넣는다

새는 황금분할 구도를 조감하려 솟아오르지만

새는 비상마저도 그림 속 풍경인 걸 모른다

 새는 명작의 불후를 감상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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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슬

 

                 엄 영 훈

 

원시림 빽빽히 우거진 숲 속

조그마한 호수

땀구멍 송송 배는 일광욕을 하고 있다

 

속뼈까지 그슬린 나뭇가지

사이로 흘러내리는 한 여름

뙤약볕과 열렬한 접문(接吻)

 

초례청 어린 신부 꿀 찍은 눈꺼풀

뜨면 십만 촉광의 어둠

속으로 가라앉는 무간 심연 (無間 深淵)

 

녹음 짙은 바람이 건너가며

산들 애무한다

진저리 치는 물의 속살

  금빛 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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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uddko 2017-06-13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생님 등단 축하드려요~~윤슬이란 뜻을 몰라 찾아보고 시를 다시 읽어보았는데..저에게는 좀 어려워서 몇번을 읽어야 할 것 같아요.늘 활기찬 선생님 응원합니다!!!

제주녀 2017-06-14 04: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축하애요 한여름 호수에 빗대어 삶의 감각을
깨어나는 감각을 절묘하게 그렸군요
2,3연의 행걸침 기교가 멋드러지네요
마지막 연의 반전으로 소름 돋습니다
진저리치는 물의 속살이라는표현과 금빛 소름이라는
이미지가 너무 좋네요 축하에요
 

             빈 그네

 

                                         엄 영 훈

 

겨울 빈 운동장에서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떠난 빈자리에 어둠이 스며들고 있었다 모두가 돌아가면 비로소 찾아오는 사람이 있기에 그네는 자리를 비워 놓았다

 

텅 빈 교문에 이끌려 한 소녀가 운동장에 들어왔다 두 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그네에 앉았다 소녀는 무심히 앉았지만 기다리며 늘어진 줄만큼 그네는 울렁거렸다 운동장에 차오르는 어둠에 발이 젖어서일까 땅을 차던 소녀는 신발 끝으로 그네를 밀어 조금 물러났다

 

발끝 쐐기를 풀자 그네는 직선 같은 짧은 호()에 소녀의 무게를 허공으로 실었다 조그만 흔들림에도 소녀의 눈에 물기가 출렁 넘쳐 한 방울 굴러 떨어졌다 소녀는 고개를 묻었다 그네도 호의 가장 낮은 한 점에 동작을 멈추고 말았지만 소녀의 가슴에서 오는 파동을 느끼고 있었다 이윽고 그네 줄은 진동을 멈추었다

 

소녀는 다시 발끝으로 그네를 뒤로 밀었다 이번에는 까치발 끝이 닿는 힘껏 밀어 힘을 모았다 그네 줄은 팽팽한 반동으로 소녀를 밀어 올렸다 소녀는 한 손을 빼 줄을 잡았다 소녀는 그네의 활공에 고개를 들더니 두 손 다 줄을 잡았다 소녀는 땅을 차던 발끝을 가슴께로 높이 잡아당겨 그네에 마음을 실었다 그네의 예각은 이내 둔각으로 솟아올랐다 소녀가 가벼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밤의 무게를 벗어나 비상했던 소녀는 그네에서 폴짝 내려 손수건을 꺼냈다 안경을 벗고 마른 눈물자국을 꼼꼼하게 지웠다 무심히 내려다보는 별을 마주 쳐다보더니 이내 옷매무새를 만진 후 가로등 환한 거리로 나섰다

 

그네는 소녀가 떨구고 간 눈물의 무게 때문에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바람이 불어와 눈물을 날려 보낸 후에야 비로소 가벼워 질 수 있었다 텅 빈 운동장에는 심해처럼 어둠이 엉기고 빈 그네는 수초처럼 몸을 흔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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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일 2017-06-13 11: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가 좋던데, 신인상 당선작이 되었군요. 축하드립니다~

제주녀 2017-06-14 0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두 세계가 있는 것 같네요 그네가 있는 어둠의 세계와 밖으 ㅅ밝은 세계
그네는 어둡고 무겁고 축축한 세계인 것 같아요
어둡고 무거운 것을 떨구고 가는 소녀의 보이지 않는 마음보다
그네가 하는 일이 빈그네의 마음을 찾으면 답이 될까요
이제 학교 그네를 보면 그네의 마음이 무엇일까 생각할 것 같네요

hoonhoon2 2017-06-14 06: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제 시는 그렇게 어려운 편이 아닌데
아무튼 감사해요 읽어주신다는 것만으로도
참고하게 심사평 올립니다

박찬일교수님 심사평
엄영훈의 <빈 그네>는 열린 형식(Offene Form)이 말하는 그대로이다.
주목되는 것은 맨끝에서만 열린 형식을 말하게 하지 않고
연 곳곳에서 열린 형식을 말하게 한 점이다.
빈 그네와 소녀가 주요 제재이다
등장인물은 소녀뿐이다
소녀의 거동은 조화와 절제 균형의 형식미를 떠올리게 한다.
삶에 대한 아폴론적 잔잔한 반주를 말하게 한다
소녀가 삶을 견딜 만한 것이고 참을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문제작 <빈 그네>는
<세계 현존은 오로지 미적 가상을 통해 정당화 된다>는
명제를 구체화시켰다
엄영훈의 <빈 그네>는 삶에 대한 아폴론적 잔잔한 반주다

hopemam 2017-06-23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선생님 시가 너무 좋아요~! 제대로 읽고 싶어서 시험 끝나고 이제서야 봤는데 뭔가 중학교 때가 생각나네요ㅎㅎ 은퇴하시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하시는 모습을 응원합니다ㅎㅎ 늘 존경합니다:)
 

            뿌리의 보시(報施)

 

                            엄 영 훈

 

논 서 마지기에 첩실로 팔려 왔다 한 칸 뒤란방에서 불편한 그림자로 서방 나이 두 배의 일생을 마쳤다 선산 먼발치에 묻혔는데, 긴 장마에 젖은 벽지처럼 축대 무너져 검푸른 곰팡이 같던 삶이 드러났다 햇빛에 흩어진 골편이 삼복에도 추위를 탄다

 

백골과 뒤엉킨 뿌리를 본 적이 있는가 앙상한 백골에 서리서리 감긴 구렁이 같은 뿌리 말이다 초점 빼앗긴 검은 눈구멍에서 못 본 세상을 마저 보겠다고 꿈틀꿈틀 기어 나오는 촉수 말이다 저승의 초입을 미리 본 듯 몸 떨지 마라 죽음의 알몸이 부끄럽다고 외면하지도 마라

 

뿌리는 반가웠던 것이다 뼛속 먼지 색깔이 너무 같다고 착착 감기며 포옹한 것이다 지상에선 잊어버린 두 생이 서로 등 도닥이는 것이다 원래 하나였다고, 가야 하는 곳도 같다고 함께 가며 동무하는 것이다 뿌리는 한 판 끝난 삶을 조용히 귀향시키고 있는 것이다

 

뿌리는 한 생을 푸른 잎에 실어 올리고 있다 바람, 흠뻑 즐기다 못해 티벳 독수리 날아오르듯 상승기류 타고 날아서 가라는 것이다

 

지상의 장례식은 산 자들의 축제지만 뿌리는 죽은 자를 위해 격식에 맞춰 보시를 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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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onhoon2 2017-06-13 08: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창작블로그 시 연재한 힘으로
시전문 계간지 <예술가> 여름호 신인상을 받았습니다.
제 졸시를 읽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강성일 2017-06-13 1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등단 및 예술가 신인상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재주녀 2017-06-14 0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빈 그네와 마찬가지로 어둡고 습한 세계네요
지상에서 잊어버린 두 생 핵심일까요?
1, 2연은 슬프고 처절하고 무서운데 3연은 뭐랄까 홀로코스트가 연상되요
홀로코스트 영화에서 보여주던
어둡고 참혹한 곳에서만 보여주는 아름다움?
가슴이 서늘해지는 느낌이네요

hoonhoon2 2017-06-14 06: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 그네 심사평 이어서
뿌리의 보시에 해당하는 심사평 올립니다
빈 그네 심사평과 함께 읽으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박찬일교수님 심사평
뿌리의 보시에서도 적나라하다.
백골과 뿌리가 주요제재이다 백골과 뿌리가 서로 엉켜 있다.
삶인가?/죽음인가? 꿈인가?/생시인가?
역시 아폴론적 가상이 말하는 것과 같다

조병금 2017-06-15 0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깊은 밤에... 선생님의 시 세 편을 모두 읽어보았습니다.

윤슬을 읽으며
와수리 남대천변에 멱감고 나와 앉아 한 여름 땡볕도 신나기만 했던 어린 시절이 훅 지나갑니다.

등단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런 소식에 너무 기쁘고
멋진 삶 걸어 가시는 선생님께는 오늘도 깊이... 감사드립니다.


 


태풍이 몰려온다

지상에 서 있는 모든 것이 고난이다

부러질 듯 휘었다가 다시 선다

낙엽의 비명만큼 또 휘어진다

살아가는 것들의 소란스런 가벼움이다

 

지상이 시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땅 속에 심을 세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지상은 살아가며 쌓인 어둠을 모두 뿌리로 보냈다

뿌리는 지상의 무거움을 모두 받아 내렸다

흙 속에 한 삶의 중심이 만들어 진 것이다

뿌리는 고요 속에서 무게의 어둠을 만끽한다

 

곧은 뿌리, 수간(樹幹) 높이만큼 맞춰 내렸다

녹음의 무게와 똑같은 붉은 추()의 고요한 깊이에

지상은

태풍을 살아 견딜 수 있는 것이다

 

지상의 힘은 뿌리에 담긴 어둠의 무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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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록 2017-05-29 2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뿌리...

뿌리는 지상의 무거움을 모두 받아 내렸다....
태풍을 살아 견딜수 있는 것이다...

힘의 근원인가요?

2017-06-10 0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읽어주어서 고마워
시를 쓰지만 해석과 감상을 읽는 사람의 몫이지
다만 뿌리가 지니는 여러 뜻을 생각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