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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 연필 - 2011년 제17회 황금도깨비상 수상작 ㅣ 일공일삼 71
신수현 지음, 김성희 그림 / 비룡소 / 2011년 5월
평점 :
이야기는 두 가지 사건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하나는 주인공 민호가 같은 반 친구인 수아의 유리천사를 실수로 떨어뜨려 날개를 깨뜨린 사건, 다른 하나는 홀연히 나타난 빨강 연필의 마력으로 민호가 갑자기 글쓰기를 잘 하는 아이로 주목받는 사건. 그 두 사건 밑으로는 우울한 민호네 집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수아의 유리천사의 날개를 부러뜨린 이야기는 맨 처음 읽었을 때엔 좀 뜬금없이 끼어든 사건이었다. 아니 끼어들었다고 할 수는 없다. 이야기 첫머리에서 만나는 사건이니까. 뜬금없었다는 건, 없어도 이야기 진행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지 않다는 뜻이다. 그런데 리뷰가 늦어지는 바람에 다시 한 번 더 읽었을 때 이 이야기가 처음과는 다르게 다가왔다. 빨강 연필의 등장을 알리는 복선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날개가 깨져버린 유리천사는 바로 민호를 의미하는 것 아닐까. 민호가 유리천사의 날개를 깨뜨리는 사건이 빨강 연필이 등장하기 전에 터지면서 불길한 분위기를 안개처럼 깔아놓는 효과도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건조하다 못해 서걱거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문체는 긴장감을 더 고조시킨다.
거침없는 유려한 솜씨로 글을 지어내는 빨강 연필은 민호에게 축복처럼 다가왔다. 사교육으로 글짓기 실력을 갈고 닦은, 자존심 강하고 잘난 친구 재규를 재치고 빨강 연필의 솜씨를 빌려 쓴 자기 글이 '이달의 글'로 뽑혀서 교실 뒷편 게시판에 붙는 것도 짜릿했고, 반 친구들이 베푸는 따뜻한 친절의 맛도 감미로웠다. 하지만 민호는 곧 빨강 연필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을 깨닫는다.
빨간 연필은 여전히 새것처럼 보였다. 막상 없애려니 빨간 연필 없이도 잘 살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비밀을 낳고 비밀은 또 다른 거짓말로 이어지니 점점 감당하기가 힘들었다. 빨간 연필은 자신에게도 주위 사람에게도 독이 될 터였다. 결심이 바뀌기 전에 없애야 한다.
빨간 연필의 마력을 빌려서 쓴 '우리 집'이라는 거짓 글이 민호의 양심을 찌르고 엄마를 슬프게 하자 민호는 괴로워한다. 하지만 아빠와 야구를 하고 엄마가 쿠키를 구워주고 주말에 온가족이 함께 주말농장에 가서 고구마를 캤다는 내용의 글이 정말 100퍼센트 거짓일까. 빨간 연필이 쓴 민호의 '우리 집'은 민호의 간절한 바람 속에 자리잡고 있는 '우리 집'이었으니 누구라도 감히 거짓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 집'이라는 글 속에 담겨있는 민호의 바람을 읽어내는 사람은 민호의 엄마.
"너무 미안해서 그래. 우리 아들 진짜로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게 잘 안된 것 같아서."
민호는 빨간 연필의 유혹을 물리치고 자신의 실력을 키워보려고 노력하기 시작한다. 아침에 들리는 세상 소리들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인터넷으로 송지아 작가의 까페를 찾아보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책을 찾아 읽기도 한다. 빨간 연필이 올바른 방법은 아니었지만 민호에게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을 안겨주기도 했던 것이다. 민호에게는 비밀일기장이 있었는데, 어느새 민호는 일기쓰기에 재미를 붙이게 된다. 비밀일기를 쓸 때에는 빨강 연필을 쓰지 않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친구들의 꿈을 헤아려 살펴볼 줄도 알게된다. 심지어 재규의 마음까지. 민호가 엄마나 선생님 같은 주위 어른들에게 기대지 않고 스스로 이런 노력들을 해나간다는 것이 무척 대견했다.
수아의 유리천사의 날개를 깨뜨린 사건이나 빨강 연필의 등장이나 모두 긴장감이 감도는 불길한 사건이지만 민호가 내적 성장을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 두 사건을 통해 민호에게도 접착제로 붙인 유리천사의 날개처럼 희미한 상처의 자국이 남을지 모르겠지만 그건 민호의 앞으로의 삶에 예방주사 같은 게 되지 않을까 싶다. 다시 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민호는 올바르고 당당한 길을 선택하지 않을까. 세상의 유혹들을 이기고 아픔을 견디고 용기를 내게 하는, 진실과 진심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하지만... 빨강 연필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난 유혹에 넘어가버릴 것 같다. 어디 빨강 연필 뿐이랴.. 난 시시때때로 마구 솟아나는 아이스커피의 유혹을 뿌리치기도 힘겹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