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인과 문학 2016.가을
주변인과문학 (월간지) 편집부 지음 / 주변인과문학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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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만 하는 게 싫어 쓰기 시작했고그 일도 어느새 7년이 되 버렸다. 2년 전부터는 소설을 쓰고 있다매일 아침 한 시간. 아침 일찍 나와 글을 쓰고 있으면 오며가며 사람들이 묻는다책은 언제 나오냐고이쯤이면 뭐가 됐어도 되야 하는 게 아니냐고하지만 나의 경우 딱히 구체적인 목표를 정해놓고 쓰는 건 아니다막연히 훌륭한 작가가 되고 싶다언젠가는 글을 쓰는 직업을 가져 바닷가에서 살고 싶다 같은 희망을 갖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1년 안에 소설을 한 권 쓰겠다 신춘문예에 등단하겠다 라는 구체적 비전을 가진 건 아니었다말하자면그냥 쓴다 라고 해야 할까?

 

하루키는 이와 비슷한 얘기를 좀 더 세련되게 말한 적 있다그는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필연성’ 때문이라고 했다쓸 수 밖에 없는 상황딱히 정의할 수 없는어떤 미지의 힘에 의해 자연스럽게 책상에 앉아 종이를 펼치고 펜을 들게 만드는 것많은 사람들이 이런 건 나도 쓰겠다.” 라고 말하지만 평생 동안 단 한 자도 쓰지 못한 채 흙으로 돌아가는 이유도 이 필연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들에겐 써야 할 필연이 없다내림굿을 받지 않으면 온몸이 아파 견딜 수 없는 무병 환자처럼어느 순간 이야기가 목에 걸려 토해내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시간이쓰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찾아온다.

 

인간의 삶이란 그 자체가 고유한 이야기고그래서 산다는 것 만으로도 작가가 될 자격을 갖췄다고 말할 수 있지만결국에 쓰는 사람과 쓰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여기서 나고 만다.

 

나는 7년 전 어느 날 그 필연을 느꼈다.

 

이 책의 신인문학상 수상자 명단에 나의 이름이 있다대상은 아니기에 아직 등단한 것도 아니다상금은 적다응모된 소설은 150여편에 지나지 않는다대상을 포함한 수록작 4편에는 그런대로 품격을 겸비한 4편의 소설” 이라는 부끄러운 총평이 붙었고, 내 소설은 이야기 전개가 함께 가지 않고 제각기 노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라는 말을 들었다. 변명을 하자면, 아마도 글을 쓰는 습관 때문일 것이다. 세 시간, 네 시간 충분히 시간을 갖고 목표한 만큼 쓰는 게 아니라 딱 한 시간, 그 시간을 넘기고 나면 두 말 없이 손을 뗀다. 그래서 이야기는 흐름을 잃고 제각기 놀았던 거겠지. 한다고 했던 퇴고도 아직은 많이 부족한 모양이다.


상을 받고 난 뒤 오히려 자신감이 떨어졌다. 주변 사람들이 많이 읽을 수록 더 그렇다. 그들의 한 마디 한 마디를 침묵으로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가 많다. 하지만 이 모든 게 별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누가 내 글을 조롱하고 업신여긴다 할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쓸 수 밖에 없다. 쓰는 마음과 쓴 것에 대해 상처 받은 마음은 완전히 별개의 것이란 생각이 든다. 어쩌면 두 개는 완전히 다른 세상에 각각 떨어져 따로 존재하는 걸지도 모른다. 나는 내 글에 박힌 가장 우울한 말을 들은 날에 썼다. 그것은 어렵거나 어렵지 않다고 따질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썼다. 내 마음이 상처를 받은 게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인 것처럼 쓰는 것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이 모든 일을 경험하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어떤 감정을 느꼈는데, 그것이 왜 나왔는지 도대체 무엇에 대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나는 책상에 앉아 그 감정을 표현할 말을 오랫동안 찾아 보았다. 하지만 이 밤이 다 가도록 나는 아직 그 말을 찾아내지 못했다. 그 말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계속 쓰는 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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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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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나간 싸이코패스가 무자비한 학살을 벌이는 소설을 기대했는데 그런 책은 아니었다. 80년대 스타일의 슬래셔 무비처럼. 불도저로 건물을 밀어버리는 기분으로.


현대 미국 스릴러는 불륜 없이는 불가능한가보다. 클리셰를 겹겹이 쌓아놓은 밀푀유의 느낌으로 소설은 지루한 행진을 계속한다. 문제를 직시하고 여러 번 반전을 꾀하지만 그마저도 밋밋하고 억지스러워 '스릴'은 생기지 않는다.


주인공 릴리는, 1876년에 태어났다면 대단히 참신한 악녀였겠지만 싸이코패스가 넘치다 못해 흘러 홍수를 이루는 2016년에는 너무나 평범해 보인다. 대개 이런 캐릭터들은 아주 어린 시절부터 사람 죽이기를 좋아했고 소설은 꼭 항상 그 유년기를 조명하는데... 이처럼 뻔한 스토리에 매력을 느끼기란 북어를 뺀 북어국에서 시원함을 느끼기보다 어려운 법이다. 


유의미한 설정은 또 다른 악녀 미란다의 등장이다. 미란다 또한 자신의 이익을 위해 주변인들을 희생시키는 소시오패스급의 극한 이기주의자다. 릴리와의 차이라면 살인을 직접하지 않는다는 것. 뛰어난 미모를 이용해 주변의 남자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에선 고전적 악녀에 가깝지만 전술했듯 릴리같은 싸이코패스가 판을 치는 세상이다 보니 오히려 그 고전적 방식 생생하게 느껴지는 반사 효과가 있다.


이 책은 릴리 미란다의 대결이 핵심이다. 두 '여성'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매우 반가워할 만한 여지가 있지만 이 대결이 타이트하게 조여진 긴장감을 전달하느냐에 대해선 의심이 간다. 이를 타개해보고자 엎치락 뒤치락 여러 번의 반전을 끼워넣지만 결과는 무리수. 반전은 사용할 수록 그 효과가 반감되는 마약같은 존재다. 쓰면 쓸 수록 지저분해질 따름이지.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라는, 펴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매력적 제목을 가지고 이렇게 밖에 해내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다. 제목이 생각 났을 땐 환호를 질렀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은 전혀 그 제목을 따르지 않는다. 너무 좋은 제목이 생각나버린 나머지 억지로 붙인 것 같다. 우선 누가 정말 죽여 마땅한 사람인지 아무리 읽어봐도 모르겠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은 과연 누구였을까? 등장 인물들에 의해 살해된 사람들일까? 아니면 죽여야 했으나 끝까지 살아남아 이 제목을 역설적으로 보이게 만든 그녀였을까?


최근에 읽은 소설들이 하나같이 재미가 없었던 탓에 우울지수가 50은 증가한 것 같다. 이런 류의 책들을 다시는 사지 말아야지. 그런 면에서 미국은 참 대단한 나라다. 산업의 힘을 믿고 그 힘을 극단까지 밀어붙인다. 그들은 어떻게 팔아야 하는지 알고 있다. 피해는 온전히 소비자의 몫이지만 그 피해를 두 번 세 번 연거푸 받는다면 잘못은 더 이상 산업에 있는 게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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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인 척 호랑이
버드폴더 글.그림 / 놀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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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책을 처음 보는 건 아닐 것이다. 장 자끄 상뻬의 책을 그림책이라 불러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가 생각난다. 대개 그림책이라 하면 파스텔 톤의 따뜻한 그림들이 들어가 있었다. 더럽고 야비하고 치사한 세상을 치유하고자 하는 기세로 따뜻하게 번져가는 그림들. 이런 걸 보면 그냥 흐뭇한 마음으로 바라보면 좋겠지만 쉽지가 않다. 아무래도 천성이 비뚤어진 것 같다.


세상이 더럽고 치사하고 비열한 건 사실이지만 구태여 그 세상을 부정해야 할 필요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세상을 따뜻하고 깨끗하게 만들려는 모든 시도들이 폭력적으로 느껴진다. 인간은 애초에 그리 고귀한 존재가 아니고 그런 인간들이 모인 게 세상이니 당연 세상도 고귀하지 않다. 인간은 시비를 가르고 악을 선으로 교화시키는 걸 자기 종만이 가진 유일한 능력이라고 믿으며 그런 이유로 세상을 이루는 다른 존재들과 병적으로 구분되길 원한다. 


인간이 금수와 같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오히려 이런 자만이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방해하고 관계를 망치는 게 아닐까?


<고양이인 척 호랑이>는 다행히 이런 야심이 없는 책이다. 트위터에 올린 140자의 글이 우연히 호평을 받아 연재 형식으로 이어나간 것 같다. 소소하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자신의 재능을 살려 귀엽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을 채워넣었다. 하나는 숲에서 자신을 주워온 할머니를 놀래킬까봐 고양이인척 하는 호랑이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을 호랑이로 착각하는 고양이다.


그렇게 버리고 싶은 자신의 모습을 간절히 바라는 이가 이 세상 어딘가엔 있다. 그러므로 네가 가진 것이 얼마나 아름답고 큰 것인지를 기억하라. 


이런 교훈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겠지만 그 자연스러움을 역행하는 게 이 책의 자연스러움이다. 작가는 모든 페이지에서 침묵한다. 호랑이가 고양이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냥 그것을 바라본다. 응, 그래, 그렇구나. 고양이가 호랑이로 살기로 마음 먹었다면 그냥 그것을 바라본다. 응, 그래, 그렇구나.


깊은 산속 외딴집엔 지금도 여전히 고양이인 척하는 호랑이와 자기가 호랑이인 줄 알던 고양이가 함께 오순도순 살고 있어요. 지금은 누가 커다란 고양이인지 누가 조그만 호랑이인지 아무도 모르겠군요.(p.178, 183)


나도 140자만으로 뭔가를 표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인류의 역사 중 한 시기엔 분명 어렵게 얘기를 하고 길게 쓴 글이 환영을 받은 적도 있었을 것이다. 내가 지금 마음을 고쳐 이런 글을 쓰기로 하면 가능한 일일까그렇게 되면 나는 고양이인척 하는 호랑이일까, 아니면 호랑이인 줄 아는 고양이일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의 비극은 무엇이 되지 못해서가 아니라 무엇이 되고 싶은지 조차 모르는 데서 오니까 그나마 나는 행복한 것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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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장)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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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으로서의 소설가>를 읽은 뒤 하루키의 소설이 미친 듯이 읽고 싶어 서점에 들렀지만 실패한 적이 있다. 지난 번 글에도 쓴 적 있지만 나는 그 '청량감'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1Q84>는 재밌지만 너무 길다. <해변의 카프카>는 손에 드는 순간 끈적끈적한 뭔가가 온 몸을 덮어 기분을 잡칠 것 같았다.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에서는 '세계의 끝'의 지루함을 견뎌야 한다. <회전 목마의 데드히트>나 <1973년의 핀볼은>은 애초에 관심 목록에 들지도 못했지만 동네 서점에 있을리도 없었다. 남은 건 민음사에서 새로 나온 <노르웨이의 숲>이나 사자, 바다 표범 어쩌고 하는 에세이들 뿐인데, 그런 걸 읽느니 차라리 낮잠이 자는 게 더욱 나았기에 결국 포기하고 말았던 것이다(솔직히 말하면 <노르웨이의 숲>을 계속 만지작 거리긴 했다).


그런데 두 번째 서점을 찾은 그 날 나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를 만나고 말았다. 2015년 12월 3일에 찍은 2판 30쇄가 반짝 반짝 빛을 내며 누워 있었다. 고작 167페이지. 페이지당 글자수는 꽉 채워봐야 700자가 넘질 않으니 바로 이거야 하고 소리를 지를 수 밖에.


물론 고려 요소가 분량에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처음 몇 페이지를 읽어보니 나름 하드보일드를 사랑하는 작가의 작품답게 담담한 문체가 마음을 끌었다. 담담함이야 말로 가슴 속 청량감을 망치지 않는 유일한 열쇠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는 방학을 맞아 고향으로 돌아온 '나'와 그의 친구 '쥐'가 함께 보낸 18일 간의 기록을 담고 있다. 뚜렷한 내러티브가 있어 기승전결을 이루는 소설이 아니다. 소설의 전통적 구성, 줄거리에 강박 관념이 있는 사람들에겐 뭐가 뭔지 모를 소설이다. "이게 끝인가요?" 혹은 "이게 무슨 뜻인가요?" 라고 묻거나 "저랑은 잘 맞지 않네요."라고 말할 확률이 높다. 다음 이야기가 어떻게 될지 중요한 소설이 아니기에 줄거리와 상관 없는 딴 얘기가 범람한다. 이야기가 단편적으로 느껴져 집중을 못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좋았다. 아주 만족했다 라고 말하면 나를 반사회적 인경장애자로 여기겠지만 부디 개인의 취향을 존중해 주시길.


확실히 이 소설을 대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지만 이제는 대가가 되버린 작가의 데뷔작을 읽는다는 건 상상을 뛰어 넘는 재미가 있었다. 초등학교 때 썼던 일기장을 몰래 꺼내 훔쳐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데뷔작 다운 엉성함이 오히려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가게를 마치고 부엌에 앉아 매일 밤 원고지를 채워 나갔을 하루키의 모습이 떠올라 나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진다. 두 주먹을 꼭 쥔 채 화이팅을 외치고 싶은 심정.


흔히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젊은이들을 풍요의 시대 속에서 자기를 잃고 방황하는 존재, 혹은 메마른 청춘 따위로 묘사하는데 나는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들은 뭔가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게 아니라 옳고 그름도 따져 볼 새 없이 무자비하게 정해진 방향으로 질주하는 역사와 시간에 조용히 저항하는 게 아닐까? 하고. 과거의 세대가 쇠파이프와 화염병을 들고 사람을 죽여가며 역사의 방향을 틀려했다면 오늘의 세대는 열심히 방황함으로써 혹은 방향 없이 부유함으로써 정해진 경로를 거부하고 그를 통해 폭력적 전진을 막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물론 등장인물들이 이렇게 뚜렷한 목적 의식을 갖고 있는 건 아니다. 하루키의 의도도 거기에 있진 않을 것이다. 그저 의도치 않은 결과랄까.


'나'는 도쿄로 돌아가는 날 저녁 매일 들르던 바에 얼굴을 내밀고 주인과 짤막한 대화를 나눈다.


"쥐도 틀림없이 서운해할 거야."

"그렇겠죠."

"도쿄는 재미있을까?"

"어디나 마찬가지죠, 뭐."

"그렇겠지. 나는 도쿄 올림픽이 있었던 해 이후로는 이 고장을 떠나본 적이 없어."

"이 고장을 좋아하세요?"

"자네도 말했잖아, 어디나 마찬가지라고."

"그렇네요."


이 대화에 쓸쓸함이 없는 건 아니다.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니다. 눈물을 흘리지 않을 뿐이다. 그저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쿄에 가면 가는대로의 삶이, 고향이 남으면 남는대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하면 같이 하는대로의 삶이, 헤어지면 헤어지는 대로의 삶이 펼쳐질 것이다.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나아간다. 파도의 흐름에 몸을 맡긴다. 하루키 소설 속에 등장하는 어린 주인공들은 왠지 그 비밀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은 진정한 관계 맺기에 실패한 패배자가 아니다. 그들은 그저 흘러가는 대로 놔둘 뿐이다. 이 하드보일드한 삶의 태도에 기어이 무의미를 쑤셔 넣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굳이 허무를 낙인 찍고 싶다면 그렇게 하라. 이런 것들은 모두 가짜요 이 세상 어딘가에 뜨거움과 영원을 간직할 곳이 있다고 믿는대도 좋다. 나는 당신이 행복과 사랑과 관계를 어떻게 정의하는지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이 없다. 나는 그저 말할 뿐이다. 그런 것들은 결코 당신이 정해 놓은 의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내진 않을 거라고. 당신이 열심히 가두려 할 수록 그것들은 더더욱 멀리 달아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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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왕자 펭귄클래식 155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심영아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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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제대로 증오하기 위해 또 한 번 완독했다. 작은 판으로도 121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 책이다. 두 시간 정도면 얼마든지 읽어 치울 수 있다.


워낙 유명한 보아뱀 이야기 때문에 그거 말고는 도입부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았는데 다시 들고 보니 화자의 독백 부분이 상당히 멋진 책이었다. 그 멋진 감각을 깨는 건 여지 없이 어린 왕자가 등장하는 부분이고 특히 "양을 그려줘.", "상자 안에 네가 원하는 양이 있어.", "세상에 하나 뿐인 꽃이야." 따위의 개수작을 벌일 땐 손발이 오그라들어 차마 독서를 이어갈 수 없는 참담함을 느끼곤 했다. 만일 이 책이 사막에 불시착한 화자의 이야기만으로 구성됐다면 지금 보다 훨씬 좋은 작품이 됐을 것이다. 그러니까 <어린 왕자>를 망치는 건 그 무엇도 아닌 바로 어린 왕자 자신이다.


지금 부터 이 책의 최악의 장면 3개를 꼽아 보겠다.


첫째, 그 지긋지긋한 보아뱀 이야기다. 생떽쥐베리는 어린 시절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 그림을 보여주며 이 그림이 무섭지 않냐고 물어본다. 어른들은 전혀 무서워하지 않았지. 겉으로 보기에 그건 완벽한 모자 그림이었으니까. 작가는 자기가 모자 그림을 그렸음에도 불구하고 그 잘나빠진 그림을 자꾸 "코끼리를 삼킴 보아뱀"으로 보도록 강요한다. 그러면서 어른의 상상력을 미천한 것으로 치부하는데 글쎄, 아이에게 아이의 시선이 있듯이 어른에겐 어른의 시선이 있는 걸로 이해할 순 없을까? 그림을 본 어른들은 그 누구도 "이건 모자야 보아뱀이 아니야!" 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저 "모자구나."라고 했을 뿐이다. 그림의 의미를 한가지로 고정시켜 결코 그 이상의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는 독재자의 마음은 오히려 어린 작가 쪽에서 보인다.


물론 일부의 어른들이 그런 그림을 그리기 보단 지리, 역사, 산수, 문법에 관심을 가져보라고 충고했다. 작가는 이것 때문에 자신이 화가의 길을 접었다고 말하고, 어쩔 수 없이 비행 조종사라는 직업을 택한 것처럼 말하지만 그가 죽기 직전까지 그 비행기로 무슨 짓을 했는지 돌이켜보면 애초에 화가 따위는 관심도 없었던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은 선택이다.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놓을 수 밖에 없다. 그는 화가가 되기를 포기하고 비행 조종사가 됐다. 그는 그 직업을 엄청나게 사랑했음에도 어릴 적 포기한 화가의 꿈이 더 큰 것처럼 독자를 속이고 있다. 나쁜 어른이란 특별한 게 아니다. 바로 이런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둘째, 여우와 어린 왕자의 첫 대면이다. 다시 읽어보면 알겠지만 여우는 거의 길거리 콜걸처럼 어린 왕자에게 접근한다. 여우는 어린 왕자를 만나자마자(초면이라는 걸 기억하자) 뜬금없이 길들인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주는데 그러고는 곧장 "제발..... 나를 길들여줘!"라고 말한다. 세상에 진도가 빨라도 이렇게 빠를 수 없어, 둘은 어떠한 교감도 감정의 고조도 없이 옷을 벗고 침대 속으로 들어간다. 물론 그 순간 어린 왕자가 "그러고 싶은데, 시간이 많지 않아.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어야 하고. 알아야 할 것도 많거든." 하고 튕기지만 이어지는 말 한 마디에(총 93자. 공백 미포함) 의지는 스르륵, 곧장 "어떻게 하면 되는데?" 라며 미끼를 물고 만다. 책을 통 틀어 가장 천박한 장면으로 꼽고 싶다.


마지막은 관계에 대한 폭력적 정의다. 이 책은 말한다. 인간은 사랑하는 누군가를 만나(사실은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서로를 길들이고 끝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끝까지 이어가지 못한 사람은 결국 실패한 것이다. 우리는 이 실패를 딛고 일어서 언젠가는 영원을 이뤄야 한다 고 말이다. 이는 사랑의 본질을 완전히 착각한 것이다.


사랑이 소중한 이유는 그것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사랑만이 진짜라고 정의하면 지난날 우리를 울고 웃긴 그 소중한 사랑들은 모두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정녕 가짜를 포옹하고 가짜와 키스하며 가짜를 사랑한 것일까?


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던 시간을 갖고 있다. 우리가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수 있는 이유는 지난날 가졌던 그 시간의 아픔 때문이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무' 때문이 아니다. 여우는 관계를 지나치게 신파적으로 만든다. 어쩌면 떠나가는 왕자를 붙잡기 위해 그런 말을 지껄였는지 모른다. 그래서 거짓을 말한 거라면 그래, 여우를 용서해 줄 수는 있다.


<어린 왕자>는 지나치게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오늘날 <어린 왕자>는 어른의 동화를 넘어 일종의 신화가 되버렸다. 다른 감상은 허용치 않는다.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알아보는 사람이 그것을 "모자 그림."으로 생각하는 사람을 경멸하고 무시한다. 그것이 바로 유아의 무지이자 유아의 잔인함이다. 하지만 명심하자. 시간이 흘러 몸과 마음이 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우리는 모두 "찌든다." 시간의 때가 켜켜히 마음에 쌓이는 것이다.


누군가는 그냥 "찌든"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을 수도 있다. 누군가는 그냥 "모자"를 그리고 싶을 수도 있다. <어린 왕자>는 이 자연스러운 욕망을 조롱하고 경멸한다. 오직 자신의 시선만이 "순수"하다고 공표한다. 나는 이 폭력이 몸서리 치게 싫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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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4 22: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메타포에 대해서 배우셨으면 합니다.

한깨짱 2021-02-15 14:11   좋아요 0 | URL
아직 배울 것이 너무나 많지요. 감사합니다.

nellous 2023-04-08 08: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에서 열심히 만들어낸 책에 첫리뷰 1점 다는게 얼마니 타격일지 뻔히 알면서 ㅋㅋ 그게 책이 번역이 잘 못되었다는 식의 완성도에 대한 지적도 아니고, 그냥 작품에 대한 혐오네요. 솔직히 이 책에 대해서 대단한 식견 가진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뭣도 없어서 자존감 다 떨어지니 남들 다 좋아하는 책 골라서 소신있는척 1점주면 멋져보이는 줄 아는거지 ㅋㅋ 다른 사람들이나 유명한 작가들은 멍청이라서 이 책이 아름답다는게 아니에요

한깨짱 2023-04-12 22:00   좋아요 0 | URL
네네네

nellous 2023-04-08 08: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똑똑한척 겸손한척 하지만 그 뒤에는 이 리뷰달아서 자존감 올리고 싶은게 젤 크잖아요 ㅋ 인생 너무 뭐없어서.. 저 진짜 출판사랑 아무 관련없는데 1점 달고 멋진척하는게 너무 역겨워서 댓달아요 ㅎㅎㅎ 근데 명작 비판적 시선으로 다시보기 이런거 한물갓어여ㅎㅎ 2년전에더 퇴물이었음. 멋져보이고싶으면 열심히 살아서 남들께 인정받으삼 ㅋㅌ짱깨님

한깨짱 2023-04-12 22:0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또 방문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