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 혁명.이데올로기 편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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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는 간지 선언은 우리를 초긍정 사회로 이끌었다. 우리가 오늘날 죄책감에 쫓긴 자기 계발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특강을 찾아다니고 조금이라도 더 우수한 인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 사는 이유. 그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성이 범람했기 때문이다.


강철 빗장을 뜯고 드디어 자유를 꺼내왔지만 그 무게에 질식해 버린 현대인의 아이러니. 더이상 당신의 성공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무한한 가능성의 창대한 발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순진해도 너무나 순진한 거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은 곧 실패의 책임이 모두 당신에게 있다는 말과 같다.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어요. 인터넷에 공짜 강의가 넘쳐나는데요? 작가가 되고 싶은데 등단의 문이 너무 좁아요. 쌔고 쌘게 인터넷 소설 플랫폼이에요.


초긍정 사회에선 낙오자가 속출하고 우울증이 만연한다. 남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불안. 그 잘못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 구조적 모순은 이 망상 뒤에 숨어 영원히 지속될 힘을 축적한다. 화를 내고 싶지만 도대체 어디에 화를 낸단 말인가?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금지는 이미 우리가 거세해 버린 것을.


지금 우리는 권력의 진화 과정을 보고 있다. 권력은 억압를 제거함으로써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개인에 내재화된 것 뿐이다. 가장 무서운 건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 현대 사회에서 '나'는 나의 주인이자 동시에 노예다. '나'를 채찍질 하는 건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나를 죽여야만 내가 해방되는 딜레마. 초긍정 사회는 해방의 딜레마 또는 해방의 아이러니로 가득차 구원이 불가한 세계다.


철학의 힘은 현실이 뒤집어 쓴 두꺼운 가면을 벗겨내 그 안에 든 추잡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은 잠깐 번쩍이고 마는 번개가 아니다. 진실엔 우리가 딛고 선 단단한 땅을 파괴하는 힘이 있다. 그 힘에 넘어지고 구르고 다친 사람들은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파괴된 세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철학이 가진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그저 어려운 생각을 주고 받는 지적 유희가 아니다. 제대로된 철학은 언제나 물리적 힘을 낳는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에 화를 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학문인 것이다.


철학의 대중화는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며 극소수의 분노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혁명의 엔진은 보통 사람들이 표출하는 보통의 분노로 움직인다.


찬바람이 뼈를 에는 겨울 광장에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섰다. 그 숭고한 마음이 지속되려면 우리는 스스로 진실을 꿰뚫어 볼 힘을 키워야 한다.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건 정치가 보여준 포르노 때문이지 그 밑에 숨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자각이 아니다. 철학을 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를 갖춰야 한다.


이 책은 시인, 소설가와의 대담, 공연을 통해 아주 쉽게 철학을 강의한다. 자기들만 아는 용어를 잰체하며 씨부리고 넘어가는 법도 없이 하나하나 공들여 설명해 준다. 대중 공연으로 기획된 강의를 책으로 옮긴 만큼 부드럽고 편안하다. 그간 웅진 지식하우스의 실망스런 행보에 견주어 보면 탁월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장님이 눈을 뜬 것과 같은 희열을 느낀다. 시야가 환해지고, 초특급 반전 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다. 철학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아중에 가서야 땅을 치며 통곡을 하기 전에, 철학을 하자. 두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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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 50 내 동생, 조반니
자코모 마차리올 지음, 임희연 옮김 / 걷는나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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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얘기가 별로 없는 책이다. 제목을 보는 순간 내용의 99%가 예상된다. 이런 류의 이야기들은 너무 흔해서 이슈가 될 것 같지 않은데, 아마도 주인공의 사연이 YouTube에 공개되고(저자가 직접 만든) 이게 큰 호응을 얻어 책까지 나오게 된 것 같다. 소셜 미디어의 발달은 우리 모두에게 일확천금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번엔 그 운이 이탈리아의 스무 살 청년에게 돌아갔다.


저자 자코모 마차리올은 1997년 이탈리아 카스텔프랑코 베네토에서 태어났다. 엄마 아빠 누나 여동생 자코모, 이렇게 다섯. 어린 남자 애가 종종 그러듯 자코모는 남동생 하나를 간절히 원했다. 이미 세 명이나 낳고 길러 허리가 휘는 부모님에게 또 다른 형제를 요구하는 건 씨알도 안 먹힐 제안이겠지만 역시 유럽은 유럽인가 보다. 어렵다 어렵다 해도 복지가 탄탄해. 외벌이로도 네 명 정도는 감당이 가능한가 보다. 엄마가 임신했다. 게다가 남자를!


자코모는 드디어 원하던 남동생이 나온다는 사실에 들뜨고 기뻤지만 조만간 그 애가 남들과는 조금 다른, 아주 특별한 아이라는 걸 알게 된다. 부모님의 침실에서 '다운 증후군'이라는 책을 발견한다. 자코모가 묻는다. 다운 증후군이 뭐에요? 자, 앞으로 무슨 이야기가 펼쳐질지 눈에 훤하지 않은가? 나도 이쯤에서 글쓰기를 마치고 영화나 보러 가고 싶지만 이렇게 짧은 리뷰는 한 번도 남겨본 적이 없기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간단히 소개한 뒤 끝을 내련다.


1. 자코모는 동생을 창피해 한다. 창피해 하는 방법은 아래와 같다.

(1) 친구들에게 동생이 없다고 말한다.

(2) 길거리에서 동생을 모른 척 한다.

(3) 공원에서 아이들이 동생을 괴롭힐 때 모른 척 한다.


2. 자코모는 조반니와(아, 아직 동생 이름도 안 알려줬군) 함께한 경험을 통해 점점 장애의 본질에 대해 깨닫기 시작한다.

(1) 장애란 정말 모자람을 의미하는 걸까?

(2) 조반니는 게임의 규칙을 지키지 않지만 그렇기 때문에 항상 새로운 룰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규율에 얽매여 한 방향으로 밖에 못 보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창의적인 것 아닐까?

(3) 조반니는 언제나 열정과 미소로 가득하다. 그는 웃음을 전염시킨다. 나는 고작 수학 점수가 잘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주변 사람들에게 짜증을 내는데.


3. 짜잔! 자코모는 깨달음을 얻는다.
(1) 조반니는 모자란 게 아니라 그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뿐이다. 천사 조반니! 내 동생 조반니! 진짜 진짜 특별한 사람!


장애인 가족이 있다는 건 나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자코모 마차리올의 가족에게 언제나 빛과 향기만 가득했던 건 아닐 것이다. 그들의 현명한 극복에 고개가 숙여진다. 편견일지는 모르겠지만 한국에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 누가 아이를 네 명이나 낳는단 말인가! 고령 출산으로 인해 장애아 출산율은 점점 늘고 있지만 결국엔 이마저도 사라질 것이다. 10년만 지나도 출산은 커녕 결혼도 하지 않을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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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대로
켄 브루언 지음, 박현주 옮김 / 시공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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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가 줄어드는 게 아까운 책이 있다. <런던 대로>는 우리 나라에 소개된 켄 브루언의 작품 두 개 중 하나다. <밤의 파수꾼>은 이미 세 번이나 읽었으니 이 책이 마지막이다. 마지막 잎새를 세는 심정으로, 한 자 한 자 마음을 졸이며 읽었다.


<런던 대로>는 헐리웃 고전 <선셋 대로>의 리메이크 소설이다. 영화를 소설로 옮겼다. 골조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영화의 주인공 조 길리스(시나리오 작가)를 범죄자 미첼로 대치함으로써 켄 브루언 특유의 범죄 소설이 탄생했다.


원작 영화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재치 있는 입담이 이 소설의 특징이다. 노숙자를 집단 폭행해 죽이고 그 범인을 찾아 무릎에 총알을 박아 넣는 등 끔찍한 중범죄가 커피를 마시듯 태언하게 벌어지지만 아이러니와 비아냥을 뒤섞어 놓은 유머가 곳곳에서 빛을 발한다. 지구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소설가들의 능력 중에 하나만 골라가질 수 있다면 주저 않고 이 능력을 갖고 싶다.


미첼은 이제 막 3년 복역을 마치고 복귀한 범죄자다. 폭력 전과였다. 나오자마자 친구와 함께 고리 대금업을 시작한다. 마음에 드는 일은 아니었지만 친구가 그 일로 차지한 고급 아파트와 옷들을 제공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한다. 그런데 복귀 환영 파티에서 만난 여기자 한 명이 그에게 새로운 직업을 하나 소개한다. 이모의 집에서 잡역부를 해달라는 것. 미첼은 흔쾌히 받아들이며 자신을 선택한 이유를 묻는다. 여기자가 말한다. 당신이 썩 잘생겼기 때문에. 퇴폐적인 에로티시즘에 범죄의 냄새가 섞여 들어온다.


여기자의 이모는 한때 잘 나갔던 연극 배우지만 지금은 퇴물이 된 노인이다. 그녀는 언젠가 연극계가 자신을 다시 불러줄 거라는 헛된 희망에 갇혀 산다. 엉터리 각본을 쓰고 자기만큼 늙은 대저택의 연습용 무대에 올라 대사를 읊는다. 이 그로테스크한 여자에게 미첼의 육체가 반응한다. 파멸의 시작.


저택엔 노망난 여배우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이상한 존재가 같이 머문다. 이 집의 집사 조던이다. 여배우의 전 남편이자 그녀의 매니저. 온갖 잡다한 일을 도맡아 처리하며 매일 아침 그녀에게 배달할 팬레터까지 손수 작성한다. 매우 단련된 육체에 지적이기까지 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완벽한 포커페이스를 유지한다. 그는 ex wife와 평생을 함께 살며 그녀의 수발을 들고 그녀에게 섹스 파트너를 제공하는 일까지 묵묵히 해치운다.


그로테스크한 저택에서 벌이는 퇴폐적 에로티시즘의 묘사로 끝날 수도 있었을 소설을 검은 범죄의 웅덩이로 이끄는 건 범죄 조직의 두목 간트다. 간트는 미첼과 함께 고리 대금업을 하는 친구의 두목이었다. 미첼은 단박에 간트의 눈에 들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아한 건 대저택에 고이 모셔둔 롤스로이스 실버 고스트. 간트는 그 사실을 털어놓고 미첼은 장난감 가게에서 실버 고스트 모형을 산 뒤 예쁘게 포장하여 간트에게 보낸다. 전쟁의 시작 된다.


대저택에선 정체 불명의 집사 조던과 미첼이 한 팀을 이루고 다른 쪽에선 간트와 그가 동유럽에서 고용한 암살자가 한 편이 된다. 전쟁은 미첼의 친구가 대저택의 나무에 매달려 죽는 것으로 시작한다. 섹스대신 카시트를 축축히 적시는 핏물이 소설을 채워간다. 그 피가 다 마르기도 전에 다른 피가 흘러 나온다. 모든 범죄 소설에서 피가 멈추는 시점은 언제나 똑같다. 그것은 더 이상 흘릴 피가 없을 때이다.


켄 브루언의 주인공들은 저학력에 알콜 중독자 혹은 범죄자지만 하나 같이 책을 끼고 산다. 그들은 범죄 소설에 푹 빠져 살다 어느 순간 그 소설과 크게 다를 거 없는 삶을 살아간다. 고독과 우울, 심각한 정신적 결함 그리고 독서의 결합. 이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소설 전체에 형언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번역된 대사가 너무 올드하고 짧은 문장이 독특한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체를 잘 살려내지 못한 번역이었음에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책이었다. 2017년에 작은 소망이 하나 있다면 이 작가의 책이 모두 한국에 소개되는 것이다. 흔한 말로, 인생 작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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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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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가 나에게 준 것은 김언수였다. 책이 가져다준 재미보다 더 큰 선물은 김언수였다. 김언수는 앞으로도 계속 소설을 써낼 것이다. 그 말은 내 삶의 무료와 권태, 좋은 책을 고르는 피곤함이 다소 해소될 것임을 의미한다. 주저없이 고른 두 번째 소설, <설계자들>이다.


<뜨거운 피>에 비해 이야기의 밀도가 낮은 감은 있지만 책장을 넘기게 하는 힘만큼은 여전히 놀라울만큼 강렬하다. 암살자들의 이야기다. 거칠고 촌스럽게 치고받지 않는 그들은 서로 칼 한 자루를 손에 쥐고 반보 싸움을 한다. 정중동. 멈춰 있던 몸이 눈 깜짝할 새에 움직여 급소에 칼날을 꽂는다.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 소속이다. 도서관은 지난 수 십년 간 대한민국의 권력들이 초법적 수단을 강구할 때 마다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해준 암살 단체다. 이 업계는 설계자와 암살자로 구성된다. 설계자는 기획하고 암살자는 실행 한다. 수녀원 쓰레기통에서 태어난 주인공 래생은 도서관에서 자라 암살자 교육을 받고 자연스레 암살자가 된다. 실력 좋고 얼굴도 잘생겼지만 그에겐 알맹이가 없다. 그저 계획에 따라 타겟의 목에 칼날을 꽂는 킬링 머신. 


도서관의 수장 너구리 영감이 래생을 선택한 이유는 그가 고아였기 때문일 것이다. 너구리 영감은 래생을 학교에도 보내지 않았다. 그가 원한건 도서관이라는 시스템을 이룰 부품이었기 때문이다. 가족, 친구, 사랑. 이런 것들은 인간의 존재를 충만하게 만들지만 부품으로선 불량 요소일 뿐이다. 살아갈 수록, 그나마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동료 암살자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때마다 래생의 숨에 짙은 허무의 냄새가 배어나온다. 래생은 생각한다. 그가 죽을 때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누구인가. 래생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암살을 반복하는가.


래생의 이름은 올 래(來)에 날 생(生)이다. 래생은 그 뜻을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나 잘해 보라는 의미로 해석하지만 이름을 지어준 너구리 영감은 한번도 그 뜻을 말해주지 않는다. 래생의 해석은 일종의 자조로 보인다. 도서관의 부품일 뿐인 자기 삶에 대한 자조. 그걸 알면서도 자신을 이 세상과 연결해주는 유일한 끈인 도서관을 떠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비웃음. 하지만 자조란 확신 혹은 믿음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자조에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그렇게 되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꿈틀거림이 존재한다.


이 희미한 저항은 암살 시스템 전체를 붕괴시키려는 한 여자 설계자를 만나면서 점점 커져간다. 처음에 래생은 여자의 계획이 무모하며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시스템의 맨 꼭대기에 그것을 통제하는 왕이 있을 거라 생각하고, 그 왕을 죽이고 나면 전체가 무너질 거라 생각한다. 천만의 말씀. 그것은 시스템을 만든 것이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비롯된 편견이다. 래생은 말한다. 인간이 시스템을 구성하는 게 아니다. 시스템이 적절한 인간을 골라 자신을 구성하는 것이다. 악당이 사라진 자리는 눈깜짝할 새에 다른 악당이 차지하고 만다.


그러나 여자는 래생의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차근 차근 계획을 수행해 나간다. 그 단호한 의지 속에서 래생은 자신의 삶이 누군가에게 중요한 의미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올 래에 날 생. 이 이름은 과연 무슨 뜻일까? 그가 핵폭탄을 들고 시스템의 핵심으로 파고든 순간 이름은 완전히 새로운 풀이의 가능성을 지닌다. 올 래에 날 생. 미래를 낳는 자. 아마도 그의 이름은 이렇게 해석되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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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교유서가 첫단추 시리즈 9
케빈 패스모어 지음, 이지원 옮김 / 교유서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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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이란 책을 읽고 있으니 사람들이 물어온다. 파시즘이 뭐냐고. 나는 두 번 놀랐다. 사람들이 파시즘이 뭔지를 모른다는 것에. 내가 파시즘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없다는 것에. 당황한 나는 대답했다. "나쁜 정치를 파시즘이라고 합니다."


변명을하는 건 아니지만 파시즘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건 유용하지는 않다고 말하고 싶다. 예컨대 파시스트를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해보자. 그렇다면 박근혜 대통령도 파시스트인가? 박근혜 대통령은 무능력한데다 민주주의를 파괴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파시스트로 모는데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를 파괴했다는 말은 여러 정당이 서로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장하고 상대편을 공격하기 위해 손쉽게 꺼내는 말이니 변별력이 떨어진다.


그럼 독재자를 파시스트라 불러야 할까? 사실 러시아의 독재자 푸틴이나 일당 독재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현대판 파시스트에 가장 근접하긴 하다(공산주의자들이 파시스트와 벌였던 과거의 전쟁을 생각해보면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러나 그들이 히틀러처럼 노골적인 인종차별 정책을 지지하지는 않는다.


오늘날 대놓고 파시즘을 지지하는 정당은 없다. 유태인 학살이나 독재를 공약으로 거는 정당도 없다. 오늘날 파시즘은 매우 다양한 형태로 변해왔으며 보수에, 극우에, 심지어 좌파 정당들에도 유산을 물려줬다. 이런 상황에서 유용한 것은 추상적 정의가 아니라 파시즘의 구체성을 추적해 나가는 것이다.


파시즘 특징은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극단적 민족주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

독재

인종 차별(외국인, 이민자에 대한 혐오)

유일 정당

전체주의

반공

폭넓은 대중적 지지


이 중에 눈에 띄는 특징이 하나 있을 것이다. 바로 폭넓은 대중적 지지. 놀랍지 않은가? 이미 파시즘이란 말에서 그것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뭔가 정의롭지는 않을 거라는 뉘앙스가 풍기는데도 대중적 지지를 얻었다니. 2016년 미대선 결과를 보면 이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도널드 트럼프는 히틀러의 환생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미치광이였다. 그러나 그는 당당히 대통령이 됐다. 누가 그를 뽑았을까? 트럼프는 엄청난 부자에 보수 정당의 대표였음에도 몰락한 산업지역, 이른바 러스티 벨트의 지지를 받았다. 완벽한 노동자의 적이 몰락한 노동자의 지지를 받은 것이다.


원인 중 하나로 탈산업화로 인한 남성 노동자의 실직율 증가를 꼽을 수 있다. 경제적 어려움이 문화적 박탈감으로, 과시적 소비 행태가 성적 매력으로 이어지는 오늘날의 사회 구조상 직장을 갖지 못한 남성의 소외감은 극대화 될 수 밖에 없다. 이들은 자연스럽게 이민자들과(내 나라에와서 돈을 훔쳐가는) 전문직 여성에(여자 주제에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대한 혐오감을 갖게 된다. 이들의 분노에 부채질을 하는 건 정부의 안이한 태도다. 우리가 누구인가. 대미국의 전성기를 이끈 사람들이지만 이제는 직장도 없이 천덕꾸러기 취급이다. 이런 우리를 돌봐줘도 시원찮을 판에 사회적 약자 운운하며 이민자에, 미혼모에, 워킹맘, 동성애자 따위를 돌보려 하다니!


이들의 눈에 정부는 지독한 샤이 가이다. 외국인들의 범죄를 막는 방법이 뭘까? 그들을 모두 추방시키거나 죽이는 것이다. 고용율을 높이는 법은? 외국에 공장에 세운 기업들에 강도 높은 세무 조사를 실시하고 막대한 과징금을 부여하는 것이다. 인권이니 법이니 그런 건 다 지긋지긋하다. 나쁜 외국인, 나쁜 기업인 하나 때려잡는 데 뭐 그리 많은 절차가 필요한가?


이것이 비단 미국만의 일이라고 생각하면 대단한 오산이다. 한국처럼 강인한 지도자에 대한 향수가 강한 나라에서는 이보다 더한 비극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 이건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괴물은 좌우 어느 쪽에서도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친일파를 모조리 찾아내 재산을 몰수하고 강제 부역을 시키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니, 현대사의 비극을 만들어낸 사람들, 전두환이나 김기춘을 반드시 응징하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아마 그의 발언이 초법적이고 민족주의를 자극하며 반론을 전혀 용납치 않을 수록(전체주의) 우리의 마음은 더 깊숙이 빨려 들어갈 것이다.


오늘날 파시스트들은 모두 민주주의의 가치를 지키겠다고 공언한다. 그중에 누가 파시스트고 누가 아니냐를 가리는 건 매우 어렵고 조심스러운 일이지만 나에겐 한가지 기준이 있다. 나는 모든 걸 한방에, 단숨에 바꿀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 혹은 그런 기대를 받는 사람을 파시스트로 규정한다. 멕시코 이민자들이 문제라고? 그럼 내가 장벽을 세워줄게. 부패한 정치가 문제야? 모조리 없애줄게. 제가 칼춤 한 번 제대로 춰보겠습니다!


진정한 민주 사회에서는 한 사람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게 불가능하다. 그게 가능했다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박근혜를 권좌에서 끌어내리는 것도 불가능 할 것이다. 강력한 지도자 한 명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폭력적 독재 국가에서 살게 될 것이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대한민국 같은 나라 말이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국의 승리로 끝난 뒤 세상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은 멸종할 거라 예상됐다. 놀랍게도 그 둘은 여전히 살아 있다. 그 이유는 아마도 권력을 잡고자 하는 일부가 그것을 악용하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파시즘이 대중의 본질적 욕망을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파시스트를 원한다. 그저 그들이 내 친구이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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