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살 것인가 - 우리가 살고 싶은 곳의 기준을 바꾸다
유현준 지음 / 을유문화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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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준 교수는 상당히 합리적인 사람이다. 말투나 표정에선 오만함이 그득한데, 하는 얘기가 틀린 말이 하나도 없고 주어진 제약 안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능력이 뛰어나다. 창의력이란 원래 밑도 끝도 없이 상상력을 펼치는 게 아니라 한계를 돌파하여 재정의하는 능력이다. 저자가 하는 얘기들에 무리 없이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선언이 아닌 제안. 충분히 실현 가능한 해결책.


저자가 건축을 통해 추구하려는 사회적 가치는 다양성과 소통이다. 아파트가 문제인가? 가끔은 그 자체로 문제가 될 때도 있지만 진짜 문제는 모두가 '똑같은' 아파트에 산다는 것이다. 똑같아서 이득이 되는 경우는 닭장 정도가 유일할 것이다. 양계장에서는 독수리가 나오지 않는다.


얼핏 소통과 건축은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2,000년도 전에 민주주의를 실현했던 그리스를 떠올려보자. 그리스에는 모든 시민이 나와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아고라가 있었다. 아고라는 애초에 민주적 이상을 갖고 있던 그리스인들이 자신의 필요에 따라 만든 건축물일까, 아니면 아고라라는 '공간'이 그리스인들을 민주적으로 만든 걸까? 높은 담장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의 아이들이 연립주택단지의 아이들을 만나 노는 걸 상상하기는 쉽지 않다. 분리된 공간은 소통의 단절을 낳는다. 소통의 부재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갈등의 씨앗이 된다.


오늘날 SNS와 메타버스, 게임 같은 가상공간의 힘은 날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혹자는 이런 세태가 우리가 우려하는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는 희망적인 전망을 펼치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 사이의 교류가 네트워크로 한정되는 바람에 더 큰 문제가 발생했다. 인터넷에서 우리는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의견을 주고받는다. 내 의견에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은 친구고 비판하면 안티다. 20년 지기와 손절하기? 버튼을 한번 누르는 것으로 충분하다.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의견을 나누면 그 생각이 세상의 전부라고 착각하기 쉽다. 자신의 생각이 '정상'이고 그 외는 전부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익명성은 사람들의 폭력성을 극단으로 치닫게 만들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 인터넷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을 보고 있으면 가상공간이 소통의 문제를 해결할 것이란 생각에 헛웃음이 난다.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갈등과 반목은 사실상 인터넷에서 시작해 성장한다.


도시는 원래 다양한 삶과 생각이 모여 융합하는 용광로였다.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 생각의 교류가 많아졌고 그로 인해 혁신적인 발전과 발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창조는 같은 생각이 충분히 많이 모였을 때 탄생하는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이 충돌하면서 발생한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들은 이러한 장점을 대부분 상실했다.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똑같이 생긴 학교에 다니고 똑같은 옷을 입는다. 그러다 보니 가격과 브랜드, 동네가 중요해진다. 사람들은 똑같다는 것을 거부하기 위해 담장을 세우고 차별을 한다.


도시의 주인이 자동차가 된 것도 문제다. 도로는 점점 넓어져 먼 곳을 가는 것은 쉬워졌지만 바로 옆의 단지와는 더욱 단절되었다. 심지어 인터넷 상거래의 폭발적 성장은 이러한 단절을 심화시키는 주범이 됐다. 사람들은 상업 활동을 통해 다른 사람과 소통할 기회가 생기는데 걸을 일이 없고, 집 앞 마트에서 양파를 살 일이 없으니 다른 생각들끼리 만나 충돌하고 융합하는 기회 자체가 소멸한 것이다.


우리가 생각을 바꿔야 세상이 바뀌는 걸까? 맞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은 우리의 의지만으로 바뀌는 게 아니다. 인간의 정신은 공간의 영향을 받는다. 생각이 물질을 지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물질이 생각을 지배하는 경우가 더 많다. 유현준 교수가 활약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건축은 어떻게 우리의 생각을 바꿔 우리의 사회를 변화시키는가. 저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세상을 바꾸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p.s - 저자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그가 최근에 시작한 유튜브에도 동일하게 소개된다. 책 읽기가 부담이라면 그쪽을 정주행 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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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 (올컬러 특별판) - 임진왜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동아시아 오백 년사 메디치 WEA 총서 4
김시덕 지음 / 메디치미디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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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덕 교수의 책들은 언제나 아슬아슬한 경계를 넘나 든다. 너는 대체 누구의 편이냐는 질문이 얼마나 천박하고 폭력적인지 알면서도 순간순간 그에게 이 말을 묻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기 힘들다. <동아시아, 해양과 대륙이 맞서다>는 2015년에 펴낸 책을 컬러로 다시 찍은 책이다. 그는 이 책의 속지에 친필로 이렇게 새겨 넣었다. '산업화와 민주화 민족주의를 넘어서서.'


그는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역사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보려는 것 같다. 그 결과 이 책은 참신한 시각을 견지한다. 누군가에게는 그 관점이 대단히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진정한 발전의 원동력은 언제나 차가운 자기 인식에 그 뿌리를 대고 있다. 대한민국은 수천 년 전에 존재했던 그 모든 고대 국가를 단일 민족에 의한 다른 왕조로 간주한다 하더라도 세계사에서는커녕 동아시아에서도 주인공이었던 적이 없다. 삼국 통일을 고구려가 했다면, 하고 원망할 일도 아니다. 작은 땅 덩어리의 소수 민족들이 역사의 흐름을 주도했던 건 세계사를 통틀어 그렇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베네치아는 도시 국가에 불과했지만 지중해를 누비며 유럽의 역사를 만들었고 그 거대한 오스만 튀르크와 창칼을 마주했다. 동인도 회사를 설립해 임진왜란, 명청 왕조 교체, 일본 제국주의 등장에 실마리를 제공한 나라는 바다보다 땅이 낮아 마음고생을 하던 네덜란드였다. 한반도가 삼면이 바다라는 기회를 활용한 시기는 삼국시대의 극히 일부를 제외하면 전무했다. 심지어 마지막 왕조 500년 동안은 스스로 중국의 속국임을 자처하며 소중화라는 자기기만에 몰두했다.


우리는 늘 힘이 약해 외세의 침략을 자주 받았으나 이는 한반도가 그만큼 중요한 땅이었기 때문에 불가피했다는 정신 승리로 이어진다. 김시덕 교수는 한반도가 동아시아의 요충지가 된 계기가 임진왜란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그전까지는 직접 지배할 필요가 없었던 변두리 땅이었으나 일본이라는 강대국의 부상으로 그 땅이 대륙 침략의 통로로 이용될 수 있다는 경험이 인식의 전환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실패 이후 한반도는 다시 짧은 평화를 맞는다. 병자호란은 조선 왕조의 입장에선 임진왜란보다 더 파괴적인 사건이었지만 한반도를 지정학적 요충지로 재인식하는 사건은 아니었다. 우리 땅이 다시 열국의 각축장이 된 것은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열강과 어깨를 나란히 한 일본이 다시 조선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였다.


그래서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의 지정학적 요충지로 만들어 준 일본에게 감사라도 하라는 말인가? 여기서 중요한 교훈은 한반도가 세계의 이목을 끄는 것은 우리 스스로의 의지가 아니라는 것이다. 대한민국은 강대한 세력들이 충돌할 때만 중요한 곳이 된다. 쉽게 말해 일본, 러시아, 중국, 북한, 미국 등 몇몇이 절대악이라는 단순한 역사관으로는 갈등을 제대로 해소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일본의 파렴치한 군국주의자들은 호시탐탐 평화 헌법을 개정해 일본을 다시 전쟁 국가로 만드려 한다. 그러나 그 목적이 정말 한반도 침략에 있을까? 이는 사실 중국을 견제하려는 미국의 의도와 일본 극우주의자들의 필요가 맞닿아 발생한 일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일본은 미국의 승인하에, 철저히 그들이 정해놓은 레드라인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


대한민국을 미국의 졸개로 폄하하는 중국, 북한의 의도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반만년 한반도 역사의 찬란한 광휘를 가슴에 새겨 넣은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반미 정서를 자극하며 진정한 자주독립과 부국강병, 고토 회복 등의 혈기를 드러낸다. 그러나 이 말이 정말로 대한민국의 미래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건 누구나 알 수 있다. 한반도가 일본의 먹잇감이 되어 야금야금 잠식되고 있을 때 러시아는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지했다. 그러나 그 속내는 우리의 기대와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이 일본의 속국이 되면 본인들이 직접 국경을 마주할 위험이 있고, 그렇다고 자기들이 차지하기엔 청나라, 일본과의 정면충돌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반도는 강대국들 사이에 오고 가는 펀치를 대신 맞아주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그 어떤 국가도 인류애와 보편적 윤리에 따라 외교 행위를 결정하지 않는다. 모든 국가는 오직,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자신의 외교 행위를 결정한다. 요는 이념이 아니라 실리에 기반해 판단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여러 나라의 이해가 복잡하게 얽혀있을 땐 더더욱 치열하게 머리를 굴려야 한다. 착한 놈은 없다. 외교란, 우리를 둘러싼 수많은 악당 중 누구와 언제 손을 잡아야 할지 판단하는 것이다.


김시덕 교수의 모든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냉철한 현실 인식에는 상당 부분 공감이 된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 실제 외교 행위가 이뤄질 수 있는지는 회의가 드는 게 사실이다. 우선 인간의 감정은 머리로 움직이지 않는다. 예컨대 진정한 사과가 없는 일본과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한편을 먹고 중국과 북한을 견제하는 정부가 지속적으로 정권을 창출하리라 상상하기는 어렵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북한, 중국과 한편을 이뤄 신냉전 체제의 대척점에 선 미국-일본과 맞서는 게 가능할까? 코로나의 창궐이 친중 성향의 정부 정책 때문이라는 터무니없는 찌라시에도 들썩들썩했던 나라인데 말이다. 대한민국처럼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달한 나라에선 시민의 마음을 얻어야만 국정을 운영할 수 있다. 소수 권력자만의 의지로 나라가 돌아가는 건 중국, 북한 같은 독재국가나 일본처럼 그 어떤 시민도 정치에 관심이 없는 정치 후진국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김시덕 교수가 그렇게 열심히 강연을 하고 책을 내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끼인 나라의 생존은 여우처럼 눈치를 보고 박쥐처럼 오가야 한다는 걸 알아주기 바라면서. 국가와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은 이렇게나 다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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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터로 경험을 디자인하라 - 고객 경험을 극대화하는 DCX 혁신의 비밀
차경진 지음 / 시크릿하우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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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차경진은 현대를 경험의 시대로 정의한다.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기보다 '의미'를 구매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의미를 구매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 쉽게는 가심비를 떠올리면 된다. 가격이 얼마든 나에게 만족을 줬으면 타당하다는 것이다. 가성비를 따지는 영역이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지만 큰돈은 확실히 가심비의 세계에서 돌고 있는 것 같다.


고객에게 잊지 못할 경험을 선사하려면 필요보다는 욕망을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그들의 삶을 이해해야 한다. 고객은 어떤 맥락에서 우리의 상품과 서비스를 이용하는가? 과거에는 포커스 그룹 인터뷰나 기타 사용자 조사를 통해 그것들을 밝혀냈다. 아주 무용한 건 아니지만 이런 방법들은 사용자의 욕망을 본인에게서 들어야 한다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한다. 이상한 일이다. 본인 자신의 욕망을 본인이 아니면 누구에게 듣는단 말인가? 현대 대량 생산 시스템의 기틀을 만든 헨리 포드의 말에 그 답이 있다. '사람들에게 무엇이 필요하냐고 물었다면 나는 더 빠른 말을 길러야 했을 것이다.' 그는 말 대신 자동차를 만들었고 지금의 미국이 탄생했다.


사람과 사람을 넘어 사람과 기계, 심지어 기계와 기계까지도 연결된 이른바 초연결시대는 고객에게 묻지 않고도 고객을 이해할 수 있는 분석 환경을 만들어주었다. 정교한 센싱 기술들이 탑재된 기계들은 이제 24시간 365일 고객의 행동을 기록하고 전송한다. 예전에는 데이터가 없어서 문제였다면 이제는 너무 많아 문제가 된 것이다.


데이터와 데이터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면 상품과 서비스는 초개인화의 영역에 도달한다. 고객이 20대냐, 여성이냐가 아니라 '당신이' 20대냐, 여성이냐, 어떤 쇼핑몰을 몇 시에 몇 번 방문하여 무엇을 구매했고, 상품 상세 페이지를 끝까지 읽었는지, 매주 주문하는지, 월급날 장바구니에 담았던 상품을 한꺼번에 구매하는지 알아내고 이용할 수 있는 것이다. 한 여성의 임신 사실을 대형 마트 마케팅팀이 먼저 알았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임신으로 인한 호르몬 변화가 특정 물건들을 구매하는 것으로 이어져 이를 종합한 추천 알고리즘이 유아 용품 할인 쿠폰을 보낸 것이다.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세상이 소름 끼친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공포를 느끼든 말든 세상은 한동안 정해진 방향을 따라 자신의 길을 간다. 그건 세상의 잘못이 아니다. 편의와 이득을 따라 흐르는 인간의 본능이 스스로 그 방향을 정한 것이다.


<데이터로 경험을 디자인하라>는 이런 세상에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는 프레임워크를 제공한다. 그 방법이 꽤 상세해 단순히 이러이러한 세상이 왔으니 이러이러하게 해야 한다고 선언하는 책과는 결이 다른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물론 더 깊고, 넓고, 선명하고, 큰 경험을 기획하라는 이 책의 솔루션과 그 사례들이 그저 그렇게 느껴질 수는 있다. 하지만 저자는 물고기를 잡는 법보다는 낚시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는 걸 이해하자. 그가 사업가였다면, 그래서 자신의 방법으로 만든 서비스가 세상을 혁신하는 중이라면, 아마 이 책은 그 자신이 아니라 수많은 분석가와 기자들이 대신 썼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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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1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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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이 책을 읽으려는 사람들에게 경고한다. 당신은 클래식을 즐겨 듣습니까? 그럼요. 제가 모차르트와 베토벤을 얼마나 좋아하는데요, 쇼팽도 있고, 드비쉬도 괜찮고, 가끔은 바그너를 청하기도 합니다, 라는 수준으로는 곤란하다. 하루키의 LP 편력은 이미 범인의 수준을 한참 뛰어넘은 상태다. 비록 재즈가 70 클래식이 20 록과 팝이 10이라지만 총량 자체가 어마어마해 20만 얘기해도 책 한 권이 나온다. 총 100곡을 소개하는데 한 곡 당 적어도 4개의 앨범을 덧붙이니까 그 양이 평생을 들어도 남을 정도다.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나도 여태껏 들어본 앨범 수를 세면 글쎄, 100개를 넘기가 힘들지 않을까? 아무래도 요즘엔 단곡을 중심으로 들으니까.


그러니 하루키의 클래식에 공감하려면 웬만한 경험으로는 부족하다. 행여나 멋진 책 커버와 그동안 하루키 에세이가 보여온 특유의 무용함에 반해 이 책을 고른다면 정말로 큰 낭패를 볼 수 있다. 하루키 책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읽어온 사람이 진심으로 하는 충고다. 몇 가지 예시를 보여주겠다.


다음은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르슈카>를 에르네스트 앙세르메 지휘 하에 스위스 로망드 관현악단이 녹음한 앨범에 대한 하루키의 감상평이다.


연주의 흐름은 둘 다 자연스럽고 조급한 구석이 없으며 적당한 유머가 감돌아 몇 번이고 편하게 귀를 기울일 수 있다. 앙세르메의 인덕 같은 것이 느껴지는 연주다.(p.17)


세상에, 스트라빈스키도 겨우 들어본 듯한데 1949년도에 활약한 지휘자 앙세르메의 인덕을 무슨 수로 알겠는가? 게다가 연주에 유머? 음악이 어떻게 들려야 도대체 유머라는 표현을 붙일 수 있을까?


다음은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1번 C장조 작품번호 15를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가 1958년에 녹음한 앨범에 대한 평이다.


지극히 성실하고 설득력 있는 베토벤이다. 그리고 그 피아니즘은 매우 긍정적이고 첨예하다.(p.153)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우선 베토벤 음악이 어떠해야 한다는 자기만의 정의가 확실히 있어야 한다. 그래야 설득력이 있는지 없는지 판단할 테니까. 피아니즘이 긍정적이면서 동시에 첨예하다는 건 어떤 느낌인지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온갖 어려움을 헤치며 끝없이 혁신하는 사업가가 떠오르는데, 그 어려운 베토벤을 자기만의 스타일로 완성했다는 의미일까?


지금 보여준 예시는 정말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단순히 하루키만 보고 들어왔다면 대화가 안 될 수 있다. 그러나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는 오히려 그 난해함으로 인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신기한 책이다. 나는 한참을 읽던 중 그냥 책을 덮고 그가 소개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유머와 긍정과 첨예의 소리가 도대체 뭔지 궁금했으니까.


물론 나는 실패했다. 유머가 무엇인지 알려면 진지함 또한 알아야 한다. 긍정을 이해하려면 부정을 이해해야 하고 첨예를 느끼려면 부드러움과 여유를 느껴봐야 한다. 이는 한 연주자의 여러 곡과 여러 명의 뮤지션이 연주한 한 곡을 수 없이 교차 청음 해야만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도 희망적인 건, 지휘자나 연주자에 따라 같은 곡도 완전히 다르다는 건 알게 됐다는 점이다. 정말 신기하게 달랐다. 이게 진짜 같은 곡인가, 할 정도로.


정말 열심히 검색했지만 워낙 구반이 많아 스트리밍 서비스에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스포티파이로 가면 좀 나으려나?) 그래도 개중 몇 개를 찾아 여기에 올리니 직접 들어보길 바란다. 스트리밍 서비스는 멜론을 이용했다. 해당 키워드를 그대로 검색한 뒤 앨범 커버로 찾으면 된다.


1. Stravinsky: The Firebird Ozawa Seiji

책에 소개된 건 파리 관현악단과 녹음한 아래 앨범이다. 하루키의 평은 이렇다.




소리가 보다 컬러풀하고 섬세해졌으며, 흐름에도 한결 강한 '스토리성'이 생겨났다.(p.132)


이는 오자와 세이지가 보스턴 교향악단과 녹음한 앨범과 비교하며 한 말인데, 내가 소개하는 보스턴 교향악단 버전이 당시에 녹음한 것을 2019년에 커버만 바꿔 다시 내놓은 것인지, 아니면 녹음 자체를 새로 한 건지는 알 수 없다.




2. Bartok piano concertos

하루키는 오자와 세이지 지휘에 피터 제르킨이 연주한 1965년 앨범을(아래) 최고로 쳤다.




두 사람의 연주로 이 곡을 듣다 보면 '맞아, 이렇게 이해하기 쉬운 곡이었어' 하고 눈이 뜨이는 경험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p.164)


두 번째는 앨범 커버가 맘에 들어 내가 골랐다.




3. Strauss four last songs

소개된 음악 중 유일한 가곡이다. 책에 실린 건 조지 셀 지휘의 엘리자베트 슈바르츠코프 버전이다. 하루키는 슈바르츠코프의 가창에 대해 이렇게 평한다.




음악을 구석부터 구석까지 빈틈없이 향유하는 가창으로, '마음으로 노래한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는다.(p.179)


이 외에도 키리 테 카나와, 리자 델라 카자, 아넬리제 로텐베르거, 군돌라 야노비츠를 소개하지만 키리 테 카나와의 것만 간신히 찾았다. 그것도 하루키가 픽한 앨범은 아니다. 하루키는 그녀의 가창이 슈바르츠코프에 비해 훨씬 드라마틱하며 '고요한 체관'이라기보다는 '그럼에도 강하게 맥박 치는 감정' 같은 것이 느껴진다(p.179) 고 했는데, 과연 어느 정도 수긍이 된다. 하루키는 슈바르츠코프 쪽이라고 했지만,


나는 카나와의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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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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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이야기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이면서 분류학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매우 정치적인 동시에 개인적이고, 에세이면서 과학책이고, 전기이면서 미스터리 스릴러 기도하다. 틀에 매이지 않는 이 책은 강물을 거슬러 오르는 물고기처럼 유유자적 고정관념의 바위를 피해 다니며 자신만의 독자적 장르를 만들어간다. 정말로 독특한 책이다.


우리나라에서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이름을 들어본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것이다. 데이비드를 빼고 보면 마이클 조던의 별칭인가 싶을 정도로 인지도가 떨어지는 이 남자는, 미국 최고의 명문 대학 스탠퍼드의 초대 학장이다. 물론 당시의 스탠퍼드가 지금 같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설립자는 캘리포니아에서 매우 수상한 방법으로 떼돈을 번 부부였고 대학을 설립한 취지에도 약간 구린내가 풍겼다. 심지어 남편 릴런드 스탠퍼드가 사망하자 아내 제인은 스탠퍼드 대학이 강신술에 대한 과학적 연구 같은 분야로 확장해나가길 원했다. 제인은 과학자들이 대기 중의 X선을 활용하여 망자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열어주기를 요구했다.


데이비드 스타 조던은 그래도 과학자였다. 제인의 생각을 쓰레기라고 치부했을 뿐만 아니라 그런 생각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든 조던은 물고기 분류에 관한 한 미국 일인자였고 그가 세계에서 최초로 발견해 명명한 종들만 모아도 대학 연구실을 가득 채울 정도로 많았다. 그리고 이 관심의 충돌은 이 책을 돌연 미스터리 스릴러로 이끄는 복선이 된다.


이 책의 줄기는 데이비드 스타 조던이라는 과학자의 생애다. 일종의 전기라고 보는 것이 맞다. 저자 룰루 밀러는 불행했던 개인사를 중간중간 끼워 넣어 자신이 왜 조던이라는 인물에 집중하게 됐는지를 밝힌다. 밀러가 이해하고 싶었던 것은 조던이 평생을 놓지 않았던 삶에 대한 불굴의 의지였다.


조던은 강신술을 과학이라 믿는 무지한 고용주와 함께 일하면서도 자기 목표를 향해 정진하는 사나이였다. 가정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두 번째 부인과는 궁합이 잘 맞았지만 사랑했던 자식들을 불운한 사고로 잃었다. 치명타는 1906년 캘리포니아를 강타한 대지진이었다. 그 끔찍한 지진은 조던이 30년 동안 일군 업적을 단 몇 초만에 박살 내버렸다. 보통 사람 같으면 절망에 사로잡혀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대사건 앞에서 조던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아는가? 그는 부서진 연구실로 달려가 에탄올과 시체 냄새를 헤치며 터지고 찢어진 물고기 표본들을 손에 쥐고 다시 그 위에 이름표를 꿰매 넣었다.


조던은 마음속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좌절과 분노를 어떻게 제압했을까? 그에겐 감정이란 게 없었던 걸까? 그릿(Grit)이라고도 부르는 이 근면 성실은 조그만 바람에도 휘청이던 삶을 살았던 룰루 밀러에게 성배와도 같았다. 어떻게 하면 조던처럼 살 수 있을까?


감동이 없는 건 아니지만, 어떻게 보면 흔하고 뻔뻔한 아메리칸 성공 스토리 기도 한 이 책은, 그러나 종반에 이르러 눈에 띄게 궤도를 이탈하다 정신을 차렸을 땐 지구를 향해 돌진하는 혜성이 되어 독자를 충격에 빠뜨린다. 그 순간 사소하고 같잖았던 이 이야기는 인류애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힌트는 제목에 있다. 마지막 문장을 다 읽고 나면 이 모든 게 페이크 다큐는 아니었나, 싶은 생각마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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