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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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계의 싸이코패스라 불리는 정유정 작가의 신작이다. <7년의 밤>에서 무시무시한 살육극을 보여줬던 악녀의 귀환. 이번에도 그녀의 관심은 인간의 근원적 악과 그 악행이 연출하는 카니발이다.


전작 <7년의 밤>이 산꼭대기에서 시작해 줄곧 내리막길을 걷는 요상한 작품이었다면(흥미 곡선이 절정, 위기보다 발단이 높은 몇 안되는 책이다) <종의 기원>은 시종일관 늪지를 헤매는 책이다. 사람은 커녕 고기도 한 번 먹어본 적 없는 척, 점잖은 악어 한마리가 물 밑에서 잠행을 한다. 그러다가 사람이 나타나면 쓱, 물 위로. 어머, 넌 참 착한 악어구나. 반갑게 인사한다. 악어가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리고는?


정유정이 이 시들한 이야기에 <종의 기원>이라는 거창한 제목을 붙인 이유는 인간이라는 종의 본질이 악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생각 때문인것 같다. 정유정은 종의 진화 과정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으며 "나의 생존=타자의 죽음" 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싸이코패스라는 독특한 정신적 기질이 유전자에 각인된 우리의 본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싸이코패스의 행동과 유전자의 행동은 비슷한 점이 많다. 역사를 돌아보며 그 피비린내에 죄책감을 느끼고 반성을 하는 건 우리의 의식이지 유전자가 아니다. 의식이란 무의식을(유전자의 행동) 억제하기 위해 만들어진 일종의 감옥이다. 이 감옥은 윤리, 도덕, 신뢰, 공감 같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 사이에서 태어난 간수들이 지킨다. 이 중 몇몇 간수가 사라졌거나, 죽었거나, 애초에 태어난적 없는 사람은 무의식이 행동으로 발현되고 우리는 그것을 싸이코패스라 부르는 것이다.


유전자가 자신의 행동에 죄책감을 느낄까? 유전자는 오직 하나의 법만을 따른다. 생존. 이를 위해선 복잡한 작동 구조가 필요없다. 아니, 오히려 그건 치명적 약점이 된다.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 후손에게 자신의 형질을 물려주기 위한 결정적 순간마다 이것이 맞는가, 이 행동이 옳은가를 따진다면 이미 늦어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유전자는 마치 자석의 N극과 S극이 서로를 알지 못하고, 서로를 미워하고, 심지어 서로를 죽이고 싶어하더라도 근처에 다가오는 순간 척, 하고 붙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기회를 얻었을 때 무조건 행동하는 것이다. 유전자에게 윤리를 바라는 건 선로 위에 놓인 나뭇잎이 자기를 밟고간 기관차에 사과를 요구하는 것만큼이나 무의미하다. 기관차는 뻔뻔하거나 사악하거나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왜 잘못인지 모르기 때문에 사과를 할 수 없다.


인간의 어둠에 집착하는 작가라면 이는 평생에 걸쳐 고민해볼만한 주제이다. 하지만 이 고민을 평생의 과제로 삼는 것과 그것을 작품으로 옮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그곳은 너무나 어둡고 깊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모든 기획이 완료됐다 하더라도 실제 책상 앞에 앉아 문장을 적는 순간 아주 끔찍한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작가는 과연 그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있는가?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들은 악한게 아니라 선과 악을 구분짓는 잣대가 없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그들의 행동을 예측할 수는 있어도 그 순간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는 없다. 설령 우리가 그걸 완벽히 이해한다 하더라도 작가는 결코 그것을 묘사해선 안 된다. 싸이코패스의 마음을 세세히 읽게 된다면 그 불가사의한 악의 존재감을 독자가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그건 패를 다 까고 치는 포커보다도 재미가 없을 것이다.


정유정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는 과정이 너무나 힘겨웠으며 삼인칭으로 기술하던 주인공을 일인칭으로 바꾸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전개를 보였다고 했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실수다. 소설은 끝까지 삼인칭으로 남았어야 한다. 심리를 드러내는 싸이코패스는 딸기를 좋아하는 지렁이만큼이나 어색하다. 정유정은 싸이코패스가 만들어지는 과정도, 만들어진 싸이코패스를 묘사하는데도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주인공은 그저 싸이코패스가 되고 싶은 중2병 풋내기처럼 보인다.


그들을 다루는 불문율은 그들의 심리를 묘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첫 일초부터 마지막까지 이 규칙을 지키는 영화 두 편을 알고 있다. 하나는 코맥 매카시의 원작을 영화화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고 하나는 데이비드 핀처가 일부 에피소드를 연출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마인드 헌터>다. 싸이코패스가 정말 어떤 사람들인지 알고 싶다면 이 영화들을 보라. 아무런 위화감도 없이, 아무런 위협도 없이, 꿈결처럼 다가와 슥, 목을 베고 가는 섬뜩한 괴물들. 그 천진난만함을 보고 나면 <종의 기원>이 낳은 갈증이 한방에 날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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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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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에 대한 해외 평 중에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얘기가 종종 나오는데, 한국 독자에 한해
 그건 신랄한 풍자와 문체, 거침없는 욕설에 대한 대비가 아니라 전적으로 지루함에 대한 경고라고 봐야 한다. 왜? 우리는 결코 흑인이 당한 인종차별의 고통을 피부로 느낄 수 없기 때문이다(이 책은 흑인과 그들이 겪는 인종차별을 주제로 한다). 우리가 그들의 마음을 이해하려면 북유럽에서 블루칼라 아시아인으로 살아가거나 조선 초기 명망 높은 양반 집의 노예가 되어 애기씨를 훔쳐봤다는 이유로 두 눈이 뽑혀 쫓겨나는 일을 삼대 쯤 겪어야 한다. 솔직히 우리의 모국에서 우리는 대개 인종차별의 가해자지(중국인 여행객, 조선족들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보자) 피해자가 아니다.


지금부터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그건 우리가 우리의 이마에 조상님들의 신분을 가리키는 문신을 새기고 사는 것과 비슷하다. 반갑습니다. IT 개발실의 김갑수 입니다.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회의실에 앉았는데 자꾸만 이마의 문신이 눈에 들어온다. 김갑수씨는 확인이 가능한 선조대부터 쭉 망나니를 해왔던 집안의 27대손이다. 까만색으로 '천'이라 적힌 글자는 그의 근본이 오랜 시간 불가촉천민의 토양 위로 뿌리 내리고 있음을 얘기해 준다. 이런 사회에서 김갑수 씨는 제대로 된 평가를 받을 수 있을까? 지각, 업무상의 실수, 프로젝트의 실패 등은 다른 사람이 저질렀을 때와 똑같은 무게를 지니는가? 이뿐만이 아니다. 김갑수씨는 취향이나 취미마저 자신의 뿌리와 연계되어 설명되는 부조리를 겪어야 한다. 천민이라 역시 생선을 좋아하네요. 천민들은 고기를 살 돈이 없어 비린내 나는 생선을 주로 먹었답니다. 저 사람들이 잡곡밥을 즐기는 이유는 쌀밥을 먹지 못했던 조상들의 입맛이 그대로 이어져온 거라고 봐야합니다. 대한민국은 다행히 봉건 시대의 신분 제도가 완전히 사라진 근대 국가이며(대신 자본주의 시대의 새로운 계급이 탄생했지만) 설령 이런 차별이 존재 할지라도 자신의 출신을 감추는 게 어느정도 가능한 사회다. 하지만 흑인은 절대 그럴 수가 없다.


그들의 얼굴이 '검기' 때문이다.


그들의 피부엔 그들의 뿌리를 증명하는 문신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캐내거나 지울 수 없으며 그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피부를 모두 벗겨낸 뒤 과다 출혈로 죽는 것 뿐이다. 아프리카 이외의 지역에서 흑인으로 산다는 건? 자신이 노예의 자식임을 증명하는 라이센스를 지닌 것이다.


이 책의 주인공 Me는 LA 근교 디킨스 시에 사는 흑인이다. 그는 농장을 경영하며 호미니라는 흑인 노예를 소유하고, 병원과 학교 버스 등 공공시설물에 백인과 흑인의 이용 범위를 구분하는 표지판(혹은 페인트 칠)을 붙여 디킨스 시에 철저한 인종 분리를 시도한다. 그의 노예 호미니는 흑인 아역 배우 출신으로 인종차별이 난무하는 코미디 TV 드라마에 출연한 경력이 있는 노인이다. 호미니는 드라마에서 온갖 차별을 당했던 그 시절을 오히려 자신의 전성기로 추억하며 나이를 먹고 나서도 학대를 당하는 걸 최고의 즐거움으로 여긴다. Me는 호미니를 즐겁게 해주기 위해 그의 생일날 백인 지정 좌석이 있는 버스를 선물해준다.


흑인 작가가 흑인을 주인공으로 이런 얘기를 한다는 건(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배반이다) 어떤 상징이나 대의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는 미치광이처럼 날뛰는 이 부조리극을 통해 흑인 대통령이 탄생하고, 인종차별이 천박과 무지의 뿌리로 대변되고, 더 이상 어떤 회사도, 학교도, 병원도 인종 분리를 하지 않는 세상이 왔지만 여전히 흑인은 도시의 가장 가난한 동네에 살고 마약 거래와 총기 없이는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가난과 범죄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현실을 조롱하려 한다. 폴 비티는 Me를 통해 묻는다. 미국에서 인종 문제는 완전히 해결됐는가? 얼굴이 검다는 의미는 더 이상 물건을 훔치거나, 세금 또는 카드 대금을 내지 않거나, 빈 집을 털거나, 백인 여자를 강간하거나, 주유소에서 강도질을 하는 것과 동일시되지 않는가?


이 책이 신랄한 풍자와 조롱 블랙코미디로 무장하고 있음에도 결코 재밌거나 공감가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배반>은 흑인 역사에 대한 수 많은 레퍼런스를 제공하고 친절한 출판사는 그 모든 내용을 각주로 촘촘히 설명하지만 설명은 설명이고 글은 글일 뿐이다. 8,000RPM으로 눈알을 아래 위로 굴리며 그 모든 단어와 문장을 섭렵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이 이야기를 피부로 느끼지 못한다. 우리는 한번도 이런 차별을 경험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당신이 일제 시대에 태어났다면 이 말은 취소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만연체 문장, 그러니까 흑인이 부딪혀온 수많은 역사적 난관을 딱 잘라 말할 수 없기에 구불구불 단어에 단어를, 문장에 문장을 붙여 표현하는 저자의 독특한 스타일을 난잡하다고 느낄 것이다. 이 책이 맨부커 상을 받았대도 소용없다.


내가 <배반>을 위해 해줄 수 있는 홍보는 딱 하나다.


이 책이 조지프 헬러의 <캐치-22>를 정돈된 소설로 보이게 할만큼 대단한 난동극을 보여준다는 것. 


검은 얼굴을 한 요사리안이 보고 싶다면 이 책을 사라. 내가 거기에 넘어갔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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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
정지돈 지음 / 스위밍꿀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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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한국 소설의 아쉬운 점은 서사가 일상에 매몰됐다는 것이다. 그 바닥에서 이야기는 완전히 촌스러운 게 된 것 같다. 호환마마나 역병을 보듯 작가들은 이야기를 발로 쫓아낸 뒤 재미도 없고 착하지도 않은 계모를 안방에 들였다. 고통받는 건 계모 밑에서 자랄 독자니까 뭐.


정지돈을 처음 본 건 <문학동네 젊은 작가상 수상집>에서 였다. 그는 <건축이냐 혁명이냐>라는 단편 소설로 대상을 받았는데,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힘을 쭉 빼고 내뱉는 덤덤한 문장들은 진지함과 농담의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고 대단한 지향과 목표가 없는 듯 부유하는 이야기 속에 본인이 추구하는 비전이 확실하게 들어있는 이중성은 하루 종일 잔소리를 하다 툭, 하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을 내놓는 츤데레 대리님같은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 사람의 장편을 꼭 한 번 읽고 싶었다. 이런 스타일의 이야기가 길어졌을 때 단편과 똑같은 집중력과 재미를 유지할 수 있을까? 농담은 주제를 막론하고 길어질 수록 그 재미가 떨어진다. 정지돈이라면 농담의 긴장감을 몇 페이지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게 궁금했다.


<작은 겁쟁이 겁쟁이 새로운 파티>는 2063년의 한반도를 배경으로 한다. 남과 북은 드디어 통일이 되었다. 국제 정세는? 일본 열도가 마침내 물 속으로 가라 앉았고 정부 혹은 국토를 잃은 전세계의 난민들이 아직 존재하는 국가를 향해 질주하는 상황이다. 때문에 중앙 정부의 치안 유지력과 행정력은 수도 서울에 한해서만 유효하다. 난민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였는지 한국은 총기 소지를 합법화했고 총격전은 일상이 됐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아파트 발코니에서 도로의 행인에게 총격이 가해지고 도로는 박살난 시체로 가득해졌다.


버스 기사 짐은 안드레아의 제안을 받아 만주까지 운전을 해주기로 한다. 매우 위험했지만 서울에서 계속 살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다. 태워야 할 사람은 안드레아와 무하마드. 무하마드는 분단 시절 아랍인으로 가장해 남파된 간첩이었고 1996년 발각되어 무기징역을 받을 위기에 처했지만 그간 무하마드가 보여준 학문적 성과(아랍과 고대 한반도의 관계 연구)와 간첩 행위의 경미함으로 사면을 받는다. 올해 나이는 129세. 현재 직책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소장. 그러나 그 연구소는 국가 전복을 꿈꾸는 테러 단체의 한국 지부였고 안 그래도 위험했던 여행은 국가 공권력의 추격까지 받는 혈투가 된다.


자, 여기까지만 말해도 이 소설이 그간 한국 문학계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세계를 그린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대단한 기대가 부풀어 오른다. 현란한 총격전, 숨막히는 추격, 영리한 따돌림과 충격전 반전!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소설은 마치 독자의 바람을 외면하는게 일생일대의 미션이라도 되는 양 힘을 쭉 뺀 채 부유한다. 만일 이 책이 159페이지에서 끝나지 않았다면 나는 완독하지 못했을 것이다. 정지돈은 이 위기를 분량으로 해결했다. 한 페이지에 540자, 159페이지면 8만 6천자가 넘는 분량이지만 수 많은 공백을 고려하면 8만자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단편 소설 5개. 어쩌면 이 분량이 바로 농담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정지돈은 주인공 짐의 입을 빌려 이런 얘기를 한다.


짐은 텅 빈 놀이터, 유원지, 공원을 걸었다. 아무런 의미도 기능도 없는 글. 짐이 걷기 좋아하는 곳이 그런 걸지도 몰랐다(23p).


정지돈에게 글쓰기는 어떤 의미일까? 단순한 유희? 정신이 이상해진 알콜중독자 노숙자가 행인을 향해 내뱉는 얘기 같은, 의미도 의도도 없는 말. 그렇다면 이 세상에서 정지돈 만큼 행복한 작가는 없을 것 같다. 그는 유희를 직업으로 삼고 있으니까. 그 놀이가 좀 더 지속될 수 있도록 내가 그의 책을 좀 사줘야겠다. 혹시 또 모르잖아, 언젠가 내가 그 바턴을 이어받을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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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끄기의 기술 -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
마크 맨슨 지음, 한재호 옮김 / 갤리온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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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논조를 제대로 알리고자 공격적인 말투와 비속어를 섞어 썼으니 너그럽게 이해 바랍니다.


제목만 보면 60년대 미국 히피 문화의 쩐내나는 씨앗이 폭력적인 21세기 자본주의의 잔해에서 자라난 개수작 잠언서처럼 느껴지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오랜만에 이 출판사에서 제대로 읽을 만한 걸 내놓은 셈인데 제목을 번역하는데서 여전히 지진아의 흔적이 남아있다. 신경끄기의 기술이라니. 왜? 흰색 커버에 정자로 박아넣고 푸른 하늘을 그려넣지.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만 남기는 힘이라는 부제를 달아줬지만 애초에 제목을 잘지었다면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이 책의 매력. 저자가 글을 잘 쓴다. 이런 류의 책에서 보여지는 요상한 멘탈 관리도, 쓸데없는 가르침도, 무의미한 자기 다짐도 없다. 그저 잡담인듯 농담아닌 농담같은 글들이 일필휘지로 종이 위를 달려나간다. 특히 대책없는 긍정주의자들이 하는 말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야, 웃어서 행복한 거지' 라던가 '매일 아침 거울을 보고 행복해, 행복해, 행복해를 열번만 외쳐봐' 따위의 리얼 핫 울트라 개수작에 눈 하나 깜짝 않고 똥칠을 하는 저자의 행동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긍정적인 경험을 원하는 건 부정적인 것이고, 부정적인 경험을 받아들이는 건 긍정적인 것이다. 철학자 앨런 와츠는 이걸 '역효과 법칙'이라고 불렀다. 이 법칙에 따르면, 기분을 끌어올리려 할수록 더 불행해진다. 뭔가를 바라는 행위는 무엇보다 내가 그걸 갖지 못했음을 강조하기 때문이다.(p.26)


내 말이!


우리가 우리의 인생을 스스로 구렁텅이에 쳐넣어 매주 일요일 밤 우울증 속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우리의 삶이 결코 특별하지 않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당신과 나는 애초에 x밥이었고 50년 혹은 그 이상을(염병할 의학의 기적!) 개떡같은 직장 상사와 쥐꼬리만한 월급, 끔찍한 월요병과 함께 보내야한다. 괴로움은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사라진 삶을 살 수 있다는 망상에서 비롯된다. 노우! 우리는 죽어서 지옥에 가는 게 아니다. 음낭이라는 따뜻한 천국에서 정자로 살다 음란한 분출로 난자를 만나 세상이라는 지옥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지옥을 멀리서 찾지 말라. 우리가 선 이곳이 바로 지옥이니까.


우리가 이미 지옥에서 산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면 괴로울 게 별로 없다. 우리의 고통은 당연한거다. 그러니 고통받는 건 신경쓰지 말고 그냥 살면된다. 우리가 평소에 감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들이 당연히 받아 마땅한 것들이라면 우리는 왜 거기에 감사를할까? 우리가 감사해 한다는 건 평범하지 않은 것, 일상적이지 않은 것, 한 마디로 특별한 일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감사할 일은 애초에 많이 생기지 않는 게 당연하다! 온갖 못과 압정, 가시가 박힌 길 위를 맨발로 걸어가다 가끔 따뜻한 족욕탕을 만나는 게 인생이고, 그건 우리가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게 아니다.


원래 인생이 고통으로 가득한 거라면 그 따위걸 계속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공감한다. 몇년 전까지만 해도 내 꿈은 사실 보도를 덮친 트럭에 치여 즉사하는 것이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끼리 단명회라는 모임도 만들뻔 했다. 그러나 고통없는 급작스런 단명은 로또 당첨 만큼이나 얻어내기 어려운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빌어먹을 정도로 발전한 의료 기술에 힘입어 벽에 똥칠을 할 때까지 살아야 한다. 그럼 무엇을 하고 살아야 할까? 당연히 하고 싶은 일을 해야한다. 하지만 문제가 있잖아. 무슨 문제? 나는 내가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걸?


고통의 뫼비우스 띠 위에 올라온 걸 환영한다.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중 하나가 어떤 동기나 감정이 생겨야만 특정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행동해본 사람들은 안다. 


행동은 동기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라는 사실을 말이다.(p. 184)


당신이 뭘 좋아하는지 모르는 이유는 놀랍게도 당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뭐라도 해봐라. 그렇게해도 찾지 못했다면? 그러면 어쩔 수 없다. 또 다른 걸 찾으러 갈 수 밖에. 당신은 당신의 소중한 시간을 새로운 일을 찾는데 들인 노력, 그리고 거기서 우러나오는 실패의 쓴 맛과 바꾸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당신과 나는 애초에 x밥이었고 무언가로 성공하기엔 극히 어려운 사람이었거늘. 그러니 뭔가를 할때마다 가슴을 찔러들어오는 실패의 비수를 느낀다면 이 말을 기억하라. 실패는 당연한거고 성공은 희박한 일이다. 눈먼 암퇘지도 때때로 도토리를 줍듯, 숲으로 나가라.


노파심에 얘기하는데 이건 더러운 패배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믿지 못하겠다면 한번 이렇게 살아보라. 그러면 당신은 매일 20명도 채 방문하지 않는 블로그에 8년 넘게 꾸준히 글을 쓰게 된다. 불합격 조차 통보해 주지 않는 회사에 뻔뻔하게 이력서를 들이 밀고 실존하는지 조차 알 수 없는 각종 문학 단체에 단편 소설을 보내게 된다. 저자는 이와 비슷한 충고를 마이클 조던의 입을 빌어 얘기했는데, 나는 문학 청년답게 필립 로스가 쓴 소설 <에브리맨>의 한 구절을 인용하려 한다.


영감을 찾는 사람은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어나서 일을 하러 간다.


오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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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순이 2018-01-07 1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정기적인 도서 구매의 꿈을 갖고 있지만 도서 대출이 일상이고, 가끔씩 구매를 할 때면 알라딘보단 예스24를 선호하며, 더더욱이 평생 중 몇 번 보지도 못한 알라딘 블로그를 떠돌다가 님이 쓰신 글에 꽂혀서. 즐겨찾기를 해두고 때때로 생각이 나면 글을 훔쳐보는 저로서는. 마지막에 쓰신 문단을 보고는 왠지 모를 반발감이 살짝 들어, 오늘 날을 잡아 이렇게 댓글 하나를 떨어뜨리고 갈 수밖에 없네요.
저도 읽는 거 참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흥미 없는 글은 빠르게 스킵하거든요.
님이 꾸준히 쓰신 글들 다 좋습니다. 무엇보다 재미있어요.
항상 ‘다음‘이 기대됩니다. 앞으로도 기대하겠습니다!

한깨짱 2018-01-08 13:40   좋아요 0 | URL
몇 명 오지도 않는 서재, 백날 써봐야 누구 하나 알아주는 사람이 없어 관둘까, 관둘까, 진짜 관둘까 싶다가도 가끔 이렇게 피드백 주시는 분들이 있어 결국 또 쓰고 맙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쓸게요. 분량도 좀 줄이는 게 좋을 거 같애요. 내용도 더 쉽게. 맘처럼 잘 되진 않지만요.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 하워드 진의 자전적 역사 에세이, 개정판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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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이 말은 지난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혀왔던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에게 그들의 행동이 진정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설명할 실마리가 되었다. 중립주의자들은 차분하고 지적이며 여유롭다. 고귀한 그들은 타인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는 문명인의 불문율을 지키려 짐짓 나의 말을 들어주는척 하지만 사실은 벌겋게 달아오른 두 볼, 주먹을 꼭 쥔 두 손, 흥분으로 갈라진 목소리를 유치하고, 감정적이며, 불확실하고, 편향적이라 생각한다. 그들은 그 모든 걸 온화한 미소를 곁들인 냉담한 눈빛으로 말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왜 중립은 없는지 생각해 보자. 여기 우측으로 질주하는 기차가 있다. 꼬리칸에 탄 사람들은 이를 좌측으로 달리게 하거나 적어도 멈춰 세워 어디로 가야할지 고민해보려한다. 그들은 이 의견을 전하기 위해 기관실로 향한다. 그런데 기관실에서 보내온 직원은 그들에게 이 기차는 우측으로 가고 있는게 아니며 더 이상 소란을 피우면 기차에서 내쫓겠다고 위협한다. 꼬리칸 사람들이 창문을 가린 커튼을 걷고 밖을 내다본다. 직원의 말이 뻔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아챈다. 이제 꼬리칸 사람들의 행진에는 피의 대가가 따른다. 바닥에는 축 늘어진 부상자들이 즐비하고 죽음과 추방의 위협은 어린이와 어른을 구분하지 않는다. 이때 위대한 중립주의자들이 그들 앞에 나타난다. 당신들은 왜 이 기차가 우측으로 달린다고 생각하는가? 기관사는 분명 그렇지 않다고 말하지 않는가? 설령 당신들의 말이 맞다고 하더라도 그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피를 흘리는 게 정당한가? 당신들은 그렇다고 하고 기관사는 아니라고 하니 나는 판단할 수 없다. 나는 중립을 지키겠다.


기관사 여러분, 우리가 당신들의 말에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꼬리칸 사람들이 맞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건 우리는 이 모든 소동과 무관하다는 것입니다. 당신들이 무슨 짓을 벌이든 우리는 객실에 앉아 조용히 독서를 하겠습니다.


말하고 그들은 자신의 의자에 얌전히 앉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중립의 허구성이 드러난다.


달리는 기차 위에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건 기차의 질주 방향에 몸을 싣겠다는 의미다. 무거운 엉덩이를 딱 붙이고 앉아 아무리 꼼짝 안한다 해도 기차의 움직임을 멈출 수 있는 건 아니다. 진정한 중립이란 기차에서 내리는 것, 즉 이 사회에서 떠나는 것이다. 그러나 많은 중립주의자들은 기차 안에서 침묵을 지키는 걸, 그렇게 기차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지켜보는 게 중립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달리는 기차와 같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건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역사는 움직인다는 사실이다. 그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은 역사에 고삐를 채워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가고, 마음에 드는 사람들은 박차를 가해 속도를 높인다따라서 중립을 선언한다는 것, 아무런 방향도 선택하지 않는다는 건 '현재의 방향을 받아들이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단호히 중립을 선언하지만 결코 멈추지 않는 역사는 그들을 '특정 방향'으로 실어간다. 이것이 바로 달리는 기차 위엔 중립이 없는 이유다.


하워드 진은 1922년 뉴욕의 빈민가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이민자의 2세였던 그는 조선소에서 하급 노동자로 일하다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이후 제대군인 원호법에 따라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고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가난한 이민자의 2세가 미국 최고 교육기관의 혜택을 입었다면 대개는 그 혜택을 이용해 상류 사회에 편입할 꿈을 꾸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는 인종차별이 극심한 미국 남부, 그것도 흑인 대학의 역사학 교수가 되어 정든 뉴욕을 떠난다. 물론 그에게 대단한 인권 의식이 있었던 건 아니다. 빈민가 출신답게 그는 유색인종과 친밀했고, 그래서 자기가 잘 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며, 결정적으로 그에게 교수직을 제안한 대학이 거기 밖에 없었으므로 그것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지만 이후 그의 인생은 극심한 진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는 하워드 진이 차별과 폭력, 전쟁과 비인륜이라는 가시밭 길을 맨발로 걸으며 기록한 에세이다. 그는 죽기 직전까지 미국을 휩쓴 각종 인권, 반전 운동에 이름을 올리며 만인의 자유와 평등, 평화를 위해 싸웠다. 그 역사적 기록들이 사실 우리와는 그닥 관련이 없어 이 담담한 회고록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이 시사하는 바를 적어도 하나만큼은 완전히 이해할 수 있었으며 최근에 우리가 광장에서 이루어 낸 일을 돌이켜봤을 때 그 이해는 확신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다.


세상을 바꾸려는 의지가 있고, 그 의지를 소리내어 말하고, 그 의지를 행동으로 옮기면, 반드시 거기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진보(이 말이 불편하다면 변화)의 가시밭길은 나 홀로 걷는 외길이 아니다. 흐름 속에서 보면 우리는 때때로 웅덩이에 갇히고 바위에 부딪혀 길목에서 맴돌지만 역사적 관점에선 다양한 지류가 큰 강을 이루고 큰 강들이 비로소 거대한 바다에서 합쳐지는 형국으로 보여진다.


"투쟁의 과정에서 낡은 질서의 힘은 부식되기 시작하고 사람들의 생각은 변화한다. 저항하는 사람들은 일시적으로 패배하지만 분쇄되지는 않으며, 결국엔 다시 일어나 반격을 재개한다.


역사의 모든 일은, 일단 벌어지고 나면 마치 처음부터 그렇게 됐을거라 믿는 필연성의 유혹에 직면한다. 결과를 보고난 뒤에는 그것과는 다른 모습을 상상하긴 쉽지 않다. 그러나 나는 역사의 불확실성을, 뜻밖의 일이 벌어질 가능성을, 바꿀 수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을 바꾸기 위해 그 무엇보다도 우리의 행동이 중요함을 확신한다." (본문 중)


하워드 진은 1922년에 태어나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87년이다. 그는 자신의 두 눈으로 변화를 목격하고 자신의 두 손으로 그 변화를 이끌어냈다. 그가 증명한바에 따르면 역사는 기필코 나아간다. 어디로? 우리가 향하는 곳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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