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빨 자국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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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영국에서 팔려나가는 전체 범죄소설 중 무려 10퍼센트가 '존 리버스' 컬렉션이라고 한다. <이빨 자국>은 존 리버스 컬렉션의 세 번째 작품이다.


제 2의 켄 브루언을 찾기 위해 범죄소설에 뛰어들었다. 끈질긴 탐문으로 작가를 골라내고 돼지 같은 인내심으로 재고와 배송을 기다린다. 참지 못하면 현장에 나가 잠복을 하기도 한다. 검거된 소설은 <악마의 증명>과 <이빨 자국>이다. 나는 둘 모두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두 소설은 어두운 책장 구석에 처박혀 다시는 나오지 못할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없이 탈옥은 불가능하다. <악마의 증명>은 2017년 7월 23일에 수감됐고 <이빨 자국>은 동년 동월 30일에 들어갈 예정이다. 지금은 최후 변론을 위해 내 책상 위에 나와 있다. 전망은 그리 밝아보이지 않는다.


<소년 탐정 김전일>의 범인 규칙을 기억하는가? 그 만화에서 누가 범인인지를 고르는 건 너무 쉽다. 가장 범인처럼 생기지 않은 인물을 고르는 것이다. 초반엔 이것이 충격적 반전으로 다가오지만 에피소드가 거듭될수록 약효는 떨어지고 지루함이 스며든다. 반전은 어느새 당연이 된다.


이것보다 더 나쁜 패턴은 반전이 뜬금없이 등장하는 것이다. 반전은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단서들이 사건 속에 촘촘히 박혀 있다 때가 이르러 한꺼번에 터져 나와 진실의 순간을 열어보일 때 만개하는 법이다. 알고보니 우리 옆집 남자가 연쇄살인마였다는 얘기는 현실 세계에서나 충격이지 소설에서는 최악의 플롯이다. 예컨대 BBC <셜록 홈즈> 최신 시즌의 마지막 챕터에서 왓슨이 홈즈에게, "사실은 지금까지 벌어진 모든 살인과 사건은 내가 꾸민 짓이야." 라고 고백했다고 하자. 지난 에피소드를 되짚는 플래시백도, 그런 짓을 꾸며야만 했던 왓슨의 동기도 그리지 않는다. 존재하는 건 오로지 왓슨의 고백 뿐이다. 누가 이걸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이빨 자국>의 매력 포인트를 매혹적인 플롯과 충격적인 반전이라고 말한다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 없다. 세 번째 시리즈라 그런지 존 리버스는 아직 자신만의 고유한 매력을 갖추지도 못했다. 돼지같은 인내심, 탁월한 지성, 놀라운 기억력, 무엇을 장기로 사건을 해결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육감이라는 게 있는 모양이긴 한데, 그건 너무 편리한 속성 아닌가? "왜 저 여자를 쫓는 거야?", "내 육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어." 이렇게 써도 된다면 정말로 행복할 것 같다(물론 다루기에 따라 육감도 굉장한 매력이 될 수도 있다).


어쩌면 문화적 차이가 이런 감상평을 낳는지도 모른다. 스코틀랜드인 존 리버스의 사고 구조, 추리 과정을 한국의 나는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에 원서가 아니라는 점도 한 몫 거들 것이다. 문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특이할 만한 것도 없었다. 플롯이 치밀하지 못해도 문체가 자아내는 독특한 분위기가 수작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밤의 파수꾼>을 읽어 보라. 거기에 어디 반전이 있고 어디 치밀한 플롯이 있는가? 거기엔 '잭 테일러'가 있고 그저 그의 말을 받아 적는 켄 브루언이 있을 뿐이다.


앞으로 몇 개월 동안은 범죄소설을 집중 탐구할 것이다. 존 리버스에게도 몇 번 더 기회를 줄지 모른다. 그 전에 내 마음을 사로잡는 책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오랜 시간 많은 책을 읽다보니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좋은 책을 만나는 건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 일은 거의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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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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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멋졌다. <악마의 증명>. 순식간에 다 읽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제목만 멋졌다.


<악마의 증명>은 단편집이다. 크게 두 장르의 소설이 등장한다. 법정 추리, 호러. 여기에 가끔 환상이라는 조미료가 뿌려진다. 맛으로 보면, 후자는 너무 인위적이라 뒤끝이 지저분하고 호러는 그냥 그런 체인점 맛 같다. 양으로 보면 추리가 대부분이고 호러는 두 점 정도 실려 있다. 그러니 전체적인 코스는 완전히 실패일 수 밖에.


내가 추리 소설을 싫어하는 이유는 범인들이 온갖 기이한 방법으로 범죄를 저지른다는 것이다. 완전 범죄를 위한 완전한 트릭. 이 트릭이 기이할 수록, 얼토당토 안 할 수록, 한마디로 황당하고 기가 막힐 수록 소설은 찬사를 받는다. "전혀 예측하지 못했어요!", "정말 천재군요!" 나는 오늘부터 이를 루브골드형 범죄 혹은 서커스적 범죄라 부르고자 한다. 작은 일을 이루기 위한(살인이 작은 일은 아니지만 이를 위해 벌이는 짓에 비하면 엄청 작으니까) 핵폭탄급 비효율. 나는 이게 놀라운 일인지 정말 모르겠다.


물론 작가는 오랜 세월 판사로 재직한 경험이 있으며 따라서 온갖 기이한 사건들을 다뤄왔을 것이다. 내가 터무니 없다고 말하는 몇몇 지점들에 대해 그는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고 응수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란 실제로 벌어졌다고 해서 설득력을 갖는 게 아니다. 일요일 아침 11시의 제왕 <서프라이즈>를 보라. 그게 흥미를 끄는 이유는 전혀 납득할 수 없는 일이 실제로 벌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나 세상에 이게 정말이야?", "말도 안돼 이게 실화라고?". 실제는 허구적일 수 있지만 허구는 반드시 실제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금방 빛을 잃고 먼 바다에 삼켜져 다시는 떠오르지 못한다.


<악마의 증명>은 터무니없는 트릭 보다는 인위적인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어떤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통찰력을 발휘, 결정적 단서를 찾는 게 아니라 이야기 전체가 통찰을 발휘하게끔 짜맞춰져 있다. 사실 이것도 엄청 순화해서 말한 거지, 실제로 사건을 해결하는 주인공들은 거의 관세음보살급 예지력과 판단력으로 어마어마한 추리를 해낸다. 해결사들은 범인보다 언제나 500수 앞을 앞서 있다. 알파고가 18급의 바둑 입문자를 가지고 놀다 초읽기 돌입 5초 전에 신의 한 수를 놓아 완전히 조져버린다. 저 멀리서 큰 파도가 밀려 들어와 단단히 마음을 먹고 서핑 보드에 오른 순간 맥 없이 꺼져 고꾸라지는 기분. 나는 지금 억지라는 말을 간신히 참고 있다.


오랜 시간 판사와 변호사로 일한 탓에 법이라면 빠삭하고, 그 사각을 완전히 꿰고 있어 이리저리 끼워 맞추는 유희를 즐긴다는 느낌이다. 이야기로 말할 것 같으면, 솔직히 영 꽝이다. 기반이 취약한 한국 미스테리 장르에 이만하면 수작이다 고 말한다면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군요." 라고는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한국 미스테리의 역사와 현황을 잘 모르니까. 그런데 우리가 미스테리 강국이라 부르는 일본을 봐도 나는 그 소설들이 잘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그 정도 수준에 이르는 게 미스테리 강국의 조건이라면 나는 방향 자체가 심각히 잘못된 게 아니냐는 의문을 던지고 싶다. 단순히 개취의 문제일까?


마지막으로, 천재적 문제 해결사에 대한 한국인의 우상 숭배급 믿음은 아마도 복잡한 사회, 정치적 현실이 만든 일종의 판타지가 아닌가 싶다.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은 상황을 단칼에 잘라 구성원들 하나 하나에게 갈 길을 일러주는 초인. 우리는 그런 사람을 꿈꾸며 5년 마다 우상을 만들어내지 않는가. 너무 많이 간 거 아니냐는 말을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슈퍼히어로 급 지니어스들이 찬사를 받을 때마다 그런 생각이 든다(이 소설과는 그닥 상관 없는 얘기일지도 모르겠지만).


좋은 평을 받는 소설에 딴지를 거는 건 너무 어렵다. 진짜 어렵다. 그래서 나는 cine21의 소금쟁이 박평식 기자를 존경한다. 누가 뭐라하든 소신껏, 대중적 인기에 코를 풀듯 낮은 평점을 던지는 패기. 아마 박평식 기자는 절대로 시나리오를 쓰거나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쌓아온 업보의 돌팔매를 무슨 수로 버티겠는가? 그런데 내 꿈은 소설가니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남들이 내 소설엔 과연 뭐라고 말할까. 걱정은 되지만, 그래도 업보를 쌓는 일을 멈추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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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청춘의 독서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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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처음 읽었던 <청춘의 독서>는 분명 이런 느낌이 아니었다. 읽지도 않은 책들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는 이런 류의 책은 확실히 지루하다고 생각했다. 작가가 유시민이 아니었다면 끝까지 읽지도 않았을 것이다.


책이란 확실히 보수적인 매체다. 종이 위에 잉크가 한 번 찍히고 나면 좀처럼 바뀌질 않는다. 2017년 5월에 63쇄를 찍은 이 책도 개정판이 아니라 초판을 되풀이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완전히 다른 느낌을 받았다. 새로 주문한 책이 오기까지 잠깐 여유를 부려 손에 들었는데, 그대로 달려버렸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한번쯤 느껴본 경험이리라. 작가는 이런 경험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 소설은 32년 전과는 크게 다른 모습으로 다가와 그때와는 다른 이야기를 해주었다. <죄와 벌>은 그대로지만 내가 달라졌기 때문일 것이다. 학창 시절 공부했던 다른 책들도 마찬가지였다. 독서는 책과 대화하는 것이다. 책은 읽는 사람의 소망과 수준에 맞게 말을 걸어주고 그가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이야기를 들려준다(P. 313).


<청춘의 독서>는 책에 대한 이야기와 책 이야기가 절묘하게 혼합되어 있다. 책에 대한 이야기가 지나치면 읽는 이가 그 책이 정확히 무슨 내용인지 알기 어렵고, 책 이야기가 지나치면 사람들은 쉽게 지루해 한다. 무의미한 동어 반복. 그래서 이런 류의 책을 짓는 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조금만 삐끗해도 강신주의 <감정수업> 같은 희대의 망작이 만들어 질 수 있다. 물론 책이란 걸 거의 읽지 않는 사람에겐 이 쪽이 더 유리할 수도 있지만.


민주화 운동가, 칼럼니스트, 방송인, 정당인, 국회의원, 장관 이라는 경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유시민 작가는 작가이면서 동시에 행동가다. 이제는 후자에서 은퇴하여 그 경험을 팔아 밥을 버는 지식 소매상이 됐지만 소매상은 무슨, 공장을 차려도 될만큼 지식과 경험이 차고 넘친다. 이 지식과 경험의 훌륭한 조화가 이 책을 아름답게 만든다.


책은 엄연히 현실이 아니다. 책은 현실에 대한 작가의 해석 또는 현실이 되고픈 작가의 바람이다. 그래서 책만 읽는 사람을 샌님이라 부르는 것이다. 유시민 작가는 하늘 위의 지식을 끌어다 삶과 엮어본 경험이 있다. 그것이 비록 실패했든 그렇지 않든(그건 역사가 평가할 일이기도 하고), 시도 자체가 만든 경륜의 깊이는 쏟아지는 시대의 폭우를 담기에 충분하다. 이런 사람들이 해주는 책 얘기는 범상치가 않다. <청춘의 독서>는 작가의 삶과 지식과 경험과 경력이 압축되어 숙성된 맥주 같다. 묵직하면서도 부드러운 목넘김이 일품이다.


이 책엔 모두 14권이 실렸고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고전들이다. 작가는 아주 대중적이면서도, 한편으로는 쉽게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이것이 바로 유명 고전의 아이러니다) 책들을 내키는대로 선택한 것 같다. 작가는 아마 교양인이라면 꼭 한 번 읽어야 할 고전 명작 이라는 말에 "웃기시네"라고 대꾸하는 독자를 더 좋아할 것이다(나는 확신한다). 이런 교조적 태도를 걱정하는 사람이라도 <청춘의 독서>는 편하게 읽을 수 있다. 여기엔 고압적 태도와 우쭐함이 전혀 없다. 정말로 순수하게, 두 번 세 번 반복해 읽은 진짜 좋아하는 책들을 고백하는 진솔한 기록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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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인 1 - 경계를 넘다 수인 1
황석영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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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 선생의 책을 기다려온 건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비록 소설은 아니지만 선생의 인생은 소설보다 기구하고, 파란한 만장이 들불처럼 번져 일어난 역동적 삶이었으니 이 자전은 가히 소설을 읽는 것만큼 흥미롭고 재미있을 터 였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선생이 한 말씀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아마 <오래된 정원>에서 읽었을 것이다. 정확한 문구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쨌든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냈다는 뭐 그런 의미였던 것 같다. 선생은 소설가이면서 행동가였고 대한민국 현대사의 온갖 비극과 살을 비비며 살아온 분이셨다. 베트남전 참전, 광주 항쟁, 방북, 망명, 칠 년의 복역. 이는 같은 시대를 살아온 다른 소설가들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경력이었다.


선생은 1943년 만주에서 태어났고 광복과 함께 평양으로 내려온다. 한국 전쟁 탓에 북에서의 짧은 유년 생활을 마감한 그는 이후 대구, 대전 등 피난지를 전전하다 대개는 서울 영등포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선생이 경험한 전쟁은 정말 끔찍한 것이었다. 어느 전쟁이 아름다울 수 있겠냐마는 같은 동네에서 멱을 감고 콩을 볶던 형, 동생이 서로를 향해 총칼을 겨누고, 철책을 따로 넘은 부부가 영영 만날 수 없게 되고, 피난 길에서 손을 놓친 아이들이 서럽게 울며 선로를 따라 달리는 그들이 바로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의 모습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가슴을 더더욱 아프게 한다.


만일 운명의 여신이 공평하다면, 그래서 살면서 겪는 고통과 행복은 어느 쪽에 하나 더하고 뺄 것도 없이 동일하게 오는 거라면, 전쟁을 경험한 그 세대는 평생의 불운을 한꺼번에 몰아 겪었을테니 앞으로의 생은 행복으로 가득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그들이 맞은 현실은 군사 독재와 자유의 강탈이었다. 국민의 피로 지킨 강토는 강도와 매국노들의 차지가 됐다. 선생이 청년이 됐을 때 그들은 자신의 권력을 영속화 하려 했다. 시대는 투쟁을 원했고, 선생은 싸우지 않고선 견딜 수 없는 사람이었다. 선생이 행동으로 보여준 사상과 정신의 힘은 이 땅을 이 땅의 주인이어야 마땅한 이들에게 돌려주려는 수 많은 운동의 씨앗이 되었고, 그 때의 노력으로 우리는 느릿 느릿 거북이처럼 기어가기는 하나 그래도 민주 사회라 부를 만한 나라에게 살게 됐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 겨레의 역사를 수 많은 이민족의 침략으로 고통 받은 한의 역사로 묘사한다. 그러나 나는 고대의 그 모든 슬픔을 다 합친다 하더라도 현대사 백년의 압축된 비극과 겨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내 세대와 멀리 떨어진 일이 아니기에 내가 공감하는 감정의 순도가 더 높은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선생을 비롯해 수 많은 이들이 걸어온 투쟁의 역사를 보고 있으면 내 안온한 생활에 슬금슬금 죄책감이 기어들면서 한편으로는 이 은혜를 다 어떻게 갚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나는 선생의 글을 읽으며 과거를 잊지 않는 것이 그나마 내가 드릴 수 있는 작은 보답이라 생각한다.


이 책은 1, 2권으로 나뉘어 있지만 1권만 읽고 끝나도 무리는 없다. 선생은 자신의 삶을 편년체로 엮지 않고 플래시 백이 난무하는 한 편의 영화처럼 구성해 놓았다. 1권에는 소년과 청년과 장년의 선생이 모두 등장한다. 이제는 노년이 된 선생의 삶을 보고 싶으면 2권으로 넘어가야 할테지만 목차를 보니 2권에서도 현재의 선생은 등장하지 않는 것 같다. <수인>은 선생의 인생 중 가장 잔인했던 시기를 끊임없이 맴돈다. 자신의 문학을 오롯이 살아낸 남자의 향기가 가장 진하게 배어든 시절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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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데우스 - 미래의 역사 인류 3부작 시리즈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 김영사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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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피엔스>가 호모 사피엔스만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유일한 인류였다는 편견을 깨면서 시작했다면 <호모 데우스>는 인류의 진화가 우리의 시대에서 끝났다는 착각을 부수면서 시작한다. 생각해보라. 수십만 년 동안 진화해왔던 호모 사피엔스가 왜 21세기에 와서 그 전진을 멈추겠는가? 우리는 기술의 진보는 쉽게 상상하면서도 인간 자체의 진화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아마도 진화가 수십 만 년에 걸쳐 일어나는 점진적 결과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어떤 인간도 살아있는 동안 진화의 흔적을 경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진화는 우주의 탄생 때 부터 단 일초도 멈추지 않고 전진하고 있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호모 하빌리스로 호모 하빌리스가 호모 사피엔스로 그리고 사피엔스가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진화한 것 처럼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호모 옵티머스 프라임이나 호모 사이버트론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인본주의 혁명과 기술의 발달로 현생 인류는 사피엔스 역사상 그 어떤 왕도, 사제도, 신도 해내지 못한 기아와 역병과 전쟁을 극복해 냈다. 시리아 내전과 IS의 테러, 아프리카의 수 많은 기아와 에볼라 창궐을 떠올리는 사람은 이 말을 헛소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과거를 돌아보면 인류가 이 모든 악들과의 전쟁에서 확실한 승기를 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것이다. 700년 전 페스트는 2,500만 명을 죽였고 천연두는 20세기에만해도 3억~5억 명의 인간을 죽였다. 하지만 2014년에 아프리카에서 창궐한 에볼라는 그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고작 8천여명을 죽이는데서 그치고 말았다. 전쟁은 어떤가? 이 야만적 행위는 이제 중동이나 아프리카처럼 여전히 고전적인 물질 기반의 경제를 유지하는 국가에서나 발생하는 드문 일이 되었다. 지식 산업이 경제의 근간이 되는 선진국들을 돌아보라. 오늘날 전쟁은 건질 게 별로 없는 사업이 됐다. 실리콘 밸리를 탱크로 점령한다고 그 기업들이 가진 기술과 노하우, 인력을 가질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기아도 마찬가지다. 여전히 아프리카에서는 수 많은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죽어가지만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우리는 기아보다 비만이 위험한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 인류가 다음으로 나아가야 할 무대는 어디일까? 기아와 역병과 전쟁을 정복한 인간이라면 무엇을 위해 살아야 더 나은 인간이 될 수 있을까? 하라리는 미래의 인류가 불멸을 찾아 떠날 것이라고 예언한다. 이른바 호모 데우스. 인간은 신이 될 것이다.


과거에 비해 인간의 수명은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이는 의학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크다. 그러나 의학이 아무리 발전한다 하더라도 육체가 가진 한계를 넘어설 수는 없다. 근육은 노화하고 심장은 결국 멈춘다. 의학은 끽해야 우리가 주어진 수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게 해줬을 뿐이다. 그러나 현대의 생명 공학은 초인간을 만들어내는 걸 최종 목표로 삼는다. 미래의 인간은 기계와 직접 결합하거나 극단적으로는 아예 디지털화 함으로써 유기체의 한계를 벗어날 것이다.


오늘날 인류가 이런 발전을 이뤄낼 수 있었던 이유가 뭘까? 그것은 인류가 공동의 목표와 비전을 위해 아주 효율적으로 협동할 줄 아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협동에 관한한 사피엔스의 멱살을 틀어쥘 정도의 대가인 벌과 개미들은 왜 달을 향해 우주선을 쏘아올리고 생명 공학을 탄생시키는대신 땅굴이나 꿀을 생산하는 걸로 만족했을까? 그것은 상호주관적 실재, 즉 이야기를 믿는 인간의 독특한 능력 덕분이었다. 상호주관적 실재란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여러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통해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내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화폐는 객관적으로 아무런 가치를 지니고 있지는 않으나 수 억 명이 돈의 가치를 믿는 이상 우리는 그걸로 옷을 사고 여행을 가고 짜장면을 시켜 먹을 수 있다. 또 하나의 예시로 국가는, 돈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실체가 없음에도 국민에게 안정적인 소속감을 제공하고 나아가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충성을 다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이렇듯 상호주관적 실재는 다양한 욕구와 욕망, 의사를 가진 인간을 단일한 목표와 비전을 향해 나아가게 만들었다.


과거에는 종교가 이 상호주관적 실재의 대장 역할을 했다면 현대는 인본주의 사상, 즉 인간은 고유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믿음이 세상을 지배한다. 우리는 인류 발전에 이바지하기 위해 우주를 탐사하고 심해로 다이빙 한다는 얘기를 아무런 의심없이 받아들인다. 당신은 왜 우주를 개척하려 합니까? 인간은 더 나은 환경에서 더 풍족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왜 인간에게 그런 자격이 있는 겁니까? 인간은 고유하고 신성한 존재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갖게 됐습니까?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내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따라 직장과 배우자와 꿈을 선택한다. 앞으로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할지 걱정된다고? 그렇다면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 된다. 그 누구도 당신의 선택에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다. 그것이 당신 스스로 결정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게 단지 인류라는 종을 번식시키기 위한 유전자의 명령이라면 어떨까? 당신은 당신의 꿈과 행동을 스스로 선택했다고 하지만 사실은 유전자의 명령에 따르고 있을 뿐이다. 얼핏 보면 이는 터무니 없는 생각처럼 느껴진다. 예컨대 내가 아이폰과 갤럭시 중에서 아이폰을 구매하기로 결심한 게 정녕 내 유전자의 명령이란 말인가? 나는 아이폰의 깔끔한 디자인, H/W와 S/W가 완벽하게 결합된 결벽성을 사랑한다. 하지만 나로 하여금 깔끔한 디자인과 결벽성을 좋아하게 만든 원인은 뭐였을까? 아니 애초에 깔끔함과 결벽성을 선호하게 된 그 마음 자체를 내가 선택할 수 있었을까?


자유의지란 없고 욕망이 단순히 시냅스 끼리 주고 받는 전기 신호에 불과하며, 언젠가 우리가 그 메커니즘을 완벽히 규명하는 날이 오면 우리는 특정한 욕망, 취향, 꿈을 가진 인간을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같은 생각은 현대 생물학이 정의하는 인간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생물학은 더 이상 인간을 고유하고 신성한 어떤 존재로 생각하지 않는다. 인간은 삶에서 얻는 감각과 감정을 특정한 방법으로 처리하는 생체적 알고리즘인 것이다.


알고리즘! 이것이 바로 핵심이다. 세상의 모든 것이 알고리즘으로 환원될 수 있다면 그것은 개선, 보강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더 뛰어난 알고리즘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대체제가 꼭 인간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GPU의 비약적 발전과 값싼 스토리지, 빅데이터 축적, 그리고 이것을 빠른 속도로 분석해 내는 AI와 머신러닝의 등장은 인간보다 더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알맞게 행동하는 기계를 만들어낼 토대를 구축했다.


단순히 기계가 육체적 능력과 지능에서만 인간을 넘어설 거라고 생각하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생각이다. 디지털 선생님은 학생들이 똑같은 질문을 수백 번 되풀이 해도 인내심이 고갈되지 않는다. 디지털 정신과 의사는 당신의 심박수와 호르몬 수치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가장 효과적인 대꾸를 해줄 것이다. 인간이 자신감을 갖고 있는 창의력은 어떨까? 기원전 500년에 피타고라스가 말했듯이 음악은 정교한 패턴에 지나지 않는다. 문학 또한 성역이 아니다. 알파고가 몬테카를로 트리 탐색과 정교한 가치망, 정책망 결정 능력으로 바둑을 제압했듯이 인공지능은 조만간 한 단어 뒤에 어떤 단어가 와야 가장 아름다운 문장이 될지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런 세상이 오면 인간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하라리는 인간이 초지능과 영생을 갖춘 호모 데우스와 여전히 사피엔스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나뉠 거라고 예언한다. 최신 생명 공학의 이기를 무리 없이 사용할 수 있는 부자들은 인공지능과 비슷한 또는 그를 능가하는 초인이 되어 인공지능이 무엇을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존재가 될 것이고 이 모든 것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가난한 사람들은 개미나 벌, 또는 호모 데우스의 자비에 힘입어 동물원의 침팬지가 될 것이다.


근대에 공중 보건 시스템이 발달하게 된 이유는 산업 발전과 국토 수호를 위해 건강한 보통 사람을 최대한 많이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는 바로 이런 이유로 복지 제도와 의료 체계를 발전시켜왔다. 그러나 미래는 더 이상 대규모의 보통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생산에서 국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영역에서 로봇이 활용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더 행복한 미래를 꿈꿔볼 수도 있다. 모든 인간이 제각각 고유한 프로그램이 되어(MS Word나 애플 Keynote처럼 우주라는 데스크탑 위에 줄줄이 늘어선 프로그램들!) 클라우드 스토리지나 USB에 담기는 것이다. 더이상 영토와 자원을 두고 인간끼리 싸우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나아가 USB에 담긴 나는 3D 프린터와 함께 우주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그러다가 원하는 행성을 만나면 그곳에 정착해 3D 프린터로 공작 기계를 만들고 그걸로 공장을 만들고 공장에서 더 정교한 로봇들을 만들어 나만의 문명을 창조해내는 것도 가능하다. 정말로 멋진 신세계가 아닌가!


<사피엔스>가 역사학과 생물학을 결합한 독특한 역사책이었다면 <호모 데우스>는 여기에 과학적 상상력을 더한 SF로 우리를 찾아왔다. 하라리는 현대를 지배하는 최첨단 기술들을 서로 연결해 시야가 좁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은 절대 그릴 수 없는 빅피쳐를 그려낸다. 그것은 광대하고 압도적이며 동시에 우울하다. 하지만 그가 말했듯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역사는 변하지 않는다는 회의적 관점을 갖기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그 반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미래는 결코 필연이 아니다. 하라리는 <호모 데우스>에서 아주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지만 그것은 수 많은 미래의 후보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목적은 여러 가능성 중에 최악의 것들을 골라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그 선택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21세기는 문명 진화의 특이점에 놓여 있다. 조만간 사피엔스의 세계는 변태와 탈피를 거듭할 것이다. 인간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세상은 급변할 것이다. 이 진화의 방향을 잡기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많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더 늦기 전에 우리는 모든 지혜를 모아 미래에 대비해야 한다. 기술이 인간의 삶을 결정하기 전에, 인간이 기술의 세계를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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