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 시인선 32
박준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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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확실히 다른 차원의 언어란 생각이 든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는 동안 나는 비논리와 비논리의 결합이 진리를 만들어내고 그 진리가 자아내는 운율을 따라 언어가 다른 차원으로 진화하는 과정을 다시 한번 지켜봤다. 나는 현실에 굳건히 뿌리내린 몹쓸 이성과 합리의 벽을 무너뜨리고 싶을 때마다 시집을 꺼내든다.


서정이라는 말이 꼭 슬프다는 뜻은 아닐건대 시는 대개 서정적이면서 동시에 슬프다. 엉엉 우는 울음인가 하면 그렇지 않고 차가운 겨울 바람에 땅 밑으로 끌려 내려온 달빛처럼 스산하고 쓸쓸하다. 고조된 슬픔이 사라지고 난 뒤, 세월이 한참이나 지나 이제는 다 잊었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지만, 어느날 살랑이는 바람에 가슴 깊이 묵혀있던 감정의 잔해들이 먼지처럼 일어나는 순간이 언어화 하는 게 바로 시라는 생각이다. 어쩌다, 문득, 아무런 전조도 없이 시상은 칼날처럼 떨어져 내린다.


이 시인은 찬란한 현재의 사랑을 노래하는 법이 없다. 그의 미인은 늘 과거의 미인이거나 한때 자기 옆에 머물렀던 미인이다. 그녀가 어디로 갔는지는 알 수 없지만 중요한 건 그녀가 지금 없다는 것이다. 시인은 떠나간 자리, 그 휑하게 빈 자리를 메꾸기 위해 애꿎은 그녀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을 먹어 보지만 부활은 오래가지 않는다. 생은 곧 멸과 함께 나오는 것이기에 시인은 자신이 지어 놓은 이름이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한 번 사라지는 슬픔을 느껴야 한다.


나는 문득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을 가져본다. 슬픔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오직 그것을 구경하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일이다. 슬픔의 당사자가 과연 그 슬픔을 아름답다 말할 수 있을까? 나는 그런 잔인한 생각은 해본 적 없고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런데 시인은 머리말에서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고 말한다. 시인은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그 사라진 것의 아름다움을 다시 살리기 위해 가슴 깊이 묻어왔던 감정을 토해낸다. 내눈엔 종종 그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하지만 시인에게는? 나는 그가 한 말을 곰곰히 생각해 본다.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는 말에 깃든 서로 다른 의미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자신의 시 쓰기가 우연히 직업으로써의 글짓기가 된 것에 대한 시인의 소회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되어진 일을 보니 슬픔은 배가 되고 아름다움은 처연한 상실감으로 변해 처음의 의도와는 너무나 멀어져버린 실제를 자조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인간은 결코 사라진 것을 되돌릴 수 없다. 오르페우스는 결국 뒤를 돌아보고 에우리디케는 망자가 되어 영원한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되돌리려는 모든 행위, 나는 그 부질없음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그것을 감수하는 인간의 비애를 다시 한번 깨닫는다.


시인이 이렇게나 멀리 온 일을 이렇게나 아름답게 여기는 것에 나는 죄책감을 느낀다. 나는 그가 멀리 온 일이 더이상은 멀어지지 않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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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일리의 사람들 판타스틱 픽션 골드 Gold 3
존 르 카레 지음, 조영학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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랜덤하우스코리아가 우리 나라 출판계에 준 선물이 있다면 켄 브루언과 존 르 카레일 것이다. RHK에는, 시공사가 촌스러운 대사 번역으로 70년대 서가에 쳐박아 버린 켄 브루언과(런던 대로) 열린책이 난독증 유발자로 낙인을 찍어버린 존 르 카레를 양지로 끌어 올린 공로가 있다. 재미와 문학모두 잡으려는 이 외국계 출판사의 노력과 의지에 감사의 인사를.


<스마일리의 사람들>은 존 르 카레의 또 다른 자아 스마일리가 최대의 숙적 카를라와 벌이는 첩보 대전 3부작의 마지막 작품으로, 답답할 정도로 고독한 두 남자의 암투가 드디어 이 책을 통해 막을 내린다. 결투의 시작 <팅커, 테일러, 솔져 스파이>를 영화로 접한 나는 곧장 존 르 카레 빠져버렸고 그 다음 얘기가 <Hornarable Schoolboy>라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이 책은 한국어로 번역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2편을 넘기고 3편으로 가야 하나? 그럴 수는 없지. 하지만 서커스와(영국 정보부) 모스크바 센터(KGB)의 대결은 시간을 거듭할 수록 눈에 밟혔다. 애꿎은 영화만 다시 보기를 수차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참지 못하고 결국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손에 들었다.


후회하지 않을 소설이다. 이것이야 말로 첩보 소설의 진수가 아닐까 싶다. 존 르 카레는 실제로 영국 외무부(영국 정부는 정보부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첩보원들의 소속을 말할 때 대개 외무부라고 한다)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진짜 스파이였다. 틈이 날 때 마다 종이 위에 이야기를 끄적였고 그것이 이 대작으로 태어난 것이다. 탄생 과정이 매우 소박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가히 흉내낼 수 없는 분위기와 사실성으로 독자를 압도한다. 기밀이라 확인이 불가한 탓에 상상을 좀 덧붙이면, 어쩌면 이 소설이 존 르 카레 자신이 참여했던 작전들의 일지가 아닐까.


스마일리는 제임스 본드 보다는 셜록 홈즈에 가까운 인물이다. 작은 단서에서 건져낸 조그만 실마리를 잡고 하나 하나 사건을 엮어 나간다. 스마일리는 언제나 과묵하다. 답답할 정도로 인내심이 많다. 그는 정보전의 승패가 상대의 정보를 캐내는 것에 앞서 내 정보를 드러내지 않는 것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남자다. 그래서 이 침묵의 노인은 그의 행동을 쫓아가는 독자의 답답함을 알고도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나간다. 마침내 진실에 손에 쥐었을 때 조차 그는 잰체하거나 자부심을 갖지 않는다. 그는 더 많이 아는 것이 더 많이 아픈 것이라는 진리를 아는 사람 같다. 우리는 그가 찾아낸 진실을 손에 들고 두 번 세 번 돌려보며 환호를 지르지만 그는 이 모든 소동 앞에서 신음할 뿐이다. 이 고독한 남자의 매력에 빠지고 나면 다른 모든 스파이들은 유치해서 견딜 수가 없어진다.


소설 속에서, 스마일리의 말과 생각은 혼재해 있고 구성마저 매우 복잡한 탓에 이야기를 따라가기는 커녕 문장 조차 잘 읽히지 않는 고욕을 경험할 수 있다. 두 번, 세 번 페이지를 되돌아가며 이야기를 되짚는 경우가 당신만의 사정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복잡성 때문에 우리는 스마일리의 마지막 결투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으면서도 그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발견하는 놀라움을 경험할 것이다. 스마일리의 침묵이 사실은 무엇을 의미했는지, 우리가 고작 사건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그는 몇 걸음이나 앞서 나가고 있었는지, 되풀이 되는 독서 과정 속에서 속속 드러날 것이다.


<스마일리의 사람들>을 읽고 있으면 암투라는 게 진정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어둠 속에서 상대의 기를 느껴 날아오는 암기를 모조리 피하는 중국 무협 따위의 판타지는 없다. 이기는 방법? 승리를 거둔 뒤 무대를 빠져나가는 스마일리의 상처에서 그 비밀을 알게 된다. 정답은 날아오는 총알을 피하지 않는 것이다. 다만 그 총탄이 살갗을 파고들어 뼈를 부순 뒤 반대 쪽 살갗을 뚫고 지나갈 때, 일말의 신음 소리도 내지 않는 것. 어둠 속에서 터져나와 나의 위치를 밀고할 비명을 숨기지 않으면 적의 무기는 기어이 그 비명을 찾아와 집요한 총탄 세례를 퍼부을테니까. 결국 스파이들의 싸움은 인내와 침묵의 싸움인 것이다.


존 르 카레는 사상의 대립이 만들어낸 냉전과 냉전이 만들어낸 비인간적 첩보전을 황홀할 정도로 고독하게 그려낸다. 흔히 첩보전을 소리 없는 전쟁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비명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비명을 지르지도 못할만큼 압도적 고통이 따르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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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 로마사 1 - 1000년 제국 로마의 탄생 만화 로마사 1
이익선 지음, 임웅 감수 / 알프레드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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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사를 만화로 읽으면 더 재밌을까? 확실한 건 더 쉽다는 것이다. 모든 심사숙고와 긴 글, 힘들여 얻고자 하는 게 조롱거리가 된 요즘 시대엔 반드시 알려야 할 것을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전달하는 게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만화가 정말 쉬운가 하면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일반 인문서라면 페이지에 페이지를 이어 장광설을 늘어놔도 될 일을 만화는 분절된 컷으로 압축 제공해야 한다. 어쩔 수 없이 드러난 공백은 읽는 사람의 상상력으로 채우거나 다른 서적을 읽어 보충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만화 인문서는 모두 퀴즈쇼 출전을 대비한 참고서나 점심 시간에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주절주절 쏟아내는 부장님의 잡지식으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러니 이 책 하나로 로마사는 끝 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 게 좋다.


만화 로마사는 그간 만화 인문서들이 보여준 전통을 잘 따르고 있지만 그만큼 참신한 면은 없다. 연출적으로는 '먼나라 이웃 나라' 보다는 '고우영의 역사 만화' 시리즈에 더 가깝다. 유치한 아재 개그가 전반에 깔려 있지만 이상하게 어색한 점은 없다. 단, 이 개그 코드가 어느 정도의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만화적 연출과 역사적 사실이 뚜렷하게 구분되지 않는 부분도 아주 간혹 나타나기 때문이다.


작화 또한 참신한 면은 없다. 친숙한 SD 스타일 캐릭터들이 컷을 채운다. 정보 전달이 목적인 만큼 잘게 잘게 컷을 구성한다. 지문은 당연히 많고 보충 설명을 위해 많은 각주를 제공하기 때문에 의외로 읽는 속도가 나지 않는다. 어쩌면 이것이 만화 인문서의 한계인지도 모르겠다. 책도 만화도 아닌 어정쩡한 위치. 재미가 있는 듯 하면서도 재미가 없는 것 같은 묘한 느낌. 이 한계는 만화를 수단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전달해야 할 '정보'를 정해 놓고 이를 만화로 그려낸다. 초점이 정보에 맞춰져 있으니 만화 특유의 매력이 잘 살아나지 않는다. '정보'를 '이야기'로 대체하면 완전히 다른 만화가 나올 수도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굳이 제목도 <만화 로마서>가 아니고, 삼국지를 재해석한 <창천항로>나 진나라 역사를 그리는 <킹덤>처럼 새롭게. 그랬다면 '만화지만 훌륭한 책'이 아니라 그냥 '훌륭한 책'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우리에겐 요코하마 미츠테루의 만화 역사서 같은 좋은 전례가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렇게 할 수 없는 이유는 전자보다 후자가 훨씬 어렵기 때문이다. 게다가 <만화 로마사>는 출판사에 의해 철저히 기획된 책이다. 편집인들이 편집 의도를 잘 따라줄 무명 작가를 고용한다. '먼 나라 이웃 나라' 같은 대박을 한 번 내봅시다. 이해는 된다. 그저 다음에는 로마사에 깊은 애착을 가진 만화가가 그리는 진짜 만화가 보고 싶을 뿐이다. 주인공은 매번 죽을 수 밖에 없으니 새로운 서술 방식을 도입. 로마 역사 그 자체를 인격화해 마치 자신의 옛 일을 회고하는 형식이라면 꽤 매력적이지 않을까?


전반적으로 참신한 면은 없지만 <만화 로마서>는 두 가지 측면에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첫째는 '왜 지금 로마사 인가?' 하는 질문에 시의 적절한 답을 내주기 때문이다. 1,000년도 넘는 세월 동안 수 많은 정복 사업을 벌였음에도 관용과 포용으로 요약되는 그들의 이민족 융합 정책은 전 지구의 역사를 둘러봐도 비교가 없을 정도였다. 따라서 현재 대한민국이 직면한 다문화 사회, 인권의 사각 지대에 놓인 외국인 노동자 문제, 또는 정치적 갈등으로 인한 지역간 대립을 봉합할 수 있는 실마리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둘째, 로마사라는 중요성과 거대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의 관련 서적은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가 유일할 정도로 그녀의 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나도 크다. <로마인 이야기>를 싸잡아 폄하할 수는 없지만 군국주의 일본을 찬양하고 과거사 청산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으며 대동아 공영권, 나아가 약육강식을 신앙으로 갖는 작가인 만큼 그녀의 책은 아주 신중하게 읽혀야 한다. 하지만 이 <만화 로마사> 같은 반대편의 책이 없다면 사람들은 <로마인 이야기>에 담긴 위험한 생각을 아예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다양성은 사회, 문화, 정치를 막론하고 어디서나 중요한 가치로 지켜져야 한다.


쓰다보니 나도 이 책의 가치를 정확하게 가늠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간만에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를 다시 한 번 꺼내봐야겠다. 이 두 책의 차이가 저자의 의도만큼 확실히 드러난다면, 우리에겐 그 보다 값진 경험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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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영희 씨 창비청소년문학 70
정소연 지음 / 창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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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리뷰를 쓰다보면 잘 모르겠는 책에 오히려 호들갑을 떨며 칭찬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대개는 다른 소설가의 추천사를 읽거나 평론을 읽고 난 뒤, 내가 보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친 다음에 이런 일이 벌어진다. <옆집의 영희 씨>는 SF 작가인 배명훈의 추천을 통해 손에 들었다. 알라딘의 젊은 작가 인터뷰 코너에서 그가 이 책을 소개한 것이다. 나는 배명훈의 소설을 한 번도 읽어본 적이 없고 그가 누군지도 알지 못하지만 왠지 그의 추천에 엄청난 신빙성이 느껴졌다. 본디 설득이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일. <예술과 중력가속도>라는 책을 쓴 사람이라면 그 추천도 범상치 않으리라 생각했다. 어쨌든 나는 기꺼이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고 그 범상함에 놀라고 말았다.


이 책이 창비청소년문학 시리즈라는 것도 손에 들고서야 알았다. 청소년문학의 특징은 뭘까? 성장이 있어야 하나? 흥미로워야 하나? 상상력을 자극해야 하나? 읽기 쉬워야 하나? <옆집의 영희 씨>는 뒤 두 개에 해당한다. 상상력을 자극하고 읽기가 쉽다. 아주 소프트한 SF. 일상에서 벌어질 법한 소소한 일들이 우주라는 공간에서 펼쳐진다. 그런데 청소년이라고 무조건 쉬운 걸 좋아할지는 의문이다. 이미 다양한 우주에서 매일 매일 수 없이 많은 전투를 치뤄내는 그들에겐(시중에 나오는 게임들을 보라!) 오히려 심심하게 느껴지지 않을까.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 소설은 차라리 어른을 위한 소설이다.


영희 씨의 감성을 느끼기 위해선 어느 정도 삶의 흔적이 필요하다. 2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 사이. 그러니까 삶의 흔적이 하나둘 마음에 생겨 그것이 점점 아려오지만 아직 두꺼운 딱쟁이는 지지 않아 부드러움을 간직한 사람들. 그런 사람이 아니라면 이 소설은 평양 냉면을 처음 먹었을 때처럼 더럽게 맛이 없을 수도 있다.


확실히 여자 작가들이 잡아내는 감정의 섬세함은 남자들이 따라잡을 수 없는 것 같다. 여자들끼리의 대화를 듣고 있으면 뭐 이런 얘기까지 하나, 뭐 저런 일에 화를 내나 라는 생각이 들때가 있는데 그 이유가 바로 여자들의 감성이 훨씬 섬세하기 때문이다. 번개처럼 번쩍하고 나타나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만이 강렬한 게 아니다. 이 섬세함을 느끼고 나면 소소한 이야기 속에서도 몇 날은 파장을 일으킬 감동을 느낄 수 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 며칠은 먹었다는 박준 시인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것이 지루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분명 있을 것이다. 내 경우에 반은 그랬고 반은 그러지 않았다. 나는 아직 정소연 작가가 지닌 섬세한 감정의 돌기를 갖지 못한 것 같다. 많은 이야기들이 그저 출근길 라디오 소리처럼 흘러가 버렸다. 속이 편안해지는 음식을 먹었지만 여전히 느껴지는 허기. 이 묘한 감정이 공존하는 게 바로 <옆집의 영희 씨>다.


가장 큰 수확은 SF라는 장르의 매력을 확실히 깨달았다는 것이다. 읽는 재미가 아니라 쓰는 재미 말이다. SF는 우주선이 성층권을 넘어 우주로 도약하듯 인간의 인식을 좁은 우리에서 꺼내 우주로 쏘아보낼 수 있다. 물리적 도약이 과학의 역할이라면 정신적 도약은 분명 SF의 일이다. 극단적 가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인식의 전환. 그 쾌감은 쓰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발견케 한다. 이 가능성 안에서 나는 인종차별, 빈부격차, 남녀 평등, 문명의 충돌 등 온갖 인간의 문제를 더 첨예하게, 더 완벽하게, 더 재미있게 그려낼 수 있다. 세상의 이면을 꿰뚫는 문장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아예 안과 겉을 뒤집어 모두가 들여다 볼 수 있게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SF의 힘임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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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 혁명.이데올로기 편 철학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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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지를 금지한다는 간지 선언은 우리를 초긍정 사회로 이끌었다. 우리가 오늘날 죄책감에 쫓긴 자기 계발에 시달리고 끊임없이 특강을 찾아다니고 조금이라도 더 우수한 인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에 빠져 사는 이유. 그것은 우리 사회에 긍정성이 범람했기 때문이다.


강철 빗장을 뜯고 드디어 자유를 꺼내왔지만 그 무게에 질식해 버린 현대인의 아이러니. 더이상 당신의 성공을 막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말을 무한한 가능성의 창대한 발현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순진해도 너무나 순진한 거다.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말은 곧 실패의 책임이 모두 당신에게 있다는 말과 같다. 가난해서 학교를 다닐 수 없어요. 인터넷에 공짜 강의가 넘쳐나는데요? 작가가 되고 싶은데 등단의 문이 너무 좁아요. 쌔고 쌘게 인터넷 소설 플랫폼이에요.


초긍정 사회에선 낙오자가 속출하고 우울증이 만연한다. 남들보다 뒤처져 있다는 불안. 그 잘못이 다름 아닌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생각. 구조적 모순은 이 망상 뒤에 숨어 영원히 지속될 힘을 축적한다. 화를 내고 싶지만 도대체 어디에 화를 낸단 말인가? 우리를 억압하는 모든 금지는 이미 우리가 거세해 버린 것을.


지금 우리는 권력의 진화 과정을 보고 있다. 권력은 억압를 제거함으로써 영원히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모든 개인에 내재화된 것 뿐이다. 가장 무서운 건 언제나 보이지 않는 적. 현대 사회에서 '나'는 나의 주인이자 동시에 노예다. '나'를 채찍질 하는 건 외부의 강요가 아니라 바로 나 자신. 나를 죽여야만 내가 해방되는 딜레마. 초긍정 사회는 해방의 딜레마 또는 해방의 아이러니로 가득차 구원이 불가한 세계다.


철학의 힘은 현실이 뒤집어 쓴 두꺼운 가면을 벗겨내 그 안에 든 추잡한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진실은 잠깐 번쩍이고 마는 번개가 아니다. 진실엔 우리가 딛고 선 단단한 땅을 파괴하는 힘이 있다. 그 힘에 넘어지고 구르고 다친 사람들은 찡그린 얼굴로 일어나 파괴된 세상을 목격한다. 그리고? 


분노한다. 


나는 이것이야 말로 철학이 가진 진정한 힘이라고 생각한다. 철학은 그저 어려운 생각을 주고 받는 지적 유희가 아니다. 제대로된 철학은 언제나 물리적 힘을 낳는다. 철학은 우리가 무엇에 화를 내야 하는지 알려주는 학문인 것이다.


철학의 대중화는 그래서 더더욱 중요하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도 스스로 진실을 꿰뚫어 볼 줄 아는 사람들은 아주 극소수에 불과하며 극소수의 분노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혁명의 엔진은 보통 사람들이 표출하는 보통의 분노로 움직인다.


찬바람이 뼈를 에는 겨울 광장에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섰다. 그 숭고한 마음이 지속되려면 우리는 스스로 진실을 꿰뚫어 볼 힘을 키워야 한다. 지금 우리를 움직이는 건 정치가 보여준 포르노 때문이지 그 밑에 숨은 구조적 문제에 대한 자각이 아니다. 철학을 해야 한다. 스스로 생각할 줄 알아야 한다. 비판적 사고를 갖춰야 한다.


이 책은 시인, 소설가와의 대담, 공연을 통해 아주 쉽게 철학을 강의한다. 자기들만 아는 용어를 잰체하며 씨부리고 넘어가는 법도 없이 하나하나 공들여 설명해 준다. 대중 공연으로 기획된 강의를 책으로 옮긴 만큼 부드럽고 편안하다. 그간 웅진 지식하우스의 실망스런 행보에 견주어 보면 탁월하다고 까지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좋은 책을 읽을 때마다 장님이 눈을 뜬 것과 같은 희열을 느낀다. 시야가 환해지고, 초특급 반전 영화를 본 것처럼 가슴이 철렁하다. 철학책은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더 늦기 전에, 나아중에 가서야 땅을 치며 통곡을 하기 전에, 철학을 하자. 두 번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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