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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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대한민국처럼 빨갱이 공포증이 심한 나라에서 '마르크스'를 언급하는 건 매우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오늘날 대한민국에서 마르크스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사람들은 공산주의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치를 떨며 종북주의자들을 심판하려 하지만 마르크스라는 이름 앞에서는 물음표를 떠올린다. 어디선가 이름은 많이 들어봤는데 누구지? 적어도 한국에서 오독의 대상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공산주의다. 사람들은 공산주의가 무능하고 잔인한 독재자의 지배 아래 노동과 생산, 개인의 자유가 통제된 사회라고 생각한다. '마르크스가 꿈꾼 건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아니라 모든 개인이 제 개성을 자유롭게 발전시키는 사회였다(p.18)'. 혁명을 하려면 공산주의라는 이름부터 바꿔야 한다.


(2) 공산주의의 영어 단어 communism은 '공동체', '공유', '공공'을 뜻하는 라틴어에서 비롯했다. 번역하면 '공동체 주의' 정도가 적당했겠지만 대한민국의 근현대 학문이 다 그렇듯 어느 일본 사람의 번역을 그대로 가져다 쓰면서 '공산주의'가 됐다. 공동생산. 끔찍한 기숙사식 공장이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3)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는 사실을 마르크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우선 이윤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살펴보자.


(4) '이윤은 유통 과정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원가 1만원짜리 상품을 시장에서 1.5만 원에 팔았을 때 생산자는 '5천 원의 이윤이 났다'라고 말한다(p.32)'. 바꿔 말하면 이 말은 소비자가 5천 원을 손해 봤다는 말이기도 하다. 마법은 지금부터다. 우리는 생산자이면서 소비자이기 때문에 이득과 손해가 무한정 반복되며 사회 전체의 이득은 0으로 수렴한다. 이런 사회는 지속이 불가하다.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다.


생산과 소비 활동이 늘 일대일로 균형을 이루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사회의 총 이득은 0이 됐다가도 곧바로 다시 늘어난다는 가정은 가능하다. 예컨대 노트북을 한대 샀다고 하자. 구매 가격은 생산원가의 1.5배인 150만 원. 프리랜서인 나는 이제 노트북을 구매한 회사의 일을 하청 받는다. 비용은 실제 노동 가치의 1.5배인 150만 원. 하지만 이 비용이 지급되기 전까지 사회의 총 이득은 0이 아니다. 비용이 입금되는 순간 0이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새로운 일을 맡게 돼 나는 영상 편집용 노트북을 한대 추가 구매한다. 이처럼 총 이득은 0으로 수렴했다가도 곧바로 늘어난다. 이 가정이 맞다면 부는 굉장히 역동적으로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를 왔다 갔다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의 부는 늘 특정 집단에 집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상으로 미루어보아 이윤은 유통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5) '이윤이 유통과정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생산과정'에서 나온다는 뜻이다(p.34)'. 생산자는 두가지가 필요하다. 하나는 원료, 기계 설비, 토지, 사무실 같은 것들이고 또 하나는 노동력이다. 전자는 그 가치가 정해져 있어 스스로 늘어나지 않는다. 오히려 감소한다. 간혹 지대나 건물(사무실)의 가치가 상승해 이득을 얻을 수는 있겠지만 통상적 영업 행위는 아니다. 실제로 그런 가치 상승만으로 경영을 지속하는 회사는 없다. 그렇다면 경영 지속을 위한 잉여가치는 노동에서 나와야 한다는 말이다. '마르크스가 밝혀낸 비밀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이 노동자가 노동으로 만들어낸 가치보다 작다'는 데 있다(p.35).'


(6) 8시간 노동 중 4시간은 우리 자신을 위한 '필요노동'이고 나머지 4시간은 자본가의 잉여 가치를 만들어내는 '잉여노동'이다. 이것이 착취처럼 보인다면 심각한 착각에 빠진 것이다. 이것은 착취처럼 보이는 게 아니라 착취 그 자체다. 문제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 착취가 절대적으로 '합법'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자발적인 계약을 통해 피착취자가 된다. 올해 연봉계약서에 동의를한 건 누구였지?


<김규항의 혁명노트>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오해와 해독, 그리고 재해석을 광범위하게 다루지만 생각의 편린들을 위에서처럼 짧은 호흡으로 쏟아낸다. 기승전결을 갖춘 긴 글을 원한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김규항은 늘 혁명을 꿈꾸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 혁명을 실천해 온 사람이다. 대한민국의 현대사가 달려 나가는 속도를 보면 그 꿈이 먼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정말 자본주의가 문제일까? 나는 '계층'이라는 단어를 꺼냄으로써 쏟아질 오해가 두렵지만 그것은 이미 우리 사회에 실존하는 현실이므로 솔직하게 말해보려 한다. 하루하루가 치명적인 빈곤계층에게 내 말은 배부른 돼지의 역겨운 소리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속한 계층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돌릴 핑계인 경우가 많다.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돈이 없거나 시간이 없어서 자아를 찾지 못하는 게 아니다. 우리의 문제는 대개 실현해야 할 자아가 무엇인지 모른다는 데 있다.


숨 막히는 경쟁 사회의 안개를 걷고 나면 우리는 자아를 찾을 수 있을까? 찾아온 여유를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거기엔 오랜 연습과 습관이 필요하다. 자본주의적 가치가 없는 일을 하면서도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선 지금보다 훨씬 덜 쓰고 덜 입고 덜 마시고 덜 가져야 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지금보다 훨씬 더 쓰고 더 입고 더 마시고 더 가지고 싶어 한다. 문제는 이거다.


자본주의는 사람의 욕망이 만든 것인가, 아니면 사람의 욕망이 자본주의를 만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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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회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6
이케이도 준 지음, 심정명 옮김 / 비채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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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오래전 이긴 하지만 <한자와 나오키>를 처음 봤을 때 그 몰입감은 대단했다. 금융회사에서 벌어지는 부정과 모략, 음모와 배신.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혈혈단신으로 돌파해 나가는 한자와 나오키. 등장인물들 간의 수싸움에 깊이가 있었고 클라이맥스의 쾌감은 소년 만화처럼 폭발적이었다. 시청률은 고공행진이었으나 제작비가 너무 커져 차기 시즌 제작이 지지부진하던 차에 멀어지고 말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 드라마의 원작 소설이 한국에 출간된 것이다. 옛 기억에 다시 한번 정주를 마음먹었으나 권수가 많아 포기. 그 옆에 동일한 작가가 쓴 이 책 <일곱개의 회의>를 집어 들었다.


저자 이케이도 준은 은행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해 이후 작가로 전업했다. 경험을 살려 주로 은행, 대기업 등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쓰며 그곳에서 벌어지는 추잡한 일들을 이야기의 원료로 삼는다. <일곱개의 회의>는 그 전형에 속하는 소설로 대기업과 그 계열사 그리고 협력업체 간의 비리를 다룬다.


<한자와 나오키>와는 달리 이 소설엔 주인공이라 할만한 인물이 없다. 제목이 암시하듯 몇 개의 이야기가 마치 연작 소설처럼 이어진다. 그래서일까? 거대한 음모를 파헤치는 몰입감은 기대에 한참을 미치지 못한다는 게 솔직한 평이다. 500페이지 짜리 단권으로 엮기엔 이야기가 너무 산만하다. 구성의 약점은 등장인물의 평면적 묘사로 이어지고, 안 그래도 주동자가 없어 이입할 대상을 찾기 힘든 소설을 더 가볍게 만든다. 깊이 들어갈 준비가 되어 있는데, 이야기는 얇디얇다. 이런 걸 바로 '엔터테인먼트 소설'이라 부르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장점이 있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지는 궁금하다는 점이다. 이제부터인가? 하는 기대감은 오래지 않아 정말 여기까지인거야? 하는 대답 없는 외침으로 끝나지만 기대와 실망의 밀당을 반복하며 탈독을 방지하는 최소한의 텐션은 유지한다. 끝나고 나면 '역시 이 사람은 아니었어', 하는 연애를 떠올리게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기대가 지나친 탓이라고 한다면 글쎄, 이미 <한자와 나오키>를 봐버린 걸 어쩌란 말입니까?


이야기가 단순해 중간 중간 몇십 페이지를 건너뛰어도 읽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다. 500페이지의 빵빵한 체구는 대부분 물살이다. 읽는 게 느린 사람도 며칠이면 충분할 것이다. 집 밖에 나서기가 무서운 요즘 읽기에 취미를 들이고 싶은 직장인이라면 이런 책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이케이도 준의 <일곱개의 회의>. 첫 만남은 비록 아쉬움의 연속이었지만, 영 안 보고 살 정도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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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의 발견 - 나의 특별한 가족, 교육, 그리고 자유의 이야기
타라 웨스트오버 지음, 김희정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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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교라는 종교가 있다. 초기 그리스도의 교회를 부활시킨다는 목적으로 시작된 이 종교는 몇몇 독특한 생활 신념을 강조한다. 1800년대 후반까지 일부다처제를 고집했다. 비록 정식 교리에서 배제되긴 했지만 그들은 여전히 수많은 아이를 낳아 대가족을 이루고 산다. 일부 근본주의자들은 일체의 문명을 거부하고 자기들만의 공동체를 만들기도 한다. 아파서 병원에 가는 것은 죄악. 콜라를 마시는 것도 죄악. 발목 위로 살이 드러나는 치마를 입은 여자는 바빌론의 창녀로 간주한다. 공교육은 이교자들이 타락한 지식을 전파하는 뱀의 소굴이다. 이 책의 저자는 바로 그런 가정에서 태어나 인생의 대부분을 살았다.


우리가 이 근본주의자의 행동이 단단히 잘못됐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우리의 머리 속에 이미 다른 세계가 확고히 자리를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세계는 언제 어떻게 내 머리에 들어왔을까? 어릴 때부터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보고, 듣고, 배우며 하나의 사고 틀을 형성해 간다. 이 틀은 지극히 배타적이라 자기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것들은 최선을 다해 노출을 피하거나 인지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래서 유년 시절의 다양한 경험은 아주 중요하다. 서로 다른 경험들은 내 머릿속의 세계와 다른 세계의 충돌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자주 일어날수록 점점 균열이 생겨 두 세계가 합쳐진 새로운 사고 틀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폐쇄된 가정에서 폐쇄된 지식만을 주입받은 사람들은 그래서 점점 극단으로 치닫는다. 자신의 사고 틀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을 맞닥뜨리게 되면 그것을 거대한 음모 또는 이단자의 공격으로 치부하거나 신이 내린 시험으로 받아들인다.


저자의 가족들은 절대 안전벨트를 매지 않는데 그건 천사와 하나님이 그들 가족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가족은 한 차례 큰 차사고를 겪는다. 가족 모두가 죽을 뻔했고 엄마는 심각한 두뇌 손상을 입었다. 당연히 병원은 가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살아났다. 가족은 몇 년 뒤 다시 한번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 안전벨트는 여전히 매지 않은 채였다. 밖에는 산악 지방의 차가운 돌풍이 불고 있었다. 도로가 얼음으로 뒤덮였다. 작은 눈송이가 차창으로 달려와 부딪혔다. 아버지는 계속해서 속력을 높였다. "좀 더 천천히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엄마가 물었다. 아버지는 씩 웃으며 말했다. "우리 천사들이 날아서 따라오지 못할만큼 빨리 달리는 건 아니야."(p. 154)


아버지의 신앙은 점점 더 피해망상과 편집증으로 변해갔지만 자식들 모두가 그런건 아니었다. 죽음의 위기가 믿음에 균열을 냈고 그들을 다른 세상으로 이끌었다. 처음엔 오빠가, 그리고 그녀가. 타라 웨스트오버는 그렇게 세상 밖으로 나온다.


<배움의 발견>은 잘못된 신앙으로부터 탈출한 경험을 눈물로 쏟아내는 간증도, 분노에 차 폭로하는 비판서도 아니다. 타라 웨스트오버는 판단을 배제한 채 자신의 인생을 담담히 써 내려간다. 기억은 사실이 아니고, 언제나 미화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지만 그녀의 슬프고도 아픈 기억들은 어딘가 모르게 숭고함이 느껴진다. 이런 책에 자기계발서 같은 제목을 붙인 출판사는 반성을 해야 한다.


인디애나의 산악지대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는 초기 미대륙 개척민들의 수난기나 핵전쟁 이후 살아남은 인간들의 고군분투를 보는 것 같다. 폐차장에서 고물을 모으고, 약초로 오일을 만들고, 아프면 해가 들지 않는 지하실로 내려가 소파에 눕는다. 문장은 차분히 가라앉아 그녀의 기억을 소설처럼 펼쳐 보인다. 하지만 이 야이기들은 모두 소설이 아니다. <배움의 발견>은 진짜 같은 소설이 아니라, 소설 같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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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충 2018년 봄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원래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글을 쓰는 습관이 있어요. 그런데 그맘때쯤 회사를 옮겼더니 출퇴근 시간이 처음으로 1시간 이내로 단축됐습니다. 같은 시간에 일어나 회사를 가면 무려 2시간 30분이나 여유가 생긴 거예요. 그 시간을 모두 글쓰기로 보내는 건 어려웠습니다. 집중력이 떨어지거든요. 뭔가 다른 일을 '추가'하면 좋을 것 같았는데, 오래지 않아 해야 할 일이 떠올랐습니다.


그렇게 게임 프로그래밍을 시작했습니다.


게임? 네, 게임이요.


이런 말을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사람들이 많지만, 게임은 그렇게 단순한 미디어가 아닙니다. 애들이나 하는 유치한 놀이가 아니고, 중독을 일으키는 유해 매체는 더더욱 아니에요. 게임은 이야기, 음악, 미술, 디자인, 수학, 엔지니어링 등으로 구성된 종합 예술입니다. 수용자의 반응을 제대로 예상하지 못하면 실행조차 불가하기 때문에, 만들기 전에 온갖 것들을 고민해야 하는 복잡한 창조 행위이기도 하죠. 저는 20세기의 예술이 영화였다면, 21세기의 예술은 단연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게임에 대한 철학이 확고하다고 게임 프로그래밍을 그냥 할 수 있는 건 아니었어요. 3-4개월 동안 유튜브 강의를 보며 똑같은 코드를 따라 짜기만 했습니다. 책도 두어권 사봤어요. 그런데 그렇게 효과적이진 않더라고요. 지나고 나면 기억이 잘 안 났습니다.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도 모르는 채 그냥 외우기만 하는 거니까요. 저는 확실히 실습을 통해 이론을 구성해나가는 스타일인 것 같습니다. 그때부터 강의에 나온 게임들을 내 입맛에 맞게 바꾸기 시작했어요. 그러기 위해선 강의에 나오지 않는 것들을 찾아봐야 했고, 돌이켜보면 그때부터가 진짜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직도 생생한데, 원하는 기능을 구현하기 위해 쩔쩔매다 일주일만에 완성한 날이었어요. 그 순간 이제 내가 원하는 게임을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치 진구 구장 외야로 날아가는 야구공을 보며 '소설가가 돼야겠다'라고 생각한 하루키처럼요.


그렇게 해서 '고양이를 줍자'라는 게임이 탄생했습니다.



iOS: https://url.kr/qv9TXt

Google Play: http://bitly.kr/jkIMQ5c7w


제작기간 1년 6개월. 이렇게 간단한 게임을 이토록 오래 만든 이유는 이 게임에 쓰인 모든 코드가 무에서 창조됐기 때문이에요. 어떠한 기능이든 새로운 코드 한 줄을 짜넣기 위해선 처음부터 배워야 했습니다. 그래서 느릴 수밖에 없었어요. 하지만 결국 끝냈습니다.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건 '재미'에요. 단언컨대 '고양이를 줍자'는 그거 빼고는 꽤 잘 만든 게임입니다. 처음이니까 뭐. 새 게임이 나오면 이 자리를 빌려 또 소개드릴게요. 이렇게 또 하나, 하나 축적해 가면서. 저는 제 길을 갑니다. 그럼 여러분도, 여러분 자신의 인생을 위해 Cheers!


*p.s - 제발 게임 좀 다운 받아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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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
임현 지음 / 현대문학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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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개와 같은 말>이라는 제목으로 이 소설의 줄거리를 예상하기란 불가능하다. 임현의 소설들은 모두가 그렇다. 한국 문학계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이야기들. 이야기를 전복하려는 특이한 실험. 그래서 읽기가 어렵고, 읽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 경우가 부지기 수다. 임현의 소설엔 도전이 필요하다.


그의 소설을 특징하는 단어들을 나열하자면 양자역학, 포스트모던, 다중 시점, 메타 소설, 현실과 소설의 뒤섞임,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위협이다. 이중 양자역학과 포스트모던, 다중 시점은 독해를 어렵게, 메타 소설, 현실과 소설의 뒤섞임은 서사에 흥미를 더하는, 그리고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부터의 위협은 그의 소설 특유의 분위기를 만드는 역할을 한다. 임현의 소설은 이 세 가지의 삼위일체로 이루어진다.


인간은 단 하나의 인생을 경험하기에 '그때 그렇게 했다면' 하는 것은 상상으로 그치고 만다. 그러나 소설은 그 경우의 수들을 동시에 기술할 수 있다. 원자의 위치가 확률로만 분포하다 관측을 통해 하나의 위치로 확정되듯 우리의 선택으로 붕괴된 다른 사건들을 임현의 소설은 길어올린다. 그의 소설은 여러 시간과 시점이 혼재해 있어 이것이 누가 한 말인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가상인지 구별이 어렵다. 그래서 금방 피로해진다.


이 피로를 상쇄하는 것이 서사의 흥미다. 메타 소설이란 소설 쓰기에 대한 소설을 의미한다. 소설이란 결국 소설가가 여기저기서 듣고 경험한 것들에 이야기라는 가면을 씌워 만든 것이다. 훌륭한 소설은 많은 독자들로 하여금 '이건 바로 내 이야기라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데, 이것이 병적으로 발전하면 작가가 자신의 인생을 훔쳐보고 있다는 생각도 가능하다. 임현은 이 지점까지 이야기를 몰고 나간다. 그것은 소설 속의 소설가와 소설 속의 독자의 대결로 그려지지만 어느 순간 이 모든 이야기를 써낸 임현과 그것을 읽고 있는 우리 사이의 문제로 발전한다.


솔직히 말해 임현의 소설은 전혀 유쾌하지 않다. 그의 소설엔 닦아도 닦아도 지워지지 않는 물때처럼 묘한 불안이 서성인다. 책장을 넘기는 손끝을 타고 검은 불안이 피부 위로 옮겨간다. 이 불안은 어떠한 방법으로도 닦아낼 수가 없는데 애초에 그 불안의 원천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설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으나 결국 존재하지 않게 된 것들을 사실 옆에 은근슬쩍 끼워 넣어 진짜와 가짜를 마구 뒤섞는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라고 외치지만 머릿속은 온통 코끼리로 가득해진다.


읽기를 통해 행복을 추구하려는 사람이라면 최대한 임현을 멀리하는 게 좋다. 그러나 나는 임현의 가장 탁월한 점이 바로 이 불안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왁!' 하는 요란함 없이도 사람을 쪼아내는 공포. 임현의 소설은 강바닥의 이끼처럼 착 가라앉는다.


그리고 음지에 사는 생물들은 이끼를 참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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