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 - 세상을 위협하는 멍청함을 연구하다
장 프랑수아 마르미옹 지음, 이주영 옮김 / 시공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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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차이는 있을 뿐 우리는 모두 멍청이다. 노벨상을 받거나 각 분야에서 특출 난 업적을 쌓은 사람들도 예외는 아니다. 믿기 어려운가? 그렇다면 주변에서 가장 똑똑해 보이는 사람을 아무나 붙잡아 보험금 청구나 은행 App에서 비대면 계좌 개설을 시켜보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게 될 것이다.


사실 멍청함은 인간이라는 종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기본 특성이다. 역사의 페이지를 조금만 들쳐봐도 이 주장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차고 넘친다. 신성로마제국 역사상 가장 뛰어난 황제이자 사후 영웅으로까지 추앙된 프리드리히 1세는 십자군 원정 중 강에서 헤엄을 치다 물에 빠져 죽었다. 더위를 식히기 위해 강으로 달려드는 젊은 병사들을 보며 67세가 된 프리드리히의 마음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내 활력이 저 젊은것들 못지않다는 걸 보여주겠어! 강물로 뛰어들자마자 물에 젖은 갑옷은 그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유럽을 평정한 노인은 결국 젖은 갑옷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강물에 빠져 죽었다. 깊이는 고작 엉덩이 정도였다.


우리가 멍청함을 싫어하는 이유는(자기 자신도 멍청이면서) 그들의 행동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처럼 붉은 버튼 하나를 누르는 것만으로 지구를 파괴할 수 있거나, 이를 전 인류가 실시간으로 시청할 만큼 미디어가 발달한 세상에서는 시시각각 조여 오는 멍청함의 향연에 질식할 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기도 한다. 차르, 시황제, 그리고 가깝게는, 흠...


멍청함에는 대개 혐오라는 일관된 반응이 동반되지만 그 종류에는 나름 유형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나는 멍청함이 다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따라 크게 3가지로 구분한다. 확신에 찬 멍청이, 무지한 멍청이, 그리고 부주의한 멍청이. 영향력은 언급한 순서와 같다.


우선 확신에 찬 멍청이에 대해 알아보자. 이는 세상에 가장 큰 피해를 끼치는 유형이다. 이 유형이 멍청함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는 이유는 확신이 멍청함을 낳고 멍청함이 다시 확신을 강화하는 피드백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자신의 행위가 나쁘다는 걸 알지만 본인의 이익을 위해 악행을 저지르는 인간이 아니라 정말로 그 일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과거 기독교인들이 흑인을 함의 자손으로 규정하여 노예제를 정당화한 것처럼 말이다. 이런 유형은 사실상 치료제가 없다. 살면서 이런 멍청이들을 만난다면 그저 도망치는 것만이 해답이다. 그러나 당신의 상사나 대통령이 그런 유형이라면? 흠...


무지한 멍청이는 말 그대로 뭘 모르기 때문에 멍청한 짓을 벌이는 유형이다. 다이어트를 하겠다며 밥을 굶고 탄산음료와 과자로 허기를 달래는 사람이나 LG 유플러스에서 개통한 삼성 갤럭시 폰을 LG전자 서비스센터에 와 고쳐달라고 하는 부류가 여기에 속한다. 가끔 보면 귀엽기도 한데, 막상 겪어보면 여지없이 짜증과 답답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이 유형은 자신의 무지를 심각하게 비난하거나 공격하면 나는 멍청이가 아니라는 방어기제가 폭발하면서 무지를 믿음으로 전환해 확신에 찬 멍청이로 진화할 위험성이 있다. 따라서 이런 부류를 다룰 때는 좋은 말로 타이르거나 잘못된 점을 차분히 설명하는 등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마지막은 부주의한 멍청이다. 사실 부주의 또한 습관과 같아서 고치기가 매우 힘들다는 점은 있지만 우리같이 평범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부주의란 대개 우리 존재의 크기만큼 미미해 그냥 웃고 넘어갈 경우가 많다. 물론 얼마 전 발생한 삼성증권 위조 주식 유통 사건이나 토스 증권 환전서비스 오류처럼 개인이 감당하기에 벅찬 규모의 실수가 단순한 부주의로 야기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는 대부분 시스템의 개선을 통해 실수 자체를 막을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런 정리가 '내 주위에는 왜 멍청이가 많을까'에 대한 질문과 어떻게 연결되는 걸까? 결론만 말하면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이 책은 이 책의 제목을 봤을 때 우리가 기대했던 내용들, 예컨대 멍청함은 어디서, 왜 생겨나는 것이며 그들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그들이 왜 우리 주위를 서성이는지, 또 우리 자신이 그런 멍청이가 되지 않으려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도 전해주지 않는다! 제목은 그저 낚시에 불과했다! 한 가지 다행인 건 내가 여러분보다 먼저 이 책에 낚였고 그 실패담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여러분은 나의 멍청함으로 인해 멍청한 선택을 하게 될 일 하나를 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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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 동시대 문화 탐구 민음사 탐구 시리즈 2
윤아랑 지음 / 민음사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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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배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은 읽는 이의 머릿속을 부글거리게 만든다. 주제와 문장이 너무 어려워 당신의 독해력을 평가하는 진정한 시험이 될 것이다. 덮지 않고 완주하면 독서 인생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운 기념으로 스스로에게 상을 부여해도 좋다. 이 책 이후론, 그 어떤 책도 당신의 독해력을 넘지 못할 것이다.


한편으로 이 평론가라는 사람들이 가진 지식의 방대함에 놀라게 된다. 도대체 얼마나 읽고 보고 듣는 걸까? 아무리 그게 직업이라지만 누구나 알만한 작품부터 심해의 미확인 희귀종 찾기 대회에서 우승할 것 같은 생소한 작품들까지 손대지 않는 것들이 없다. 매체도 출판(책, 만화), 영화, 웹툰, 공중파 드라마, 예능, OTT 오리지널들까지 경계가 없다 못해 사실상 온 우주의 콘텐츠를 전부 흡수한 것 같은 경험의 깊이를 보여준다.


그래서 글이 어려울 수밖에 없는 걸까? 한 동네를 산 사람과 세계를 산 사람의 폭과 넓이는 단순한 양의 차이를 넘어 질적으로 달라질 테니까. 시야가 다르니 안 보이는 것이 보일 테고 안 보이는 것에 대한 서술이 안 보이는 사람들에게는 어렵다 못해 황당하게까지 다가올 수 있다. 인류 최초로 세균을 발견한 과학자들이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역시!


하지만, 평론이란 것도 결국 독자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 아닌가? 아는 사람들끼리 돌려 읽고 서로의 등을 쓰다듬으며 잘했다 잘했다 하고 말 게 아니라면, 솔직히 나는 왜 이런 식으로 글을 쓰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저자는 부산일보 신춘문예를 통해 정식으로 등단한 평론가인데 이 바닥에선 이렇게 글을 쓰지 않으면 인정받을 수 없는 모양이다. 문단은 정녕 독자를 떠나 자신만의 갈라파고스를 만들 생각인가!


<네 멋대로 해라>의 고다르는 자동차의 벡터에서 파국의 징후를 엿본다. 이는 문명의 운명에 대한 로셀리니의 근심을 자기식으로 확장, 번안한 장치다.(p. 85)


사실 이 정도는 무슨 뜻인지는 몰라도 읽는 것 자체가 어려운 건 아니다. 이 책에는 가독성을 낮추려 일부러 끼워 넣은 것 같은 수많은 사족(괄호를 치고 끊임없이 부가 설명을 적어 넣는다)과 함께 사전 지식이 없다면 도저히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예컨대 위 인용문에서 로셀리니의 근심 같은), 전문용어(예컨대 르상티망, MTF 트랜스젠더, 논모노섹슈얼 같은)가 바늘비처럼 정수리를 강타한다.


맷집 하나는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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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09-25 12: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려운 비평이 너무 많죠. 특히 문화쪽의 비평들이 그런 경향이 더 있는듯.... 독자가 알아들을 수 없는 비평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한깨짱 2022-10-02 09:11   좋아요 0 | URL
사람들이 너무 안 보니까 점점 더 그런 성향이 강해지는 것 같기도 해요. 일종의 오덕 문화처럼 되는 것 같기도 한데, 그 특성상 알아듣는 사람들끼리는 엄청난 유대와 존경이 생기는 영향도 있는 것 같구요.

간만에 탈진할 정도로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번역서도 아니었는데 말이에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 정본 C. S. 루이스 클래식
C.S.루이스 지음, 김선형 옮김 / 홍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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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악마 스크루테이프가 자신의 조카이자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풋내기 악마 웜우드에게 악생의 선배이자 직장 상사로서 따끔한 충고를 담아 31통의 편지를 보낸다. 신과 함께, 영원히 살며 수많은 영혼을 타락시켜온 대악마의 눈에 유혹이랍시고 펼치는 조카의 기술들이 얼마나 어설퍼보였을까? 인간의 신앙에 내재한 모순과 약점을 정리해 더 효과적인 기술을 전수하려는 <악마 생활 지침서>. 이것이 바로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다.


이 책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 모두에게 깊은 통찰을 전해준다. 기독교인 입장에서는 스크루테이프의 충고에 정반대로 행동하면 믿음의 깊이를 더할 수 있고, 비기독교인이라면 기독교의 교리와 교인의 마음속에 내재한 모순을 파악해 비판과 논쟁의 주제로 삼을 수 있다. 하나님을 믿든 안 믿든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는 귀담아들을만한 충고로 가득하다.


사실상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데다 온갖 범죄자들의 신분 세탁 도구로 목사라는 직업이 선택될 정도로 안수 과정에 체계가 없고, 헌금과 성전, 교인의 규모로 서로를 줄 세우는 한국 기독교의 입장에서 스크루테이프의 지적은 찔리는 데가 많을 것이다. 요즘 악마들은 전부 교회에서 산다는 대악마 스크루테이프의 말씀은 그야말로 이마를 탁, 칠 정도의 탁월한 지적 아닌가!


종교가 없는 사람에게 옳은 행동의 기준은 양심에 있다. 양심은 맹자의 측은지심과 같은 선천적 선함과 오랜 시간 갈고 닦인 사회적 규범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이 중엔 생명을 존중하고 사랑하는 마음처럼 결코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는가 하면 시대의 변화와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해 지속적으로 바뀌는 것들도 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은 고뇌와 갈등을 경험하며 그 결과 과거의 행위를 반성하거나 격렬한 시비를 다투기도 한다.


반면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의 말씀을 따르는 종교인들에겐 그 어떤 모순과 악행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하는 막강한 심리적 방어기제가 주어진다. 갈등과 고뇌는 악마의 시험일뿐이다. 신실함은 얼마나 맹목적인가로 측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학살과 살인이 모두 종교의 이름으로 거행됐던 것이다.


신의 뜻은 세속적 성공, 특히 돈과 결합했을 때 도덕적 모순을 지우는 강력한 세탁기가 된다. 믿음의 크기는 얼마나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십일조를 했는가로 정해지고 장로에게는 교회 운영에 보탬이 되는 강력한 재력이 요구되지만 아무도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본인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더 이상 문제 삼기도 어려울 정도로 흔한 일이 되어버렸다. 도대체 '배우자 기도'란 어떤 교리를 근거로 만들어진 걸까? 오늘날 기독교는 믿음이 믿음으로 이어지는 신앙 공동체가 아니라 돈이 돈으로, 기회가 기회로 이어지는 경제 공동체에 가깝다. 사업가는 헌금을 내고 사업 기회를, 정치인은 표를, 결혼 적령기의 남녀는 좋은 배우자를 얻어간다. 헌금은 이 모든 서비스를 제공하는 신앙 플랫폼의 수수료와 다름 아니다.


C.S 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의 편지를 통해 기독교인들이 각성하기를 원했겠지만, 이 시도가 성공적이었나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오로지 신의 사랑을 느끼기 위해 모였던 신앙 공동체는 핍박을 피해 어두운 지하 묘지에서 예배를 보던 시절에 이미 끝나버렸다. 인간이 신앙을 유지하는 동기는 결국 믿음에 대한 보상으로 속세의 평안과 천국의 입장권을 받을 것이라는 기대에 있다. 사도신경을 외워본 사람이라면 끝부분으로 갈수록 고조되는 감정에 가슴이 벅차오르는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 믿음의 근원은 산자에 줄 서려는 욕망인가? 아니면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분에 대한 순수한 사랑인가? 아무래도 나는 아주 오랫동안 스크루테이프에게 영혼을 잠식당해 온 것 같다. 부디 여러분에게는 그 유혹에서 벗어날 용기와 믿음이 가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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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겟돈을 회상하며
커트 보니것 지음, 이원열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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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나는 니체와 다자이 오사무에 빠져 다소 우울한 시간을 보냈다. 빛이 들지 않는 구석진 서가에서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질릴 때까지 책을 읽는 게 유일한 취미였다. 스스로 책을 사서 읽을 수 있게 된 이후에는 더 다양한 작가에 탐닉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이 포함된 전쟁 3부작을 읽은 뒤로 시오노 나나미의 역사책에 빠졌고 우연히 극장에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를 본 뒤에는 코맥 매카시의 번역서를 모조리 사다 읽었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라는 영화를 봤을 때도 비슷했다. 나의 존 르 카레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엘러건트 유니버스>를 읽었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생생하다. 끈 이론에 빠져 <우주의 구조>까지 단숨에 내달렸고 이후 그가 쓴 책이라면 따지지도 않고 집어 들었다. 내 서가의 과학 분야에서 가장 많은 자리를 차지한 작가는 지금도 여전히 브라이언 그린이다. 미쳐버릴 정도로 좋아했지만 번역서가 거의 없거나 작품 자체가 많지 않아 몇 권의 책으로 그친 작가도 있다. <사피엔스>의 유발 하라리와 <밤의 파수꾼>의 켄 브루언이 그렇다. <밤의 파수꾼>을 펴낸 랜덤하우스 코리아의 편집자를 만나면 나는 언제 어디든 두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리고 싶다.


그리고,


그리고, 내게는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가 있다.


썼던 글을 뒤져보니 내가 이 새로운 신을 마음속에 영접한 건 2010년에서 2011년 사이였던 것 같다. 첫 책은 <제5 도살장>이었다. 거의 1~2주 간격으로 커트 보네거트의 책이 올라온 걸 보면 심각한 중독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는 내게 그런 존재였다. 도저히 잊으래야 잊을 수 없고 떨쳐낼 수 없는 절대자.


한창 소설을 쓰던 시기에 글이 잘 풀리지 않고 벽에 부딪혔다는 생각이 들면 <타임퀘이크>를 꺼내와 필사를 하곤 했다. 그의 글을 옮겨 적는 동안엔 아무 생각도, 아무 걱정도 내 마음을 넘겨보지 않았다. 딩동댕, 딩동댕~


주니어는 1922년에 태어나 2007년에 죽었다. 그의 말마따나 너무 오래 살았고 여기저기 싸질러 놓은 글과 말은 셀 수도 없이 많았다. 살아생전 너무 큰 사랑을 받은 작가는 죽고 난 뒤 남겨진 이들에게 쓸데없는 짓을 저지르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한다. 주고받은 편지를 공개한다거나 미발표 원고 또는 연설문을 엮어 책을 내는 것이다. 어떤 작가들은 이런 걸 너무 끔찍하게 여겨 원고를 전부 불태우거나 공개하지 못하도록 유언을 남기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재치 넘치고 유머러스한 이 할아버지는 그런 유언을 남기기도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마크 보네거트는 주니어의 아들이었고 그 역시 작가였다. 나는 그의 마음속에서 아버지의 자리가 얼마나 컸을지 이해하고, 주니어의 팬으로서 그의 글을 한 문장이라도 더 읽는 게 얼마나 큰 위안이 되는지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겟돈을 회상하며>는 이 세상에 나오지 말았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주니어는 글쓰기로 따지면 뚜벅이 중의 뚜벅이였다.


아버지는 고쳐 쓰고 고쳐 쓰고 또 고쳐 쓰셨다. 고개를 앞뒤로 까닥거리며 방금 쓴 것을 거듭 웅얼거리고, 손짓을 해가며 높낮이와 리듬을 바꾸었다. 그러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몇 자 적지도 않은 종이를 타자기에서 조심스레 빼낸 뒤, 구겨서 던져 버리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p.7)


그런 작가에게 스스로 퇴고를 마치지 않는 글을 세상에 내놓는 건 벌거벗은 몸으로 타임스 스퀘어를 달리는 것보다 끔찍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내 마음을 가장 흔든 건 아들 마크 보네거트가 쓴 서문이었다. 그의 단어 하나하나에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말린 꽃처럼 은은하게 스며들어 있었다. 떠난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그를 회고하는 것이 이토록 따뜻하고 충만한 일이라는 걸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우리의 추모는 거기서 끝났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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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 - 전쟁의 기원에서 미래의 전쟁까지, 한 권으로 읽는 전쟁의 세계사
제러미 블랙 지음, 유나영 옮김 / 서해문집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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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기존의 전쟁사를 비판한다.


첫째는 기존의 전쟁사가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으로 기술되어 왔다는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만 해도 그렇다. 물론 2차 세계대전은 일본의 참전으로 아시아까지 확전 되기는 했지만 사실상 일부 유럽 국가 + 미국의 전쟁을 세계대전이라 부르다니, 아시아에 사는 작고 노란 나로서는 왠지 모르게 어깨가 움츠러든다.


저자는 이른바 중심이라고 간주해온 세계에서 한 발 물러나 전쟁사를 기술한다. 아프리카나 중국, 에스파냐 정복 이전의 라틴아메키라, 오스트레일리아 심지어 이순신의 임진왜란까지. 이슬람 전쟁사를 다룰 때도 유럽과 이슬람의 대립에 집중하던 기존의 시선을 거두고 오스만과 페르시아(지금은 다 이슬람 국가지만 페르시아는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조로아스터교의 발상지이다)의 다툼에 주목한다.


뿐만이 아니다. 저자는 국가나 문명권 사이에 군사 역량의 위계가 존재한다는 가정에도 비판을 가한다. 로마 대 야만인, 중국 대 오랑캐, 멋지고 점잖은 기사단과 잔인하고 미개한 이슬람의 대결은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역사 왜곡에 불과하다. 로마의 군사 기술이 더 뛰어났다면 그들은 왜 패배했을까? 왜 한족은 변방 중의 변방에 불과한 만주족에게 그 광활한 영토를 빼앗긴 걸까? 중무장한 채 거대한 군마 위에 올라탄 기사를 보면 가죽 갑옷에 낙타를 탄 이슬람 군대가 하찮고 미개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기후와 전략이 달랐기 때문이지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실제로 유럽의 기사단은 1차 십자군 전쟁에서 짧은 기간 동안 몇몇 도시를 점령했을 뿐 이슬람 문명의 심장부를 제대로 찔러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심지어 그들이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건 그 자신의 역량이라기보다는 이슬람 국가들 사이의 지긋지긋한 분쟁 때문이었다.


둘째는 전쟁사가 특정 인물과 전투에 집중하는 경향이다. 코끼리를 타고 알프스를 넘어 로마를 침공한 한니발은 고대 전쟁사에서 전투의 신으로 기록된다. 특히 로마군을 완패시킨 두 번의 대회전에서 구사한 포위 전술은 포에니 전쟁을 기술하는 책들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주제다.


그러나 한니발은 로마 본토의 상당수를 점령하고서도 결국 전쟁에서 패배한다. 로마는 추가 보급이 불가한 카르타고 군의 약점을 파고들었고 중앙을 내줄지언정 항구만큼은 지켜내는 전략을 구사하며 버티고 또 버텼다. 한니발은 결국 항구를 확보하기는 했으나 이 전쟁을 지속하느냐 마느냐로 갈등이 폭발한 본국의 정치 상황 때문에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절대 질 것 같지 않던 전투의 신은 아프리카에서 완패했고 이후 지중해 역사에서 카르타고는 삭제된다.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건 전투와 전술뿐만이 아니라 전략, 정치, 병참, 통신 같은 다양한 요소의 결합이다. 전투와 그 전투를 이끈 영웅에 집중하다 보면 그 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과소평가하는 결과를 낳는다.


여러 가지 신선한 대목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거의 모든 전쟁의 역사>를 재미있는 책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문제가 있다. 나 또한 전쟁과 전략보다는 전술을 기대하며 이 책을 펴 든 것이 사실이다. 이야기를 즐기는 입장에서는 사실 거시적 관점보다는 영웅의 이야기와 뛰어난 전술이 더 재미있지 않은가? 한편 인류 문명의 전쟁사를 핵심만 꾹꾹 눌러 담아 깊이 있게 꿰뚫었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 39개의 장을 400쪽에 담은 책이다. 각각은 너무 짧고 많은 부분이 생략된 느낌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전쟁사 책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몇 층에서 떨어지든 지상의 보행자에게 치명상을 입히고도 남을만한 벽돌 책이 드물지 않다. 하지만 짧은 책은 명확한 설명을 제시하기 위해 전쟁의 본질을 단순화할 위험성과 전개 과정을 해명하기 위해 인과적 내러티브를 동원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p.400)


아주 정확한 지적이지만, 그래서 이 책은 이도 저도 아닌 맛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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