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포로 아크파크 3 : 프로세스
마르크-앙투안 마티외 글 그림, 이세진 옮김 / 세미콜론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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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권에서 세계의 빅뱅을, 2권에서 색의 축복을 입은 아크파크가 이번엔 뒤틀어진 시간축에서 길을 잃은 방랑자가 된다.
  

 

 

3권의 첫 머리, 아크파크는 여지없이 꿈에서 깨어난다. 갈수록 심해지는 공간난을 해소하기 위해 아크파크의 옷장에 그의 동료가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언제나 서서 자야만 하는 불쌍한 영혼. 밤에도 편안히 잠들지 못하는 현대인의 고된 숙명. 아크파크는 자신의 불쌍한 처지를 강조하는 동료의 아쉬운 소리를 피해 출근 준비를 서두른다. 그런데 이 때 아크파크의 침대 위에서 또 한 명의 아크파크가 깨어난다. 이것은 여전히 꿈인가? 

 

 

 

이제 웬만한 사건에는 덤덤한 아크파크는 침대에 누가 누워 있든 게의치 않고 자신을 데리러 온 택시에 오른다. 방금 침대에서 일어난 아크파크는 이 상황이 무엇인지 깨닫고 출근하는 아크파크는 만류하지만 이미 택시는 떠나간 뒤다. 잠옷 차림의 아크파크는 총알 택시를 잡아 타고 자기 자신을 뒤 쫓기 시작한다.   

 

 
 

 <출처: 세미콜론 공식 블로그>

 

도시의 심각한 공간난은 도로에도 영향을 미쳤다. 자동차처럼 거대한 공간을 점유하는 운송 수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도시의 택시는 자전거다. 게다가 도로는 건물과 건물 사이를 연결해 놓은 외줄! 심지어 이 외줄은 건물의 창문을 통과해 가정집의 부엌을 가로 질러 반대편 창문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아크파크가 탄 총알 택시는 이 외줄 위에서 아슬아슬한 곡예를 펼치며 목적지를 향해간다. 그 행위의 결과가 무엇이 될지도 모르는 채, 인간은 아찔한 외줄 위에서 광속의 춤을 춘다.

택시 위에서 스쳐 지나간 증권 거래소는 이 세계의 민낯을 잔인하게 보여준다. 거래소의 입구에 드러난 말은 '투.기.하.여.라'. 시장은 전반적으로 하락장인데 그 종목을 보면 더 가관이다. 의지, 충성, 정직, 용기, 인내, 올바름, 관용, 자비... 이 중 가장 큰 폭으로 하락한 종목이 바로 의지와 소박함, 연대와 나눔이다. 

 

  

 

배금주의의 황야 위에서 부질없는 욕망을 끝없이 쫓아 달리는 현대인. 한 뼘의 공간이라도 더 차지하기 위한 인간의 이기심. 그리고 그 공간을 보장해주는 현실 권력에의 복종과 순응. 이같은 부조리는 아크파크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이미 철저히 내재화되어 있어 어떠한 비판과 저항도 불가하게 만든다. 체제에 대한 저항 의지는 소박함과 나눔을 부활시키고, 이것이 곧 거대한 연대가 되어 새 세상을 끌어내는 바퀴가 되지만 이 세계에서 의지와 소박함, 연대와 나눔은 여전히 하한가를 기록 중이다. 

아크파크가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꿈 공장이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와 좌절을 치료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이 공장은, 그러나 현실을 넘어 인간의 꿈까지 통제하려는 목적으로 세워진 건 아닐까 의심스럽다. 아크파크는 이 곳에서 천장 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로 오인되어 잘못된 꿈 시술을 처방받는다. 그가 빠져든 꿈은 바로 천장이 사라진 아크파크의 집! 아크파크가 침대에서 일어나 사라진 천장이 있던 자리로 올라서자 그 곳엔 바둑판처럼 똑같은 방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어느덧 자신이 깨어난 방을 잃어버린 아크파크가 하염없이 꿈 속을 헤매고 있는데 이 때 수상한 회오리가 나타나 아크파크를 꿈의 중심 속으로 빨아 간다. 그리고 뒤통수를 강타하는 굉장한 연출! 

 

 

 

꿈의 중심에 도착한 아크파크는 바닥에 널린 컷들을 헤매는 동안 발을 헛딛어 그 중 하나에 빠지기도 한다. 그 순간 아크파크는 이것이 꿈 속의 꿈임을 깨닫는다. 꿈 속에서 길을 잃고 방황하던 아크파크가 안내소에 도착해 천장에서 떨어지는 또 다른 아크파크를 목격한 컷은 곧이어 안내소를 나와 꿈의 중심으로 이동한 아크파크가 발을 헛딛어 빠져버린 컷이었기 때문이다. 



 
 

 

정신이 번쩍 든 아크파크는 서둘러 자신의 방을 찾아 떠난다. 이 꿈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면 꿈을 마무리 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방을 찾은 순간, 아크파크는 3권의 첫 부분, 바로 출근 준비를 하는 아크파크가 침대에 누운 아크파크를 발견한 컷으로 되돌아 온다. 꿈의 포로 아크파크.  

 

<이 글의 두 번째 그림과 비교해 보라>  

꿈의 포로 아크파크 시리즈 3권 '프로세스'는 무한의 프로세스를 얘기한다. 아크파크는 꿈에서 깨어나 그 무한의 고리를 끊으려 하지만 현실은 정해진 운명에 따라 또 다시 꿈으로 빠져든다. 꿈과 현실의 무한 반복. 끊임없이 돌을 굴려야 하는 언덕 위의 시지프스.

3권 프로세스는 카프카의 패러디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을 정도로 '부조리'란 개념을 환상적으로 그려낸다. 비록 시지프스 신화를 강조한 것은 카뮈지만 꿈과 현실, 2차원과 3차원, 허상(만화)과 실재(우리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환상적 표현법은 정녕 카프카가 살아 돌아온 것처럼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 만화는 고작 46페이지다. 그러나 이 46페이지를 그리기 위해 작가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얼마나 철저한 계산을 했을지, 그 땀과 노력에 경외를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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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볼 - 불공정한 게임을 승리로 이끄는 과학
마이클 루이스 지음, 윤동구 옮김, 송재우 감수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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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효율이라면 질색하는 서구 문명 사회가 자기 고유의 논리적 체계로 포섭하지 못한 영역이 있었으니 그게 바로 스포츠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볼까?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부자 구단 첼시는 연간 수 백억을 들여 스타 선수를 영입하지만 여지껏 단 한번도 챔피언스리그에서 우승하지 못했다. 돈 쓰기로 따지면 첼시의 엉덩이도 우습게 걷어 찰 맨시티는 같은 리그의 하위권팀 5개를 살 수 있는 돈으로 리그 3위를 얻어냈다. 바다를 건너 미국으로 날아가 보자.
  

 

 

미국에서 '돈지랄'로 유명한 곳을 꼽자면 뭐니뭐니해도 월스트리트겠지만 오늘은 스포츠에 대해 얘기하는 날이므로 미국 야구 얘기를 꺼내지 않을 수가 없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부자 구단인 뉴욕 얭키스는-발음이 참 좋다 - 2002년 개막일 당시를 기준으로 총 1억 2,600만 달러의 연봉을 선수단에 지급했다. 그래도 이 팀은 곧잘 플레이 오프에 진출하고 종종 월드 시리즈 우승도 거머쥐니 맨시티 보다는 봐줄만 하다. 그러나 이정도 돈이라면 편의점에서 껌을 사오듯 월드 시리즈 우승을 해도 전혀 이상할게 없는 액수다. 공교롭게도 월스트리트와 양키스는 모두 뉴욕에 있다.   

그렇다면 이 정도 돈을 들이고도 언론과 지역 주민,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내가 이 구단의 관계자라고 자랑할만한 일을 단 하나도 해내지 못하는 팀이 있을까? LA 다저스와 텍사스 레인저스 그리고 뉴욕 메츠와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바로 그들이다. 이 네 팀은 메이저리그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부자구단이지만 메이저리그 최종 성적에서(2000년대 초반) 줄줄이 꼴찌를 차지했다. (텍사스 레인저스의 예전 구단주가 바로 조지 부시다!) 그렇다면 반대로 빈약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좋은 성적을 내는 팀이 있을까? 바로 이 책의 주인공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 그들이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뉴욕 얭키스가 1억 2,600만 달러를 쏟아 부으며 메이저 리그에 배금주의를 실현하고 있을 때 고작 3,400만 달러만을 투자해 양키스와 맞서 싸운 전설적인 팀이다. 비록 그들은 2000년과 2001년 포스트 시즌에서 얭키스와 맞붙어 단지 아웃 카운트 몇 개 만을 남겨 둔 채 패배하고 말았지만 그 누구도 오클랜드를 비난할 수는 없었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같은 지구에 속한 텍사스 레인저스가 한 경기 승리를 위해 무려 300만 달러를 지불할 때 고작 50만 달러만을 지불하는 팀이었다. 메이저 리그에서 오클랜드보다 많은 승수를 올리는 팀은 애틀란타 브레이브스가 유일했다. 덕분에 오클랜드 어슬레틱스는 무려 4시즌 연속 포스트 시즌에 진출하는 쾌거를 거두었으며 그 중 두 번이 바로 위에서 말한 양키스와의 혈전이었다.

오클랜드 어슬레틱스가(이하 A's) 승리를 위해 취한 전략은 간단했다. 바로 낭비를 하지 않는 것. 메이저 리그의 부자 구단들이 선수의 타율과 도루에 열을 올리고 있을 때 A's는 출루율과 사사구를 얻어내는 능력에 집중했다.

그들의 논리는 간단 명료했다. 점수를 얻으려면 아웃 카운트를 낭비해선 안된다. 따라서 A's가 타자에게 요구하는
능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누상에 진출하는 참을성이었다. 아무 공에나 방망이를 휘두르는 습관은 A's에선 '지옥에나 꺼져버릴' 저주에 속했다. 

 

 

 

A's는 지난 수십년간 메이저 리그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직관적 미신을 - 수 십년간 메이저 리그에서 종사해온 베테랑들의 비과학적 직관 - 쳐부수기 위해 촘촘하게 짜여진 과학적 통계를 활용했다. 그들의 계산에 따르면 A's가 포스트시즌에 진출하기 위해 얻어야 하는 승수는 95게임 정도였다. 그리고 95경기를 승리로 가져가기 위해서 상대팀보다 최소한 몇 점을 더 획득해야 하는지 계산해 보았다. 그것은 135점이었다!  

다음으로 A's는 자신들이 보유한 인내심 많고 까다로운 선수들이 얻어올 점수와 상대팀에 뺏길 점수를 계산해 보았다. 만약 부상이나 시즌 중 트레이드 같은 변수만 발생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800점에서 820점을 기록할 것이고 650점에서 670점 사이의 점수를 내어줄 것이었다. 이로써 A's는 93경기에서 97경기를 승리할 것이고 결국 플레이오프에 진출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A's는 선수를 트레이드함에 있어서도 이같은 통계와 철학을 철저하게 적용했다. 특히 그들은 팬들을 비롯 야구 관계자들까지 광분하게 만드는 선수들의 갖가지 기록을 있는 그대로 믿지 않았다. 예를 들어 매년 3할 2푼 7리를 치는 타자가 있다면 그는 분명 메이저리그의 톱 타자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친 안타가 타점이나 득점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3할 2푼 7리라는 기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한단 말인가? 그래서 A's는 2할 7푼 4리를 치지만 출루율과 장타율이 상대적으로 높은 선수들을 선호했다. 앞선 타자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누상에 진출해 있었기 때문에 다음 타자의 장타는 그들을 홈으로 불러들이기가 아주 쉬웠던 것이다(혹은 장타 두개 - 2루타, 2루타면 쉽게 1점을 얻을 수 있다). 

 

 

A's의 투수 선택법은 타자와 정반대라고 생각하면 쉽다. 그 말은 어느 마이너 리그 투수가 4구를 잘 내주지 않고 장타를 허용하지 않는다면 A's의 레이다망에 걸려들었다는 얘기다. 추가로 A's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투수는 경기 상황을 창조하고 게임의 색조를 설정할 줄 알아야 했다. 이 말은 투수가 어떠한 위기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게임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갓 졸업한 고교생 투수들에게는 확실히 기대하기 힘든 능력이었다.

A's는 153km를 뿌리며 혜성같이 등장한 고교생 괴물 투수가 어느새 희미해진 꼬리를 끌며 메이저 리그에서 영원히 사라져 버리고 마는 일을 아주 단순한 통계를 통해 확인했다. A's는 이 단순한
통계를 통해 투수의 경기력이 구속이 아닌 나이와 경험에 비례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이와같은 이유로 A's의 드래프트 1순위 명단은 그들의 관점에서 언제나 굉장한 선수들로 가득 채워졌다. 한가지 다행인건 메이저 리그에 속한 나머지 29개의 구단 중 어느 한 팀도 이 명단을 굉장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따르는 또 다른 행운은 A's가 지명하는 대부분의 선수들이 자신이 1순위에 지명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치 못한 선수들이라는 것이었다. A's의 1순위 지명자들은 다른 구단이 지명하는 스타 선수들과 달리 높은
계약금 문제로 아웅다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이 1순위에 지명됐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보상받았다고 생각하는 선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을 알아준 A's에 쉴새없이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를 표했고, 다른 팀의 1순위 지명자들이 받는 계약금 보다 수십만 달러가 적은 계약서에 손 쉽게 서명했다. 

   

<A's에 과학적 통계와 진정한 경영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단장 빌리빈>

 

A's에 과학적 통계와 진정한 경영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고 수십년 동안 메이저리그를 지배해 오던 엉터리 미신을 쓰레기통에 쑤셔 넣은 인물이 바로 A's의 단장 빌리 빈이다.

빌리 빈은 선수 시절 최고의 신체 조건과 괴물같은 운동 신경을 지닌 초특급 인재였다. 스카우터들은 예의 베테랑의 직관을 덧붙여 '빌리 빈의 장미빛 미래'라는 터무니 없는 소설을 썼고 대학 진학을 희망하는 옹골찬 젊은이에게 '지옥에나 꺼져 버릴' 바람을 넣어 프로 야구팀과 계약하게 했다. 이후 빌리 빈은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를 수시로 들락거리며 20대를 허비했고 27세에 이르러 야구를 그만두게 된다.

그의 통산 타율은 2할 1푼 9리, 홈런은 3개였다.

빌리 빈이 선수 시절 스카우터들로 부터 배운 건 그들이 하는 말이 모조리 거짓말이라는 것이었다. A's의 단장에 취임한 뒤에도 빌리 빈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다. 스카우터들이 고교 출신 괴물 선수를 발견해 돌아와 침을 튀기며 온갖 미사여구를 쏟아 내도 빌리 빈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그 수 많은 미사여구들은 바로 18세의 빌리 빈이 들었던 얘기였기 때문이다.

빌리 빈이 스카우터들의 미사여구 대신 선택한 것은 그 동안 메이저리그가 손대지 않은 먼지 묻은 데이터와(출루율과 장타, 사사구 비율) 그 데이터를 분석할 컴퓨터였다. 그는 이 둘을 이용해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가난한 구단 A's를 2000년대 최강의 팀으로 변신시켰다.

2011년 현재, 그는 여전히 A's의 단장직을 수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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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1-01 0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한깨짱 2012-01-01 16:32   좋아요 0 | URL
리뷰를 재밌게 보셨다니 정말 감사합니다! 그런데 전 책을 모으는게 취미라서요. 게다가 책을 좀 지저분하게 보는 편이랍니다. 신판 번역이 별로라니 의외네요. 알라딘 중고장터에 머니볼 정도는 꽤 있지 않을까요?
 
위대한 유산 1 대교북스캔 클래식 20
찰스 디킨스 지음, 이순주 옮김 / 북스캔(대교북스캔)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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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은 기네스 펠트로와 에단 호크가 출연한 영화 위대한 유산과는 좀 다르다. 물론 영화 위대한 유산이 소설 위대한 유산을 원작으로 한 것은 맞다. 그러나 영화에선 시대가 바뀌었고 결말 또한 소설보다는 장밋빛 해피엔딩에 가까웠다.

영화가 소설과 다른 점을 더 꼽으라면, 분위기다. 찰스 디킨스의 원작 소설은 세태를 꼬집는 은근한 풍자, 그리고 유머러스한 문체가 두드러진 작품이었다. 반면 영화는 미스테리와 멜로가 뒤엉켜 전체적으로 알쏭달쏭 신비스러운 매력을 풍기는 작품이다. 따라서 소설을 먼저 보고 영화를 나중에 보고 하는 등의 고민은 이 위대한 유산에는 통하지 않는다. 둘 중에 무엇을 먼저 보더라도 각각의 감상에 방해가 될 일은 없을 것이다.








주인공 핍은 포악한 누나 밑에서 '손수' 길러진 아이다.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었다.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읜 대다수의 소년들이 그렇듯 핍은 천덕꾸러기로 자라났다. 핍을 칭찬하거나 사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핍의 누나 가저리 부인은, 핍같은 말썽 꾸러기를 '손수' 기르는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리고 핍 자신은 그것에 대해 얼마나 깊이 감사해야 하는지를 아낌없는 매와 구박으로 알려주는 것을 하루의 중요한 일과로 생각할 정도였다. 이런 핍이 그나마 크게 비뚤어지지 않고 자랄 수 있었던 이유는 대장장이 조 가저리 덕분이었다. 조 가저리는 누나의 남편이었다.

그런데 도저히 나아질 것처럼 보이지 않던 핍의 인생에도 일대 전환기가 찾아온다. 상류 계급에 속하는 미스 해비샴과 에스텔라를(영화에선 기네스 팰트로) 만나게 된 것이다.

미스 해비샴은 결혼식 날 남자에게 버림 받은 후 오랜 시간 세상을 등진채 살아온 늙은 여자였다. 남자를 향한 끝모를 복수심은 평생동안 그녀의 삶을 이끌어온 유일한 에너지였다. 미스 해비샴은 이 세상 모든 남자들을 향해 복수를 꿈꿨다. 그리고 그녀의 양녀 에스텔라는 이 복수극의 주인공이었다.

에스텔라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소녀였다. 그러나 미스 해비샴은 그녀의 가슴에서 뜨거운 사랑을 꺼내 차가운 심장과 바꿔치기 했다. 핍은 에스텔라를 보는 순간 평생 그녀를 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직감을 하지만 에스텔라에겐 사랑이 없었다. 그녀의 눈은 오만했고 하층민으로 자란 소년의 태생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핍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경험한다. 그는 자신의 집과 대장간, 안개에 싸인 고향 마을과 마을 사람들, 심지어 언제나 자신의 친구가 되어 줬던 매형 조 가저리마저 싫어졌다. 핍은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자신의 태생을 저주하고 원망했다.








이후로도 핍은 몇번 미스 해비샴의 저택을 방문해 그녀 앞에서 에스텔라와 카드 놀이를 하고 그녀에게 무시당하고 그녀가 마당 위에 내어 주는 음식을 먹었지만, 에스텔라가 외국으로 떠나버리는 바람에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그걸로 끝이었다. 

후에 핍도 정체 모를 은인에게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아 런던으로 떠나게 된다. 그는 지긋지긋한 대장간의 일상과 안개낀 늪지대와 자신을 괴롭히던 마을 사람들로 부터 떠난다는 생각에 행복해 했다. 
그러나 에스텔라와의 추억, 그 아련하고 가슴시린 기억은 끝내 앙금으로 남아 가슴에 쌓여 있었다.

400쪽이 넘는 양장본 2권으로 이뤄진 소설 '위대한 유산'은 바로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신사 수업을 위해 런던으로 건너간 핍은 그곳에서 상류 계급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출신과 처지를 완전히 잊고 지낸다. 그는 어린 시절 유일한 친구가 되어줬던 매형 조가 자신의 런던 집을 찾아오는 것을 달가워 하지 않았다. 핍은 식탁 위에서 보여준 조의 매너가 창피했고 그의 촌스러운 정장을 싫어했다. 얼마전 까지만해도 조의 도제로서 하루 종일 망치질을 했던 대장장이 소년은, 이제 배은망덕한 속물이 되어 자신의 뿌리를 부정하고 있었다.

달라진 것은 핍만이 아니었다. 핍이 막대한 유산을 물려 받았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마을로 퍼졌다. 핍은 더이상 마을의 천덕꾸러기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알아서 길을 비켜 주었고 핍에게 어울리지 않는 존칭을 썼다. 심지어 핍의 어린 시절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해쳐 놓곤 하던 펌블추크 마저 완전히 태도를 바꿔 자신이 핍의 절친한 친구이자 그의 성공을 위해 아낌없는 희생을 보여준 위대한 후원자로서 행세하기 시작했다. 핍은, 고향이 싫어졌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minju8230&logNo=10106439011>


핍이 조 가저리의 대장간을 다시 찾은건 그로부터 십 수년이 지난 다음이었다. 그는 빈털터리가 되어 고향 마을의 호텔 블루 보어에 도착했다. 그가 빈털터리가 됐다는 소문은 그보다 먼저 마을에 도착해 있었다. 블루 보어의 
주인은 더 이상 핍에게 좋은 방을 내주지 않았다. 핍은 자신을 쳐다보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번화가를 가로 질러 고향집으로 향했다. 그는 자신이 진 빚, 결코 적지 않은 액수를 조 가저리가 갚아줬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이 변하던 시절에도 조건없는 사랑을 전해줬던 조. 무식하고 촌스럽지만 흔들리지 않는 우정을 보여줬던 진정한 친구. 핍은 오랜 시간을 헤맨 끝에, 비로소 '위대한 유산'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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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의 해석 돋을새김 푸른책장 시리즈 8
지크문트 프로이트 지음, 이환 옮김 / 돋을새김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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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를 이해하는 사람의 경우, 프로이트는 어렵다. 그의 언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가 어려운 이유는 그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탐구된 적이 없는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전인미답의 정글을 헤쳐나가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를 무수하게 만들어 냈다. 재차 말하자면, 프로이트의 어려움은 그가 만들어낸 언어의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다.

한국어만 이해하는 사람의 경우, 프로이트는 어렵다. 그의 언어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의 언어가 어려운 이유는 그가 인류 역사상 한 번도 탐구된 적이 없는 분야를 연구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 전인미답의 정글을 헤쳐나가기 위해 자신만의 언어를 무수히 만들어냈는데, 젠장 그건 모두 독일어였다. 다시 말하면, 프로이트의 어려움은 그가 만들어낸 언어의 어려움과 무관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번역의 어려움과도 무관하지 않다. 이 무관하지 않은 상황 속에서 당신이 결국 내 리뷰를 통해 프로이트에 도전하든 그것을 비하하든 그건 나와 완전히 무관한 일이라는 걸 밝혀두고 싶다. 

 

 

 

<꿈을 꾸는 이유>

꿈을 꾸는 데도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수면을 방해하는 신체적 자극을 꿈으로 제거함으로써 우리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꿈을 꾸는데 좀 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건 바로 소망 충족의 욕구였다. 우리는 현실 세계에서 이루지 못한 일들을 꿈 속에서라도 이루고 싶어한다. 그리고 이런 강렬한 욕망은 곧 꿈으로 나타나 잠자는 동안 만이라도 흐뭇한 미소를 짓게 만든다. 문제는 이 꿈이 우리가 상상한대로만 나타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꿈의 재료>

꿈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에서 재료를 수집한다. 꿈에서 묘사하는 사건은 어렸을 때의 추억을, 어제 본 영화를, 낮 시간에 겪은 회사일을 배경으로 한다. 심지어 자신은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일이라도 꿈에서는 싱싱한 재료가 되곤 한다. 꿈에서 생경한 장소나 인물이 나타났다면 그것은 꿈이 당신의 잊혀진 기억으로부터 재료를 택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의 무의식이 꿈과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암시한다.
 

<중간 정리>

앞서 말했듯이 꿈은 현실 세계와 욕망을 반영한다. 물론 이 반영 과정이 언제나 온전하게 이뤄지는 것은 아니다. 꿈은 우리가 겪는 수 많은 일들은 과장하거나 생략하고 때로는 뒤죽박죽 섞어 버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장면들을 만들어 낸다. 꿈의 해석이 어려운 이유는 이처럼 왜곡된 꿈의 내용을 두드려 펴 본래의 모습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꿈의 사고와 내용>

말을 할 때를 가정해 보자. '나는 배고프다'라는 말은 어디서 나왔나? '나는 배고프다'라는 생각에서 나왔다. 여기서 '나는 배고프다'라는 말은 표현이고 '나는 배고프다'라는 생각은 말 그대로 생각이다. 우리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 표현을 할 수 없다. 표현은 생각에서 나온다.

꿈에도 '생각의 세계'가 있고 '표현의 세계'가 있다. 우리가 꾸는 꿈이 '표현의 세계'라면 '생각의 세계'는 그 꿈을 꾸게 만든 원인이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표현의 세계'는 꿈 자체를, '생각의 세계'는 무의식적 욕망, 무의식적 기억, 일상의 경험 등을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꿈은, '생각의 세계'를 떠난 씨앗이 '표현의 세계'에서 발화하는 일종의 성장기인 셈이다. 

 

 

 

그러나 생각의 세계를 떠난 장미 씨앗이 표현의 세계에서 개나리로 피어나는 게 바로 꿈의 세계다. 씨앗은 다양한 도시를 경유하며 공항의 검색대를 통과한다. 그 때마다 씨앗은 강도 높은 검열을 당한다. 사상이 불순하거나 욕망이 저열하면 씨앗은 어김없이 체포당한다. 따라서 씨앗은 얼굴을 바꾸고 옷을 갈아 입는다. 씨앗은 말투를 바꾸고 마치 다른 사람처럼 행동한다. 하고 싶은 말을 반대로 하는가 하면 완전히 딴소리를 하기도 하고 종종 고차원의 비유를 활용하기도 한다. 

간밤에 꾼 당신의 꿈이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나? 어젯밤 꿈 속에서 당신은 어린 조카의 장례식장에 있었다. 그 조카는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는 아이였다. 그런데도 당신은 전혀 울지 않았다. 대신 당신은 장례식장을 찾아온 한 남자를 보게된다. 당신은 그를 보고 보고 또 봤다. 이제 당신은 그 남자를 보느라 조카의 죽음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 꿈의 목적은 당신과 그 남자의 재회에 있다. 당신은 현실세계에서 남몰래 그를 흠모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남자에게는 아내가 있었다. 당신의 소망은 불륜의 암초에 부딪힌다. 이 때 꿈은 당신과 그의 밀회를 노골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당신은 스스로를 정숙한 여자라고 생각했으며 불륜은 결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라고 믿어 왔다. 이렇게 강력한 이성의 힘이 욕망을 억압할 때 꿈은 스르륵 모습을 바꾼다. 당신은 그 남자와 만나기 위해 조카의 죽음을 이용한다. 

 

 

 

프로이트가 난해함을 넘어서 불쾌하기까지 한 이유는 그가 인간의 어두운 욕망을 밝혀내기 때문이다. 불륜의 환상을 충족하기 위해 조카의 죽음을 이용하는 꿈이 사이코패스의 정신 상태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욕망을 이 같은 매커니즘 속에서 이해하는 프로이트를 결코 인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말한다. 이게 바로 인간이라고. 욕망으로 이글거리는 악마의 모습은,

그저 당신의 옆 모습에 지나지 않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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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누가미 일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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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탐정 김전일이라고 들어 봤는가? 평범한 생김새와는 다르게 그가 가는 곳엔 언제나 피와 살육이 넘쳐 흐른다. 그가 서있는 곳은 언제나 밀실로 변하고 바로 그 곳에서 김전일 소년과 그의 여자친구 미유키, 그리고 몇몇 인원을 제외하고는 모두 살해 당한다. 소년 탐정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있지만 실상은 가는 곳마다 죽음을 몰고 다니는 저주받은 인간. 언제나 모든 사람이 죽고 난 뒤에야 '범인은 이 안에 있어'라고 외치는 소년. 그런데 이 소년이 도저히 풀기 힘든 트릭을 만날 때 마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는 말 한 마디가 있었다. 바로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사건을 해결하겠다는 것. 도대체 할아버지가 누구길래? 당시에는 이 만화의 숨막히는 이야기에 흠뻑 빠져 이런 의문을 가질 여력도 없었다. 짐작하겠지만 지금 내가 하려는 얘기는 소년 탐정 김전일(원제: 킨다이치 소년의 사건 수첩)이 아니다. 바로 그의 할아버지 킨다이치 코스케에 대한 얘기다. 

 

 

킨다이치 코스케는 1948년, 일본의 추리 소설 작가 요코미조 세이시가 탄생시킨 가상의 탐정으로 신장은 다섯 자 네 치(163.3cm 정도), 체중은 십 사관(52.5kg)이라고 한다. 외모는 평범 중에 평범, 차림새는 주로 더벅머리에 중절모를 쓰고 기성복 하카마에 게다를 신은 모습이다. 흥분하면 더벅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을 더듬기 시작한다. 못생긴 외모에 지저분한 습관까지, 그리 인상적인 인물은 아니지만 추리 능력 만큼은 보통이 아니다. 1948년 '혼징 살인 사건'을 해결했다. 그 후로 '옥문도', '팔묘촌'을 거쳐 '이누가미 일족'에 이르러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한다. 이 글은 '이누가미 일족'에 대한 리뷰다.

 

*스포일러 있습니다.

 

 

 

일본 제 일의 재벌, 생사왕 이누가미 사헤이가 81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자 이누가미 일족의 대저택에 팽팽한 긴장감이 조여들고 있었다. 문제는 역시 유산이었다. 

이누가미 사헤이에게는 세 딸이 있었다. 어머니가 모두 달랐다. 그래서인지 자매들끼리 사이가 좋지 않다. 자매들은 각기 아들을 한 명 씩 두고 있었는데, 징집으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는 장손 스케키요를 비롯해 둘째 딸의 아들 스케타케, 셋째의 자식 스케토모가 그들이었다. 짐작하다시피 이들의 사이도 그리 좋은 편은 못된다. 사이가 나쁜 어머니들 밑에서 자랐으니 가족의 끈끈한 정 같은걸 배웠을리 만무하다. 이들은 명목만 가족이었을 뿐 실제로는 남남과 다름없었다.  

더욱이 이들은 일본 최고 재벌가의 손자들 아닌가. 아무리 유산이 많더라도 세 명이 나눠 갖는다면 뒷맛이 개운치 않다. 그러니 그들에게 형제란 차라리 없어져 버렸으면 하고 바라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누가미 사헤이, 이러한 사실을 모를리 없는 이 비밀스러운 남자는 마지막까지 요상한 유서를 남겨 일족을 질투와 욕망의 화산 밑으로 던져 넣는다. 

 

 

이누가미 일족에게는 식객이 한명 있었다. 다마요. 절세의 미녀였다. 다마요는 이누가미 사헤이가 빈털털이 고아일 때 그를 거둬 들인 나스 신사의 신주 노노미야 다이니의 손녀였다. 노노미야 다이니는 이누가미 사헤이를 먹이고 입혔을 뿐 아니라 그가 사업을 시작할 무렵 결정적인 자본을 빌려준 사람이기도 하다. 일본 제 일의 부자가 된 뒤에도 그 은혜를 잊지 않았는지 이누가미 사헤이는 노노미야 가문의 식구들을 극진이 보살폈다고 한다. 다마요의 어머니 노리코 그러니까 노노미야 다이니의 외동딸이 죽고 나자 다마요는 이누가미 일족에 들어와 식객이 된다. 그러나 이누가미 사헤이의 유서가 공개되자 이 식객은 열 두칸 다다미 방을 가득 채운 긴장과 기대감이 순간 질투와 시기, 경멸과 증오로 변해 자신을 찔러 들어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누가미 사헤이가 자신의 모든 유산을 다마요에게 물려줬던 것이다.   

이누가미 일족의 번영에 있어 노노미야 다이니의 역할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누가미 사헤이 보은은 어딘가 이상한 생각이 들 정도로 지나친 것도 사실이다. 아니, 단순히 지나치다고 평하고 그칠일은 아닌게 이 유서가 공개된 이후로 이누가미 가문은 누가 누구를 죽여도 이상할게 없을 정도로 증오와 욕망에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다.  

고아로 태어났음에도 일본 재계를 제패할 정도로 신묘한 남자였던 이누가미 사헤이, 그러나 그도 죽음을 앞에 두고서는 역시 냉철한 판단력을 잃고 말았던 걸까? 한가지 다행인건 다마요가 이누가미 사헤이의 세 손자중 한 사람과 결혼을 해야만 일족의 모든 것을 상속 받을 수 있었다는 거다. 그러나 이 '다행'이란 과연 누구에게 해당하는 말일까? 다마요의 마음만 얻으면 일족의 모든걸 차지할 수 있는 세 손자들인가? 아니면 그들만 사라지고 나면 부와 권력을 독식할 수 있는 다마요인가? 

 

  

 

나는 지난 수 개월 동안 제대로 읽을만한 장르 소설을 찾아 방황했지만 수확은 신통치 않았다. 베스트셀러 목록의 단골 손님이라는 일본 현대 작가들의 소설은 대개가 왜 읽는지 모를만큼 절망적이었다. 앞으로도 일본 현대 문학은 무라카미 류의 'Sixty Nine'을 능가하는 소설을 내놓진 못할 것 같다는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요코미조 세이시의 '이누가미 일족'은 간만에 읽는 즐거움을 만끽한 장르 소설이었다. 연쇄 살인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듯한 소설의 분위기 탓에 끔찍한 사건의 긴장감이 약화된다는 점, 그리고 뻔한 트릭과 지나친 우연이 겹쳐 추리의 밀도가 다소 떨어진다는 점이 흠이라면 흠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게 바로 장르 문학의 멋과 맛인 것을.  

 

<요코미조 세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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