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 로숨의 유니버설 로봇
카렐 차페크 지음, 김희숙 옮김 / 모비딕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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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25일 저녁 프라하에서 인류가 처음으로 로봇과 조우했으며

그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로봇에 절멸되었다.(1)”

 

 

위 문장은 카렐 차페크의 희곡 R.U.R (Rossum's Universal Robots)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던 사실에 대해 다소 위협적으로 기술한 것이다. 체코어 로보타(robota), 강제노동을 뜻하는 오늘날 공용어로 사용하는 로봇은 여기서 처음 쓰였다. 대략 1세기 전에 천재 작가에 의해 창조된 상상력이 바야흐로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들의 삶에 다가왔다. 그는 과연 어떤 의도로 이 작품을 쓰게 되었을까? 그리고 작품의 대단원은 어떻게 끝나는 것일까?

 

서막과 1~3막으로 구성된 이 희곡의 줄거리는 일견 비관적이지만, 오늘의 표현인 포스트휴먼(Post human), 다시 말해 호모사피엔스보다 우월한 종으로의 변화를 꾀하는 기술지상주의자들의 견해에서는 희망적이랄 수도 있겠다. 한 마디로 현 인류는 종말을 고하고 새로운 종으로서의 인류에게 지상의 삶이 이전 되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희곡의 마지막 문장은 불멸 하리라! 불멸!”이다. 이러고 보면 취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몸을 새로운 인간형 장치로 대체하려는 오늘의 신생기술들이 지향하는 궁극의 의지인 동물로서의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는 욕망, 그것과 어떠한 차이도 없는 듯 보인다. 그렇다면 차페크는 현 인류의 종말을 가져 올 기술지상주의의 실천이 과연 인간적 진실이라고 말하려 했던 것일까?

 

 

1. 희곡 속으로

 

늙은 발명가 로숨(Rossum)의 제조 공식, 그리고 그의 아들이 생산 공정을 완성한 로봇을 대량 생산하는 외 딴 섬이 무대이다. 생리학 연구부장 갈 박사, 로봇 심리학 연구소장 할레마이어 박사, 기술담당 중역 파브리 등의 기술진들과 이들의 이상을 실현하는 강력한 주체인 회사 대표 해리 도민과 로봇의 인권보호를 위해 섬을 방문한 헬레나, 그녀의 유모 나나, 그리고 건축주임인 알퀴스트가 인간의 미래를 결정하는 주역이 되어 열연한다.

 

헬레나는 도민에게 묻는다. “로봇을 왜 만들고 있죠?” 그 답변은 오늘날 트랜스휴머니스트의 그것과 완전히 일치한다. “인간이라는 기계는 정말 대책이 안 설 만큼 불완전하며, “비용도 너무 많이 들고”, “ 현대 기술을 제대로 쫓아오기에는 효율성도 떨어지며”, “기술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유년기란 완전히 난센스인 시간 낭비일 뿐이라는 것이다.

로봇들은 세계의 시장에 무한히 팔려 나간다. 그것들은 인간을 대체하여 노동을 하고, 전쟁의 군대가 되어 전투 병사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인류는 자아실현만을 위해서 살면 되는 것일까? 인간의 욕망은 그 한계를 제어하는 데 무척이나 서툴다. 로봇에게 인간의 감정을 이식하기 위한 작은 변화의 시험이 시도되고, “어느날 갑자기로봇들은 인간에 복종하기를 멈추고, 인간은 완전히 불필요한 유물임을 각성하며, 인간의 주인이 될 것을 선언한다.

 

세상에 그 무엇도 인간만큼 인간을 증오할 수 있는 존재는 없음을 학습해 온 로봇은 세계의 모든 인간을 살해하고, 그것들의 본산지인 섬을 공격한다. 인간이 절멸된 로봇만의 세계, 지구의 새로운 주인으로서 로봇의 시대임을 선언한다.

 

로봇들의 공격으로부터 살해되기 직전의 도민을 비롯한 경영진과 기술진들의 자기항변과 사태의 비극적 현실에 대한 반성의 대화들은 가히 오늘의 진술들과 견주어도 어떠한 손색이 없다.

회사대표 도민은 인간으로 사는 건 너무 힘들었으며, 그걸 극복하려 한 건 정당했으며, 그 어떠한 장애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로운 종, 인간보다 더 위대한 그 무엇으로 살려한 것은 위대한 일이었다고 항변한다. 반면에 알퀴스트는 생체로봇의 생산은 돈, 보다 많은 이익배당을 꿈꾼, 자신들의 거대한 이익을 위해, 인류의 거대한 무언가를 위한다는 인간의 과대망상이 자초한 단순한 인류의 멸망뿐이라고 자성한다.

 

로봇들은 마침내 이들 모두를 살해하지만, 건축노동을 하던 알퀴스트만을 살려두고, 로봇들의 지속적인 생산을 위한 제조공식을 넘겨줄 것을 요구한다. 오늘날 같으면 엄청나게 축적된 빅데이터를 비롯하여 디지털화되어 저장된 기술내용으로서 고도의 지능을 갖춘 로봇들에게 불필요한 행위일 것이다. 100년 전의 사람인 차페크에겐 이 갈등이 위대한 걸작의 중요한 반전 요소가 된다. 더 이상의 로봇제조가 불가능하게 된 것이다. 인간의 멸종뿐 아니라 새로운 종으로서의 로봇 또한 절멸이 불가피한 상황에 이른 것이다.

 

아마 이 희곡의 대단원이야말로 백미(白眉)라 해야 할 것 같다. 사랑의 이타성과 성()의 구분이 발생한 로봇 헬레나와 프리무스라는 한 쌍의 로봇이 출현하고, 인류가 절멸한 세계에서 새로운 종의 시대를 시작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는 것인데, 과학기술에 대한 맹목적 우상화에 대한 육신으로서의 생명이 지니는 가치를 향한 차페크의 염원으로 느껴졌기 때문에서이다. 형이상학적 고뇌가 결여된 현대의 과학기술과, 그 진보란 단지 산업적 생산의 진전이상이 아니지 않느냐는 항변이지 않았을까?

 

2. 카렐 차페크의 의도

 

19236월 런던에서 개최된 이 희곡에 대한 토론에 당대 최고의 작가인 버나드 쇼’, ‘G.K.체스터턴등이 참석하여 차페크의 의도와는 사뭇 다른 해석과 비판을 하였던 모양이다. 차페크는 이에 대한 관대한 수용과 한편, 왜곡된 작품의 바른 의도를 알리기 위해 로봇의 의미라는 제목의 소고를 발표했다.

 

여기서 그는 작품의 의도는 두 측면에서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그 첫 째는 과학의 희극이라는 것이다. “산업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은 도리어 산업의 지배를 받게 되며”, “결국에는 인간의 손이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게 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한 기술적 특이점의 필연적 도래와 닮은 이 주장은 기술미래에 대한 동일한 예측이지만 그들이 딛고 선 영역은 서로 경계의 반대에 서 있다는 점이다. 기술지상주의자에겐 낙관적인 특이점이지만, 차페크에겐 과학의 희극으로 이해되었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과학기술의 수용에 대한 인류의 이해에 어떤 편견이나 단정적 진실이란 방패를 씌우지 않는다. 그것이 의도의 두 번째 이다. 인간의 로봇화에 대한 다양한 이해들이 존재한다. “산업주의만이 현대의 필요를 충족할 수 있다.”, “기술의 진보가 인류를 타락시킬 것이다.”, “고된 노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것이다.”, “비인간적 기계화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육신과 마음을 지닌 인간의 탈신체화가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겠는가?”와 같은 다양하게 대립되는 이상론들의 존재를 전제하면서, 이렇듯 진실을 향한 견해들은 고상한 진실과 사악하고 이기적인 잘못 사이에 투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래서 이것이야말로 현대문명에서 가장 극적인 요소이며, 바로 진실의 희극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류가 좇아야 할 진실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일까? 21세기 오늘의 기술은 점점 인간에 대한 도구적 관점을 강화하고 있다. 교체 가능한 멀티 플랫폼으로서의 기능에 맞춰진 불멸의 어떤 물체가 되는 것이 과연 인류의 진정한 욕망인가? 이것은 기술자본주의의 탐욕과 망상인 것은 아닐까? 1세기가 지난 오늘에도 이처럼 이 작품은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지를 사유케 하는, 성숙된 인간의 태도란 어떠한 것이어야 하는지를 성찰케 한다. 가히 경이로운 고전중의 고전이다.

 

*(1): 트랜스휴머니즘P150(마크 오코널 , 노승영 , 2018.2 문학동네 )에서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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