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기사단장 죽이기 - 전2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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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것의 형상”, 얼굴 없는 남자가 화자인 에게 약속했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지극히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장면으로 시작되는 소설의 첫 장인 프롤로그가 소설 속 실체로 등장하는 데에는 무려 일천 쪽 가까이 읽어나가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어느새로 인식 될 만큼 이야기의 흡입력은 폭력적이며 압도적이다.

 

이야기의 전체 구조는 초상화 전문화가인 일인칭 화자(話者)의 아홉 달 남짓한 기억의 술회(述懷)이지만, 그 경험의 세계가 너무 격렬해서 발을 디딘 현실을 잠시 벗어난 느낌조차 갖게 된다. 또한 소설의 표제이자 핵심 소재인 노()화가의 숨겨졌던 그림인 기사단장 죽이기는 뫼르케가 쓴 프라하로 떠나는 모차르트라는 노벨레에서 정신없이 돈 조반니의 피날레인 저녁 성찬부분을 읊어대는 모차르트의 망아(忘我)적 장면과 겹쳐지면서 차갑게 파고드는 어떤 파멸과 죽음의 공포로 전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죽음에 주목하게 되는데, 심장판막 증세를 지닌 누이동생의 죽음을 안은 ’, 독일의 오스트리아 강제 합병에 저항하다 처형된 연인과 난징 대학살에 참전했다 귀국 후 자살한 남동생을 지닌 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 그리고 엄마를 잃은 열세 살 소녀 아키가와 마리에가 동시에 직면해야 했으리라는 세계에 대한 분노, 무력감, 그리움 등의 어렴풋한 공감을 갖게 된다. 삶의 시간이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고 멈춰버린 세계, 발설할 수 없는, 은폐시킬 수밖에 없었던 이들 내면의 저 밑바닥에 침잠해 있는 어둠이 비밀처럼 이야기 속에 내려앉아 있다.

 

아내로부터의 이혼 통보를 받은 의 무력(無力)과 무념(無念)의 여정, 방랑을 끝내고 거처가 된 오랜 친구인 미대(美大) 동창생의 아버지인 유명화가의 교외 산 속 외딴 저택, 생업이었던 상업적 초상화 그리기를 멈추려 하는 에게 제안된 고액을 대가로 한 의문의 인물로부터의 초상화 의뢰, 그리고 새벽이면 들려오는 방울 소리, 우연히 발견된 아스카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진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는 이야기 곳곳에 등장하는 의 정사(情事) 장면과 함께 거대한 서사를 이룬다.

 

방울 소리의 근원지를 파헤치고, 발견 된 방울과 삼 미터 깊이의 구덩이는 내겐 은폐된 음험한 무의식의 세계로 이어지는 통로이자 산도(産道)로 여겨졌는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에 일치되지 않아 거부하고 억압한 어두운 무엇의 실체가 도사리고 있는 곳에 이르는 곳, 혹은 그곳에서 나오는 곳으로서 이것은 구덩이를 개방한 이후 에게 발현하는 기사단장의 형상을 한 이데아로 인해 더욱 구체적 심상(心想)이 되었다.

 

결국 구덩이는 의 정사와 함께 이데아의 통찰을 가리키는 개념으로서의 에로스를 말한 플라톤의 동굴을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의 섹스는 인식의 확장을 추동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이기도 하며, 어두운 현상의 세계를 벗어나 이데아에 이르게 하는 추동력이기도 하다. 또한 은폐된 것들이 똬리를 틀고 있는 곳으로 가는 출입구, 그래서 마주하기를 피했던 두려움의 그것들과 마주하고 삶의 균형을 비로소 만들어 낼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장소이기도 하다는 생각에 붙들렸다고 해야겠다.

 

이러한 맥락에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별 통보를 받은 이후 한 달 남짓한 화자(話者)의 방랑 여정 중 미야기현 해안 작은 마을에서의 일화가 꽤나 깊은 인상으로 남아있다.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한 연인과의 격렬한 정사, 그리고 화자에게 깊이 각인되어 훗날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초상화의 인물인 가죽점퍼 차림의 남자는 다름 아닌 의 투사(投射)였으리라는 점이다. ‘아마다 도모히코, ‘의 그림은 그네들의 숨겨진 실체이다. 그네들에게 삶의 평온은 이것들과 마주할 용기를 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으리라.

 

바닥에서 칼에 찔리는 기사단장을 바라보는 은유적 인물인 얼굴 긴 남자의 굴(어둠)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의 행동은 삶의 복원을 향한, 멈췄던 삶의 시간을 다시금 흐르게 하는 비로소의 용기이다. 때문에 아내 유즈와의 재회와 딸을 얻는 엔딩, 그리고 마침내 소실되는 두 개의 그림은 지극히 당연한 귀결이랄 수 있다. 나는 괜스레 화자 에게 시기(猜忌)를 보내기도 했다. 이처럼 처절한 자기 내면의 응시를 지닐 수 있었던 그이기에,

 

이 소설의 묘미를 이처럼 몇 문장에 모두 설파해내기란 불가능할 것이다. 작게는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에 등장하는 메타포로서의 인물들과 소설 속 인물들과의 매치, 정밀한 묘사에도 불구하고 결코 천박하지 않은 이야기의 곳곳에 펼쳐지는 정사의 장면들, 자기희생이라는 이데아의 행위 속에 깃든 의지는 무엇일까 하는 생각, 역사적 사건으로 등장하는 1938년 독일 오스트리아의 합병으로 이어진 안슐루스와 193712월에 저질러진 일본군의 난징 대학살에 감춰진 인간의 어두운 그림자에 대한 사색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무궁무진하다. 가히 생명력 넘치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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