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선(善)한 악인(惡人)을 생각하며...

 

우리네 삶이란, 비좁은 가설무대에서 공연되는 연극일 뿐이라는 듯 펼쳐지는 <파우스트>를 다시금 읽게 된것은, 자신의 살인 행위에 어떤 회한도 지니지 않은 인간, 즉 '근본악의 존재'를 그린 '정유정'의 소설 ,<종의 기원>에 대한 반감에서 시작되었다고 해야겠다. 그래서 '융'의 분석 심리학에 기댄  '존 샌포드'의 < 융 심리학, 악, 그림자>에서 주장하는 자기(self)의 온전함, 개성화 과정에 대한 확인을 통해 악인이라는 새로운 종자(種子)가 마치 출현한 것 같은, 아니 별개로 존재하는 것 같은 주장의 부정에 더욱 위안과 확신을 가졌다고 해야겠다. 그리곤 샌포드의 자기 입증의 반영을 위해 등장하는 신(神)과 메피스토펠레스의 내기,  메피스토펠레스와 파우스트의 영혼을 담보로 한 계약의 실체, 인간본성의 이중성에 대한 우아하기 그지없는 삶과 죽음의 매혹적인 형상인 <파우스트>에 이르게 되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우리들의 태도이다. 자신들에게는 티끌만큼의 악도 존재하지 않다는 듯이 범죄자들을 이상한 사람으로, 마치 전혀 새로운 인종을 대하는 듯한 사람들의 역설, 그것이다. 자기 안의 악을 들여다보려 하지않는, 자기 안의 악은 은폐한 채 타인만을 판단하려는 그 시선에 대한 위화감이 왠지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나만큼은 선인(善人)이고 정상이다라고 주장하는 몽매함 말이다.

샌포드의 주장은 이렇다. 인간의 심연에는 무수한 악이 존재하지만 그 악은 철저하게 거부되고 억압되고 침잠해 있을 뿐이다. 성적갈망, 분노, 거짓, 폭력성, 탐욕, 증오, 시기심 ...등등 어둡기만한 그것은 무의식의 저 깊숙한 곳으로 가라앉아 있다.  즉 이상적이고 도덕적인 자아가 되기위해 억압한 그림자 - 우리가 되고자 하는 어떤 존재와 일치되지 않고 거부된 것들 - 가 바로 악(惡)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린 왜 이 그림자를 인식하는 것에 주저하는 것일까? 아마 자신의 내면에 쌓여있는 악과 마주하는 두려움, 공포, 죄의식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이 악, 어둠의 그림자에 압도되지 않기 위해서, 그것을 피하려 든다. 결국 우린 가면(페르조나)을 쓴다. 다양한 세계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각기 다른 가면을 쓴다. 자아의 인격을 덮어씌우는 덮개로 포장한다.

 

그런데, 자신을 페르조나와 동일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 우리의 세계에는 넘쳐난다. 진짜 인격이 감추어지고, 페르조나가 드러내는 역할만을 하려드는 사람들, 피상적이고, 거짓되고, 깊이가 없는 인격의 사람들, 진정한 자신의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되고만다. 만일 어질고, 선만을 위해서 애쓸 경우, 그 사람은 가증스러운 인간이 될 수도 있다. 우리가 살아보지 못한 생기 넘치는 삶의 일부, 그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를 거절했을때 삶이 얼마나 위태로워 질 수 있는지,  자신의 영혼을 담보로 삶의 쾌락을 위해 악마 메피스토와 계약하는 파우스트가 선 바로 그 경계일 것이다. 더 많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마다 쌓이는 악의 축적으로 악인이 되지 않을까?

 

악인은 별난 새로운 종이거나 정상과 비정상과 같은 작위적인 분류에 의한 별종이 아니다. 자기 안의 악을 외면하고, 부인하고, 억압해온, 선한 인간이라 자처하는 인간일 뿐이다. 마침내 억압된 그림자가 차고넘칠만큼 축적된 인간이 자기의 내면을 보았을 때, 그는 자기를 어떻게 인식해야 할까? '한강'의 <채식주의자>에 그려지는 '영혜'처럼 자기를 무화(無化)시키려 하거나, 그림자에 사로잡혀 <종의 기원>의 살인자처럼 그림자의 원형을 삶에서 실현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 되어버리지 않을까? 오늘 우리의 사회는 선한 박애주의자의 페르조나를 쓴 악인의 전형을 보면서 촛불들을 들어 올리고 있지 않은가?

 

'파우스트'는 어떤 인간인가?  '초라하게' 책상 앞 안락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시작되는 비극 제1부에서 " 아, 나는 이제 철학도, 법학도, 의학도, 게다가 신학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철저히 연구했다. 그 결과가 이 가엾은 바보 꼴이구나."라고 자신의 학식과 덕망과 명예라는 선만을 위해 살아왔지만 결국에는 초췌하게 늙은 한 노인만이 남아있다는 삶에 대한 회한에 사로잡힌 인간이다. 그리곤 악마에게 자신의 영혼까지 담보하면서 인생 내내 거부하고 억눌러왔던 그림자의 삶으로 향한다.  "차라리 관능의 심연 속에 들어가 이 불타는 정열을 식히게 해라! (중략) 시끄러운 시간의 여울 속으로 사건의 와중으로 뛰어들자! 거기에는 고통과 쾌락, 성공과 불만이 번갈아서 덤벼들어도 좋다."고 외친다. 파우스트는 모르고있지만 여기에는 하나의 내기가 전제되어있다. 하나님과 사탄의 내기이다. 신(神)은 메피스토펠레스에게 파우스트를 악으로 끌어들여보라고 내어준다. 신이라고 우리가 부르는 것은 어쩌면 신의 형상을 했다는 우리 인간 개체의 총체, 즉 온전한 하나, 선과악이 공존하는 총합된 인격으로서의 자기(self)일지도 모른다. 즉, 신은 선이고 사탄은 악이라는 이분법, 또는 이원적 구성이란 공허한 말에 불과하며, 실은 신은 선악을 초월한, 혹은 인간의 언어에 불과한 선악의 총합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자 , 30년이나 젊어진 파우스트의 탐욕스러움,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장식된 처녀'그레첸'을 자신의 손에 넣기위한 술책과 관능적 사랑, 발푸르기스의 밤에 펼쳐지는 온갖 쾌락, 고대 그리스의 극치미(美)인 헬레나를 소유하기위해 지옥의 심연까지 내려가는 인간 욕망의 극한, 교활한 전쟁의 승리와 전리물로서의 광활한 해안영토의 취득, 나아가 드넓은 자신의 영토와 바다의 전망에 한 점의 장애까지도 제거하기 위해 노부부의 초가를 불태우는 파렴치에 이르기까지 그의 새로운 인격은 한계가 없다. 선이 억압해왔던 악의 마주함을 통해서 파우스트는 비로소 구원되고, 온전한 영혼이 된다. 우리들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다. 또한 선하기도 하고 악하기도 하다. 우리들의 의식적인 인격이 확실히 도덕적인 태도를 지니기 위해서는 결코 악, 무의식의 그림자를 대면하지 않으면 안된다. 인식함으로써 우린 그것을 절제하고 조화를 이룰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비극 제2부 5막, 파우스트 시신의 매장 중 천사들에게 담보로 잡아두었던 귀한(파우스트) 영혼을 빼앗기고 어이없어하는 메피스토펠레스의 허망한 주절거림을 듣게된다. 악마와 내기했던 하나님은 정말 영리했다. 선악을 넘어 비로소 '온전함'을 달성한 파우스트를 구원한 것이다. 악마는 강탈당했다고 억울해하지만 이미 이길수 없는 내기였다는 것이 시인 '괴테'의 신념이었을 것이다. 근본악이라는 것은 지극히 잔인하고 피를 얼어붙게 만들며, 인간의 것이라 생각할 수 없는 그러한 극한적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가 선만을 추구하려는 한 필연적으로 빠지는 함정 이상이 아닌 것이 아닐까? 자기가 쌓아둔, 은폐시킨 자기 악으로부터의 침식, 결코 부인하고 인정할 수 없는 자아(自我)의 편협함, 성장하지 못한 어린아이의 자기변명 같은 것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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