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는 여자들의 특별한 친구 - 문학적 우정을 찾아서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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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통찰로서의 우정, 스승과 제자의 교학상장(敎學相長)으로서의 우정, 그리고 교육적 우정, 학문적 성장의 동반자로서의 우정, 거절함으로써 주어지는 우정, 삶의 평화와 균형을 가져다주는 관계로서의 우정, 애정과 증오가 반복되는 삶의 동행자로서의 우정, 존경과 견고한 동맹자로서의 우정 등, 책은 이러한 특별한 우정의 주체들인 여자들의 삶의 관계를 문학적 글쓰기에 실어 삶을 견고하게, 때로는 위안과 생의 의욕을 고취하는 근원으로서의 동력을 탐색 발굴해내고 있다. 어쩌면 이 글을 읽으며 그네들의 삶의 지탱과 그 투영으로서의 성취들인 사상과 예술, 혹은 문화사적 하나의 중추적 뿌리를 발견하는 즐거움도 아울러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이들 우정의 관계를 통해 30여 인물이 발굴된다. 메리 매카시와 한나 아렌트, 다이앤 아버스와 리젯 모델, 미시아 세르와 코코 샤넬, 루스 베네딕트와 마거릿 미드, 캐서린 매콜리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시몬 베유와 시몬 드 보부아르, 에설 스미스와 버지니아 울프에 이르기까지 우정을 거절할 때 우정을 받을 자격이 주어진다는 시몬 베유의 말처럼 우정은 철저하게 행하는 것임을 또한 확인하게도 된다.

 

행동하는 실천가인 시몬 베유와 사유하는 이론가인 보부아르의 냉랭한 만남의 일화는 아주 강렬한 장면으로 인상에 새겨지는데, 1920년대 후반 이미 유명인사에 가까웠던 베유와 소르본 대학 교정에서 보부아르는 잠깐의 대화를 나누었던 모양인데, 베유의 행동 요구에 보부아르는 실존적 의미부여를 위한 이론적 사유의 중요성을 말하며 동의하지 않았다. 베유는 싸늘한 표정으로  보아하니 굶어 본적이 없었군요.”라는 날카로운 말을 남기고 떠나버린다. 이후 보부아르는 시몬 베유를 더 이상 보지 못했다. 후일 보부아르는 이 차가운 거절로부터 진정한 우정을 받을 자격이 주어짐을 이해하게 된다. 결국 우정이란 관념이나 이론이 아니라 철저하게 행동하는 것임을. 보부아르가 후일 동료 인간들에 대해 실천한 반응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의 배려와 후원의 행위로 실행 된 것은 우정을 한 차원 다른 지대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여성 참정 운동권자이자 음악 작곡가인 피아니스트 에설 스미스라는 칠순를 넘긴 선배 예술가를 향한 존경심으로 비롯된 마흔여덟 살 버지니아 울프 우정의 시작은 견고한 기성질서에 대한 거친 저항자로서의 모습, ‘암석 폭파자에 대한 경외심이었던 것 같다. 이에 화답하며, 울프의 작품들을 자기 생의 위기를 위무하고 돌파하는 것으로 삼으며, 읽는 이와 쓰는 이의 글을 통한 교감으로서의 우정을 또한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내가 화답하고 싶은 저자를 꼽아본다.

 

사실 가장 인상 깊은 우정의 이야기는 100년의 시간을 뛰어넘는 라헬 파른하겐과 한나 아렌트의 우정이다. 도덕적 열정을 환기시키며 인류의 스승 역할을 수행했던 위엄 넘치는 철학자인 한나 아렌트는 친구 안네 멘델스존이 적극 추천한 파른하겐 전집을 읽으면서 그 독창적이고 관습에 얽매이지 않은 지성을 발견함으로써 이루어진 독특한 유형의 우정이다. 아렌트는 우정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했다. 우정은 상대방의 의견에 내재된 진리를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최고 수준의 정치적 통찰이다.”라고. 때문에 책을 통해 세계를 읽는다는 믿음은 세계를 독서 가능성의 대상으로 두는 것과 같다는 한스 블루멘베르크의 진단처럼, 아렌트는 100년 전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반성적으로 성찰했던 파른하겐과의 지속적 논쟁의 대상으로 함께한다. 아마 파른하겐은 아렌트에게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해준 정직한 우정의 상대자였을 것이다.

 


아렌트의 우정은 공동의 세계에서 동등한 파트너가 되는 것을 의미했기에 그가 나치를 피해 미국 망명자가 되어 살아가야 했을 때 후일 우정의 정당’, ‘2인 정당으로 불리는 파트너로서 1970년 이후 아렌트의 보호자가 되었던 소설가 메리 매카시와의 정직한 우정은 정말 진하게 마음을 울린다. 아렌트가 1975년 친구들에게 식사대접을 하다가 돌연 사망하게 됨으로써 집필 중이던 미완에 그친 정신의 삶3년에 걸쳐 세심하게 편집하여 완성시켜 출간하는 매카시의 우정은 한 위대한 지성에 대한 깊은 사랑과 믿음이었던 것 같다. 콧날이 시큰해진다.

 

무엇보다 스승과 제자의 학문적 무교감의 천박성으로 잠식된 오늘의 한국 대학의 현실을 생각게 하는 사진 예술가 다이앤 아버스와 스승인 리제 모델의 사제 관계에 형성된 우정은 존경할 만한 스승과 제자 관계의 고결한 모델로 읽힌다. 훌륭한 스승을 만난 제자는 깨치고 성장한다. 뛰어난 제자를 둔 스승은 환호하며 공부한다.”는 교학상장으로서 우정, 끝까지 듣고, 있는 그대로 존중하며, 응원하고 지지하며 함께 배우는 사람으로서의 우정, 우리네 학문의 장에 진정 요구되는 인간관계일 것이다. 다이앤 아버스와 리젯 모델의 사진 작품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특권을 누린다는 기분을 없애고, 편안히 지낸다는 것에 불만을 떠뜨리고 싶은 욕망을 지녔던 다이앤 아버스의 작품들은 지금의 내게 무언가 중대한 메시지를 전해 줄 것만 같다.

 

샤넬은 미시아의 임종을 지켰다.”는 미시아 세르와 코코 샤넬의 우정 이야기는 이미 예술계 왕족이나 다름없었던 문화적 자산으로 풍부했던 예술가가 뿌리를 알 수 없는 옷 재봉으로 돈을 거머쥔 사람에게 어떻게 자신이 쌓아올린 모든 문화적 자산과 인맥을 남김없이 베풀어주고, 한 세기의 모더니스트 예술가로 우뚝 설 수 있도록 변화에 필요한 가르침을 줄 수 있는지 그 신비로움에 코를 빠뜨리고 읽었던 글 중 하나이다. 사실 독일점령기간 중 샤넬의 독일 부역 행위는 민족 배신행위로서 극형에 처벌되어야 했을 것이지만 윈스턴 처칠과의 인연으로 스위스 망명으로 위기를 모면한다. 시장 자본주의에 대한 재빠른 감각적 이해를 지닌 이 패션 상인은 소위 지식이라는 구역질나는 단어를 쓴 프랑스 인사들의 우상화 결과인 것이 아닐까? 롤랑 바르트의 샤넬은 옷감과 형태와 색깔로 고전을 쓴다.”, 문학사에 기입해야하는 인물이라는 주장이 왜 내 낯을 뜨겁게 하는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재산권 보장, 여성의 이혼 청구권 인정을 비롯한 인권신장을 위한 여성 운동가로서의 삶과 여성이 저자가 되고 전업 작가가 되는 미래를 상상했던, 생각할 줄 아는 여성이 지닌 사고력을 드러내는 작품의 저자로서 세계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우정의 근대적 원천을 보게 된다. 훗날 프랑켄슈타인을 쓰게 되는 메리 셸리를 둘 째 딸로 낳게 되기까지의 여성의 고난과 삶의 곡절들이 여권 신장의 투사로서의 삶과 병행하며 한 여인의 삶을 주목하게 한다. 치열하게 읽고 쓰면서 특별한 우정을 일궈낸 여성들의 문학적 향기 그득한 이야기가 전하는 고결하고 신성한 삶의 역사에 한동안 취하다보면 파리의 영문학 전문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의 실비아 비치의 서점 개업과 운영의 일화에 이른다.

 

책이 있는 곳에 피어나는 우정”, 말만으로도 기분 좋은 구절이다. 20세기 사상과 예술의 굵직한 한 축을 점유하는 여자들의 특별한 우정을 이야기하는 이 책은 우아한 20세기 문화사로 읽어도 될 것 같다. 사진, 미술, 음악예술은 물론 문학, 철학, 인류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주의 여성 참여의 고된 운동사이기도 하며, 현재 진행형인 그 성취사이기도 하다. 오늘의 여성들에게 어떤 창발의 불씨가 되어줄 책이기도 하지만 신뢰할 수 있는 우정의 기반이 되었던 버지니아의 남편 레너드 울프나, 삶의 공허로부터 안정감을 지탱하게 해주었던 아렌트의 남편 하인리히 블뤼허가 있었듯 남성 독자들에게도 이 책은 예술적 영감과 함께 파트너로서 여성에 대한 이해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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