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페이퍼 글은 카프카 탄생 140주년을 맞이하여 민음사에서 특별 간행한

카프카 단편집 <돌연한 출발>을 기초로 작성되었습니다. 

2023년 유네스코는 '세계 책의 날' 올해의 인물로 '프란츠 카프카'를 선정했답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책은 우리를 아주 고통스럽게 하는 불행처럼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는 책이라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프란츠 카프카의 편지 에서


 


카프카의 작품집은 많은 독자들이 여러 권 소장중일 것이다. 이 편집본은 조금은 새로운 면모를 하고 있는데, 카프카의 육필원고와 그가 그렸던 몇 장의 드로잉, 그리고 프라하 시가의 전경과 그의 작품 산실이었던 여동생 집의 사진 등이 22쪽에 걸쳐 수록되어 있다. 내 그림은 순전히 그림 글쓰기라 했던 그의 말처럼 스케치 속에서 어떤 서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로 바라보지만 그의 소설들처럼 왠지 이해를 거부하는 느낌에 시선을 거두었다. 자신을 타자의 시선으로 바라보았음직한 왜곡된 이미지를 상상해본 것이 아닐까라는 헛다리도 짚어보지만 합당한 해석이 아닌 듯해 실패한 미소를 지어본다.

 

아무튼 카프카의 탄생 140주년 기념판본으로 출간된 이 책은 여덟 번째로 내 품에 들어 온 소중한 카프카의 소설집이다. 새롭게 시선을 끈 것은 옮긴이 전영애 교수가 엄선하여 서른 두 편의 장단편(短篇)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히 내적 화자가 지닌 의미의 유사성에 따른 작품의 재배치가 돋보인다.

 

사실 나는 카프카를 즐겨 읽는다. 무의식의 어떤 은폐되고 억압된 욕망을 분출하고 싶어질 때면 짧지만 강렬한 밀도로 응축된 그의 소설을 주기적으로 찾아 든다. 물론 덤터기만 쓰고 물러날 때도 있지만 그 불가능 속을 헤매다보면 무언가 해소된 느낌을 갖기도 한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서사적 진공상태로 다가와 그 속에서 어떤 기대와 답변을 찾지 못하도록 일관된 요약이나 해석을 거부하는 듯하지만, 그의 종결(終結)없는 미결이 매혹적일 수도 있다. 내가 답을 만들어가며, 혹은 내가 기대하는 어떤 질서를 축조해가는 해결의 과정을 즐길 수도 있으니 말이다.

 

친구 오스카 폴락에게 쓴 위에 인용한 카프카의 편지로부터 간략한 감상을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구절은 한 권의 책에 대한 얼붙은 도끼의 은유처럼 그의 소설이 주는 불편함과 불안과 고통이 독자에게 무엇을 시사하려는 것인지를 짐작케 한다. 작품의 구조적 측면의 비()일관적 훼방이 불러일으키는 고통이기도 하지만, 서사의 내용면에서 끊임없이 타자를 밀어내는 세계의 위계와 오염된 인간성들, 몰이해와 낯섦, 관료적 권력이 뿜어내는 악취 등등 인간과 인간사회의 추오를 들이밀어 독자들의 정체성과 실존을 위협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 곤란들과 당혹감을 정면으로 마주케 함으로써 체험적 변화를 요구하는 책의 의무에 대한 그의 의지표명일 것이다.

 

이 편집본의 표제가 된 극히 짧은 소설 돌연한 출발도 그 이해로부터 독자를 완강하게 추방하려는 듯하기만 하다. 첫 문장부터 실패의 상황이다. 마구간에서 말()을 끌어내 오라는 명령을 하인은 듣지 못한다. 화자의 뜻은 이 불통에 의해 연거푸 좌절된다. 카프카의 작품들은 실패를 씀으로써 성공했다는 비평가 '게르하르트 노이만'의 지적처럼 당대에 만연한 인간 사이의 소통불능이 단지 떠난다.”는 목적을 지닌 굉장한 여행과 극히 대항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상 혹은 진실의 지대를 향한 삶의 대모험은 이 돌연한 출발에서 시작되어야만 한다는 듯이,

 

이와 연관하여 읽을 수 있는 소설인 옆 마을평범한 나날조차도...턱없이 모자란다는 점을 두려워하지 않고 옆 마을로 말을 타고 나설 작정을 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할아버지의 말씀 한 문장으로 구성되어있다. 구세대의 안주하려는 게으름과 이상을 찾으려는 새로운 세대의 응축된 대립의 장면이다. 이러한 세대 간의 갈등, 즉 지배의 세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메시지는 카프카 소설의 커다란 하나의 축인 것 같다.

 


그것은 약혼녀 펠리체 B'라는 부제가 달린 선고의 주인공 게오르크와 아버지의 거듭되는 위상의 엎치락뒤치락하는 장면에서 극심한 갈등의 고통으로 나타난다. 둔감하고 더럽고 편견으로 그득한 아버지가 아들에게 원죄를 씌워 판결하는 이 우화는 너를 지금 익사형에 처하노라라는 말과 똑같이 다리에서 추락하는 아들의 행위처럼 아이러니로 가득하다. 이 작품에 시선이 붙들리는 것은 이러한 세대 간의 권력 갈등 못지않게 죽음이 지니는 의미이다. 부모님, 저는 그래도 당신들은 사랑했었답니다.”라는 말을 남기며 다리에서 떨어진 죽음 이후의 그 무심한 전경이다. 마치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다리 위에는 끝이 없을 것처럼 차들이 오가고 있었다.”는 세계의 무관심한 불변성.

 

이것은 너무도 유명해서 거듭거듭 소환되는 변신그레고르 잠자의 죽음 이후 가족들의 소풍 전경과 거의 동일한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어쩌면 카프카에겐 이 죽음의 개념은 평온과 안락, 화해의 감정이었던 것만 같다. 변신을 나는 작품의 외적 환경인 시대상과 연결하여 읽곤 하는데, 주류 유럽사회에 편입되지 못하고 끝없이 배제되고 거부되는 유대인의 고통, 즉 자기이해와 타자의 시선이 지닌 엄청난 간극에 대한 처절한 항의로 이해하고 있다.

 

이 작품과 항상 동일선상에서 언급되는 작품이 학술원에의 보고의 주인공인 원숭이 빨간 페터가 주류 사회를 상징하는 고매한 학술원에 하는 신랄한 보고내용이다. 이 소설은 페터의 치욕적인 상처를 설명하는 구절들에서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무시, 무관심과 편견을 지속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성적 거세와 할레를 암시하며 유대인의 유럽 주류사회의 모방은 그네들의 생존적 탈출구임을, 유럽 사회가 우월해서가 아님을 강조한다. 오직 세상에 스며들기 위함임을, 그러나 세계는 페터의 보고에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는다. 메아리 없는 외침, 이 철저한 소외와 배제의 고통을 읽고 있으면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현재적 사건임을 통절하게 느끼게 된다.

 

나는 단편 법 앞에서를 장편소설 소송에서 K와 신부가 나누는 법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와 시골사람의 대화를 참조하곤 하는데, 이해를 거부하는 이들의 해석에서 역설적인 전략을 보게 된다. 법의 문은 마침내 그의 죽음으로써 문이 닫힌다는 점이다. 시골사람 스스로 연기하는 술책이라고 지적한 조르조 아감벤의 법의 효력을 정지시키기 위한 인내심 가득한 고도의 전략이란 말에 한편 수긍하게도 된다. 카프카의 소설을 대표적인 열린 결말의 서사라 부르는 이유처럼 무궁무진한 해석들이 가능한 작품일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모두(冒頭)에서 말하기도 했지만 실패와 좌절의 이야기들이다. 단편 다리(, )와 잠재적 적을 막기 위해 지하에 삶의 터전을 구축하는 한 개체의 보고인 ()은 소위 기대와 체험, 그리고 실패의 정형성을 띤다. 물론 의 주인공은 조금 복잡하지만 애초 장소를 소유하지 못한 존재의 굴이 지닌 안전의 보장 실패는 예견된 귀결인 것만 같다. 살아있는 다리()로서 절벽 위에 몸을 뻗어 누군가가 오는 것을 보려다 그만 떨어져 찢어발겨지는 인간의 다소 황당한 이야기도 역시 실패는 본래적이다.

 

그런데 발터 벤야민실패는 카프카 문학의 정수라 하기도 했다, 그의 소설에는 인생 경력에서 전형적으로 실패하는 주인공들이 즐비하며, 한편으론 이러한 망가진 경력을 표현하는 문학적 형식에 실패함으로써 그는 말하고자 함에 성공하고 있다고. 오늘 한 세기가 넘어 이역만리에 있는 낯선 지역의 독자가 그의 좌절과 실패담을 읽으며, 어떻게 이 세계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를 고민하는 것이야말로 그가 실패한 다리가 아닌 굳건한 토대를 놓았음의 반증일 것이다.

 

건조한 아이러니와 감각적 통찰력으로 가득한 카프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감당할 수 없는 세계의 규명을 마주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리장성의 축조 때와 같은 의사소통 부재, 의미를 상실하는 공동의 작업이나, 그 누구도 합의할 수 있는 형상이 아닌 오드라덱을 통해 통제도 지배도 불가능한 존재를 그리는 가장의 근심에 이르는, 마치 원인도 목적도 없는 것 같은 불안의 실체들이 빼곡한 카프카를 읽는다는 것은 삶에 대한 내 자신의 시선을 스스로 점검하는 실마리가 되어주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비극적 실존으로서의 인간 카프카의 작품을 계속 읽어나가며 몰이해로 뭉쳐진 존재로서의 나, 상식이라는 하나의 시선에 포획된 나를 의심케 하는 목소리들에 마음의 문을 열어야만 우리는 변화하고 다름을 수용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카프카의 소설들은 그 생생한 실천의 장이다. 해명할 수 없는 것들에 달려들어 그것들을 규명하려는 온몸을 다하는 그의 절체절명(絕體絕命)의 글은 항상 묵직한 감동이다.

 

여전히 카프카 읽기에 나는 많은 빈틈을 느낀다. 이 틈새를 메우는 읽기, 그 모험을 이번 기념 편집본이 다시금 자극한다. 권력이 법과 함께 자신들의 영토를 모든 인간의 영역으로까지 뻗는 가장 추악한 욕망을 드러내고 있는 즈음이다. 시민이기 전에 인간인 우리들은 이 불의한 영토화 욕망에 맞서야 하는 앎의 지대를 카프카를 통해 경유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카프카를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절, 4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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