벗겨진 베일 (워터프루프북) 쏜살 문고
조지 엘리엇 지음, 정윤희 옮김 / 민음사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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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명인 피를 지불해야 하며,

우리 신경의 미세한 조직에까지 아로새겨야 한다.” - 78

 

 

누군가를 애타게 사랑한다는 것은 그 대상의 속내가 온통 비밀에 싸여 있어서 우리들의 상상력이 그것에 지배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미들 마치의 작가, ‘조지 엘리엇은 알려진 만큼 국내에 소개된 작품이 한 손가락을 다 채우지 못할 정도이다. 아마 이 짧은 소설(노벨레)은 갈증을 어느 만큼은 채워 줄 듯 싶다. 벗겨진 베일(The Lifted Veil)은 한 여성의 감추어진 마음의 장막이 벗겨지고 드러나는 내면의 추악함과 경망스러움, 허위를 통해 꽁꽁 감추어진 인간 영혼의 이중성, 그 음울한 심연(深淵) 들여다보기이다.

 

화자인 주인공 래티머는 병약한, 그러나 시적 본성을 지닌 내면적 청년이다. 그에게 어느 날 갑작스런 영감이 발작처럼 찾아오고 사람들의 머릿속 생각과 감각을 들여다볼 수 있게 된다. 사실 이 비정상적 감각은 그에게 고통이다. 인간들의 표면적 태도와 행위, 말씨의 이면인 조악하고 이기심과 변덕스러움으로 뒤섞여있는 속내를 불가피하게 수용하여야 하는 까닭이다. 그에게 인간의 외면이란 서서히 발효되는 커다란 두엄 더미를 뒤덮고 있는 그럴싸한 포장지(34)”로 보일 뿐이다.

 

래티머는 이복형인 앨프리드와 약혼을 염두에 둔 버사 그랜트라는 여성을 보게 되고, 그녀의 생각과 감정을 읽어보려 하지만 예외적으로 알아차릴 수 없는 기호로 된 거미줄에 차단되고 만다. 결국 이 알 수 없음이라는 무지와 두려움은 흥미를 자아내고 더욱 매력적인 존재로, 그에게 시적 열정의 우상이 된다. 버사 또한 결혼할 남자의 동생을 자극하여 질투와 욕망으로 들끓게 한다. 어리고 병약해서 마치 애정조차 느낄 수 없다는 듯이 형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그를 쓰다듬으며 달콤한 고문을 지속한다.

 

래티머는 혼란스럽다. 그녀에 대한 사랑의 희망과 거절의 두려움 사이의 줄타기는 극대화된 육감의 공포로 달뜨게 한다. 청년은 여자에게 자신을 상징하는, 시적 본능의 상징인 오팔을 선물하고 그녀가 그것을 손에 장식할지 지켜본다. 화려하게 치장된 손가락과 팔과 목과 귀 어디에도 그의 오팔은 보이지 않는다. 래티머는 버사에게 자신이 준 선물의 가치를 알지 못한다고 힐난한다. 여자는 자신의 금목걸이 줄을 잡고서 가슴에 품고 있던 오팔을 들어올린다. 버사의 교활한 책략이 베일에 싸인 탓에 래티머는 읽지 못한다.


 

2022 민음북클럽 에디션



형 앨프리드와 버사의 결혼이 예정된 즈음의 어느 날 사냥 중 사고로 앨프리드는 세상을 저버리고 만다. 18개월 남짓의 시간이 지나고 병약하고 몽상적인 청년 래티머는 버사와 결혼하게 된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은행가인 래티머의 아버지는 버사가 자식의 부족한 면을 채우며 그를 가꾸어나가리라는 믿음에 이 둘의 결혼에 더할 나위없는 기쁨을 표시한다. 그의 병약함과 유약성에 대해 주변 사람들은 버사에 비해 부족한 인간이라 조롱하지만 신혼의 열정에 들뜬 래티머는 이에 무감각 상태로 대응한다.

 

오랜 세월 내내 같은 실수를 반복했음에도 결국 인간 영혼은 가시로 가득한 황야를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이며 걸어가야 한다.” -49

 

래티머는 참혹한 불행’, 극단적으로 처참해질 미래를 준비한다.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벗겨진 버사의 베일로 인해 드러난 그녀의 내면, 편협과 옹졸한 책략, 단순한 허위로 뭉쳐진 내면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비밀에 싸여 미지의 관념을 만들어내던 환상은 온전한 거짓, 위선이었음이다. 계획적인 교태와 용의주도한 이기심, 베일을 벗어던진 여자는 감추었던 더러운 영혼을 드러낸다. 래티머는 그녀를 향했던 믿음을 완전히 거두어들인다.

 

그는 비정상적인 통찰력과 예지력이 빚어낸 이 지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고, 마침내 버사와의 참담한 7년의 결혼 생활 끝에 타인의 속마음을 침범하는 대신에 자신의 고독한 미래를 곱씹기 시작한다. 아마도 내면을 꿰뚫어 본들 변함없이 반복되는 인간의 오래된 이중성이 살아남은 이유를 넘어설 수 없음의 깨달음일 것이다. 사실 타인의 속내를 속속들이 안다는 것은 저주일지도 모를 일이다.

 

화자의 일방적인 시점으로 이어지던 이야기에 대한 독자의 의심 - 버사의 교활성, 천박성에 대한 래티머의 반감 등 - 은 이윽고 완전히 박살난다. 아내인 버사의 시종 아처 부인의 죽음과 잠깐의 소생을 위한 실험에서 발설되는 악마적 반전은 인간의 심리, 아득하게 은폐된 심연의 그 복잡 미묘한 양식을 줄기차게 묘사해대는 이 작품의 음울하다 못해 불쾌감까지 스며드는 기묘한 이끌림에서 풀려나게 한다.

 

어쩌면 이 작품은 조지 엘리엇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인간 심연의 실재였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보았으니 어쩔 겁니까? 인간들의 그 편협한 사고와 미약한 배려, 반쯤 지친 연민에 대해서 잘 알았지요? 너무 깊숙이 타인의 정신을 헤집으려 해도, 그렇다고 신비의 환상에 빠질 것도 아니라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듯하다. 인간 영혼의 갈증과 그 충동에 대한 심리 탐사의 이 이야기는 눈에 보이는 욕망의 위력과 베일에 싸인 내면을 거닐며 피와 도움을 간청하는 눈물로 물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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