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너의 문화사 - 매너라는 형식 뒤에 숨겨진 짧고 유쾌한 역사
아리 투루넨.마르쿠스 파르타넨 지음, 이지윤 옮김 / 지식너머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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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너의 문화사>는 발칙하지만 아주 흥미로운 책입니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매사에 적절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의 클럽'처럼 여기는 유럽에 대한 고정 관념에 흠집을 낼 것이다(13쪽)라는 선언을 하고 있거든요. 유럽의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아리 투루넨과 핀란드 공영방송 교양 PD인 마르쿠스 파르타넨은 유럽인의 매너란 선한 의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저 정교하게 정해진 행동 규범을 외형적으로만 따른 것에 불과하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눈앞에 드러나는 형식의 이면을 파고들어 '도대체 훌륭한 매너란 무엇인가'를 질문하고자 한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과연 훌륭한 매너라는 게 존재하기나 하는지, 아니면 그저 본능적이고 동물적인 인간의 행동을 억제하기 위해 고안된 정신적 울타리를 그렇게 부르는 것에 불과한지를 탐구하려 한다... 이른바 '미덕'이라는 것의 실체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14쪽)

우리가 '좋은' 사람의 기준 중 하나로 삼는 '매너'가 사실은 인간의 폭력성을 감추기 위해 발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예를 들어 '손을 들고'하는 인사와 '악수'는 '나에겐 무기가 없으며, 당신과 싸울 의지가 없다'란 의미로, 레이디 퍼스트의 의미로 여성을 먼저 문안으로 들여보내는 행동은 혹시라도 숨어 있을 '암살자'에게 여성을 미끼로 내던져준 거라고 해요.


<매너의 문화사>에는 '눈물'과 '웃음'마저도 귀족과 일반인의 계급에 따라 그 가치가 다르고, 남자와 여자들에게 다른 기준으로 적용되는 등 지금으로서는 도무지 상상하기 힘든 당시의 유럽이 가득 담겨 있습니다. 무리와 무리를 구분짓기 위해 자신들만의 독특한 에티켓을 발전시키고, 그렇지 못한 외부인을 야만이라 규정지으며 발전해온 유럽식 매너의 역사. 특히 '성생활'에 대한 부분에선 진짜 중세 유럽에 태어나지 않은 걸 감사하는 마음이 진심에서 우러나옵니다.

저자는 <매너의 문화사>를 통해 '왜 그렇게 행동해야 했는지'를 설명하려 했다고 하는데요, 여기에서 등장하는 예절들은 보편적으로 세계에서 통용되는 것들입니다. 하지만 매너의 폭력성이 흐르는 세월 속에서 미덕 또는 배려라는 정반대의 의미로 발전해온 기록을 접하니, '자신이 속한 무리를 위해 개개인이 노력을 참 많이 했구나'라는 얼토당토않은 느낌이 들어 픽~웃음이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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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 -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12가지 충격 실화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 지음, 이지윤 옮김 / 갤리온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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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라서 재밌다고 하면 안 될 텐데... 재밌단 말 밖에 떠오르지 않아요★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는 형법 전문 변호사로 활동 중인 저자 페르디난트 폰 쉬라크가 25년 동안 다룬 2500여 사건 중에 가장 '충격적인' 12건의 사건을 담고 있는 책입니다. ​그 12건은 판례인 것도 있고, 아예 범죄사실이 입증이 안돼서 기소중지에 처한 사건도 있고, 아갈마토필리아(동상이나 인형을 사랑하는 페티시즘)의 대상인 러브돌의 강간(?) 사건, 남편을 죽인 여자, 인신매매, 청소년 범죄, 불법 증거수집 등등 저자의 말처럼 별 희한한 사건도 참 많더군요. 

 

형사 사건 재판 이야기라고 하니 분명 실화일 텐데 너무 희한하다 보니 마치 단편소설을 읽은 기분이 들어요. 거기다 페이지터너이기도 한데 이걸 재미있다고 해야 하는지, 실화인데 재미 운운하면 도덕성에 의심을 받을 것 같고... 그래요.

 

특히 남편을 살해한 용의자로 지목된 '증거', 러브돌 강간(?) 사건인 '리디아', 마약범죄자가 되고 싶었던 슈트렐리츠의 이야기 '작은 남자', 바람난 남편을 응징한 '진주 목걸이'였는데, 이 사건들은 영화로 만들어져도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인상적인 사건들이었죠.

 

법은 눈을 가리고 있는 정의의 여신처럼 한쪽으로 치우쳐서도 안 되며 감정에 휘둘려서도 안되죠. 판사는 오로지 증거와 청취를 통해서만 범죄자를 응징해야 하며 그 판결에는 어떠한 감정도 개입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다 보니 증거불충분이나 심증은 있으되 물증이 없어 무죄방면되는 범죄자들을 종종 보게 되는데요 그럴 때마다 우린 법을 원망하곤 하죠.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에서도 분명 때려죽여도 모자란 나쁜 놈을 석방시켜야 하거나, 죽어도 싼 나쁜 새끼를 죽였음에도 감옥에 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 함무라비 법전에 새겨진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법 조항은 '복수'의 의미가 아니라 가해자에게 죄를 물을 때 딱 그만큼만의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해요. 즉 '과한 형벌을 막기 위한' 법 조항이란 이야기죠.

 

우리는 종종 '저딴 새끼는 자기가 저지른 짓이랑 똑같이 죽여야 해.'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범죄자들을 보게 됩니다. 하지만 그런 가해자에게도 법은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고, 똑같은 형량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저지른 살인에 대해서도 법은 동정의 여지가 없고요. 이런 부분이 일반인과 법조인들을 가르는 한계가 될 텐데요 그런 걸 보면 법조인이라는 직업은 웬만한 정신력 가지고는 하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이 세상엔 진짜 별 희한한 인간이 다 있구나.'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던 <왜 살인자에게 무죄를 선고했을까?>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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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숨겨진 얼굴 - 러시아의 미국 대통령 선거 조작부터 은밀한 섹스 토이까지
라이나 스탐볼리스카 지음, 허린 옮김 / 동아엠앤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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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의 숨겨진 얼굴>은 요즘 한창 많은 저서들이 다루는 '가짜 뉴스', '조작' 등에 관여하는 인터넷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특히 가짜 뉴스에 관해서는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러시아 트롤 개입설이 한창 지구촌을 달군 적이 있었는데요, 여기서는 '4D' 전략을 설명하며 과연 진실은 무엇이며, 우리는 이 이야기를 어디까지 진실로 인정해야 하는가를 말합니다. 

 

4D(89쪽)

무시하기dismis - 먼저 부정적인 소문 및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형성된 비난을 무시한다.

변형하기distort - 이 소문이 다른 형태로 보이도록 변형한다.

산만하게 하기distract - 그 후 상대방을 겨냥한 공격에 덧붙여 또 다른 소문을 만들어낸다.

충격 주기dismay  - 충격적인 메시지를 유포한다.

 

굉장히 낯익은 전략이지요? 저자는 만일 소문처럼 미국 대통령 선거에 러시아가 개입했다면 분명하고 확실한 인과관계의 성립 유무를 따져 판단해야 하는데, 그 과정은 매우 민감한 문제이므로 그 이면의 '진짜 문제는 무엇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요즘 국내에서도 한창 사회문제로 대두되는 '리벤지 포르노' 공유 현상을 통해 디지털 시대의 '신뢰'에 대해 고민하게 합니다. 

 

<인터넷의 숨겨진 얼굴>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2부 '해커의 세 얼굴: 좋은 놈, 나쁜 놈, 어나니머스'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들은 '누구'일까요? 핫이슈의 중심에 서 있는 '위키리스크'는 화이트해커라 불려도 되는 걸까요? 기술 전문 기자 스티븐 레비의 해커윤리(171쪽)는 자유이용 소프트웨어 보급의 자유를 보장 하며 변형을 통해 창조의 자유를 누리게 했지만, 과연 이것의 사용에 대해 우리는 자유로울 수 있는가?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여기에서는 해커의 역사도 함께 다루고, 흑백논리에서 벗어난 '회색을 입은 놈'에 대해 흥미로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가장 궁금해하는 '어나니머스'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또한 톰 크루즈가 주교로 임명될 예정이라는 '사이언톨로지교'에 관해서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크웹' - 그게 뭔지 명확히는 몰라도 우리가 아마 영화를 통해 가장 많이 접해본 단어가 아닐까 합니다. 3부에서는 이 '다크웹'에 대해 다양한 방법으로 익명성을 깨뜨리는 사례를 들어 국가 기관의 역할, 공권력의 보호를 무조건적으로 신뢰해도 되는가에 대해 고찰해 봅니다. 

 

오늘날 복잡하고 폐쇄적인 디지털 도구와 인터넷 접속 도구에 위임한 권력은 기술혁신을 위한 연구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산업(410쪽)으로 발전시키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가치와 윤리는 어디에 기준을 둬야 하며, 우리는 디지털에 대한 신뢰의 한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할까요?  

 

인터넷에 접속해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인터넷의 숨겨진 얼굴>은 누구를 향해 있는지 섬찟한 기분이 듭니다. 안전하다고 '느끼고' 계시나요? 하지만 실제로 안전한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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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 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
미치코 가쿠타니 지음, 김영선 옮김 / 돌베개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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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거짓과 혐오는 어떻게 일상이 되었나>는 '독설의 서평가'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직설적 평론의 대가, 미치코 가쿠타니의 국내 첫 출판작 입니다. 이 책을 조금이나마 쉽게(?) 읽기 위해서는 '포스트모더니즘Post Modernism'에 대해 간략하게 집고 넘어가야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19세기 중엽-20세기 초중반, 즉 산업혁명 이후부터 냉전질서까지의 시기인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사조입니다. 모더니즘이 산업혁명의 여파로 '이성/식민지/제국주의/물질주의/도시화'로 대표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이성 중심에 대한 '회의'를 내포한 사상적 경향을 의미합니다.

 

특히 문화적인 면에서는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에서도​ '해체'로 표현될 만큼 많은 변화가 있었는데요, 2차례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겪으며 '합리성은 옳은가'에서 시작되어 '이성 자체가 문제가 있으며 그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트럼프 대통령 정부에 대한 혹평으로 가득합니다. 이렇게 쓰다가 정보국에 잡혀가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요. 그리고 그 이면에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급진적 포스트모더니스트에 대한 비난은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에 대한 회의가 짙게 깔려있기도 합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든 거대 서사를 거부할뿐더러 언어의 불안정성을 강조했다.(51쪽)

 

과학을 등한시하고, 자신의 이익에 부합하는 자들에 대한 특혜(법을 바꾸고, 장관 임명에 사사로운 관계가 개입될 정도로), 가짜 뉴스의 유포 등 '이게 한 나라, 아니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대통령이 이런단 말이야?'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트럼프는 감정을 앞세우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과학은 호전적이고 친기업적인 우파 권력기구의 한 부문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것은 오염을 일으키고, 동정심이 없으며, 탐욕스럽고, 기계론을 따르는 데다, 성차별에 인종차별을 하며, 제국주의에 동조하고, 동성애 공포증을 갖고 있으며, 억압적이고 편협하다. 우리의 정신, 몸, 또는 대지의 영적이거나 총체적 안녕에는 신경 쓰지 않는 비정한 이념이 된 것이다.(49쪽/숀 오토 『과학 전쟁』에서 인용)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조가 팽창하면서 '나의 시대(by 톰 울프)'와 '나르시시즘의 문화(by 크리스토퍼 래시)'가 들불처럼 일어나 '전체'는 해체되고, '개인'이 중시되는 '방어의 시대', 자기 상황에 따라 재산의 총액이 달라진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대통령, 본인이 믿는 것만을 믿으며, 근시안적인 자아 추구에 치중하는 나라, 최고 권위자가 나서서 사람들의 두려움에 호소하는 거짓말을 생산해 내는 나라, 『멋진 신세계』가 실현되어 가고 있는 이 시대에 대해 미치코 가쿠타니는 끝없는 독설을 쏟아냅니다.

 

사고의 저장탑(사일로 효과)에 갇혀 주위를 둘러보지 않은 채 '내가 믿는 것만'이 '진실'이 되는 작금의 상황 앞에, <진실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는 과도한 포퓰리즘에 의해 결국 제국의 멸망을 불러온 고대 로마를 생각나게 합니다. 보편성이 사라지고, 언어에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 '1984년의 멋진 신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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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섹슈얼리티의 위계 - 누구도 페니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계정민 지음 / 소나무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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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섹슈얼리티의 위계>는 영문학을 전공한 저자의 '범죄소설의 계보학-탐정은 왜 귀족적인 백인 남성인가'에 이은 두 번째 저서입니다. ​ 저자 계정민 교수는 2005년에 쓴 논문을 바탕으로 이 글을 썼다고 하는데요,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 문학 속에 담겨 있는 남성섹슈얼리티에 대한 역사와 새로운 시각을 제공해 주고 있습니다.

 

남성 생식기의 소유자에게 주어졌던 젠더적 특권에서 제외된, 남성집단에서 비정상적이고 부적합하다고 평가된 섹슈얼리티를 지닌 남성 하위등급을 조명하며, 사회적으로 특히 영미 문학을 통해 그들에 대한 위계 인식의 역사를 말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먼저 계정민 교수가 말하는 남성 섹슈얼리티의 위계는 규범적/지배적·패권적/특권그룹으로 규정되며, 성인/이성애자/가부장/비장애남성의 속성을 가진 '상위등급'과 주변적/종속적/비규범적/동성애자/독신남성/소년/장애남성의 속성을 가진 '하위등급'으로 구분 지어진다고 합니다. 이러한 위계질서는 산업혁명의 시대에 '생산'의 기능이 없는 남자의 성적 에너지는 자본주의적 가치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배제되거나 부인되는(22쪽) 상황에서 규정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소년과 독신남성의 비생산성은 충분히 교정될 가능성이 있다고 해도 남성 동성애자는 사회적 협상의 가능성이 '근원적으로' 봉쇄된 계층이라 교정의 가능성조차 없는 부류로 취급되었는데요, 이로 인해 그들은 국가 내란죄와 맞먹는 형벌을 감수해야 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들에 대한 처벌이 정점에 다다랐던 18-19세기의 영국은 프랑스에서 동성애에 대한 변화의 기미가 보이자 '프랑스식 부도덕'의 극치라며 동성애에 대해 더욱 빗장을 걸어 잠그기도(129쪽) 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문학에서 장애남성을 그린 3부 장애남성 중 '훼손된 남성섹슈얼리티는 어떻게 치유되는가-『제인 에어』'였습니다. 『제인 에어』는 읽어 보신 분이라면 누구나 로맨스의 정석 중 하나로 꼽는 작품이고, 저 또한 그 책을 읽고 가슴 설레며 로맨스를 꿈꿨던 적이 있었습니다.

 

『제인 에어』는 서술부터 파격적이었다고 하는데요, '나(I)'가 화자인 1인칭 시점의 소설은 요즘은 흔한 일이지만, 샬롯 브론테의 19세기에는 '나=죄인(sinner)'라는 의미가 있어, 참회록이나 고백록을 제외하고는 사용하지 않는(215쪽) 시기였다고 합니다. 그런 시기에 '나=제인'이라는 공식의 소설이 얼마나 파격적이었는지는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예쁘지도, 여성스럽지도 않은 전형성을 탈피한 제인이라는 여자 주인공과 나이차이가 많이 나고, 성격조차 나쁜 로체스터가 '장애남성'이 된 후 이루어진다는 이야기에서, 계정민 교수는 '공정한 세상 이론'에 의해 장애 남성이 된(천벌) 로체스터가 제인에 의해 구원을 받고, 그들 사이의 첫아이 출산은 그가 드디어 '상위 등급'으로 인정받았음을 뜻한다고 말합니다. 즉 가부장의 위치로 재배치된 그에게 마침내 성적 시민권이 부여(241쪽) 되었다고 보는 거죠. 

 

이렇듯 <남성섹슈얼리티의 위계-누구도 페니스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는 남성성의 위계를 통해 차별과 배제에 대해 이야기하며 모두 조금씩 불편해지고 조심하는 삶이 문명이고 진보라고 책을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문득 우린 남성의 성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가졌었나 되돌아보게 됩니다. 페미니즘에 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목소리는 커졌는데, 정작 가부장 사회의 지배층에 속한 남성에 관해서 깃발을 세우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아마 남성의 권리 주장 운운했다가는 뼈도 못 추릴지 모르지만요.

 

하지만 남성과 여성은 다를 뿐, 틀리지 않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면 어떤 면에서 남성도 참 가엾기도 하고 그래요. 이건 누가 더 불쌍하고 아니고의 문제가 아닌 '인간'의 문제라고 보이니까요. <남성섹슈얼리티의 위계>를 통해 남성성의 역사에 대해서도 접하게 되었는데요, 이를 시작으로 모두가 조금만 서로 보듬어 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남성섹슈얼리티에 대한 긴 이야기를 마칠 시간이다. 모두가 조금씩 불편해지고 조심하는 삶이 문명이고 진보라는 사실을 기억할 때다. 누군가는 확신에 차서 무례하고 난폭한 말을 큰 소리로 외치고, 다른 누군가는 위축되고 침묵해야 한다면, 그것은 원색적인 야만이고 퇴행이다. 소년이 침묵하고, 동성애자가 두려워하고, 장애남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끔찍한 미래다. 이미 충분히 힘들고 슬픈 이들이 많다. 더할 필요는 없다.(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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