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좀 잘 지냈으면 하는 마음에 - 삶과 인간관계로부터 지친 당신에게
윤글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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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눈을 떴더니 침침한 것이... 삭신이 쑤시는 것이... 누워서 천장만 바라보는 노인이 된 꿈을 꾸었다. 배게에 머리를 대고 하늘만 꿈뻑 꿈뻑 쳐다 보았다. 이 길고 긴 시간이 언제쯤 끝이 날지, 전역날을 기다리는 말년 병장의 마음으로 지루하게 천장만 바라 보았다. 천장의 무늬에 온갖 서사를 갖다 부치며 동공을 비우고 한참을 있던 내가 꿈을 깨고 떠올린 것은 친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친할머니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하는 농사일을 가끔 도와주셨다. 어머니, 아버지는 '거베라'라는 꽃을 작농하셨는데, 그 꽃잎이 가지런히 모이도록 플라스틱 컵을 씨우고 가지가 꺾이지 않도록 철사 하나를 꽂은 후에 파란색 테이프를 칭칭 감는 작업이었다. 할머니는 그 일을 도와주셨다. 정정하셨던 모습이 떠오른다. 기억의 부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그 간에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했고 나름대로 삶을 살았다. 다시 살아난 나의 기억에 할머니는 가만히 자리에 앉아 TV화면을 보셨다. 채널은 항상 1채널이라 불리는 KBS였다. 한 칸만 내리거나 올리면 '오락프로'라고 불리는 프로그램이 많은데도 할머니는 가만히 1채널에서 방송하는 편성을 그대로 시청하셨다. 크게 웃지도 않으셨고 어떤 반응도 하지 않으셨다. 할머니에게서 약간 떨어진 곳. 나는 거기에 앉아 TV화면을 배경으로 한 할머니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그것이 나의 다음 기억. 이어지는 기억의 부재 뒤, 할머니의 모습은 천장을 보고 계셨다. 그 공간의 시간은 천천히 흘렀다. 온전히 함께 시공간을 채우던 시기는 지나갔고 나의 손에는 다른 세상에 연결되는 스마트폰이 들려 있었다. 그 화면을 들여다보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 있었다. 그것을 호주머니에 집어 넣으면 초침과 분침은 속도감을 온전히 전하려는 듯 천천히 흘렀다. 그 견디지 못할 지루함을 반대쪽에서 할머니는 어떻게 보내고 계셨을까. 그 느리게 흘러가는 공간을 벗어나면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스마트폰에서는 알림이 끊임없이 왔다. 친구들의 농담은 공간을 달리해서도 이어졌다. 나와 전혀 상관없는 이들의 시덥잖은 농담과 이야기가 끊임없이 흘렀다. 나의 하루는 그 방향 전환이 빨랐다. 동으로 갔다가 서로 갔고 다시 북으로 갔다. 하루와 하루의 결정으로 인생의 방향이 크게 달라졌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가끔 그 기억의 부재와 부재 사이에 어럼풋한 할머니의 모습이 떠오를 때가 있다. 할머니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졌을까. 음악도 듣지 않고 TV도 스마트폰도 없는 방에서 무슨 생각을 하게 됐을까.

10대에 나는 이별이나 상실에 대해 깊은 상처를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이별보다 만남이 더 흔하고 잦은 나이였다. 이별과 상실을 겪으면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채웠고 다시 이어서 새로운 인연이 그 자리를 매우고 채우고 넘쳤다. 계속해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러다보면 비어진 자리를 느낄 새는 없었다. 스물이 넘어서는 그 '만남'과 '이별'의 분기점이 갈라졌다. 점차 만남과 이별의 횟수가 평행을 이루었다. 어떤 이별에는 그것을 채우는데 한참의 시간과 인연이 필요했다. 서른이 되고 이제 마흔에 닿는 나이가 되면서 점차 '새로운 인연'보다 '사라진 인연'이 많아짐을 느꼈다. '결혼식', '환영식' 보다 '장례식'이나 '송별회'에 참석하는 일이 많아졌고 어떤 경우에는 만나는 사람에 '정'을 두는 '감정 소모'를 피하게 됐다. 이미 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떠나갔고,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채워내지 못했다. 사회적으로 풋내기에 속하는 마흔 언저리가 느끼는 건방진 상실감은 과거 '할머니'를 떠올리면 숙연해진다. 괜히 시간을 축내서 채워진 '나이'가 아닌 상실감으로 가득찬 나이. 그것을 오롯하게 감내한 나이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됐다. 자신을 키워주던 부모와도 자신의 길을 찾아 떠난 '자식'과 작별하고 일했던 이, 친구, 반려자와도 이별하하여 점차 혼자가 되는 시기가 되면 나의 시간은 무엇으로 채워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해 볼 때가 있다. 내가 채워야 하는 것은 그저 '숫자'에 불과한 '자산'이나 '인맥'이 아니라, 어느 순간 유일하게 남게 될, '나'와 '기억'이 아닐까.

나에게만 있을 것 같다는 '이별'과 '상실'을 사실 세상 사람들이 모두 공유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대략 인생의 절반인 마흔에 알게 됐다. 밖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비슷한 기억을 갖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간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또한 그들에게 남은 시간과 나에게 남은 시간은 여전히 '상실'과 '이별'이 훨씬 더 많을 거라는 것도 안다. 모두가 상실하며 살아가는 시대에서 서로가 서로를 위로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누구에게도 함부로 할 수 없다.

언젠가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적 있다. 별 생각없이 던졌던 나의 말을 꽤 가슴 깊은 곳에 담고 사는 사람의 이야기였다. 그는 가끔 나에게 그 기억을 말하곤 한다. 나에 이야기에 꽤 적잖은 힘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의 그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나는 입을 다물었지만 내가 그에게 던졌던 말은 그저 대책없이 던저진 '위로'에 불과했다. 상대가 '잘 해 낼 수 있을지, 앞으로 더 잘 될 거라던지', 나는 알 수 없다. 나의 미래도 모르는 망정, 상대에게 던졌던 대책없는 위로가 누군가에게 힘이 됐다. 모든 위로하는 사람들은 각자 자신의 무게도 감당하지 못하면서 감히 누군가의 미래를 긍정한다. 그러나 그 거짓 위로는 위약이 만들어낸 '플라시보'처럼 가짜 효과를 만들어내어 상대를 치료한다.

삐뚤빼뚤 자전거를 타면서 뒤에서 잡아주는 손이 놓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혼자 타는 자전거를 앞으로 나가게 만든다. 믿을만한 이의 선한 거짓말은 때로 불가능을 아무렇지 않게 만들기도 한다. 생각해보면 우주에 인간을 보내 도시를 건설하는 것 만큼이나 누군가에게는 '자전거 처음타기'가 불가능한 일이며 그 불가능의 영역은 사실 모든 '처음하는 일'에 드리워져 있다. 우리는 모두 미래라는 모두가 처음 경험하는 '불가능'에 맞딱드리며 그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위약'의 효과에 감탄한다. 때로는 의미없고 진심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불특정 다수에게 던지는 메모에도 우리는 위로하며 힘을 얻는다. 잘 모르는 미래에 대해 잘 모르는 이의 막연한 응원을 받고 힘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가끔 보면 불가능했던 거의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아마 내가 속았던 선의의 거짓말처럼 나의 선의의 거짓말도 누군가를 속여 불가능을 가능하게 바꿀지도 모른다. 알 수 없는 '우울'과 '상실'의 늪에서 아무렇지 안게 건져낼지도 모른다. 고로 나는 누가될지 모를 상대의 불행과 우울, 상실에 대해 이렇게 장담하고자 한다.

내가 분명하고 확실하게 보장하건데, 당신의 미래는 아름다울 것이다. 모두 잘 될 것이고 그러기 위해 그러고 있는 것이다. 분명하다. 틀림없다. 내가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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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크 - 일로 성공하기 위한 폭발적 성장 법칙
크리스 메틀러.존 야리안 지음, 정윤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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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브 잡스 사망 즈음, 애플의 시가총액은 3500억 달러였다. 2024년 현재 애플의 시가총액은 2조 6천억 달러다. 무려 730% 성장이다. 규모가 무려 7배 이상을 성장했다. 스티브 잡스는 '천재적인 인물'이긴 했으나 제품 디자인과 개발 과정의 통제를 엄격하게 했다. 잡스는 제품의 모든 부분과 디테일에 관심을 가졌다. 때로는 권위적이 었다. 2011년 스티브 잡스의 뒤를 이은 '팀 쿡'은 달랐다. 그는 조금 더 '관리형 인재'에 가까웠다. 그는 개방적이고 협조적 문화를 선호했으며 포용적이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회사로 만들고자 했다.

집단이 규모를 형성하면 리더십의 형태는 바뀌어야 한다. 어떤 '정치 독재자'는 경제 성장을 올렸다는 의미로 긍정적 평가가 된다. 다만 규모를 갖춘 집단에서는 같은 방식의 리더쉽이 성장의 발목을 잡는다.

리더십은 규모와 성격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다. 정답이었던 일이 그렇지 않게 된다. 언젠가 '왕권강화'는 국가 기틀의 상징이 되었다가 '독재'라는 이름으로 바뀐다. 규모를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통제'는 분명 필요하다. 다만 성장 뒤에 '통제'는 견제해야 한다. 건전한 확장성을 위해 '리더'는 때로는 '자유'를 인정하고 '창의성'을 마련해야 한다. 통제하는 것은 에너지가 들어가는 일이다. 그러나 '통제'를 벗어난 성장이 그보다 더 고차원적이고 힘든 일일 수 있다.

리더와 보스의 차이를 보여주는 그림을 본 적 있다. 보스는 뒤에서 나아가도록 지시하는 인물이다. 리더는 앞에서 이끄는 인물로이다. 둘은 차이가 있다. 먼저 위치가 그렇다. 리더의 위치는 소수일 때는 뒤일 수 있으나, 다수가 되면 반드시 앞이 되어야 한다. 가장 뒤에 있으면 '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인지하기 어렵다. 가장 먼저 상황을 확인하고 대처해야 이끌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리더'는 '목표'를 품고 있어야 한다. '목표'를 품은 리더는 멘토가 되며 인정 받는다. '리더'에게 필요한 역량은 '기술적'인 부분보다 '정신적인 부분'이다. 일을 대하는 태도, 올바른 가치관 등이다.

과거 나에게도 인상 깊은 '상사'가 있다. 그는 독특한 요구를 했다. '리더'의 지위를 부여하며, '리더십'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을 요구했다. 요구에 따라 나는 '리더'에 대해 다양한 생각을 했다. 관련한 책을 읽고 영상과 강의를 찾아 봤다. 다만 '상사'가 요구한 '리더십'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내가 생각했던 '리더'와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리더십은 기술적인 부분이었다.

'해 줄 수 있나요?'라는 권유가 아닌, '하도록 해'라는 명령문을 사용할 것.

쉬는 시간에는 직원과 함께 잡담하지 않을 것.

웃거나 농담을 하지 말 것.

목소리를 낮게 하여 권위를 유지할 것.

당시 상사 또한 어린 나이였다. 고로 그 정의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제시한 '리더의 자질'은 본질에서 벗어나 있었다. 나는 그 집단에 얼마 간 머물가다 자리를 옮겼다. 그가 요구했던 것 중 한가지 유익한 말이 있다. 바로 이것이다.

'리더가 부지런하면 직원은 게을러진다.'

실제로 게을러지라는 의미가 아니다. 점차 자신의 업무를 후임자에게 넘겨야 한다는 의미다. 또한 새로운 차원의 일을 만들어 그 공백을 채우라는 의미다. 이렇게 꾸준히 새로운 차원으로 일 만들고 이전의 업무를 넘기는 과정을 반복하면 그 집단은 반드시 성장한다. 고로 리더는 원래 하던 업무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새로운 일을 만들고 기존 업무를 다른 이들에게 이관해야 한다.

실제로 리더가 부지런하면 직원은 게을러지는 경우가 있다. 직원의 업무를 리더가 맡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집단은 정체되고 나아가지 못한다.

우스께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가장 최악의 상사는 '무능하고 부지런한 상사'이고 가장 최고의 상사는 '유능하고 게으른 상사'라는 것이다. 실제로 본질을 따져 보건데 리더는 누군가를 통제하고 관리하는 인물이 아니라 단순히 더 먼저 나아가 멀리 보는 인물이어야 한다. 집단의 성장에 무엇이 더 이익인가를 따지고 보자면 리더는 꾸준히 발전하고 지나간 자리를 후임자에게 적절히 넘겨주는 역할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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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형의 집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48
헨릭 입센 지음, 안미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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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9년 1월 노르웨이 트롬쇠에서 태어난 '라우라 킬레르'는 '스칸디나비아'의 여성 소설가다. 그녀는 1873년, 학교 교사로 근무하는 빅토르 킬레르와 결혼식을 올린다. 그녀의 남편은 결혼식 직후 결핵에 걸린다. 남편의 결핵을 치료하기 위해 그녀는 이탈리아에 휴양 차 여행을 준비했다. 이 과정에서 여행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돈을 빌린다. 또한 '킬레르'는 수표위조를 하게 된다. 이후 남편은 이 사실을 알았다. 이때부터는 꽤 이해하기 어려운 전개가 벌어진다. 킬레르의 남편이 그녀에게 '이혼'을 요구한 것이다. 또한 아내를 자녀로 하여금 '접근금지' 하려 했다. '킬레르'는 이 와중 신경쇠약에 걸리고 한 달 간 정신병원에 입원한다. 결과적으로 이 둘은 화해를 했다. 다만 이 소재를 주제로 한 '인형의 집'의 결과는 다르다. 대체적 흐름은 소설가 '킬레르'의 '일화'와 비슷하다. 그러나 결말은 다르다. 희곡의 결말은 자신을 찾아나선 '여성의 독립'으로 이어진다.

극의 내용은 이렇다. 세 아이의 어머니이자 사랑 받는 아내, 로라의 이야기다. 로라는 다음 해에 은행 총재로 부임할 남편 헬메르를 위해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그러다 그녀의 오랜 친구인 '크리스티네'가 찾아온다. 크리스티네는 자신의 사정을 말하하며 취업에 대한 부탁을 한다. 이 과정에서 당연히 해고되는 쪽도 발생한다. 다만 해고되는 쪽은 다름이 아닌 그녀가 돈을 빌렸던 상대이다. 이는 극의 갈등을 유발하는 소재가 된다.

빠른 전개를 위한 일이겠으나 크리스티네가 그녀를 찾아왔을 때, 그녀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는다. 남편의 병을 위해, 아버지의 서명을 위조하여 돈을 빌렸던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잘 이해가 가지는 않았다. 왜 그렇게 쓸데 없는 이야기를 많이 하고 사는지...

아무튼 '남편'의 '병'을 위해 '몰래' 돈을 빌리고, 묵묵히 그 돈을 갚는 모습을 보고 대부분의 남편의 반응은 '감사하다'할 법하다. 그러나 극은 그와 반대다. 아마 당시 시대적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비도적적인 방식으로 돈을 빌렸던 점, '여성'은 돈을 빌릴 수 없다는 점, '남성'의 권위를 실추 시켰다는 점. 이러한 이유로 당시 남자들에게 용서하지 못할 죄를 짓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은 '로라'의 약점이 된다. 남편에게 로라는 자신을 위해 '춤'을 추고 노래하는 귀여운 '아내'였다. 그런 '로라'가 뒤에서는 자신을 기만하고 범법을 저질렀다. 남편인 '헬메르'는 그녀에게 커다란 실망을 한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는 상당히 권위적인 모습이라고 볼 수 있다.

남편은 아내를 '종달새, 다람쥐'라고 부른다. 아이 취급하고 인형 취급한다. 남편의 사랑'을 받기 위해 혼신을 다하던 '아내' 또한 그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점차 변해간다. 아내와 어머니로 살던 그녀는 '삶'이 연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녀는 결혼 생활에 대해 '행복'이 아니라, 재밌었다고 말하며 진정한 행복을 위해 '자신'를 찾겠다고 말한다.

물론 현대의 여성 지위가 이렇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을 시대적 '페르소나'에 대해 생각해 볼 만 하다. 과연 우리는 '아버지', '친구', '남편', '아내'의 여러 페르소나에 둘러 쌓여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진짜 자신을 잊고 살아가는 것은 아닌가. 많은 가면들 사이로 우리는 상황에 맞는 연기를 하고 살아간다. '희곡' 인형의 집은 '헨리크 입센'의 '인형의 집'은 사회적 편견과 현실, 자아의 간격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여성'에 대한 글이다. 짧지만 꽤 생각해 볼 여지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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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의 흑역사 - 이토록 기묘하고 알수록 경이로운
마크 딩먼 지음, 이은정 옮김 / 부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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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베냉에서는 꽤 아주 특이한 '절도' 사건이 일어났다. 2001년, 서아프리카 베냉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 절도는 사람들을 화가 나도록 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사람들은 용의자에게 휘발유를 붓고 불을 붙인 다음 그가 타죽는 것을 지켜보기까지 했다. 화가 난 군중들은 '이것'을 흠친 용의자 다섯 명을 죽이기도 했는데 이 살인 사건의 발단은 '절도' 였다. 군중들은 왜 그렇게 화가 났으며, 무엇을 훔쳤기에 그토록 분노 했을까.

베냉의 남자들은 인근 사람들에게 '자신의 그것'이 도난 당했다고 소리쳤다. 이 소시를 들은 주변 군중들은 도둑을 향해 달려 들었다. 그리고 집탄 폭행과 살인은 저질렀다. 그렇다. 그들이 도난 당한 것은 바로 '남성의 음경'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그것은 '집단 히스테리 혹은 '사회적 패닉'의 형태로 나타났다. 사람들은 자신의 음경이 점점 줄어들거나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꼈다. 실제로 '그것'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느끼게 되는 '뇌의 착각'은 집단적으로 강한 두려움과 사회적 혼란을 만들었다. 학자들은 이 현상을 근거없는 믿음과 사회, 경제적 불안정이 결합한 결과로 봤다. 실제로 뇌는 물리적 실체와 상관없이 무언가가 없다거나 사라진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이를 '신체편집분열증'이라 부른다. 좌측 편마지와 관련해 신체편집분열증을 앓는 환자들은 자신의 신체가 '소'의 것이라던지 다른 인격의 것이라고 믿는다.

이러한 일들은 조금더 '실천적인 의지'로 바뀌는 경우가 있다. 바로 신체통합정체성장애(BIID)이다. 이 장애를 갖게되는 환자들은 자기 몸의 일부가 자기 것이 아니라는 금각과 함께 극심한 우울, 스트레스를 겪는다. 그리고 이 낯선 몸을 자신으로 부터 잘라내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를 갖는다.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손을 '시어머니의 손'이라고 여겼고, 어떤 누군가는 자신의 어떤 손을 지하철에 두고 내렸다고 여겼다.

1970년대 존스홉킨스대학의 '정신호르몬 연구실'에서의 일이다. 어느날 이곳에서 일하는 이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이 전화의 내용은 다소 충격적이다. 전화 상대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잘라줄 외과 의사를 찾고 있었다. 그는 13살부터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고 싶어 했으며 그러한 의지는 집착을 넘어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가 자신의 다리를 잘라내고 싶어했언 이유는 성적인 이유였다. 그는 목발을 짚고 걸어가는 사람을 보면 성적 흥분을 했다. 또한 다리가 절된단 사람에 대한 환상과 동경을 했는데, 이후에는 자신의 다리를 잘라낼 의사를 찾아 다니곤 했다. 그러나 역시 당시에도 이는 '의료윤리적 문제'로 의사들에게 거절되는 일이었다. 결국 자신의 다리를 절단해 줄 의사를 찾지 못하자, 그는 결국 결심을 했다.

그는 스테인리스 쇳조각을 줏어다가 자신의 다리를 찔렀다. 이후 망치로 쇳조각을 내리쳐서 정강이뼈에 박아 놓았다. 정강이빼에 박힌 쇳조각을 다시 빼내자, 피부에서 뼈까지 이어지는 구멍이 생겨났는데, 그는 그 구멍 속에 얼굴 여드름에서 짜낸 고름, 콧물을 섞어 만든 오물을 채워 넣었다. 이후 그 오물들이 자신의 정강이뼈에 심각한 감염을 만들어주길 기다리다가 의사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날 의사는 그의 다리를 성심히 치료했고 그는 두 발로 걸어 집으로 돌아왔다. 이처럼 비정상적인 일에 대한 집착과 착각은 대체로 '주술'이나 '종교' 등에서 다뤄진다. 그러나 현대 과학에서 이들이 모두 '뇌'가 벌이는 일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1972년생 에리카 라브리에는 미국의 양궁선수다. 그는 1999년 일본에서 처음 양궁을 시작했으며 뉴욕에서 열린 제42회 세계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고 FITA팀 기록을 깼다. 또한 IFAA 실내 선수건 대회에 참여하여 2007년에도 금메달을 획득하고 독일 만하임에서 단일 라운드 세계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2004년 그는 한 상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로 인해 그를 대표하는 수식어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바뀐다. 그가 사랑에 빠진 대상은 바로 '프랑스 파리의 마르스 광장에 서 있는 '에펠탑'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단순히 스치고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였다. 그녀는 2007년에는 에펠탑과 결혼식을 했는데 그로 인해, 그녀의 이름은 현재 '에리카 라브리에'에서 '에리카 에펠'로 바뀌었다. 그는 무생물과의 관계를 발전시키는 조직인 OS 인터네셔널의 설립자로 활동하고 있다.

뇌는 그밖에 꽤 흥미로운 모습을 보여준다. 어떤 충격에 의해 누군가는 감정을 잃기도 하고, 누군가는 천재가 되기도 하며, 누군가는 성격이 바뀌기도 한다. 사람은 모두 같은 것을 보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적은 프레임으로 움직이는 만화처럼 단절된 현상을 보는 이도 있고 어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손에 달린 손이 수박만큼 크게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 모두 뇌와 연관된 일이다. 이런 현상은 흔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아예없는 일도 아니다. 꽤 적지 않은 사례가 보고 되고 있으며 실제 보고되지 않은 사례를 합한다면 이는 어쩌면 흔한 일이거나 누구에게나 일생 중 겪어 볼 만 한 일이다. 명백하게 손에 붙어 있는 손가락을 보고도 손가락이 없다고 믿는 이들은 다른 인지나 지능에서 보통 범주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런 착각을 하는 이유가 생물학적인 이유라면 나 혹은 나와 아주 가까운 사람들도 이런 착각을 하지 않으라는 법이 없다. 우리는 모두 같은 색을 보고 있는가. 우리는 모두 같은 모양을 보고 있으며, 같은 세상을 살고 있는가. 알 수 없다. '뇌'를 연구하는 것은 어쩌면 '우주'을 연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렵고도 신비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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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오신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04
김시습 지음, 이지하 옮김 / 민음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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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은 태어난지 여덟달 만에 글을 읽어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러한 신동을 보고 주변 어른들은 '논어'의 글을 따서 '시습'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 不亦說乎)'

이는 논어의 첫문장이며 그 의미는 '배우고 그것을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아니한가'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논어를 읽지 않은 이들도 한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문장이다. 이 문장을 따서 이름을 지었을 만큼 '시습'은 매우 천재적인 인물이었다. 그의 어린 총명함이 어찌나 특출나던지 세종대왕이 그를 불러 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살아 생전에 엄청난 벼슬을 하거나 대단한 치적을 남기진 않았다. 그의 나이 서른 넷 정도 됐을 때, 금오산 용장사에 들어 앉아 집필을 했는데 그때 지은 '소설'이 '금오신화'다. 금오산에서 집필한 단편 소설집으로 '신화'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 '배경'이 '현실'을 다루고 있지 않아서다. 과연 천재의 글 답게 이 글은 무려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이다.

한때, '장르소설'이 폄하되는 시절이 있었다. 판타지, 과학공상, 무협, 추리소설 등의 장르소설은 순수문학에 비해 가볍게 쓰여지고 내용이 허무맹랑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따지고보면 종교 혹은 이데올로기적인 목적으로 쓰여진 '성경, 쿠란, 마오쩌둥 어록'을 제외하고나면 해리포터 시리즈, 반지의 제왕, 나니아 연대기, 다빈치 코드, 어린왕자 할 것 없이 대부분 판타지 소설이 그 순위를 차지한다.

오죽하면 우리나라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 또한 판타지 소설이고, 최초의 한글 소설인 '홍길동전' 또한 판타지를 가미하고 있는가.

'금오신화'는 총 다섯 개의 단편 소설이 엮어진 글이다. 사실 더 많은 소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까지는 다섯 개의 소설만 전해지고 있다. 이 소설은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를 흉내냈다.

첫번째 소설은 만복사저포기로 시작한다. 전라도 남원에 사는 '양갱'이라는 청년이 만복사라는 절에서 아름다운 여인을 만나는데, 이들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알고 보니, 이 여인은 왜구들의 침략 때 이미 죽은지 오래된 귀신이었다. 이 소설은 현실과 비현실을, 이승과 저승을, 생과 사를 오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 소설을 해석하는 방식에 따라, '계유정난' 당시 왕위에 오른 '세조'를 지켜본 '김시습'의 일대기와 엮어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다만 작가의 의도가 어찌됐건 이는 독자의 몫이지 정답은 아니라고 본다.

마치 J.K.롤링의 해리포터에 '20세기 사회가 갖고 있던 불평등한 사회에 대한 비판과 문제의식 고치'라는 거창한 수식을 달아 굳이 읽고 싶지 않도록 만들 이유가 없듯이 말이다. 소설은 소설로써 그 흥미를 주고 독자 개인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을 자유롭게 열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머글 태생 마법사'와 '순수 혈통'간의 차별이 현실 세계의 인종과 계급, 성차별에 대한 은유적인 비유'라고 굳이 '주석'을 달필요가 없는 것 처럼 말이다.

가벼운 마음으로 '금오신화'를 읽어도 그 안에서 독자는 충분히 다양한 사유거리를 느껴 볼 수 있다. 소설에는 현대의 뮤지컬처럼 주인공들이 '한시' 한 편을 서로 주고 받으며 읊는다. 이 과정에서 '성리학'의 '이치'와 더불어 다양한 배움을 얻을 수도 있다.

'이생규장전' 또한 비슷한 맥락이다. '이생'이라는 자가 '최랑'이라는 여인과 만나 사랑하는 내용이다. 이또한 판타지적 요소가 가미되어 있다. '사랑'과 '판타지'라는 현대에서도 흥행의 필수인 요소가 많아 흥미롭다. 다만 생각보다 쉽고 재밌는 이 '금오신화'를 실제 읽은 사람이 많지 않은 이유는 아마 그 '이름'과 '해석'이 주는 '장벽'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글'의 쓰임은 '읽힘'이고 그 쓰임 또한 '읽힘'이다. 읽히지 않는 글은 그 생명이 사라진다. 문학을 사랑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오랜 고전에 다양한 각주를 달지만, 이러한 각주가 점차 글을 접하는데 장벽의 역할을 하며 때로는 그 본질을 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대가 지나면 점차 사용하는 언어와 문화가 달라지면서 글에 이질감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고전을 쓴 사람이라고 각 잡고 어려운 철학을 담아내기 위해 애쓸 것이라는 생각은 자칫 부담감이 되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읽었을 때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이 소설의 첫문장은 누가봐도 '판타지'다.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해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 어떤 해석이 들어갈 여지 없이, 다음 문장을 읽어보고 싶은 강렬한 문구다. 이 글을 읽으며 나는 '흥미'를 느꼈지, 카프카가 던진 '사유'와 시대에 던진 '파편화'를 떠올리지 않았다. 그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후기'를 읽으며 '이렇게 잃힐 수도 있겠군'하고 생각 했을 뿐이다. 소설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고 마음에 떠오르는 생각을 자유롭게 향유하는 것이다. 공부하기 위해 꺼내든 학습지가 아니다.

김영하 작가는 작품이 독자들이 다양한 감정을 느끼도록 하는 일이지, 조각난 내용 속에서 답을 찾는 방식'으로 읽혀서는 안된다고 했다. 그렇다. 작가의 의도는 글이 읽히는 것이다. 감히 선택을 받아야 하는 '작가'가 오만하게 '선택'하는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면 누가 그 글을 읽고 사용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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