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받을 용기 2부작 북케이스 세트 - 전2권 (10주년 한정판) 미움받을 용기
기시미 이치로.고가 후미타케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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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 1000만 부 돌파

51주 연속 역대 최장기 종합 베스트 1위

국내 판매 200만부.

결과가 마케팅인 '책'이 있다.

많은 이들이 이미 선택한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베스트셀러'를 선호하여 찾아보진 않는다. '트렌드'를 판단할 뿐이다. 다수에게 선택 받았다고 반드시 좋은 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판매 부수로만 따지자면 '수학의 정석'은 4천 500만권이다. 매년 100만권이 팔린다. 운전면허시험 문제집도 2천 500만부가 팔렸다. 그 책이 지금의 나에게 적합한가. 아니다. 나에게 적합한지, 그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보면 '미움받을 용기'는 '베스트셀러'이며 요건이 적합했다. 특정 사람에게 집중 판매되는 것이 아니다. 시대를 살아가는 다수에게 필요하다. 왜 그런 선택을 받았는지 알 수 있다. 특정 집단이 아니다.

시대가 선택한 책이다.

왜 시대는 이 책을 선택했는가.

'미움받을 용기'

도서의 제목은 '미움받을 용기'다. 도서 제목은 아이콘처럼 쓰여지기도 했다.

관계에 얽힌 우리 동양인들에게 '미움받을 용기'는 제목부터 위로를 준다. 목차에서 매력을 주고 내용에서 깨달음을 준다. 어떤 사람을 미워할 때, 행동이 미워서 미워하는 것일까. 그저 미움이 먼저지 않을까. 미움이 먼저라면 미움은 누구나 받게 된다. 그것을 설명해주는 좋은 예가 '페스트'와 '지옥'이다.

카뮈의 소설 ‘페스트’는 인간 존재와 윤리적인 고민을 보여준다. '신의 형벌'로 여겨진 '페스트'가 그저 단순한 질병이라는 사실은 사람들의 '죄책감'을 덜었다. 넷플릭스 드라마 ‘지옥’도 유사하다. 드라마에서는 ‘신의 저주’로 여겨지는 ‘형벌’이 불특정 임의로 설정된다. 이 설정은 아들러의 목적론과 유사하다. 이유가 있어서 ‘형벌’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받을 뿐이다. ‘목적론’은 우리를 위로한다. 우리가 미움받는 것은 그저 확률에 의한 것이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행동'이 원인이 아니다. 결심이 원인이다. 결심 후 행동에 의미가 부여될 뿐이다. 아드러의 목적론은 그렇게 우리를 자유케 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성경의 말처럼 어떤 깨달음으로 우리는 자유로워진다. 아들러는 주체성을 상대, 외부, 과거에서 현재의 나로 가지고 온다. 변화의 시작은 언제나 '나'와 '지금'이다.

이책은 우리에게 단순한 자기계발서 이상의 가치를 제공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 책에서 위로와 깨달음을 얻는 이유다. 시대가 선택한 이 책은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의 지침서가 될 것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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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를 하며 생각한 것들 (리커버 에디션) - 손흥민 첫 에세이
손흥민 지음 / 브레인스토어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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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말하면 어떻지 모르지만 손흥민에 대해 잘 모른다. 한창 그가 주가를 올리던 시기, 개인적인 어려움의 시간을 겪고 있었다. 세상이 손흥민 선수에 열광을 하던 시기, 전혀 그의 존재도 모르고 삶을 살았다.

불현듯 그럴 때가 있다. '너무 세상을 모르고 살고 있나' 할 때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TV프로그램이나 시대의 아이콘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지 않나.

보통의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손흥민'의 책, 그의 영상을 찾아 본 것은 '손웅정'이라는 사람 때문이다.

누군가는 '손웅정 작가'를 보고 '손흥민 아버지'라고 떠올리겠지만 적어도 나에게 '손흥민'은 '손웅정 아들'로 보인다. '스포츠'가 단순히 '신체 강화'로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 부자를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스포츠'가 다른 무언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모든 것은 그 끝으로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결국 '철학'을 만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지금도 손웅정 작가의 '책' 중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다. 트로피를 받은 손흥민에게 칭찬을 하고 들어오며 '트로피와 상장'은 분리수거 잘 하고 오라고 했다는 말.

'손웅정' 작가의 '모든 것은 기본에서 시작한다'라는 책의 일부다. 이 책은 갑자기 마음에 들어왔고 밤 10시 30분이 되어 급하게 서점으로 뛰어가 구매한 책이다. 직원이 마감 정리를 할 때, 잽싸게 구매해서 잠들기 전에 속독으로 훑었다.

다급함에 훑어 내려가다, '탁'하고 걸렸던 부분이다.

'내가 읽은게 맞나?'

책은 '손웅정 작가'의 성격처럼 그저 '툭'하고 그 일화를 소개했다. 뭐 이렇다 할 준비도 없이 그저 '툭'하고 넌지시던진 그 몇 줄이 가슴에 '팍'하고 꽂혔다. 아이의 추억을 간직하겠다며 어린이집에서 만들어온 꽃모양 색종이도 모두 쌓아두던 나에게 던지던 메시지였다. '물건'이 대관절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가만히 보면 내가 쓴 글에도 비슷한 일화가 있다. 어머니에 관한 일화다. 어머니는 거의 모든 것을 버리길 좋아하셨다. 기분 좋게 구매한 어떤 것을 보고도 '쓰레기'를 사왔다며 타박 하셨다. 때로는 '책', '일기장', '상장'을 비롯해 깔끔하게 버리셨다. 당시 일었던 약속한 마음이 괜스레 죄송스러웠다.

최근 읽었던 손웅정 작가의 '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에서 다른 인사이트를 얻었다. 이것을 읽고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도서를 읽으면서, 읽고 난 뒤 꾸준하게 버렸다. 자가용으로 몇 차를 갔다 버렸는데도 아직도 버릴 것이 많다.

수 년 간, 단 한번도 선택받지 못한 것들.

또한 비슷한 종류의 다른 선택지들.

그런 것들이 다음 경쟁에서도 밀리면서 영원히 쌓여 있을 것만 같았다. 찻장에 '비타민'이 보였다. 종류는 두 종류였다. 가만보니 어떤 하나는 선택을 받고, 다른 하나는 선택 받지 못했다. 선택 받던 녀석을 다 먹고 나면 선택받지 못한 것을 두고 다른 선택지를 또 구매했다. 다만 매번 비타만에 손을 뻗을 때마다 새로운 비타민을 다시 구매할 때마다 선택하지 않았던 '것'에 미련을 두었다.

'미련(未練)'이란 '한자'의 뜻을 보건데 '아닐 미(未)에 익힐 련(練)'을 쓰고 있다. 어쩌면 아직 '익혀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미 내것이 아님을 알고 있으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붙잡고 있는 마음이다.

물건 뿐만 아니다. 과거와 사람. 나는 거기에 익혀지지 않았다. 잊혀져야 할 것을 붙잡고 '인정'하지 않았다. 그것이 익숙치 않으니, 거기에 얽매여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짧게 일주일 간 손웅정을 빙의했다. 매일 두 시간 씩 청소를 하느라 보낸다는 그를 보며 '미친척'하고 버릴 것을 버렸다. '버리는 방법'에 대한 많은 책과 청소에 관한 글을 읽었다. 그리고 대략 꽤 필요한 뼈대만 남고 상당히 버려졌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 비로소 느껴졌다.

'개운하다'

혼탁했던 시야가 말끔해진 느낌이다. 집안에 '선택지'는 사라졌고 본질만 남았다. 불필요한 고민과 생각이 단순화 되는 느낌이다.

그를 그렇게 만들었던 독서법에 무서운 호기심이 생겼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뒤늦게 그의 행동이 '독서'에 기인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우연히 '손흥민'의 책에 그의 자취가 남아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손흥민'의 책을 읽었다. 손흥민의 책에는 꽤 많은 분량이 '아버지'에게 할당되어 있었다. 주인공이 곁으로 비껴서며 조연으로 등장할 때, 그 사람의 객관성이 명확하게 보였다.

이 부자가 서로 주고 받은 말 중에 가장 많은 핵심 키워드가 보였다.

'호사다마'

언젠가 친구로부터 들었던 말이다. 개인적인 성장이 꽤 이뤄지고 있을 때, 친구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했다. 그 야속한 마음에 내가 했던 말은 '긍정'이었다. 이후 안좋은 일로 고통스러워 할 때, 친구가 한 말이 있다. '새옹지마'.

좋을 때는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고, 나쁠 때는 모든 것이 나쁘게만 보인다. 좋을 때 갖는 '긍정'은 '긍정'이 아니다. 때로 좋을 때 보이는 나쁜 면이 긍정이다. '긍정'은 '수긍하다'의 '긍'과 같다. '옳다고 여기다'라는 의미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양면 중 '좋은 면'만 보는 것도, '나쁜 면'만 보는 것도 모두 긍정이 아니다. 긍정은 모든 상황과 현상에 존재하는 양면은 모두 바라보고 그렇다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호황은 좋다. 불황은 더 좋다'

책에서 언급한 이 말이 더욱 와닿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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뭘 해도 잘되는 사람의 모닝 루틴 - 내 인생을 바꾸는 좋은 아침 습관
이시카와 가즈오 지음, 김슬기 옮김 / 다른상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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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막 깬 직후의 행동은 대부분 의식적 사고 없이 이루어진다. 반복하는 행동 혹은 습관을 자동으로 하게 도와주는 신경구조를 '신조체'라고 하는데 선조체의 활동은 우리가 잠에서 깨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또한 이미 입력된 자동화된 행동을 촉진한다. 이 과정에서 도파민이 보상 체계를 강화하고 쉽게 습관으로 자리 잡는다.

사람마다 아침 루틴이 존재한다. 시간과 상관없이 눈을 뜨자마자 무의식적으로 반복하는 행위가 있다는 말이다. 누군가는 눈을 뜨자마자, 알람시계를 살피며 겨우 눈을 뜨고, 누군가는 명상을 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자고 일어난 자리를 잽싸게 정리하기도 한다. 물을 한 컵 들이켜는 사람도 있고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 이들도 있다. 이런 일은 어제와 오늘이 다르고, 내일이 다른 행동이 아니라, 아주 높은 확률로 '반복', '지속'되는 '루틴'일 것이다.

잠에서 막 깨어난 상태는 '최면'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 이를 '최면성 각성 상태' 혹은 '최면 유사 상태'라고 한다. 우리의 뇌는 특정 가정이나 생각에 따라 천천히 그 떨림을 방출한다. 이 떨림의 크기와 빈도에 따라 알파파 부터 델파파로 구분할 수 있다. 의식이 완전히 깨어나지 않고 약간 비몽사몽한 상태, 즉 그 상태는 최면과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

영화 올드보이는 최면 상태를 통해 각성 상태를 조종한다. 결국 사람의 인생을 좌우할 수 있는 영화적 설정은 현실에서도 비슷하게 일어난다.

잠에서 깬 직후의 상태는 외부 자극에 더 민감하고 수용성이 높다. 즉 최면 상태와 유사하다. 이때 어떤 암시나 제안을 넣으면 더 쉽게 받아 들여질 여지가 있다. 가장 이완된 상태에서 주입되는 암시가 최면가 연결된다는 것은 그닥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때 반복하는 일이 습관을 형성하거나 사람의 생각과 인생을 새롭게 창조한다는 것에도 동의가 된다.

눈을 뜨지마자 무엇을 하는가.

아이가 성장하며 나 또한 다양한 방식으로 삶의 루틴을 고민한다. 7살 이후에 가장 중요한 삶의 루틴 중 하나는 침실에는 '결코' 전자기기를 갖고 들어가서는 안된다 는 법칙이다. 잠에서 깨어난 뒤에 우리가 하는 '첫 생각', '첫 행동'이 무엇인가. 아마 '시계'를 확인하는 것이다. 시계를 확인하면 곧바로 짧게 쌓인 메일이나 문자를 확인하고 간단한 '알림'을 확인할 것이다. 시계를 확인한다는 '명분'으로 우리가 하는 그 첫 행동이 문제다.

'마케팅 전쟁터'로 시작과 동시에 빨려 들어간다. 시간을 팔아 '돈'을 버는 '플랫폼 기업들'이 한푼 파는 것 없이 세계적인 수익을 얻어내는 세상에서 우리는 눈을 뜨자마자, 그것에 빨려 들어간다.

내가 가진 철칙 중 하나는 눈을 뜨자마자, 처음하는 행동이 '그날 하루'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20세기 중반 콘라트 로렌츠 박사는 거위 새끼가 부화한 후에 처음 보는 물체를 어미로 인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을 '각인'이라고 한다. 각인은 매우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이후 시간이 지나면 더이상 각인이 일어나지 않는다. 태어나자마자 움직이는 첫 물체를 어미로 인식하는 과정은 보통 '조류'에게 일어나는데, 나는 조류와 인류가 0.01%의 연결성도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눈을 뜨자마자, 연예인 기사를 읽은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요즘과 같은 '알고리즘 지능'이 고도화 된 사회에서 그 정보는 다른 정보를 끌어당긴다. 이 얼마나 직관적인 사고 흐름인가.

원숭이 엉덩이는 빨갛고, 빨간 것은 사과, 사과는 맛있어. 맛있으면 바나나...

이처럼 인간의 사고 흐름은 앞에서 주어진 인식 대상에 짧은 연결성을 긋고 끊임없이 이어 나간다. 그 사고의 흐름을 '알고리즘'이 기가 막히게 포착해주니, 처음에는 '연예기사'로 시작했다가 나중에는 난데없는 정치 기사나 전혀 관심없었던 물건 사용 후기를 의식없이 들여다 보게 된다.

만약 눈을 뜨자마자, 성경, 불경, 도덕경, 논어, 맹자, 채근담을 읽는다고 해보자. 우리의 사고는 주어진 인식 대상에서 그 사고의 첫 뿌리를 시작한다. 한참을 사고가 확장하다가도 책은 다시 중심으로 돌아 오도록 한다. 아무리 떠내려가더라도 중심 바닥에 앵커가 단단하게 자리를 잡아주고 있으니, 다시금 제자리로 돌아 올 수 있다. 정처없이 사고의 흐름으로 떠돌아다니는 것보다 조금은 안정적인 방식으로 중심을 잡고 사고를 제어 할 수 있다.

집에는 TV가 없다. 태블릿도 없다. 스마트폰도 없다. 이것들은 업무에서 사용하고 배터리가 모두 소진되면 부엌 넘어에 있는 세탁실의 세탁기 위, 유일한 충전선에 연결된다. 간단한 문자를 확인하기 위해 꽤 귀찮은 거리를 이동해야 한다.

외부와 철저하게 단절하여 '수도승' 같은 삶을 살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하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 굉장히 화가 났던 적이 있었다. 꽤 오래 전 일인데, 당시만 하더라도 하고 있던 사업이 활력이 돌 때 였다. 전화는 쉴틈이 없이 울리고, 문자, 알림이 미친듯이 쏟아졌다. 이 와중에도 가장 나를 괴롭게 한 것은 '스팸문자'와 '스팸전화' 였다.

'보험', '주식','대출'과 같이 무작위로 대상을 정하여 돌리는 그들의 마케팅 공격에 무기력하게 당해야 했다. 그들을 피하기 위해서는 꽤 큰 중요한 전화를 놓칠 여지가 있었다. 당시 업무의 특성상 입력되지 않은 전화번호는 모두 받아야 했기에, 나는 매우 급한 상황에서 그 쓰레기 같은 전화를 모두 받아야 했다. 어디서 노출된지 알 수 없지만 점차 걸려오는 전화의 상당수가 '광고, 주식, 대출, 보험' 등의 성격이 늘었다. 한 번은 너무 화가 나서, 이들 중 일부를 신고하고 '행정 처리 결과'를 받았는지 확인까지 해봤다.

그때 상담사분께서 말씀하시길, '자신도 이 일을 하지만, 이런 전화를 받게 된다고 피할 수 없다'고 하셨던 기억이 있다. 어떤 기분 좋았던 하루,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대며 전화를 끊었던 적이 있다.

나의 하루가 그들에게 간섭 당하는 것을 깨닫고 필사적으로 수 년 간, 스마트폰에서 멀어지기를 시도했다.

지금은 꽤 그 균형을 잡았다. '아이폰13미니'는 괜찮은 선택이었다. 특정 시간과 장소에 따라 '방해금지모드'를 설정하면 원하는 전화만 받을 수도 있고 워낙 작은 화면 탓에 스마트폰을 들여다 보는 습관도 줄어 들었다. 쓰지 않으면 가방에 넣어 두어 전자책을 꺼내어 본다.

물론 밀려 있는 '메일'과 '문자', '알림'을 내가 원하는 시간에 확인 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이런 모든 유혹은 참 신기하게도 주 5일 아침 9시부터 6시까지 이뤄진다. 스팸을 보내는 이들이 주 5일 8시간 근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꽤 귀엽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은 주체적으로 관리 할 수 있는 루틴을 가졌다. 이런 까닭에 꽤 여유로운 마음이 생겼다.

개인적으로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낼 시간이 짧다고 여긴다. 아이는 여덟 살이고, 앞으로 4년 뒤에는 '아빠'보다 '친구'를 좋아 할 것이다. 다시 4년 뒤에는 자신의 미래를 위해 공부를 하게 될 것이고 다시 4년 뒤에는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어 나갈 것이다.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앞으로 4년, 짧게 보면 1000일 밖에 남지 않았다. 이 1000일을 놓치면 아이와의 추억은 영원히 사라질지 모른다.

일상을 모두 끝내고 난 뒤에 아이와 시간을 보내는 것은 거의 어렵다. 다만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4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은 확보된 시간이다. 아이는 자신의 일과를 마치고 스스로 하루를 정리할 마음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고로 아이와 해야 할 일을 아침에 함께하고 충분한 이야기를 하며 하루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각자 시작한다.

아침 시간은 모든 유혹이 잠에들고 부지런한 이들은 누구도 방해하지 않고 자기 수양을 하는 시간이다. 그 시기에 놓쳐도 주어지는 두 번 째 기회가 있는 꽤 너그러운 시간이다. 저녁 또한 역시 매우 중요한 시간이지만, 저녁은 모든 유혹이 필사적으로 자기 성과를 위해 달려드는 시간이며, 그 시기를 놓치면 기회는 다시 주어지지 않는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주체적인 삶이 중요하다. 기상 시간 따위는 중요치 않다. 그 상황에 따라 주체성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다만 현재 나의 상황에서는 '아침'이라는 결론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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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쓰고 버린다 - 손웅정의 말
손웅정 지음 / 난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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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 자기계발서를 잘 안읽게 됐다. 이유는 이렇다. '가짜'가 너무 많다. 누구나 쉽게 '책'을 출간 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철학' 없는 글들이 무책임하게 쏟아진다. 개중에는 '여러분도 할 수 있습니다'라며 '쉽게 달성하는 법'을 알려준다. 다만 읽다보면 '자기계발서'가 아니라 '자기소개서'인 경우가 많다.

인터넷을 켜면 '이것 하나만 알면'이라는 문구를 많이 보게 된다. '이것만 알면 월 수익 얼마', '자신만 따라하면 이룰 수 있다'는 말 일색이다. 그 거짓부렁들에 회의감을 느낀다. 결국 그 잘난 '자기소개서'를 안보게 됐다. 이들의 최종목적은 '성공 팔이'다. '성공'을 팔아 '성공'을 이루고, 강연과 유튜브, 출판의 새로운 수익 구조를 창출해 낸다.

워런버핏, '이것만 알면 누구나 쉽게 투자의 고수가 될 수 있습니다'

일론 머스크, '누구나 쉽게 월수익 두 배 올리기'

이런 강연을 본 적 있을까. 없다. 그들이 그런 강연을 하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들은 그들의 본업에 충실하기에 그런 강연을 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이들은 '곁다리'로 빠져 이타적인 행동에 삶을 좀먹지 않는다.

진짜는 사람들에게 성공팔이를 하지 않는다. 다면 물으면 답할 뿐이다. 그들은 자신의 일에 충실한다. 자기의 일상와 루틴을 행하기 정신 없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우리가 그들을 존경하는 이유다.

대중은 각자 자신의 몫으로 삶을 산다. 그것을 바꾸어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교육'이 아니라 주체적 의식에 달려있다. 고로 노하우를 알리지 않아도 할 사람은 한다. 목이 마르면 우물을 팔라고 말하지 않아도, 우물을 파게 된다. 진짜는 대중의 계몽을 위해 자신의 일상과 루틴을 내팽겨칠만큼 무책임하지 않다.

강연하고 책 쓰는데는 생각보다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다. 몇 일을 통으로 내어 놓아야 한다. 누군가 유튜브나 책을 통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고 있다면 그것은 '이타성'이 아니라 '그것'이 '업'이라는 의미다. 진정한 이타성이라면 돈 한푼 받지 않고 그저 행해야 한다. 만약 성공을 쉽게 이루는 방법을 알려준다고 한다면,

"그런 순수 이타적 행동 말고, 본인을 성공에 이르게 했던 '본업'은 대체 언제쯤 시작하실껀가요?"

묻고 싶어진다.

입 다물고 묵묵히 치열하게 자기 일을 하던 '진짜'는 지금도 입을 다물고 있다.

진짜는 본래 입을 다물고 있으니, 가짜는 제발 그 입을 다물라, 말하고 싶다.

진짜들의 하루는 '철학'으로 덮혀 있다. 물음에 답할 뿐, 알려주고 싶어 안달하지 않는다. 자신이 하는 일에 '명확한 철학'이 있기 때문다.

'손흥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쉽고 빠른 노하우'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가 '손흥민'이 된 것은 '쉽고 빠른 노하우'가 아니라, 하루와 하루를 쌓았던 작은 습관과 생각, 삶의 방식의 연속 때문이다. 여태껏 남들보다 게을렀으나 지금이라도 역전 한방으로 삶을 바꾸고자 하는 욕심은 푼돈이 되어, 누군가의 '낚시바늘'에 꿰인다. 철학 없는 푼돈을 모은 가짜는 그렇게 '진짜 성공'의 모습으로 탈바꿈 된다.

삶은 끊임 없는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은 현재로 하여금 미래를 과거로 결정 짓게 하는 마법이다. 과거의 내가 나태했다면 그것은 현재에 충분히 반영이 돼었다. 현재의 내가 나태한다면 그것은 미래의 내가 충분히 반영할 것이다. 지은 죄값을 받지 않겠다는 욕심이 '지금까지는 나태는 했으나 한방으로 성공하여, 과거부터 노력한 이를 바보취급 하겠다.'는 터무니없음을 만든다.

'하려고 하면 방법이 보이고, 하지 않으려 하면 변명이 보인다.'

지금껏 스스로를 만들어갔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을 했을 땐, 최소 버렸던 시간만큼이나 노력을 채워 물타기를 했다는 다짐이 필요하다. 10년을 버렸으면 10년을 보고, 20년을 버렸으면 20년을 봐야 하지 않을까. 20년을 허투로 살고 단 1년 만에 모든 것을 뒤집겠다면, 반대로 1년 만에 이룬 성공 또한 그렇게 쉽게 다시 뒤집힐 수 있다.

빚더미보다 잿더미에서 일어나기가 더 쉽다. 이미 쌓아둔 업보를 되돌려내기 보다 아무런 업보를 쌓지 않는 것이 훨 수월하다. 간단한 논리다. 뒤로 달렸던 사람보다 멈춰있던 사람이 훨씬 더 목적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그것은 꼭 경제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만히 있어서 '퇴화'에 이른다. 몸과 정신은 노화한다. 생물학적, 사회적 나이는 점차 차오르고 사회가 원하는 '기대치'는 점차 높아져 간다. 8살에는 한글을 읽고 10살에는 구구단을 외우며 16살에는 적어도 '이차방적식'에 대해 들어본다. 각 나이에 맞는 '수준'을 요구하던 사회가 30살이나, 60살이나 변함없이 세월만 축낸 이에게 같은 결과를 보상하진 않는다. 즉, 나이가 들수록 더 능동적으로 성장해 내야 한다.

인생은 가만히 있으면 우리를 뒤로 후진 시키는 '런닝머신'과 같다. 내가 발을 내딛지 않으면 나는 뒤로 움직인다. 내가 한발과 한발을 떼야 겨우 그 자리를 유지할 뿐이다. 책 한 권 읽지 않고 일 년을 살면서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은 어불 성설이다.

'왕자불가간 내자유가추'라는 말이 있다.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으니 앞으로의 일에 더 신경을 쓰라는 말이다. 이 말은 지나간 일은 잊어버리고 지금부터 하면 즉각적인 보상이 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지나간 것은 어쩔 수 없다. 지은 죄에 대한 죄값은 그 죄만큼 받고 결국은 터벅터벅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다. 즉, 어쩔 수 없는 것에 연연해 하지 말고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시작하라는 의미일 것이다.

'손자병법'에는 이와 같은 말이 있다. '승전후구전', 무작전 싸움을 거는 것이 아니라, 이길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싸움을 걸어라.

준비 없이 보낸 세월을 망각한 채, 자신이 가진 하찮은 무기를 가지고 덤벼 드는 것은 '필패'를 의미한다. 충분히 쌓여 '낭중지추', 나의 잔이 차고 밖으로 흘러 넘쳐지는 순간이 '필승'의 순간일 것이다.

'손웅정 작가'의 글을 보면 딱 두 가지가 보인다. '더하고 덜기'.

그는 필사적으로 어떤 것은 더하고 어떤 것은 덜어낸다. 마치 자기를 채워가는 수많은 시간과 경험에서 끊임없이 좋은 것만 남기고 나쁜 것을 빼버리는 '필터링' 과정을 쌓아가는 것이다.

근육을 더하고 살은 뺀다. 지식은 더하고 주변은 덜어낸다. '지식을 얻고자 하면 무언가를 더하고, 지혜를 얻고자 하면 무언가를 버리라'는 의미다. 그의 책을 읽으며 몇 번이나 엉덩이가 들썩 거렸다. 미루고 있던 '버리기'를 실천 하느라 온주말을 사용했다. 가끔 '진짜'를 보면 그 경외감에 감탄하기 바쁠 때가 있다. 대상을 보고 한참을 감탄하다가 나에게 흡수하기로 했다. 가만 보면 나의 독서는 진짜 독서인가, 하고 되돌아보게 된다. 간만에 제대로 자극 받는 책을 보게 됐다.

"강력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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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 - 수양과 덕치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증자.자사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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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중용'은 '대학'과 '중용'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먼저, '대학'은 말한다. 개인 수양이 가정과 국가를 이어서 천하 평화까지 영향을 미친다고 말이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

개인의 도덕적 수양은 단순히 한 사람의 인격을 만드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세계 평화의 기본이 된다는 '이상'을 제시한다. 질서과 체계, 규칙과 정리라는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하는 공자의 '유교'를 잘 보여준다.

공자의 가르침은 명확하다. '정리', '질서', '체계', '규칙'이다. 태양은 태양의 자리를 지키고, 달은 달의 자리를 치키고, 나무는 나무의 자리를, 풀은 풀의 자리를 지키는 것처럼 사람은 자신의 자리를 알고 지켜야 한다.

'군군신신부부자자'

임금은 임금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아버지는 아버지답게, 아들은 아들답게.

이 고리타분해 보이는 이천년 넘은 꼰대어는 소통이 안되는 '권위주의 사고방식'의 상징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대부분의 젊은 세대에게 '유교'는 '꼰대'의 철학이다. '질서'를 강조하는 쪽이 '위'라는 점이 이유다. 사람의 욕심이 한이 없는지라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리는 선택적 철학이 가장 '유교'를 위험하게 만드는 자세다.

'유교'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다.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는 것을 말하지, 상대가 상대의 위치에 최선을 다 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제 '위치'에 오른 이들이 난데없이 "너의 위치에 최선을 다하라." 하니, 그것은 '유교'를 빙자한 '간섭'이 된다.

대부분의 철학은 '남을 평가'하는 잣대가 아니라, 스스로를 '수양'한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문장을 보면 알 수 있다. 거기에 '너'는 없다. 자신을 갈고 닦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공자의 가르침을 보면 각자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라고 말한다. 다만 오늘 그 '성인'을 방패막이로 삼는 '공자팔이'는 공자말을 앞세워 말한다.

"너의 본분을 다하라."

사실 유교 철학의 핵심은 모두가 각자의 본분을 다하는 것이다. 어린 아이가 둘이 있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이 하나 있다.

"왜 나만 해?"

이 유치하고 철없는 생각은 그대로 성장하여 마흔이 되고, 쉰이 되고 예순이 된다. 자신만하기에 '손해' 본다고 생각한 이들이 '다른 이들의 철학'을 고쳐 놓으려고 간섭하기 시작한다.

상대는 하던 말던 자신은 자신의 위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우리는 상대에게 간섭할 이유도 명분도 없다. '임금'이 '임금'의 위치를 다하지 못하더라도 '신하'는 '신하'의 역할을 하고, '아버지'가 '아버지'의 역할을 못하더라도 '아들'은 '아들'의 역할을 해야 한다.

상대는 하지 않는데 '나만' 한다고 손해라고 여길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상대'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 이기 때문이다. '수신'은 모든 덕목의 기본이다. 이렇게 자신의 수양에 힘쓴 이들이 많아지면 사회는 점차 자리를 잡는다. 부처를 팔고 예수를 팔고, 공자를 파는 것처럼 자신의 말에 위엄이 없는 자들은 성인을 힘을 빌어 자신을 포장한다. 그러니 결국 '제자'라고 자칭하는 이들이 '스승'을 욕보인다.

다음으로, 중용은 무엇인가. 중용은 '유교와 도교'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은 적절한 중간을 말한다. 모든 행동과 사고는 중도를 지켜야 한다. 도덕적 행위와 인간관계의 가르침도 준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이 말은 '지나칠 것 같으면 차라리 모자른 편이 낫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조화'를 위해서는 다다익선이 맞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극단'은 꼭 화를 부른다. 즉 선을 넘지 않는 조화로움은 '질서' 만큼이나 중요하다. 달이 달의 위치에 떠 있는 이유는 지구가 끌어당기는 중력과 지구로 부터 튕겨 나가는 관성 사이의 균형 때문이다.

즉, 대학과 중용은 사실 우주를 이루는 방식이다. '균형'은 '질서'를 낳고, '질서'는 '균형'을 낳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이도 마찬가지다. 이 둘이 너무 붙어 '충돌'하지 않고, 너무 멀어 '튕겨져' 나가지 않는 적절한 선의 균형이 필요하다. '부모', '자식' 간의 관계만 그렇겠는가.

군자지교 담담여수(君子之交淡淡如水), 군자의 사귐은 맑은 물과 같아서 담백하고 평온해야 한다. 군자의 우정이 욕심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소인지교 감감여주(小人之交甘甘如酒), 소인의 사귐은 달콤한 술과 같아서, 진하고 강렬하지만 오래가지 못한다. 소인의 우정이 이해관계에 얽혀 있고 일시적이라는 의미다.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함께 여행하거나 동거를 하게 되면 꼭 싸우게 된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이라도 부부의 연을 맺고 함께 살다보면 그 흠을 보게되고 싸우게 된다. 즉 너무 가까워지면 결국 '화'를 면치 못한다. 모든 관계는 '대학'과 '중용'처럼 질서와 균형이 중요하다.

다시보자면

공자의 철학의 핵심은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예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부처의 철학도 '너'가 아니라 '나'에 있다.

'도덕'과 '윤리'의 잣대는 '너'가 아니라 '나'에 두어야 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을 '원수'가 해서는 안된다.

'깨닮음'에 이르러라, 라는 말은 '상대'가 아니라 '나'에게 두어야 한다.

공자의 수양, 예수의 사랑, 부처의 깨닮음.

그 가르침을 우리는 때로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가. 그것은 '상대'가 아니라 '나'를 향하는 무기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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