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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인류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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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두 권으로 구성된 소설을 꾹꾹 읽어 내려가다가,  마지막 문장 아래 작은 활자로 추가된 글자 몇 개를 보고 당황한다. - 1부 끝 - 맙소사. 이게 1부라고? 즉 2부가 나올 거란 말인가? 아. 정말 다행이다. 그가 2부를 나중에 내 줘서. 덕분에 2부는 리뷰를 쓰지 않아도 되지 않는가. 만세. 만세. 만세. 

  적당한 기발함을 적당히 배포할 줄 아는 센스. 베르나르 베르베르에 대한 내 감상이다. '적당한 기발함'이라는 게 성립 가능한 표현이라면 말이다. 이 소설은 가볍고, 심각하지 않고, 적당히 심심풀이로 보기 좋다. 적당한 유머 감각과 밉보이지 않을 지성, 감성을 갖춘 인물들이 나와 몇가지 착상을 주고 받는다. 그 와중 베르베르의 상대적이고 절대적인 상식 사전이 '에드몽 웰즈' - 주인공의 증조부라는 신선격 존재를 빌어 마구 투입된다.  이런 구도가 나쁘다는 건 아니다. 베르베르는 이야기를 매끈하게 술술 풀어나가는 작가다. 내가 적당히라는 말을 적당한 정도를 넘어서 남발하고 있는데, 적당히가 왜, 나쁜가? 소설은 일차적으로 즐기기 위해 쓰고 읽는 것이고, 대다수의 사람이 즐기기에 나쁘지 않다면 그건 장점 아닌가.  
  
  비록 이 소설이 '진화'와 '현세계의 편견을 뛰어넘는 시도'를 다루는데도 불구하고 극히 '편견'에 휩싸여 있으며, 편견이 으레 그렇듯 자화자찬과 팔 안으로 굽기가 보인다고 해도 말이다. 작가는 '공평'하고 '진보'적인 시각으로 편견에 휩싸인 무리들을 까내린다. 자신들도 인종 차별 당했음에도 어느새 백인들처럼 피그미 족 사람들을 끔찍하게 학대하는 반투족이라든가, '여성 인권 묵살의 상징'인 차도르를 옹호하여 프랑스 출신 페미니스트와 드잡이하는 이슬람권 여성들 말이다. 작가는 신문에서 보도되는 그런 사건들을 싹 모집해 자신의 책 안에서 신나게 섞었다. 쉐킷 쉐킷~.  하지만 이들이 이렇게 된 데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의식은? 전혀 없다. 어떻게 그렇게 단언하냐고? 그렇게 보일 만한 증거가 책 도처에 깔려 있으니까.

이 소설에서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가치를 알아 보는 이들은 '소르본 대학의 공모전'에 입상한 프랑스 백인 학자들이다. 그들은 모두 지적이고 일정 이상 부유한 백인 부모 아래에서 자랐다. 적어도 그들이 이 세계에서 약자 계층에 속하지는 않는다. (남녀간 차별을 제외하고 본다면 말이다.) 이들은 그 부모들에게서 너희가 세계를 구할 것이라는 계시를 받는다. 그 계시에 따르든, 반하든 결국 그들은 정말 그렇게 해낸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 가장 깨달은 이, 이자 주제를 전하는 이들은  '중산층 이상 백인 인텔리' 사회의 일원인 것이다. 이 소설을 그렇게 보는 건 쿨하지 못하다고? 이 소설은 그런 얘기를 하는 소설이 아니라고? 실컷 이 세계의 편견과 아집을 보여주면서 왜 주인공에게는 그걸 적용하면 안되나? 그럼 공평하게 주인공 남녀가 그런 자신의 소속을 뛰어넘는 인식을 보여줬는지 살펴 보자고. 음. 어디에서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허덕이는 걸 보고 한심하다고 하려는 게 아니다. 그 부모의 틀에서 벗어나 가는 곳이 '무려 전생으로의 회귀'니까 하는 말이지. 작가가 짜놓은 틀에서는 그런 인식을 벗어날 필요조차 없다. 이미 그들의 쿨함과 진보적 태도만으로 당면한 위기를 해결하기에 충분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얘기해서, 이 소설에서는 세계의 편견을 깨닫는 것마저 (서양 세계의 사고관으로 무장한) 백인들인 것이다. 그들이 체험하는 피그미족과 아마조니스의 의식은 또 어떤가. 새삼 말하는 게 허무할 만큼 신비주의에 쩔어 있다. 그러니까 이 소설에서는 그런 '초월적인 해결책'을 알아 보는 것마저 백인들의 역할인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 남녀의 그 기발한 영감은 그들이 팔천년 전 전생에 '위대한 거인들'이었을 때 이미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순환 고리란 거다. 이 소설은 진화를 얘기하지만 그 '진화 방법'은 '옛날 옛적에 있었던 일의 재현, 반복'이다. 법칙에 따르는 순환이 어떻게 진짜 변화란 말인가? 그 법칙이 바로 지금의 모순을 찍어낸 틀인데. 

  그런데 적어도 이 두 권 짜리 '1부'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여섯 명의 주요 인물 중 아무도 자각하지 않는다. 심지어는 인간의 유전자를 변형한 지성체를 만드는 것에 대한 구태의연한 문제 제기도 나오지 않는다. 아, 그 문제는 너무 구닥다리라 아예 다룰 필요가 없는 것인가? 이들이 쿨한 과학자들이자 아마조네스 전사,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말을 되뇌는 군인들이기 때문에, 진보의 첫발을 내딛는 자들이기 때문에 그런 얘기는 할 필요조차 없는 건가 보다.
  진보란 가장 뻔한 문제들의 답부터 제시할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소설이니까, 이 소설에서 중요한 건 그런 문제가 아니니까 다룰 필요가 없다고 할 수는 있다. 솔까말 이 작품에서 중요한 건 미니 인간을 만들어 낸다는 거지 걔네를 만들어 내는 과정에서 겪는 - 혹은 실험체들이 겪게 되는 윤리적, 정신적 문제가 아니란 건 나도 안다. 그 문제를 다큐멘터리 식으로 다뤄주길 바라는 것도 아니다. 다만 내가 이 소설을 읽을 때 그런 문제들을 떠올렸고, 그게 떠올랐다는 게 이 소설의 구멍으로 느껴졌다는 걸 말하고 싶을 뿐이다. 이 소설은 정말, 구멍 천지니까.

  심지어 그들은 미니 인간들을 만들어 놓고 아주 뻔한 신 롤플레이도 한다. 중간 중간 끼어드는 지구의 멘트도 공허하고 별 맛이 없다. 지구의 자기 역사 서술은 차라리 과학 교양서 쪽을 보는 게 훨씬 재미있을 정도다. 원래 신화적 서사란 클리셰 난무라지만, 이 소설은 그게 '뻔하게' 느껴진다는 게 문제다. 사상누각이랄까. 공들이지 않은 탑이랄까. 대충 이런 건물에는 이 쯤에 창문이 있고 문은 이쯤에 있겠지 / 하고 슥슥 구멍을 뚫어 놓은 집을 구경하는 것 같다.  베르베르 쯤 되는 다작 작가면 이제 그런 법칙들에는 이골이 나있긴 할테다. 그렇다고 읽는 나한테 '이골이 났다는 걸' 어필 할 필요는 없을 텐데. 이 소설은 '재미있게 풀 수도 있는 소재'들을 가지고 뻔한 사건들을 연속시킨다. 베르베르 식의 글쓰기 방식을 쭉쭉 펼쳐 나가기는 하지만, 그 안이 텅 비어 있다. 이 소설은 지푸라기 공이다. 그 표면에 지구과학, 생물학, 역사, 문학, 신학, 심리학 등등 온갖 상식들이 잡초 나부랭이들이 붙어 있다. 문체가 가볍고 읽기 편해서 쑥쑥 읽히지만, 따져보면 이 잡초들이 붙어 있어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없다. 아무 잎이나 한두 잎 쯤 떼어내도 지푸라기 공에는 아무 영향도 못 미칠 것 같은 걸. 적당히 재미있지만 치명적이지는 않은, 시간 떼워야 할 때 읽기 좋은 소설. 2부가 나올 모양임.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에 떼워야 할 만큼 시간이 많이 나는 사람들이 있는지 모르겠다.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일단 내가 베르베르의 모든 작품을 읽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으니까. 깊이 알지도 못하면서 흥분한 채 쓴 내 리뷰는 엄청 조잡하고 건방져 보일 거다. 이 작품을 읽는 내내 이게 베르베르의 글이 아니었거나, 베르베르가 쓴 글이라는 걸 모르고 봤다면 이렇게 툴툴 거렸을까 계속 자문했다. 어차피 이프 온리에는 답이 없으니까, 과연 어땠을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이 글에 그런 문제들이 있고, 베르베르라는 저자 이름을 단 채 우리 집에 배송되었다는 건 사실이니까.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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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만 분의 1의 우연
마쓰모토 세이초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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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모토 세이초. <10만분의 1의 우연>을 읽고 

 
  가볍지 않고 버겁지 않다. 첫장부터 끝장까지 화려한 묘사 한 줄 없이 시선을 잡아놓는다. 읽어나갈 수록 계단을 한 단 한 단 올라가는 기분이랄까. 문장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지면을 내리누른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10만분의 1의 우연>은 대말뚝같은 소설이다. 이 소설에는 어떤 불필요한 서술도, 농담조차도 없다. 작업용구는 사용자의 미감을 반영하지 않는다. 강도며 모양, 색깔까지도 기능만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다. 이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의 문장 하나하나는 오로지 ‘10만분의 1의 우연’이라는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 배치되었다.

  소설은 마술이며 마약이고 합법적인 사기극이다. 관건은 얼마나 그럴듯하게 독자를 속여 넘기느냐이며, 그 기교가 화려할수록 감탄하게 되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이 소설에는 그렇게 내세워진 '그럴 듯 함'이 보이지 않았다. 작가는 그저 묵묵히 공들여 이야기를 쌓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어떤 획기적인 메시지도 반전도 없다. 과장도 비약도 없다. 소설 속 세계는 그저 확고하게 다져질 뿐이다. 작가에 의해서, 그리고 이야기 속에서 움직이는 등장인물들에 의해서.
  소설 속 아마추어 사진가 야마가는 '10만분의 1의 우연'을 연출하기 위해 공들여 트릭을 마련한다. 덕분에 그는 구경꾼이나 경찰이라는 ‘현실’에 훼손당하지 않은 순수한 ‘순간’을 포착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보다 한수 앞선 이가 야마가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나선 누마이다. 그의 약혼녀는 야마가가 놓은 함정에 휘말려 결혼식을 얼마 앞두고 절명하고 말았다. 소설은 누마이가 능수능란한 연기와 철저한 준비로 야마가의 트릭을 깨고 복수를 하는 과정을 쭉 짚어 나간다. 

  반전은 없다. 처음부터 범인이 누구인지는 확실하다. 그가 쓴 트릭마저도 세세히 설명된다. 수수께끼도 자극적인 추가 사건도 없다. 범인은 범죄를 순순히 인정한다. 복수 역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피도 절규도 통쾌함도 없다. 마지막까지 밝혀지지 않는 비밀도 없다. 이 소설은 내가 요즘 본 소설 중 가장 '스포일러'가 무의미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차근차근 작가가 다 알려주는데, 대체 뭘 스포일러하고 말고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 이 소설은 정말 '솔직하다.' 마치 '한 순간을 온전히 담아낸 사진'을 들여다 볼 때처럼.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이야기를 모두 파악했다고 여기게 되는 것이다. 범인도 범죄도 그 결과마저도 다 밝혀졌는데, 대체 그 외에 더 밝혀져야 할 게 뭐가 있는가?

  그런데 이 소설을 쓴 마쓰모토 세이초는 일본 미스터리 계의 한 파를 만든 거장이다. 그리고 나는 이 소설을 펼쳐든 후 한번도 놓지 않고 내리 읽었다. 미스터리류를 많이 읽지 않아서 그 장르 법칙은 잘 모르지만, 이 소설은 끝까지 부족한 게 없었다. 읽는 내내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다음 장면을 궁금하게 하고, 지금 일어나는 사건들이 무엇일지 생각하게 한다. 그렇다면 이 '트릭 없이 솔직한 이야기'가 어떻게 미스터리가 되는 걸까?

  누마이는 야마가에게 접근해 진실을 듣기 위해 보통 사람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철저히 대비한다. 작가 역시 이 과정을 '아무 방해 없이 진실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철저히 한 가지 전략을 고수한다. 그 전략이란 바로 '외부 관찰자 시점 고수하기'. 이 소설의 소재 '사진'의 속성과도 일통하는 부분이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서사 중심에서 벗어났을 때에만 그 심리가 묘사된다. 소설에서 내내 중심 사건을 한 단계 한 단계 진행시키는 누마이의 심리에 대해서는 절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독자는 사진 속 인물들의 표정과 포즈로 상황을 유추하듯, 그의 행동에 관한 서술을 보고 그의 심정을 파악한다. 물론 그 행동 서술에서 이미 심정에 대한 단서가 들어가 있기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누마이는 슬펐다. 괴로웠다. 분노했다.' 라고 쓰인 부분이 없다. 기껏해야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가 전부인 것이다. 
  이 소설의 죄인 그룹인 야마가와 공모전 심사위원 후루야의 경우에는 심리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일련의 사건에서 철저히 수동적인 입장에 놓여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독자는 이들의 심리 묘사를 철저히 남의 것으로, 이 인물의 것으로 읽는다. 즉 사진을 들여다보듯 거리를 두고 보게 되는 것이다. 결코 독자나 화자의 이입을 위한 심리 묘사가 아니다. 오직 '피사체' 묘사일 뿐. 

  누마이가 야마가와 후루야에게 접근하는 과정은 '누구인지 뻔한데도 불구하고' 굳이 누마이가 만든 가명으로만 표기하는 것도 재미있는 장치다. 야마가가 1년 종합 대상을 탄 공모전과 교통사고 기사, 공모전 결과에 대한 독자들의 반박글은 그림까지 실어서  표기했다. 야마가가 어떤 트릭으로 연쇄추돌사고를 일으켰는지 추리하는 과정은 현장 검증과 탐사를 하나 하나 다 보여줬다. 그런데 정작 누마이가 행동에 나설 때에는 아무런 설명도 되지 않고 카메라가 훌쩍 뒤로 물러난다. 둘 다 '꼼꼼한 행동 서술'인데도 '렌즈를 갈자' 완전히 달라진다. 작가는 아무 것도 속이지 않았다. 그러나 독자는 철저하게 숨겨진 누마이를 읽어 나간다. 가면 겉만 찍는다면 아무리 선명하게 찍는다 해도 어떻게 가면 안의 사람을 볼 수 있겠는가? 누마이가 직접 움직일 때 독자는 절대 누마이 자신의 시점 자체에는 접근할 수 없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의도를 일부러 알려줄 때를 제외하면 말이다. 

 더욱 재미있는 건 야마가의 심경을 다루는 와중에도 '이 소설의 메인 사건: 야마가가 일으킨 연쇄추돌사고'에 대한 심경 묘사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야마가가 희생자의 언니 미요코를 소개 받을 때 당황하는 장면이 나오긴 한다. 하지만 그 때에도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판단은 보이지 않는다. 죄책감? 아니면 자기 정당화? 어느 것 하나 직접적으로 다뤄지지 않는다. 다만 라이벌 사진 작가의 평가와 심사위원 후루야의 언급에서 동기 부분이 드러날 뿐이다. '공명심'이라든가 '기획-계획적 연출의 필요성' 같은 것들 말이다. 이런 표현은 야마가가 직접 한 게 아니다. 모두 다른 사람들이 해준 것이다. 야마가는 '심사위원 후루야를 극구 치켜세우고 존경심을 표하는 것으로' 자신의 입장을 대변한다. 하지만 그가 후루야가 말한 '우연 연출하기'를 실행하게 되기까지의 갈등, 각오, 그런 자신의 행동에 대한 자체 판단은 자세히 다뤄지지 않는다. 기이할 정도로 그 부분에 대한 얘기가 없어서, 나는 초반부를 읽을 때 정말로 야마가가 범인이 아닌 건가 싶기까지 했다. 일반인이 사람을 여섯 명이나 죽인 것 치고는 너무 담담하다. 자신의 행동을 전혀 회고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의 그 담담함이 오히려 누마이가 준비한 덫에 꼼짝없이 걸려들게 한 원인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어쨌든 작가는 사진 작가가 백장의 필름을 버려가며 한 장의 사진을 건지는 정성으로, 꼼꼼히 준비하고 치밀하게 제시하며 이야기를 끌어간다. 아무리 큰 사진이어도 끄트머리에 이르면 잘려나가듯 이야기가 끝나자 서사도 가차없이 끝맺어진다. 영원히 번갈아 빛나는 등대 불빛을 스트라보 삼아. 완벽한 사진을 만들어 낸다.
  흔히 '남는 건 사진 뿐'이라고들 한다. 세월이 흘러 기억이 흐려지고 피사체인 내 모습도 변한다 해도, 매정하리만치 그때 그 모습 그대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 주는 사진들. '그 순간'을 강제로 남겨버리는 '사진의 힘은 과연 가공할 만 하다. 그러나 그런 사진의 힘은 정말 '진실'에서 나오는 것일까.
  사진에 진정 생생한 순간을 담기 위해서는 '10만분의 1의 우연'에 기댈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설령 그런 사진을 찍는다고 해도, 그 사진이 생생하면 할수록 결과물은 거짓이 되는 것이다. 야마가의 사진은 '우연임을 역설한다.' '그 누구보다도 생생하게, 아무런 가공도 되지 않은 순간을 포착해 냈다는 것'이 그의 사진에 대한 첫번째 찬양이었다. 그러나 그가 사진을 찍은 상황은 '사실' 우연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그 사진이 '우연한(진실한, 어떤 의도도 없는) 한 순간'으로 보이면 보일수록 사진의 거짓말은 완전해 지는 것이다. 
  소설 역시 마찬가지다. 신문 기사와 비평문, 이야기 속 사건 현장에 대한 자세한 묘사가 더하면 더해질 수록 사건의 실체 누마이는 더 꼭 꼭 숨어 버린다. 야마가와 후루야의 눈에 누마이의 가짜 신분이 그럴듯 해 보이면 보일수록 그들은 누마이의 덫에 걸려들게 되는 것이다. 누마이는 야마가를 '진짜 같은' 장난감 뱀으로 속여 죽인다. 후루야는 누마이가 준비한 대마를 복용하고 진짜만큼이나 생생한 환상을 보다 죽는다. 누마이가 기껏 그의 죄를 털어 놓아도 그는 듣지 못한다. '더 없이 진짜 같은 것들'에 눈이 멀면 아무도 진실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다. 진짜 같은 게 이미 있는데 무엇때문에 진실을 볼 필요가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작가는 사실적으로, 속임수에 대한 허구를 만들어 냈다. 진실은 어디에도 없다. 반복되는 스트라보 빛만이 우리의 눈을 찌를뿐. 우리는 '보도 사진'을 볼 때마저도 진실보다는 '진실성'을 추구하게 되어 버렸다. 허구가 분명한 소설에 대한 최고의 찬사가 -생생한, 현실같은, 진짜 있을 법한 -인 것 역시 돌이켜 볼 일이다. 과연 진실성을 추구하는 걸로 진실을 좌시하는 걸 정당화할 수 있을까? 진실하려 했다-는 것은 진실에 준하는 것인가? '진실 같음' 앞에서 진실이 퇴색해 버린다면 우리가 사진을, 언어를 이용하는 건 어떤 의미를 가진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나는 단 한 장으로 마음을 뒤흔드는 사진, 단 한 권으로 파문을 던지는 소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한꺼번에 보게 되었다. 앞으로 몇 권의 소설을 읽어도 한동안 이 강렬한 빛의 대비를 잊지 못할 것 같다. 마쓰모토 세이초의 단순하고 묵묵한, 그러나 치열한 글 세계를.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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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에서
김사과 지음 / 창비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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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사과의 이름은 여러 단편집에서 자주 보곤 했다. 워낙 이름이 눈에 띄니까. 하지만 작품을 직접 읽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장편을! 감상을 한마디로 줄이라면: 오, 의외인데?

  이 작품은 읽는 내내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이 생각났다. <사물들> 은 ‘그럭저럭’ ‘교양있는 속물’로 살아가는 현대 유럽 젊은 부부의 일상을 관찰하는 소설이다. 사물들을 나열하는 것은 그들 부부의 일상을 박제하고 확대한다.  그들 부부의 작은 찻잔 속 같은 일상에서는 아무런 폭풍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 세계 안에서 끝없이 부유하다 가라앉는 그들 부부, 자신의 삶에 대해 한없이 피상적인 태도를 취하는 그들의 모습이 소설에 잘 나타나 있다.
  이 작품은 <사물들>보다는 성기지만 좀 더 커다란 그물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훌륭한 부분은 ‘외국 가족의 삶’을 세대별로 그린 부분에서 작가가 오버를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중 나오는 말대로 유럽이고 한국이고 다를 거 없이, 사람 사는 곳 다 그렇게, 자신에게 필요한 키워드를 쭉 뽑아 늘어놓았다. 그 스크랩 결과물은 딱히 흥미로울 것이 없는 중산층 일대기다. 작가의 시각 역시 그들에 대해 새로운 해석을 내놓지는 않는다. 작가는 그저 이 ‘소비위주 사회’에서 공공연히 소비되는 것들을 다시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 새로운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로운 것 - 자아 정체’의 부재를 메우기 위해 소비하고 또 소비하며 소진되는 젊은이들이 있을 뿐이다. 아마 이들은 소비를 멈추지 않는 한 계속 젊은이로 남을 것이다. 이 사회에서 ‘쿨할 수 있는 건’ 소비뿐이고, 이 싸구려 쿨함은 젊은이들만의 전매 특허 아니겠는가.
  소설은 특별히 서사를 만들어 제공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이야기들을 그 자체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도 한번쯤 필요한 일인 게 분명하다. 나는 이 소설이 끝까지 제 키워드를 놓치지 않고 가주어 고맙다. 소진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채, 그저 소비하는 현재의 자신만을 볼 수 있는 우리를 보여주므로.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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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괴 1
히라노 게이치로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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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제가 시도한 것 중 하나는, 어떤 형태로든, 폭력을 영웅적으로 그리기를 거부하고 철저히 ‘불쾌한 것’ 으로 묘사하는 일이었습니다.

  이는 히라노 게이치로의 신작 장편소설 <결괴> 2권 책 뒷표지에 실린 작가의 말이다. 책을 펼쳐보면 과연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진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불쾌하다. 메인 사건은 끔찍하고 그로 인해 촉발된 파문은 추잡하다. 소설은 메인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사회 외적 현상을 스케치하는 한편 피해자의 가족-특히 형인 다카시를 중심으로- 사건 관계자들의 내면을 길게 묘사한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사적 대화(내면)과 매스미디어에 스크랩된 군상들의 표정(외면)이 하나로 합쳐져 ‘혼네-다테마에’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렇게 포착된 인간의 면모란 지극히 불쾌하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가장 불쾌한 것은 굳이 다른 글씨체로 표시되는 ‘악마’도, 그의 범행이나 범행성명문도 아니다. 생각해보면 폭력이 불쾌한 것이라는 게 뭐 그리 놀라운 일이겠는가.
  이 소설의 특이성은 소설을 온통 뒤덮고 있는 ‘겉핥기’다. 이 소설의 주인공 다카시는 가가 세상을 향해 ‘마음껏 아는 척’ 할 수 있도록 설정된 캐릭터이다. 그가 늘어놓는 아주, 아주 긴- 도대체 왜 모든 등장인물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 않는지 의문스러울 정도로 - 대사들은 온통 교양철학서적을 복사해서 붙인 듯한 말들 투성이다. 그는 그저 ‘다른 이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이 진짜 나의 가치를 규명할 수 있을까? 더 많은 이가 행복한 것이 좋다는 건 당연한 일일까?’ 라는 단순한 말을 하기 위해 온갖 철학자들을 ‘어설프게’ 끌어들인다. 동생 료스케의 살해범으로 몰린 극단적인 상황에 대한 해석도 매우 지적으로 비비 꼬아 놨다.
  내가 특히 역겹다고 생각하는 부분은 이 다카시의 일장논설만 시작되면 그의 대상들에게 꼭 ‘다카시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하지는 못했지만’이라는 표현이 들어간다는 것이다. 주변 사람들이 다카시의 말을 이해 못한다면 그건 그가 뻔한 잡식들을 쓸데없이 늘어놔서 도대체 본론이 언제 나오는지 짐작도 할 수 없기 때문일 거다.
  다카시의 이 장황한 인식망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까? 국내에서 진행된 작가 인터뷰 (http://www.people21.co.kr/sub_read.html?uid=13731&section=sc3) 를 보면 그의 의도가 소개되어 있다.

  “새로운 현실을 문학으로 그려내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본 에도 시대의 살인 사건과 오늘의 살인사건은 다르죠. 이야기가 뻗어 나가는 층이 늘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문학으로 어떻게 표현할지 고민하며 '결괴'를 썼습니다."

"지금 이 순간 사회에 호소하고 싶은 주제를 써보고 싶었다"는 작가는 '자아를 발현할 수 없는 현실에 체념한 젊은이들'과 '인터넷의 발달' 속 나타나는 '타인의 압도적인 다양성'에 주목했다.

"소설 속에서는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타깃이 아니라, '행복하려고 하는 사람'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 대상이에요. 악마라는 사람은 죽을만큼 노력해 '행복'을 쟁취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오, 제발 작가가 다카시를 문제아로 지정하고 쓴 것이길 빈다. 작가의 사건일지 드래그 복사 붙이기 같은 각계 인사 반응, 다카시의 장광설이 정말 현실을 재포착하는 데 유효했나? 나는 회의적이다. 겉핥기라는 말을 계속 사용하지만 작가가 글을 대충 썼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는 아주 ‘성실하게, 진지하게’ 겉핥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게 이 소설을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작가의 인터뷰나 책  뒷면에 나타나는 문제의식에는 공감하면서도 결과물에는 차마 박수를 칠 수 없다. 다카시가 작가의 축약판 캐릭터이고, 작가는 그를 통해 자신이 세상에서 느낀 위협감을 되풀이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읽기가 힘들었다. 작가가 ‘일식’을 통해 보여줬던 전문성을 다시 회복하기를 바란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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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일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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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말도 없고 아무 행동도 없이, 그저 조용히 서로를 바라보며 웃었다. 우리가 침묵 속에 앉아 있는 것은 다른 무엇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냥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무리라는 것을 느끼기 위해서였다.

 

- 위화, 제7일, 227p -

 


증오어리지 않은 비판. 모두를 감싸 안으면서 왜곡하지도 않는 포용력. 매일 황당한 사건들이 당황스러운 방식으로 보도되는 요즘 이 사회에 절실히 필요한 시선이다. 알량한 위안도 눈먼 분노도 현대인들의 피로와 절망을 해소해주지는 못하기에.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이 두 극단 사이에서 탈출구를 찾을 수 있을까? 날카로움과 유머, 온기를 두루 갖추고 현실을 직시한다는 게 정말 가능할까?

 


비평가 신형철은 소설을 '희망의 근거를 어설프게 늘어놓는 아마추어의 소설, 어떠한 타협도 없이 절망의 정의로움을 완강하게 고수하는 프로의 소설, 그리고 절망의 끝에서 기어이 희망의 가능성을 설득해내고야 마는 대가의 소설' 세가지로 분류했다. 위화의 [제7일]은 저 세번째 소설의 조건을 독특한 설정으로 충족시키는 작품이다. 인간이라면 모두가 반드시 겪어야 하는 관문 죽음이라는 장치를 통해서.

 

 


- 죽은 이에게서 이야기를 끌어내는 위화만의 방식. 따뜻한 회색 세계 -

 

나는 그간 기록이란 '살아있는 자들의, 살아있는 자들에 의한, 살아있는 자들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기록을 남기는 것은 '살아있는 필자'이며 읽는 것은 '살아있는 독자'다. 게다가 이 글을 쓴 나와 읽은 당신이 모두 죽는다 해도 기록만은 계속 살아남는다. 우리가 '인류'라는 정체성을 유지하고 갱신할 수 있는 것은 분명 기록의 이 '불사성' 덕분일 것이다. 그중에서도 소설은 '당대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삶'을 포착해내는데 공헌해 왔다. 우리가 소설 책장을 펴드는 건 '아직 모르는 다른 이들의 삶을 맛보고 싶어 하기' 때문 아닐까.

 

그런데 위화의 이번 소설은 아주 달랐다. 이 소설은 죽은 자에 의한, 죽은 자들을 위한 소설이다. '죽을 수 밖에 없는 우리 모두를 위한' 소설인 것이다.


[제7일]의 화자는 불운한 화재폭발 사고로 사망한 한 남자다. 그는 죽은 지 첫날, 짙은 물안개가 퍼져 있는 세계를 거닐어 스스로 화장터로 향한다. 팔에는 스스로를 애도하기 위한 검은 완장을 찬 채다. 남자에게는 그를 애도해 줄 친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남자의 삶은 기이하고도 평범하고 서글프면서도 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남자는 묵묵히 살아낸 인생을 죽어서야 천천히 회고한다. 그리고 그제서야 자신의 인생을 온전히 살펴볼 수 있었다. 우리는 종종 '나에 대해서는 역사가 평가해줄 것이다'라는 말을 사극에서 듣곤 한다. 하지만 자신의 삶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은 후세의 역사가가 아니라 망자가 된 그 자신 아닐까. 이 소설에서 단 하나의 접점 화장터 빈의관을 사이에 두고 이승과 저승은 두 개의 세계로 분리된다. 이러한 분리가 오히려 이승에서의 자신을 투명하게 보게 해주는 렌즈 역할을 하는 건 아닐까.


주인공은 저승의 물안개 속을 헤매며 자신과 주변인들을 돌아본다. 그 추적의 끝에는 어김없이 죽음이 있다. 사람의 삶을 쫓는 것은 곧 죽음을 쫓는 것이다. 읽어 내려가다 보면 이렇게 빠른 시일 안에 주인공 주변 사람들이 연달아 죽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빈번한 죽음'이야말로 우리가 명징한 이승의 태양 아래 묻어두고 망각해 버리는 것일 게다. 우리는 희끄무레한 저승세계에 가서야 나를 비롯해 내 주변에 망자들이 이렇게 많았다는 걸 똑똑히 알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작가는 독자들이 당혹스러움을 누그러뜨릴 수 있을 만큼 천천히 저승 세계를 돌아본다. 천천히 가도 괜찮다. 망자들에게는 더 이상 급할 것이 없다. 제대로 묘지에 묻히든 묻히지 못하든 그들 모두에게는 영원이 주어졌으니까. 독자는 주인공의 걸음을 따라 책장을 한장 한장 넘기면서 조금씩 저승의 경계를 넘는다.


마치 맑은 물이 가득 든 유리컵 안에 먹물 한 방울이 떨어져 흩어지듯 풀려나가는 이야기. 이미 죽은 자들이기에 그들의 이야기는 모두 과거형이다. 주인공 양페이를 버리고 떠난 아내 리칭, 양페이의 양아버지와 젖을 물려준 이웃집 부인, 그의 이웃에 살던 젊고 가난한 커플들의 이야기도 모두 지난 일일 뿐이다. 양페이는 죽고 나서야 그들과 해후하여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다. 그의 인생의 이야기는 그가 죽고 나서야 온전히 완성될 수 있었다.

 

 

- 이 소설에는 죽은 자들이 잔뜩 나온다. 이들이 왜 죽어야 했는지 알아야 한다. -

 


이 이야기에 굵직한 사건들은 등장인물들에게는 모두 지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을 쫓듯 책을 읽어 내려간다. 당연하다. 그들에게는 살아 생전 겪었던 일이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당장 겪고 있는 현실이니까.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있는 현실들 말이다.


기이하게도 이 소설의 사자들은 모두 '머물 곳'을 잃은 자들이다. 이 작품의 이승과 저승을 관통하는 법칙은 딱 하나. '거처'에 대한 것이다. 현재 중국의 강제 철거 해프닝과 저승의 묘지 과시가 겹친다. 이 소설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궁극적으로는 '갈 곳을 잃고 떠밀려' 죽은 자들이다. 자살하듯 폭발에 휘말린 주인공부터 태어나자마자 의료폐기물로 버려진 스물일곱명의 아기까지. 모두 다.

 

현실에서 제대로 된 거처를 보장받지 못한 자들 대부분이 죽어서도 안식할 땅을 얻지 못했다. 아무도 그들을 제대로 염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마구잡이로 철거되고 부실공사로 무너지는 건물들 안에 깔리는 사람들. 그들의 죽음은 무너져 내리는 현대 사회에 묻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는다. 제대로 묻히지 못한 혼들이 구천을 떠돈다. 자신이 왜 죽었는지조차 제대로 모른 채, 마지막 단장도 하지 못한 채. 저승의 검은 비와 흰 진눈개비 사이로 나타났다 흩어지기를 반복한다.


우리는 환한 대낮에 좀 더 '편히 잘 살기 위해' 죽은 이들을 모르는 채 한다. 알려하지 않는다. 그러나 저승에서는 다르다. 거기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담담히 말할 수 있다. 비로소 알려지는 것이다.


저 모노톤 저승세계가 따뜻해 보이는 이유는 바로 이 담담한 폭로 덕분이다. 망자들은 언제 썩어 흐트러질지 모르는 몸을 잃고 대신 영원을 얻었다. 영원한 안식과 영원한 방랑. 어쨌든 '영원'이란 모든 싸울 이유를 무화시킨다. 은원과 득실이란 다 시간과 얽힌 일 아닌가. 시간이라는 물레가 영영 멈춰버린 이상, 남는 것은 썩은 살에서 뼈를 발라내듯 남겨진 진실뿐이다. 어느 장지에도 묻히지 못한 자들이 뼈만 앙상하게 남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 진실들끼리는 서로를 해하지 않는다.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 침묵을 공유할 뿐이다.

 


우리는 조금 더 오래 살기 위해 온갖 방법을 고안한다. 이제는 진시황처럼 대놓고 불노장생을 말하지는 않지만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이승에 머무는 시간을 늘리려 애쓴다. 또 그와 함께 피안의 세계에 대해 온갖 상상을 펼친다. 사후 세계만큼 인간이 상상력을 집요하게 발휘시킨 소재가 있을까.


위화의 [제7일]은 최근 읽었던 어떤 이야기보다도 더 위안이 되는 저승 세계 이야기였다. 그가 다루는 것이 모두 억울한 죽음, 고통스러운 죽음인데도 그러했다. 우리가 예로부터 가장 불길하게 여겼던 '구천을 떠도는 혼들'이 주인공인데도 이 소설은 아름답다. 죽은 그들은 더 이상 가엾지 않다. 가엾지 않기 때문에 증오하지 않을 수 있고 그래서 흘러가는 강과 심장 모양 잎사귀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을 수 있다. 연인의 희생으로 영원한 안식을 얻은 처녀의 장례식 길을 진심으로 배웅할 수 있다. 우리가 죽어 남길 뼈와 혼이, 우리가 마지막 남기는 것이 이렇게 아름답다면 죽는 것도 그리 끔찍하지 않을지 모른다.


이렇게 처참한 일들이 매일 일어나는 세상인데도 무가치하지는 않다. - 나는 이 책을 읽고 이런 위안을 꾹꾹 곱씹었다. 인간의 추함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인간의 손을 이렇게 따스하게 맞잡을 수 있다니 그야말로 대가 아닐까. 부디 우리 모두가 이 온기를 유지할 수 있기를.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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