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도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문답식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외부로부터 억압을 받으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냐 선생님이 이처럼 실천적인 삶을 산 것은 허생의 모습을 비판하며, 지식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가장 잘 배우고 실천한 학생은 윤수였습니다. 동철이가 왜냐 선생님을 비판할 때나, 선생님이 학교에 못 들어오게 되었을 때 했던 말이나 행동을 보면 윤수는 왜냐 선생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며 한결같이 옹호합니다. 
왜냐 선생님이 학교에 못 들어온 날, 윤수는 자기 생각을 실천으로 보여 줍니다. 땡볕이 쏟아지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윤수는 왜냐 선생님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름의 방법으로 시위하며 저항합니다. 윤수의 행동에 선재 역시 운동장으로 뛰어갑니다. 선재는 똑똑하지만 생각이 많은 학생입니다. 하지만 윤수를 본 그 순간에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왜냐 선생님은 학교로 돌아오셨을까요?

정신분석 용어 사전에 의하면, 이 용어는 1970년에 심리학자인 시너스와 마이어가 소개한 개념이라고 합니다. 다른 개념들에 비하면 비교적 최근에 나왔죠. 
공선옥 작가는 이 소설을 보고는 ‘어쩌면 현대라는 사회가 집단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
라고 말했습니다. 
유명 작가의 시선이 아닌 학생들의 시선은 어떨까요? 중학생이 이 소설을 읽고 쓴 서평을 소개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타인을 만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그들의 감정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들의 감정에 공감하기도 어려워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철저하게 타인에게 무관심한 무관심 사회가 된 것이다. 
무한 경쟁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오로지 나 하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나 이외의 타인의 감정에는 공감하는 법을 잊어버린 우리 사회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자는 감정 표현 불능증을 가지고 있는 주인공 윤재가 타인과 관계 맺음을 통해 감정을 느끼는 것을 보여 주면서 타인에 대해 무관심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메시지를 주는 것 같다.

윤재가 ‘감정‘이라는 것을 느끼고 다른 이들과 그 감정을 나눌 수있으리라는 희망으로 끼니마다 ‘아몬드‘를 밥상에 올리지요.
이런 엄마의 바람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아무런 선입견 없이 윤재의 이야기를 들어주던 이층 빵집 주인 심 박사의 관심 덕분이었을까요? 윤재는 자기 자신의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감정 표현 불능증 덕분에 두려움도 못 느낀 채 몸을 던져 곤이를 위험에서 구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느낄 수 있는 딱 그만큼에 맞추어 앞으로의 인생에 부딪혀 보기로 결심합니다.
선천적으로 타인의 감정에 공감하지 못한다고 괴물 취급당했던 윤재가 괴물이 되어 가던 소년 곤이를 위해 진짜 괴물인 사내와 싸워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 부분을 보며 과연 우리 사회의 괴물은 누구이고,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섣부른 ‘라벨 붙이기‘가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성찰하게 됩니다.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축복 받아 마땅한 아이들이 태어나는데 그들이 어떻게 성장할지는 주위의 사람에게 달려 있을 것입니다.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것도, 괴물로 만드는 것도 사랑입니다.

본문 작품 자료 출처

성석제, 『내가 그린 히말라야시다 그림』, 창비, 2017
김려령, 『완득이』, 창비, 2008
최진영, 「오늘의 커피」, 『겨울 방학』, 민음사, 2019
은희경, 『새의 선물』, 문학동네, 2014
김중혁, 「나와 B」, 『악기들의 도서관』, 문학동네, 2008
백수린, 「고요한 사건」, 『여름의 빌라』, 문학동네, 2020
윤후명,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 민음사, 2005
현덕, 『하늘은 맑건만』, 창비, 2018
권정생, 『강아지똥』, 길벗어린이, 1996
김애란, 「노찬성과 에반」,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송기원,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얼굴』, 문이당, 2006
김애란, 『달려라 아비』, 창비, 2019
유하순, 「불량한 주스가게」, 『불량한 주스가게』, 푸른책들, 2022
공선옥, 『나는 죽지 않겠다』, 창비, 2009
이희영, 『페인트』, 창비, 2019
김선영, 『특별한 배달』, 자음과모음, 2013박완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세계사, 2015
심윤경, 『설이』, 한겨레출판사, 2019
최은영. 「쇼코의 미소」, 『쇼코의 미소』, 문학동네, 2016
공선옥, 『라면은 멋있다』, 창비, 2017
해이수, 『십번기』, 문학과지성사, 2015
임태희, 「가식덩어리」, 『베스트 프렌드』, 푸른책들, 2007
이꽃님, 『행운이 너에게 다가오는 중』, 문학동네, 2020
이도우, 『잠옷을 입으렴』, 위즈덤하우스, 2020
이경화, 『지독한 장난』, 뜨인돌, 2014
임솔아, 『최선의 삶』, 문학동네, 2015
김려령, 『우아한 거짓말』, 창비, 2009
황영미, 『체리새우: 비밀글입니다』, 문학동네, 2019
박완서, 「자전거 도둑」, 『자전거 도둑』, 다림, 1999
황석영, 「아우를 위하여」, 『아우를 위하여』, 다림, 2002
안도현, 『짜장면』, 열림원, 2002
백온유, 『유원』, 창비, 2020
남상순, 『사투리 귀신, 창비, 2012
김선영, 『시간을 파는 상점』, 자음과모음,2012
최시한,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 『모두 아름다운 아이들』, 문학과지성사, 2008
이경화, 담임 선생님은 AIJ, 창비, 2018
박완서, 「배반의 여름」, 「배반의 여름』, 문학동네, 2006
송병수, 「쑈리킴」, 『송병수 단편집 지식을만드는지식, 2002
손원, 「아몬드, 다즐링, 2023
은희경,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내 고향에는 이제 눈이 내리지 않는다.
생각의나무, 2000 
(현재는 은희경 작품집 『상속』(문학과지성사, 2002)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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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의 만남은 사실 길고 긴삶 전체를 놓고 보면 아주 잠깐에 해당하는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 큰 영향을 준 것만은 틀림없어 보입니다.
‘나‘는 영화를 만들겠다고 꿈꾸며 열심히 시나리오를 쓰지만 공모전에서 번번이 떨어지고 심사평에서조차 모두 혹평을 듣습니다. 
‘나‘
는 점점 가족들의 얼굴을 보러 가지 않게 됩니다. 그런 ‘나‘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옵니다. 몇 시간 동안이나 비를 맞으며 기다린 채 좁디좁은 고시원 방에 찾아온 할아버지는 ‘나‘의 초라한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봅니다. 
할아버지는 ‘나‘가 이렇게 살고 있는 것, 하고 싶은 걸 하면서 사는 게 멋지다고 담담하게 말합니다.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삶, 사실상 유일한 관객이었던 할아버지가 ‘나‘를 이해해 준 겁니다.

세 번째 열쇠말 서른 살, 우린 이제 혼자네

할아버지는 고시원 방으로 ‘나‘를 찾아왔을 때 위로의 말뿐만 아니라 쇼코가 보낸 편지와 폴라로이드 사진을 건넸습니다. 편지 속에는그동안 쇼코가 살아온 평범한 삶에 대한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 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나‘는 고향으로 내려갑니다. 할아버지를 돌보며 ‘나‘는 지금까지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가족이라는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숨을 거두기 전에 어머니와 할아버지, ‘나‘는 함께 누워서 그동안 마음속에 쌓아 두고 하지 못했던 말들을 도란도란 나누기도 합니다. 
우리는 사실 타인에게는 미안하다. 고맙다는 말을 쉽게 하지만 오히려 가족들에게는 왠지 부끄럽고 쑥스러워서 망설이게 됩니다. 
어쩌면 가족은가장 낯선 타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세 번째 열쇠말 관심을 가질 것

세 번째 열쇠말은 두 번째 열쇠말 ‘행운‘에서 이어집니다. 곁에 누군가 있어야 행운이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말을 앞에서 했는데요, 결국이 소설에서 말하는 ‘행운‘이란 것은 어떤 초월적 존재가 가져다 주는것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내는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겠지요.
누군가의 인생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운‘이라는 이름의 초월적 존재를 통해 이것이 쉬운 일이라고 말합니다.

관심을 가질 것. 너무 쉬워서 그렇게 될 것이라고 아무도 믿지 못하겠지만 관심을 가지면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요?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는 없더라도,
적어도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이 그리 힘든 일이 아니라는 것만은 공감할 것입니다. 외로운 이에게도, 상처를 가진 이에게도, 고통을 겪고 있는 이에게도 그 옆에 관심을 가진 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충분히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사람에게도 행운이 다가가고 있다는 거겠지요.

이 소설의 제목처럼 행운이 나에게 다가오는 중이라고 기대하며 산다면 매일이 얼마나 설렐까요? 지금 행운이 여러분 곁에 다가오기를바라면서 오늘의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천지가 죽은 후 엄마와 언니가 이사한 곳은 화연이네가 사는 동네였습니다. 천지 엄마는 화연이네 중국집을 찾아가 화연의 생일 선물로 최신형 mp3 플레이어를 전해 줍니다. 그것은 천지가 죽기 전 타의에 의해 준비했던 것이었지요. 이때 천지 엄마는 이렇게 평생 피해자 가족의 얼굴을 보면서 살아보라고 혼잣말합니다. 사실 천지 엄마는 오래전에 화연이의 부모를 찾아와 괴롭힘을 말려 달라고 했으나 화연이 부모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화연이 엄마는 천지가 죽은 후 찾아와 태연히 자장면을 먹는 천지 엄마가 달갑지 않습니다. 
하지만 위로도 사과도 섣불리 할 수가 없습니다. 어린 딸의 잘못을 인정해 버리면 치러야 할 값이 너무 컸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잘못을 하고도 그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그 잘못을 인정했을 때 치르고 싶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일까요? 
어떤 이들은 왜 용서하지 않느냐고 오히려 피해자들에게 잘못을 묻기도 합니다.


세 번째 열쇠말 허생전

「허생전」은 조선 후기 실학자 박지원이 쓴 한문 소설입니다. 허생은 남산 밑 묵적골에 살며 책 읽기만 하던 가난한 선비입니다. 
어느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질책을 듣고 장안의 부자인 변 씨를찾아가 돈 1만 낭을 빌립니다. 그러고는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하여 큰돈을 법니다. 이후 도적의 소굴로 찾아가 도적들을 설득한 뒤, 이들을 이끌고 어느 섬으로 들어갑니다. 
섬에서 농사와 무역으로 자신의 이상국을 건설한 허생은 다시 섬에서 나와 나라 안의 빈민을 구제합니다. 
변 씨에게서 허생의 이야기를 들은 이완 대장은 허생을 찾아가 나라 안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묻습니다. 
이에 허생은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지만, 이완 대장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허생은 지배층의 허례허식과 무능을 비판하면서 이완 대장을 내쫓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허생이 자취를 감추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납니다.

허생은 사대부 양반으로 지식인입니다. 예리한 안목으로 당대 사회를 비판하고, 많은 과업을 이루는 인물이지요. 

왜냐 선생님은 이를 적극적인 실천 의지가 결여된 것으로 양반으로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아울러 이 한계는 작가 박지원의 한계이기도 하다고 지적합니다.

왜냐 선생님 역시 지식인이지요. 그는 교사들의 노동조합인 전교조에 가입하여 진정으로 학생들의 삶에 도움이 되는 참된 교육이 무엇인지 치열하게 고민합니다.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를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적극적으로 실천하고 있지요. 
이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전교조가 생겨난 지 얼마 안 된 1990년대입니다. 그 이후에 일제 고사가 폐지되고 고교 평준화가 이루어져 중학교만이라도 입시 교육을 탈피하게 되었으며, 촌지와 체벌이 없어지고 친환경 직영 무상급식이 이루어졌습니다. 
이외에도 학교에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교육 민주화는 전교조의 선구적 운동과 요구로 인해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이 과정에서 왜냐 선생님처럼 해직되어 그토록 가르치고 싶었던 아이들곁을 오래도록 떠났다가 돌아온 선생님도 많지요. 
지금은 당연한 것들이 사실은 이런 지식인들의 끊임없는 실천과 투쟁의 결과로 얻어낸 것들이라는 점은 알아야 할 것 같습니다.

왜냐 선생님은 「허생전」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 싶었던 것일까요? 
「허생전」은 과거의 이야기이고, 
「허생전」을 배우는 시간은 현재입니다. 

우리는 과거의 이야기를 통해 현재의 우리 삶을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배웁니다. 이 작품을 통해 왜냐선생님이 가르치고싶었던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요? 

제도에 맞지 않는다는 비판을 들으면서도, 문답식 수업을 진행했습니다. 노동조합 활동 때문에 외부로부터 억압을 받으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왜냐 선생님이 이처럼 실천적인 삶을 산 것은 허생의 모습을 비판하며, 지식인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간접적으로 알려 주고 싶었기 때문일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을 가장 잘 배우고 실천한 학생은 윤수였습니다. 동철이가 왜냐 선생님을 비판할 때나, 선생님이 학교에 못 들어오게 되었을 때 했던 말이나 행동을 보면 윤수는 왜냐 선생님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며 한결같이 옹호합니다. 

왜냐 선생님이 학교에 못 들어온 날, 윤수는 자기 생각을 실천으로 보여 줍니다. 땡볕이 쏟아지는 운동장 한가운데에 혼자 앉아 시위를 벌인 것입니다. 윤수는 왜냐 선생님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 부당한 일이라고 생각하여 나름의 방법으로 시위하며 저항합니다. 윤수의 행동에 선재 역시 운동장으로 뛰어갑니다. 선재는 똑똑하지만 생각이 많은 학생입니다. 하지만 윤수를 본 그 순간에는 생각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왜냐선생님은 학교로 돌아오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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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한다는 것

이동식

시작한다는 것은
안 된다는 걸 믿는 것이 아니라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확률이
아무리 낮아도
그것이 하고픈 일이고
꿈이라면
그 낮은 확률에도 희망을 갖고
나의 길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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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탁에서

아이 둘 낳아 기를 매
나의 아이들 아직 어렸을 때
만약에 우리가 이혼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면절대로 자기는 아이들 떼놓고
집을 나가는 사람이 되었을 거라고
아이들 키울 자신이 없어 분명
그렇게 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라는
아내의 말을 듣고 짐짓
가슴이 아리다
그렇다면 우리 집 아이들은
어디서 누구하고 산단 말이냐
아이들 울고불고 길거리를
헤매고 그랬을 일을 생각하면
우리가 젊어서 이혼한 사람들이 아닌 게
참 잘 한 일이지
같이 살아 늙은 사람이 된 것이
참 좋은 일이지
있지도 않았던 일들을 생각하며
가슴 쓸어내리는 어떤 아침이 있었다.

다시 중학생에게

사람이 길을 가다 보면
버스를 놓칠 때가 있단다
잘못 한 일도 없이
버스를 놓치듯
힘든 일 당할 때가 있단다
그럴 때마다 아이야
잊지 말아라
다음에도 버스는 오고
그다음에 오는 버스가 때로는
더 좋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떠한 경우라도 아이야
너 자신을 사랑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너 자신임을 잊지 말아라.

꽃들아 안녕

꽃들에게 인사할 때
꽃들아 안녕!
전체 꽃들에게
한꺼번에 인사를
해서는 안 된다
꽃송이 하나하나에게
눈을 맞추며
꽃들아 안녕! 안녕!
그렇게 인사함이
백번 옳다.

멀리서 빈다

어딘가 내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꽃처럼 웃고 있는
너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눈부신 아침이 되고
어딘가 네가 모르는 곳에
보이지 않는 풀잎처럼 숨 쉬고 있는
나 한 사람으로 하여 세상은
다시 한 번 고요한 저녁이 온다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유언시1
아들에게 딸에게

아들아 딸아, 지구라는 별에서 너희들
애비로 만난 행운을 감사한다
애비의 삶 길고 가느른 강물이었다
약관의 나이, 문학에의 꿈을 품고 교직에 들어와
43 년 넘게 밥을 벌어먹고 살았으며
시인교장이란 말을 들을 때가 가장 좋은 시절이었지 싶다
그 무엇보다도 한 사람 시인으로 기억되기를 희망한다
우렁차고 커다란 소리를 내는 악기보다는 조그맣고 고운소리를 내는 악기이고 싶었다

아들아, 이후에도 애비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을 만나거든
함부로 대하지 않기를 부탁한다
딸아, 네가 나서서 애비의 글이나 인생을 말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의 작품은 내가 숨이 있을 때도 나의 소유가 아니고
내가 지상에서 사라진 뒤에도 나의 것이 아니다
저희들끼리 어울려 잘 살아가도록 내버려 두거라
민들레 홀씨가 되어 날아가는 느티나무가 되든 종소리가 되어

사라지고 말든 내버려 두거라.

인생은 귀한 것이고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란 걸
너희들도 이미 알고 있을 터,
하루하루를 이 세상 첫날처럼 맞이하고
이 세상 마지막 날처럼 정리하면서 살 일이다부디 너희들도 아름다운 지구에서의 날들
잘 지내다 돌아가기를 바란다
이담에 다시 만날 지는 나도 잘 모르겠구나.

태백선

두고 온 것 없지만 무언가
두고 온 느낌
잃은 것 없지만 무언가
잃은 것 같은 느낌
두고 왔다면 마음을
두고 왔겠고
잃었다면 또한
마음을 잃었겠지
푸른 산
돌고 돌아
아스라이 높은 산
조팝나무꽃 이팝나무꽃
소복으로 피어서 흐느끼는
골짜기 골짜기
기다려줄 사람 이미 없으니
이 길도 이제는다시 올 일 없겠다.

별리

우리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
그대 꽃이 되고 풀이 되고
나무가 되어
내 앞에 있는다 해도 차마
그대 눈치채지 못하고
나 또한 구름 되고 바람 되고
천둥이 되어
그대 옆을 흐른다 해도 차마
나 알아보지 못하고
눈물은 번져
조그만 새암을 만든다
지구라는 별에서의
마지막 만남과 헤어짐
우리 다시 사람으로는 만나지 못하리.

오늘의 약속

덩치 큰 이야기, 무거운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조그만 이야기, 가벼운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아침에 일어나 낯선 새 한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든지
길을 가다 담장 너머 아이들 떠들며 노는 소리가 들려 잠시발을 멈췄다든지
매미 소리가 하늘 속으로 강물을 만들며 흘러가는 것을 문득느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남의 이야기, 세상 이야기는 하지 않기로 해요
우리들의 이야기, 서로의 이야기만 하기로 해요
지나간 밤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애를 먹었다든지
하루 종일 보고픈 마음이 떠나지 않아 가슴이 뻐근했다든지
모처럼 개인 밤하늘 사이로 별 하나 찾아내어 숨겨놓은 소원을 빌었다든지
그런 이야기들만 하기로 해요
실은 우리들 이야기만 하기에도 시간이 많지 않은 걸 우리는잘 알아요

그래요, 우리 멀리 떨어져 살면서도
오래 헤어져 살면서도 스스로
행복해지기로 해요
그게 오늘의 약속이에요.

가족사진

아들이 군대에 가고
대학생이 된 딸아이마저
서울로 가게 되어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기 전에
사진이라도 한 장 남기자고 했다
아는 사진관을 찾아가서
두 아이는 앉히고 아내도
그 옆자리에 앉히고 나는 뒤에 서서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미장원에 다녀오고 무쓰도 발라보고
웃는 표정을 짓는다고 지어보았지만
그만 찡그린 얼굴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떫은 땡감을 씹은 듯
껄쩍지근한 아내의 얼굴
가면을 뒤집어쓴 듯한 나의 얼굴
그것은 결혼 이십오 년 만에

우리가 만든 첫 번째 세상이었다.

아름다움

놓일 곳에 놓인 그릇은 아름답다
뿌리 내릴 곳에 뿌리 내린 나무는 아름답다
꽃필때를 알아 피운 꽃은 아름답다
쓰일 곳에 쓰인 인간의 말 또한 아름답다.

행복 2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 있다는 것.

풀꽃

1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2
이름을 알고 나면 이웃이 되고
색깔을 알고 나면 친구가 되고
모양까지 알고 나면 연인이 된다
아, 이것은 비밀.

3
기죽지 말고 살아봐
꽃 피워 봐
참 좋아,



무심히 지나치는
골목길
두껍고 단단한
아스팔트 각질을 비집고
솟아오르는
새싹의 촉을 본다
얼랄라
저 여리고
부드러운 것이!

한 개의 촉 끝에
지구를 들어 올리는
힘이 숨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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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는 가족들이었다. 만나면서로 싸우고 상처 주고 더러운 기분만 길게 남았다. 경기남부의 만석꾼이었던 할아버지가 세상을 뜨며 적자들에게는 알짜배기 옥토를 나눠주고, 서자인승균의 아버지에게는 멀리 떨어진 자갈밭을 주었는데 그 자갈밭에 신도시가 들어서는 바람에 크게 이익을 본 게 갈등의 씨앗이었다. 
가지고 있던 논밭도 못 지킨 본가의 자식들이 원망에 가득 차있는지라, 모이면 칼부림이 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차별받고 자란 아버지가 또다시 가정생활에 실패한 건 뒤틀린농담 같은 일이었다. 승균도 따지고 보면 혼외 자식이었다.
자갈밭을 판 돈으로 호의호식하며 취미삼아 분당 근교에 인도어 골프장을 차린 아버지는, 잘나가는 학원 강사였던 어머니를 유혹했다. 승균이 태어났을 때도 전처와 이혼이 덜 끝난 상태였으니 깔끔한 구석이 없었고, 억지로 이복 형누나와 교류를 하려던 시도는 처참히 실패했다. 
어머니는결혼과 잘 맞지 않는 성격이었기에 승균이 초등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아버지와 이혼했다. 
승균을 두고 가며 미안하기는 했는지, 생일엔 잊지 않고 비싼 전자기기를 사주었으나 그걸로는 불충분했다. 승균은 방치된 채, 아버지의 인도어 골프장 초록색 그물망 안에서 자랐다. 어쩌면 수용소에 잘 적응한 이유도 어린 시절과 비슷해서인지 모른다. 

엄마 생각하며 꾹 참자, 그랬거든요. 근데 최종 배정된 데가 곰 사육장이더라고요, 세상에. 맨날 새벽 4시에 나가서 애들 먹이 썰고 사육장 청소하고 했어요."
"곰・・・・・・ 귀엽잖아요."
"새끼 곰이나 다 커도 작은 녀석들은 참 귀여워요. 사실 정도 많이 들었어요. 무릎에 매달리고 재롱도 떨고, 물론 청바지가 찢어지면 좀 화가 났지만도 테디베어가 왜나왔는지 알겠더라고요. 근데 큰 녀석들은 얼마나 무섭다고요. 웬만한 성격이 아니에요. 관람객 하나가 장난치다가 팔이 날아갈 뻔했다니까요. 이력서에 한 줄 쓰자니 이것저것 따질 계제가 아니어서 있었지만, 곰 사육장에서 일한 게 제 경력에 대체 무슨 도움이 되겠어요? 갇혀 있는 곰들도 불쌍하고 저도 불쌍하고…………. 세상에 넘쳐나는 인턴이란 거, 특히 나라에서 하는 걸수록 다 그런 식이에요. 
정말 자기 전공에 꼭 맞는 자리 구하려면 너무 힘들어요. 이제 겨우

요원들은 연선의 어머니가 초과 근무에 투잡까지 뛰며 밤새 일했던 게 정상이 아니었으며 일종의 중독이었다고 말해 연선에게 상처를 줬다. 

자네를 민간인 사찰하고 있었잖아. 사찰을 할 거면 나 같은 사람을 사찰했어야지. 괴물들을 두고 학생들이나 잡아다 고문하고 있었다니 아직도 기가 막히네. 게다가 먼저 찾아갔더니, 기껏 한다는 짓이 나를 무기로 쓰려고 했고, 적국에 가서 사람들을 죽이라질 않나.
우방국에 나를 무슨 선물처럼 바치려 들지 않나. 냉전 시대에도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지…………. 양심적이고 효율적인 독재 정부 같은 소리 누가 하면 혀를 뽑아버릴 거야. 그 억울한 세월을 어떻게 견뎠는데 이런 상황이 또……………. 가서 일목인 변호사나 찾아와! 
어딘가에 한 명은 있겠지! 
괴물 변호사도 괜찮아! 
갇혀 있는 변호사 없어? 찾아와! 소송할 거야! 아, 닥치라고, 소송한다고!"

소장은 경모를 진정시키기 위해 열심히 상부와 조정 중이라며 웅얼거렸다. 하지만 그 조정을 기다리는 동안 연선이 버틸 수 있을지 회의적이었다. 승균과 하민이 연선을 다른 수용소로 이동이라도 시켜달라고 항의했지만, 연선의 특이한 점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수용소까지 사태가 번질 수 있다며 거절당했다. 변수를 통제해야 한다는 대답이었는데 소장을 한 대 치고 싶고, 벽을 때리고 싶고, 물건을 던지고 싶었지만 그중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승균은 자신이 폭력성을 완전히 제어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시민인데도 갇혀 있다는 게 갑자기 믿을 수 없어졌다.

그리고 여기는 여기는 어딘지 모르겠습니다・・・・・…. 알면 좋을 텐데 전혀 모르겠고, 누가 듣고 계셨으면 하는 마음과 한 분도 듣고 계시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반반입니다."
정규 주파수가 아닌 이상 몇 사람이나 듣겠냐마는 살인자를 각성시키는 목소리가 광범위하게 날아가고 있으니 작은 문제는 아니었다. 
일목인들은 이해할까? 수용소에서 도서관이 가장 위험했음을 숭균은 대학 시절 우연히 접했던 소책자를 떠올린 후 그 책을 구해달라고 신청했고, 신청은 승인되었다. 소출력 라디오 운동 혹은 커뮤니티 라디오 운동에 필요한 소규모 기지국을 건설하는 법을 자세히 적어둔 책이었다. 〈볼륨을 높여라> 같은 영화가 나올 만큼 유명했던 미국의 급진적 미디어 운동과 이탈리아의 볼로냐 등지에서 활발했던 텔레스트리트 운동에 영향을 받은 듯 한국내 단체의 유행 지난 선전물이, 모조리 폐지되지 않고 남아 있으리라고는 승균조차 기대하지 않았는데 하늘이 도왔다. 
운동은 팟캐스트의 등장과 함께 수명을 다한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예측 바깥의 수를 둔 것은 확실했다. 그 책과 다른 책들에서 읽은 것을 응용하여 송출기를 조끼 하나에 부착 가능하도록  압축한 것은 성과라면 성과였다. 

승균에게 그것은 무기였고, 협박의 도구였다. 누구를 협박하느냐 하면. 세상을?
살인자를 깨우는 목소리로 해적 방송을 했다.

새로운 종류의 괴물이라서, 괴물 위의 괴물이어서 그들을지배했다면ㆍㆍㆍㆍㆍㆍ 자유를 되찾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모두를.
중독시켰을 가능성은 분명 있었다. 수용자들은 부탁 한번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그렇다 해도 그 얼굴을 다시 볼 수 있다면 이번에는 제대로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의 마주 봄으로 영원히 잊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구해주신 건 감사하지만, 전 선생님을 그런 식으로 느끼지 않아요."
"선생님께 말씀 안 드렸던가요? 내내 애인이 있었어요."
"선생님은 목소리가 매력이었는데 왜 저 때문에 그런일을.....…."
"저도 상상하지 못했는데 선생님 때문에 살인자가 되고말았어요. 구치소로 면회 오시겠어요?"
"저와 선생님이 만나는 건 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우리에겐 미래가 없어요."
"그때 왜 변태같이 제 손을 잡으셨어요? 제가 모를 줄 알았어요? 전 선생님 같은 사람 딱 질색이에요."
"앗, 저 레즈비언인데요."
"연하가 취향이라서・・・・・・ 선생님 말고 하민 씨가 나왔으면 좋았을 텐데."
연선이 할 만한 다양한 종류의 거절을 세상 끝날 때까지


승균은 웃으면서 하민과 주먹을 부딪쳤다. 대한민국 정재계의 방향을 비틀어버리는 사람이 비밀 수용소의 스물한 살짜리라니. 누가 상상이나 할까. 승균은 처음 수용소에 들어왔을 때 자신과 다른 수용자들이 세상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이제 다시 수용소를 나가자니, 세상은 원래 아주 이상한 곳이었고 그들이 더한 것은 그저 미량의 광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린 구울이었다. 수현은 머리땋기 기술을 응용하여 갖가지 색실로 행운의 팔찌를 만들어 직접 승균의 손목에 매어주었다. 굽은 손가락 끝의 날카로운 손톱이 손목을 할 때 승균은 내색하지 않았다. 팔찌는 엉성했고 젖은 흙냄새가 났지만 앞으로 승균의 보물이 될 것이었다.
"한 가지만 약속해주세요."
고인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 애쓸 때 수현이 요청했다.
승균은 뭐든지 들어주마 했다.
"나중에 돌아가시면요. 화장 같은 낭비 절대 하지 말고,
미생물이니 캡슐이니 요상한 것도 쓰지 말고 그냥 땅에묻히세요. 정 신경 쓰이면 얇은 판자 관에 천 한 장 정도감고요."
"어어....… 그래. 그 정도야."

우주 이주 실패가 의도치 않게 혁명을 성공시켰던 것은 역사에서 자주 되풀이되는 아이러니였다. 사람들은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진 다음에야 이 작은 행성의 가치를 다시 매겼던 것이다.

지구에 파괴적이지 않은 적정 인구수는 25억, 국가별 인구수 상한을 두고 첨예한 협상이 벌어졌습니다. 자원 순환 구조와 경제 구조를 완전히 바꾸어야 했고, 더 효율적으로 바꾼 나라들이 상대적으로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습니다. 환경주의와 페미니즘이 맞물려 돌아가는 톱니처럼 기능했습니다. 언젠가는 마을 가장자리에 서서 비명을 지르는 마녀 취급을 받았던사람들이 끝내는 모두를 구했습니다.
인공 포궁과 바이오 필름형 피임도구의 보편화가 기술적으로 발맞추었습니다. 원치 않는 임신이 지구상에서 사라졌습니다. 인공 포궁에 대해서는 제도적으로 여러 각도의 접근이 있었으나, 이내 정부가 관리하되 사용은 오로지 개인이 할 수 있도록 정비되었습니다. 인공 포궁을 이용하려는 사람은 양육자 교육기관에 등록하여 능동적인 생명권 교육과 인권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냉동실에서 야산에서 아이들의 시신이 발견되던 학대와 살해의 시대가 끝났습니다. 그렇게 사회는 드디어 트라우마 없는 시민들을 키워냈습니다.

필터 주전자형 정수기로 걸러 전기 포트로 끓여 마시기 때문에 탈이 난 적은 없었다. 씻는것에도 큰 변화를 줄 필요는 없었다. 오히려 더 잘 씻었다.
예전에는 뜨거운 물이 금방 끊겨서 샤워하다가 찬물을 맞기 일쑤였는데, 아래층에 걸어 다니는 좀비들은 이제 샤워를 하지 않으니 늘 온수가 나왔다.

전기 포트, 전기 플레이트, 가습기, 다리미, 드라이기헤어 아이론, 노트북, 전화기가 있었다. 머리를 감고 나서는 드라이기와 아이론을 여유 있게 썼다. 자기 전에 감으면 피곤해서 대충 말리고, 일어나 감으면 새벽 훈련 때문에 대충 말리곤 했는데 몇 년 만에 완전히 건조해질 때까지 말릴 수 있었다. 
처박아두기만 했던 아이론으로 매일 머리카락을 반듯하게 폈다. 
하루에 15분이라도 집중할 거리가 더 필요해 시작했는데, 반복하다 보니 경건해졌다.

사람이 죽으면 가장 오래 남는 것 중 하나가 머리카락이라고 하지 않았나? 누군가에게 나중에 발견될 때, 해골에 화살처럼 곧바른 머리카락이 붙어 있으면 발견하는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윤이 끝까지 살아 있으려 노력했다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를테면 수업시간에 배웠던 ‘존엄‘을 지키려 했다는 것을. 그러나 존엄이란 게 가지런한 머리카락 따위로 지켜지는 것은 아닐 것같고 어쩌면 허영심일지도 모르겠다.

 악역을 제외하면 이 단편집의 남성들은 대체로 무해하며, 실제로 액션을펼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이 단편집에서는 딱 한 편의 예외가 있습니다). 뭔가를 할 때는 거의 조력자로서 움직이죠.
그들의 주 역할은 주인공에게 액션의 원동력을 제공하는것입니다. 여성 뮤즈들이 남성 화자(그리고 그 화자와 동일시되는 작가와 엮이는 방식이 역전된 겁니다. 이렇게 역전된 관계가 정치적인 장치일 수도 있겠죠. 하지만 전략적인 장치로 보기에는 너무 눈에 잘 띕니다. 이 단편집의 여러 주인공이 서로 닮아 있는 것처럼, 남성 뮤즈들이 서로 닮아 있는 것도 작가의 세계관이 자연스럽게 발현된 결과물로 보입니다. 주로 ‘남자다운 특성‘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는 공격적인 특성을 지니지 않은 남성들에 대한 호감 말이죠.

반대로 주인공이 맞서는 존재들은 모두 선제공격을 서슴지 않는 인물이며, 때로는 그런 공격성을 숭앙하는 현대문명 자체입니다. 독자들은 "이런 세계라면 그냥 사라져버려도 상관 없다"는 독백을 서로 다른 인물들로부터 여러 차례 들을 수 있습니다. 
세상을 더 암울하게 만드는 문명이라면 당연히 스스로 몰락하고 망하는 게 올바른 수순이 아니겠냐는 주장을 쉽게 기각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단편집에서 포스트 아포칼립스풍으로 쓰인 작품들은 묘한 안도감 같은 것을 안겨줍니다. 

이 이야기를 표제작으로 삼은 것은 요새 가장 자주 하는 고민이 한 사람 안의 유해함, 공동체와 시민 사회 안의 유해함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유해함을 신중하게, 더불어 기꺼이 제거하기로 마음먹는 주인공의 목소리를 받아 적고 싶었다. 그리고 몇 년전에 반복해서 "정세랑 소설은 <목소리를 드릴게요> 말고는 다 갖다 버려야 한다"는 요지의 글을 올렸다 지웠다 하시는 분이 계셨는데…………. 아니, 제가 정말 다작하는 편인데 정말로 다요? 이제와선 웃지만, 창작자들에게 조금만 너그렇게 대해주시길 부탁드린다.

<7교시>는 <리셋>과는 다른 세계에 있는 초단편이다. 에드워드 윌슨의 《지구의 절반>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 나는정말로 여섯 번째 대멸종이 두렵다. 조류 관찰을 좋아해서 전 세계의 관련 단체 소식을 받고 있는데, 모두 개체 수 급감에 아득하게 절망하고 있다. 요새 ‘극단적인 환경주의자‘
라는 소리를 자주 듣지만 
새들이 다 사라져가는 세계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 더 치우친 게 아닌지 항변하고 싶다. 
욕망은 점점 단순하게 수렴해서, 흔들리는 나뭇가지 사이를 누비는 작은 새들을 보고 싶은 마음뿐이다. 우리는 이제 우리와 닮은 존재가 아닌 닮지 않은 존재를 사랑

하는 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사랑의 특성은 번지는 것에있으므로 머지않은 날에 정말 가능할지도 모른다.

<메달리스트의 좀비 시대>는 어려운 희망에 대해 쓰고 싶어서 썼던 이야기가 아닌가 싶은데, 내가 이 이야기를쓸 때의 기억보다 어떤 분이 웹진 거울에 "그런데 헬기가 구해주지 않고 또 통조림만 주고 가버려" 하고 농담을 남기신 게 강렬했다. 
그 농담만 생각하면 매번 웃음이 터진다. 별개로 나는 살아남은 정윤이 먹고 싶어 하던 채소로,
싱그러운 향기로 가득한 작은 화단을 가지게 되었을 거라고 상상한다.

2020년은 SF 단편집을 내기에 완벽한 해가 아닌가 싶고, 세계는 더디게 더 많은 존재들을 존엄과 존중의 테두리 안에 포함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갈 거라고 믿는다. 너무늦지만 않으면 좋겠다.

2020년 1월
정세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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