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가는 관들에게
연마노 지음 / 황금가지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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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가는 관들에게/ 연마노 SF 소설집/ 황금가지





연마노 SF 소설집 <떠나가는 관들에게>는 표지처럼 몽글한 감정을 가득 품고 있다. SF 소설로 오늘날이 배경은 아니지만,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와 이야기 소재로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그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수많은 일 중에 여덟 가지를 이야기로 엮어냈다. 



여덟 가지 단편 모두 특색 있으면서도 한결같이 다정하다. 삶과 생명, 관계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이 느껴지는 글들이었다. 단단하게 다져진 대지에 뿌리내리고 자라나기 시작하는 나무의 줄기같다. 연약해보이지만 태양을 향해 힘차게 뻗어나가는 생명력이, 밝음이 우리를 기분좋게 한다. 연마노의 글은 건조한 대지에 내리는 비처럼 촉촉하고, 습하고 뿌연 도시를 비추는 태양처럼 보송하고, 어둡고 냄새나는 골목길을 걷다 마주치는 환한 가로등마냥 안도하게 하고,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돌아가는 집마냥 편안하게 한다.



참신한 소재와 발상으로 시선을 잡아끄는 글은 마음에 스며드는 결말로 자연스레 우리를 동화로 이끈다. 

한 줌의 희망을 품고 우주로 아픈 딸 인서를 보내고자 하는 서진을, 먼저 떠나보낸 연인을 만나기 위해 태엽형 미로를 벗어나려는 나를, 마지막 남은 선임 연구원으로 프로젝트의 완주를 위해 방주를 향하는 진영을, 사라지는 것들을 받아들이기 버겨워 잠길 위기에 처한 동네로 되돌아가는 선안을, 인간 은아를 사랑하게 되어   스스로를 조각조각 해체하는 우주 생명체를, 직업 윤리를 저버리고 인어를 바다의 품으로 돌려보내는 정원을 이해하게 된다.


내가 읽으면서 공감하고 감동하는 주인공의 힘겨운 선택에 이해와 응원을 보여주는 존재가 마치 연마노 작가처럼 다가왔다. 


[떠나가는 관들에게]의 인서, [방주를 향해서]의 인공지능 율라, [아틀란티스의 여행자]의 진안, [저주 인형의 노래]의 돌고래, [마지막 인어]의 인어처럼 주인공들은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이해와 공감을 해주는 존재들이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나도 언젠가 그렇게 나가보고 싶었어.

내 한계까지, 누구도 붙잡을 수 없을 정도로 먼 곳까지.


서진은 인서가 필요하지 않았다. 동시에 몹시도, 애가 닳도록 필요했다.



어느 것도 오답일 수도 정답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인서를 보내는 것에 대해 양가적 감정으로 흔들리는 서진이 인서에게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미안해.

그리고 안 미안해. 

알아.

나도 엄마한테 하나도 안 미안해.

그래도 날 사랑해?



삶과 죽음, 만남과 헤어짐 그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떠나가는 관들에게>는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하나의 인어를 위해 그 많은 노래를 세상에서 지우게 되었을 지도 모르겠지만 작은 점이 되어 외롭고 자유롭게 나아가는 인어의 뒷모습만으로 충분히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음은 그누구도 모르는 일이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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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각본집
강승용.오선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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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 각본집/ 강승용 오선영/ 한겨레출판




봄이 오면 휘날리는 벚꽃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하이얀 벚꽃이 비처럼 내리면 '아, 정말 봄이 왔구나' 싶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다. 겨우내 움츠렸던 주변의 기운이 기지개를 키는 듯 사부작거린다. 그런 평온한 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국가와 군인의 군홧발과 총부리에 쓰러져야만 한 우리네 슬픈 역사가 2024년 봄을 이끌고 우리를 찾아왔다. 독재권력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 앞에 서 있는 그들을 클로즈업하는 영화 <1980> 그리고 이를 위한 모든 것을 담은 각본집 <1980>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역사는 기록이다. 그 기록에서 민중, 소시민의 서사는 찾아보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간에 숨은 개인의 서사를 쫓는다.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시대적 상상력과 인간적 가치와 의미를 재료로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노력을 통해 역사가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일상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영화 <1980> 역시 뼈아픈 기억인 5ㆍ18 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을 여덟 살 소년과 가족,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 생생한 현장감은 시간의 태엽을 되감아 끔찍한 순간 한복판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소리가 말이 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나오던 1980년 5월의 광주는 지금도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다. 



각본집 <1980>은 2023년 5월 18일 재개발 계획으로 철거될 예정인 40년 전통의 중국집 '화평반점'의 현재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곳을 찾은 이(우리)가 내놓은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로 이끈다. 



1980년 5월 17일, 중국집 화평반점은 신장개업으로 떠들썩하다. 가난하지만 마음은 넉넉한, 동네 이웃들이 제 가족인 80년대의 평범한 동네에 중국집 '화평반점'은 자리하고 있다. 

6ㆍ25 동란 때 가족들과 피란 온 철수 할아버지가 1대 주방장이다. 그는 큰 아들 철수 아빠가 뒤를 이어 2대를, 장손인 철수가 3대 주방장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제 여덟 살이 된 철수는 짜장면 냄새가 싫고, 짱개라 놀림받는 게 싫기만 하다. 


읽다 보면 어느새 화평반점에 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쓰윽 쓱 비벼서 입에 몰아넣고 있다. 구수한 사투리와 더 고소한 짜장 냄새에 취해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과 왁자지껄 웃으면서 떠들고 있다.




"

이때, 문으로 들어서는 군인들. … 

경직된 기류 속에 일순 고요해진 화평반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여덟 살 철수는 건넌방에 사는 아빠 친구 딸 영희가 좋을 뿐이다. 삼촌도 아모레 이모와 결혼식을 앞두고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형(철수 아빠)의 낙지 짜장을 맹연습 중이다. 엄마는 무등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군부독재에 맞서 민중운동에 열심인 아빠 몫까지 열심히 일한다. 이모도, 날라리 아저씨도, 통장 어른도, 동네 상점 아저씨들도 다 각자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왜?





10일의 기록 안에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 앞에서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외치며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을, 이웃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순박하고 다정한 그 시대의 우리가 있었다. 



"나가 아부지 아들 맞지라?

나가 아부지가 그라고 씨부리던 싸나이 맞지라?

그란께 나가 요로코롬 숨 죽이고 있으믄

먼저 간 내 각시… 얼굴 볼 수가 읎어라…

이 속 좁은 넘이 속 터져 뒤져분당께!!"




막역한 사이였던 철수 아빠에게 총을 겨누는 영희 아빠. 철수 아빠를 잡기 위해 동생 상두를 고문하는 영희 아빠. 군인의 신분으로 명령에 따랐다. 

매번 드는 의문이지만, 결정을 내리는 자는 항상 현장에 없다.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들이 결정을 내리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다. 철수 아빠, 삼촌, 아모레 이모, 할아버지 등등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또다시 그들의 가족이요, 이웃이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피 묻은 군홧발로 민중을 탄압한 독재 권력은 끝까지 뻔뻔했다. 






<1980>은 그럼에도 한자리에서 꿋꿋하게 할아버지의 중국집, 아버지와 삼촌의 낙지 짜장을 오늘날까지 이어온 철수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사람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감싸 안은 민중의, 소시민의 진정성을 전하고 있다. 




각본집을 통해 영화와는 또 다른 결의 <1980>을 접할 수 있었다. 미공개 현장 사진과 스틸컷, 배우들의 사인 등 볼거리와 제작 관련 정보가 담겨있어 소장각이다. 

<1980>을 첫 번째 연출작으로 감독 출사표를 던진 강승용 감독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국가와 권력의 존재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되는 시간이었다. 



한겨레 하니포터 8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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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 - 세월호참사 10년, 약속의 자리를 지킨 피해자와 연대자 이야기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 기획, 박내현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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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 기획/한겨레출판




- 세월호참사 10년, 

약속의 자리를 지킨 피해자와 연대자 이야기


2014년 4월 16일,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날 이후로 10년이 흘렀다. 감각하지 못한 채 맞이하는 나는 정체성이 흔들린다. 참사 자체로는 삼자로, 지역사회 주민으로서는 이웃으로, 부모로서는 당사자로 마음이 요동친다. 

오며 가며 마주하는 이들, 웃으며 인사하는 지인들, 그 안에 세월호참사의 가족들과 연대자들이 있다. 참사 후 피지 못한 영혼을 애도하는 장례식에 가고, 분향소를 찾고, 북토크를 아이들과 참여하면서 보낸 몇 년의 시간 이후 세월호참사는 4월에 찾아오는 노란 기억 조각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10주기'라니 말문이 턱 막혔다. 그날의 공포와 고통과 무기력과 분노가 밀물처럼 밀려왔다. 그리고 밑바닥에 가라앉았던 미안함이 나를 엄습했다. 



 <기억의 공간에서 너를 그린다> 

세월호참사 10주기 위원회에서 기획한 이 책에는 전국에 있는 기억장소와 기억공간을 지키는 이들과 세월호참사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던 긴 시간, 힘들지만 묵묵히 걸어간 그 길을 기록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나아갈 힘과 의지, 마음을 모으는 글이다. 


'생명, 안전, 약속'

세월호참사 이후로 달라진 게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안전사회'에 대한 우리의 소망이 아닐까. 큰 재난 앞에서 보이지 않았던 국가, 보호받지 못했던 국민 그리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아닌 배·보상으로 뒷수습을 하려는 정부. 모든 상황을 똑똑히 본 우리는 안전사회에 대한 의식이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세월호참사 이후 정확한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세 번의 국가 조사 기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아쉽게도 명확한 결론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피해자와 연대자의 활동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세월호참사 이후에도 재난은 반복되고 있기에 비탄함을 품고 더 큰 책임감으로 연대하여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힘쓰고 있다.






20편의 글을 통해 세월호참사의 그날과 그 이후의 기억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의 10년을 담은 기억공간에 발을 내디뎌 진솔한 이야기에 귀 기울여 듣다 보니 그들이 바라는 간절한 소망이 간단하면서도 단순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누구의 책임인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통해 또다시 이런 인재가 반복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먼저 고통을 겪은 이로서 다시는 그 누구도 이런 허망하고 어처구니없는 시스템의 부재로 절절한 아픔을 경험하지 않아야 한다는 믿음이었다.  






유가족들은 노래를 부르고, 봉사를 베풀고, 연극을 하고, 목공을 하면서 세월호참사의 기억을 이어나간다. 자식을, 형제자매를, 가족을 잃은 고통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치유받고 위로를 주고받으며 더 나은 사회, 더 안전한 사회를 꿈꾸는 그들은 반짝거렸다.


물론 순탄치 않은 현실적인 문제들은 산재해 있다. 10년이 흘렀으니 이제 그만하자는 분위기나 줄어든 세월호 관련 예산, 지켜지지 않은 약속들.

4ㆍ16생명안전공원 착공은 계속 미뤄지고, 4ㆍ16목공소, 단원고 생존 학생을 위한 공간 '쉼표' 등 세월호 관련 단체들에 대한 정부 지원이 사라지고 있다고 한다. 



"이제 그만 잊으라고 말하는,

또 세월호와 관련된 예산이 모두 사라지는 이 현실은 

우리 아이들에게 박수쳐 줄 준비가 되어 있나요?

이런 상태라면 세월호는 20년 후에도, 30년 후에도

진행 중일 거예요."








'단원고 4ㆍ16 기억교실'을 국가지정기록물 14호로 지정받고 이제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올리려는 작업이 진행 중이다. 기억공간을 만들고 지키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은 기록의 힘을 알기 때문이다. 

'기록은 마음을 모으는 일'이라는 4ㆍ16기억 저장소 소장 이지성 님의 말처럼 기록이 기억으로 이어져 잊지 않기를, 서로가 서로의 이웃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따스하게 스며드는 책이다. 


더 안전한 사회를 위해 잊지 않고 기억하겠습니다.



한겨레 하니포터8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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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3
이희영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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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스/ 이희영/ 현대문학/ 핀 장르 003





"나는 인간이 스스로를 정확히 보는 게

의외로 힘들다고 생각해.

근데 가끔 보일 때가 있어.

그렇게 드러난 것이

꽁꽁 감춰두었던 흉터일 수도 있지."







이희영 작가는 부모-자식 간의 천륜을 뒤집어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화두로 삼은 <페인트>로 알게 되었다. '부모를 선택하여 가족을 구성하는' 주체로 아이들을 내세워 이야기를 전개하는 그의 글은 파격 그 자체였다. 이번 작품 <페이스> 역시 기이한 발상에서 탄생하였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는 
아이가 있다면……."




일상의 습관에서 스치는 생각이, 한 줄의 문장이 시울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한 것이다. 소름이 돋을 만큼 전율에 휩싸였다. 글을 뽑아내는 이 놀라운, 노련한 능력에 탄복하며 이희영 작가가 구축한 <페이스> 세계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영민한 아이다.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타인의 신호를 섬세하게, 예민하게 파악하여 그들을 안심시켰으니까. 불과 여섯 살이었던 작은 아이는 불편한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꺼이 세상에 단 한 사람, 바로 자신을 속이기로 하였다. 그렇게 12년이 지나갔다. 



자신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18세 소녀 인시울은 어느덧 적응해나가는 것 같이 보였다. 아침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은 어떨까? 궁금해하는 모습에서 영화 <뷰티 인사이드>의 남자 주인공 우진이 떠올랐다. 자고 일어나면 다양한 성별, 국적, 연령대로 변했던 우진처럼 시울도 먹물, 모자이크, 낙엽, 안개, 롤리팝 등 다양한 이미지로 가려진 자신의 얼굴을 매일 아침 거울로 보았다. '모든 이에게 보이느냐, 자신에게만 보이느냐'라는 큰 차이가 있지만.








매일 달라지는 얼굴 이미지를 수용하는 듯 보였는데 예기치 않은 사건으로 이마에 생긴 흉터가 선명하게 보이는 것에 대한 반응이 인상적이다. 난생처음으로 진짜 얼굴과 마주한 감정, 우리는 유아기적에 겪어 기억조차 나지 않은 그 생경하면서도 벅차오르는 감정을 생생하게 느끼는 18세 인시울은 자신의 내면에 좀 더 내밀하게 다가선 듯하다. 상처를 통해 비로소 진정한 자신을 마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다는 상징이라 굳이 감춰야 할 필요가 없다는 말에서 최초로 상처를 입고 흉터로 드러난 자아를 긍정하는, 인식하는 태도를 느낄 수 있다. 



시울은 자신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좋은 점들을 자꾸자꾸 찾아낸다. 주변 사람들의 반짝이는 얼굴을 그 자체로 소중히 여긴다. 그 넘치는, 자연스러운 생기를 정작 담고 있는 본인만 모르는 상황을 안타까워한다. 





"그냥 인간의 삶이 그렇게 흘러간다. 

지난 후에야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이 참 많다.

안타깝고 아프게도……."





시울이 담아내는 주변의 빛나는 얼굴들이 아름다워 가슴이 저렸다. 할머니의 안온한 미소가, 환한 얼굴이, 라미의 살짝 어긋난 앞니가, 목젖이 보일 정도로 환히 웃는 얼굴이 참 많이 반짝거려 눈이 부셨다. 


어둠 속으로 침잠한 묵재가 가깝지 않고 약간의 거리가 있는 존재인 시울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토해내게 되는 흐름은 터닝포인트가 되어준다. 

아물지 않는 상처 때문에 속이 다 곪은 묵재는 그 상처를 시울에게 털어놓고 위로받음으로써 상처의 아가미에서 벗어날 수 있는 웃음을 되찾게 되었다. 오랜 시간 남들의 시선과는 다른 자신의 눈으로 보고 살아온 시울 덕분이다. 




"삶의 얼룩들에 한번 시선을 빼앗기면 

더 크고 소중한 것들이 안 보인다. 

너도 그랬으면 좋겠어. 세상의 시선이 아닌 

너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뭔가가 분명히 있을 테니까."







아침마다 시울과 엄마가 주고받는 대화가 현실적이라 오히려 좋다.

"딸, 좋은 아침."

"거짓말하지 마."

"너는 꼭 아침부터 사람 기분을……."




서로를 알 수 없고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너무 가까운 관계. 하지만 어느새 닮아갈 정도로 시간을 함께 보내는 관계다. 얼룩에 집착해서 크고 소중한 무언가가 반짝일 기회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잠시 생각해 본다. 

시울이 얼굴을 나타내는 다양한 표현처럼 우리의 얼굴도 이렇게 개성 넘치고 다채롭다면 삶이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로워지지 않을까? 

일단 시울이 말대로 이분적인 표현보다는 훨씬 재밌다. 그리고 그런 표현을 하기 위해서는 세상의 시선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꼼꼼하게 얼굴을 살펴보는 게 먼저일 테다. 그러다 보면 내밀한 자아를 밀도 있게 인식하는 그날이 오지 않을까. <페이스>가 열어준 즐거운 상상이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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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육아 - 나를 덜어 나를 채우는 삶에 대하여
정지우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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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육아/ 정지우 지음/ 한겨레출판




지구상에서 가장 아이를 낳지 않는 나라가 바로 '우리나라'라는 뉴스를 접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 'N포 세대'라는 신조어로 대변되는 2,30대가 느끼는 상대적 좌절감과 박탈감, 무력감을 체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로 받아들이기에는 외부적인 요소가 너무 크다는 생각에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두 아이를 키우고 있는 부모로서 그 삶의 충만함과 찬란함을 잘 알기에, 감사하기에 더 절절한 심정이다. 이런 시기에 정지우 작가가 쓴 육아 에세이 <그럼에도 육아>는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품게 된 희망을 속삭이고 있다. 세상 어딘가에서 서로 설레어 새로운 생명이 움트고, 또 그 새로운 존재들이 사랑하고 꿈꾸고 웃고 울며 이 삶을, 세상을 사랑하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말이다. 



결혼 후 바로 임신하여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된 나는 아이가 없는 부부의 삶이 낯설다. 어느덧 내 키를 훌쩍 뛰어넘어 자란 아이들이 성장하여 가정 너머 또래의, 공동체의, 사회의 일원으로서 삶의 반경을 확장시키는 시간의 흐름이 야속하기도 하다. 하지만 시간은 아랑곳하지 않고 흐를 뿐이다. 결국 내가, 우리가 챙겨야 하는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의 기억, 조각일 것이다. 






<그럼에도 육아> 책을 읽는 내내 감정이 벅차올랐다. 이제는 희미해져버린 아이들과의 추억이 펑펑 터지듯 튀어나와 피식 웃음 짓게 하고 울컥 눈물 나게도 했다. 핸드폰 화면에 갑자기 떠 그 시절로 되감기 시켜주는 사진들처럼 잠들어있던 소중하고도 귀한 기억 속 우리 가족들을 소환하였다. 


여러 글들이 마음에 남았는데 특히 '이중 긍정'이 기억에 남는다. "나는 그것을 사랑하는 것을 사랑한다"라고 할 수 있어야 진정 '자신의 가치'로 긍정하는 것이라는 말이 와닿았다. 

여러 매체를 통해 글을 읽고 책을 읽다 보면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 있다. 그래서 따르면 헷갈리는 경우가 있다. 바로 나의 생각이나 기준이 아니라 남의 기준이 좋아 보여 따른 것이어서 그럴 것이다. 

그런 의미로 이중 긍정으로 "다시 태어나도 아이를 가질 건가?"라는 질문에 "다시 태어나도 아이를 가지겠다" 당당하게 밝히는 저자는 진정 자신을 긍정하고 삶을 사랑하는 이다. 이 책에 담긴 그의 한 시절이 온 마음으로 증명하고 있다.






육아를 하면서 좋은 점은 아이의 눈높이로 다시 한번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정지우 작가의 표현처럼 '삶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어린아이가 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일생의 마지막 타임머신을 타는 일' 같다. 흐릿한 나의 유년 시절 기억보다 더 생생하고 또렷한 너의 유년 시절을 기억하고 기록하는 역할을 감사하게도 우리에게 허락해 주었다. 


'엄마', '아빠'. 세상 어느 말보다 보드랍고 몽글한 그 말 한마디와 세상 어느 거울보다 맑은 눈동자로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들 사이에 자리 잡은 아이. 그 아이가 성장하는 시간과 공간을 함께 공유하면서 자연스레 부부도 부모가 되어간다.





행복과 삶의 본질이 결코 거창하고 화려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해주는 순간들, 정지우 작가가 적어둔 작고 사소한 날들이 전해준, 고마운 가르침이다.

잊고 살았던, 묻어두고 살았던 우리의 작고 사소한 지난날과 오늘의 평범한 일상 그리고 미래 어느 날 찾아올 무지개. 우리 가족이 함께 그려나가는 이 작은 그림이 진짜 삶이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여러 가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부대끼면서 살아가는 여정 속에 행복과 사랑이 있음을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결혼, 육아… 좀 더 사회적, 공동체적 시스템의 지원이 뒤따랐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오히려 인간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아 보이는 순간은 덜 동물다울 때인 것 같기도 하다'라는 정지우 작가 말처럼 우리의 삶을 충만하게 채워주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생각에 잠기게 하는 책이다. 



한겨레 하니포터 8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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