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80 각본집
강승용.오선영 지음 / 씨네21북스 / 2024년 3월
평점 :
1980 각본집/ 강승용 오선영/ 한겨레출판
봄이 오면 휘날리는 벚꽃이 우리를 설레게 한다. 하이얀 벚꽃이 비처럼 내리면 '아, 정말 봄이 왔구나' 싶어 몸과 마음이 가뿐해진다. 겨우내 움츠렸던 주변의 기운이 기지개를 키는 듯 사부작거린다. 그런 평온한 봄이 계속되던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국가와 군인의 군홧발과 총부리에 쓰러져야만 한 우리네 슬픈 역사가 2024년 봄을 이끌고 우리를 찾아왔다. 독재권력이 자행한 무자비한 폭력 앞에 서 있는 그들을 클로즈업하는 영화 <1980> 그리고 이를 위한 모든 것을 담은 각본집 <1980>을 마주하는 시간이다.
역사는 기록이다. 그 기록에서 민중, 소시민의 서사는 찾아보기 드물다. 그래서 우리는 그 행간에 숨은 개인의 서사를 쫓는다. 역사적 사실을 근간으로 시대적 상상력과 인간적 가치와 의미를 재료로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이런 노력을 통해 역사가 '기록'에 머무르지 않고 그 너머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일상의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영화 <1980> 역시 뼈아픈 기억인 5ㆍ18 민주화운동 10일간의 기록을 여덟 살 소년과 가족, 그들과 관계 맺고 있는 주변 인물들의 시선으로 풀어나가고 있다. 이 생생한 현장감은 시간의 태엽을 되감아 끔찍한 순간 한복판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소리가 말이 되지 못하고 비명으로 갈기갈기 찢어져 나오던 1980년 5월의 광주는 지금도 여전히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이다.
각본집 <1980>은 2023년 5월 18일 재개발 계획으로 철거될 예정인 40년 전통의 중국집 '화평반점'의 현재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곳을 찾은 이(우리)가 내놓은 낡은 흑백사진 한 장이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로 이끈다.
1980년 5월 17일, 중국집 화평반점은 신장개업으로 떠들썩하다. 가난하지만 마음은 넉넉한, 동네 이웃들이 제 가족인 80년대의 평범한 동네에 중국집 '화평반점'은 자리하고 있다.
6ㆍ25 동란 때 가족들과 피란 온 철수 할아버지가 1대 주방장이다. 그는 큰 아들 철수 아빠가 뒤를 이어 2대를, 장손인 철수가 3대 주방장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이제 여덟 살이 된 철수는 짜장면 냄새가 싫고, 짱개라 놀림받는 게 싫기만 하다.
읽다 보면 어느새 화평반점에 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앞에 두고 쓰윽 쓱 비벼서 입에 몰아넣고 있다. 구수한 사투리와 더 고소한 짜장 냄새에 취해 인간미 넘치는 캐릭터들과 왁자지껄 웃으면서 떠들고 있다.
"
이때, 문으로 들어서는 군인들. …
경직된 기류 속에 일순 고요해진 화평반점.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제 여덟 살 철수는 건넌방에 사는 아빠 친구 딸 영희가 좋을 뿐이다. 삼촌도 아모레 이모와 결혼식을 앞두고 할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해 열심히 형(철수 아빠)의 낙지 짜장을 맹연습 중이다. 엄마는 무등산처럼 부른 배를 안고 군부독재에 맞서 민중운동에 열심인 아빠 몫까지 열심히 일한다. 이모도, 날라리 아저씨도, 통장 어른도, 동네 상점 아저씨들도 다 각자 일을 하면서 열심히 살아갈 뿐이다. 그런데 왜?
10일의 기록 안에 무자비한 탄압과 폭력 앞에서 '무릎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 죽기를 원한다' 외치며 자신을, 사랑하는 가족을, 이웃을 지키기 위해 총을 들어야만 했던 순박하고 다정한 그 시대의 우리가 있었다.
"나가 아부지 아들 맞지라?
나가 아부지가 그라고 씨부리던 싸나이 맞지라?
그란께 나가 요로코롬 숨 죽이고 있으믄
먼저 간 내 각시… 얼굴 볼 수가 읎어라…
이 속 좁은 넘이 속 터져 뒤져분당께!!"
막역한 사이였던 철수 아빠에게 총을 겨누는 영희 아빠. 철수 아빠를 잡기 위해 동생 상두를 고문하는 영희 아빠. 군인의 신분으로 명령에 따랐다.
매번 드는 의문이지만, 결정을 내리는 자는 항상 현장에 없다. 권력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자들이 결정을 내리는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무참히 희생된다. 철수 아빠, 삼촌, 아모레 이모, 할아버지 등등 수많은 이들이 흘린 피의 무게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또다시 그들의 가족이요, 이웃이다. 인간의 존엄을 짓밟고 피 묻은 군홧발로 민중을 탄압한 독재 권력은 끝까지 뻔뻔했다.
<1980>은 그럼에도 한자리에서 꿋꿋하게 할아버지의 중국집, 아버지와 삼촌의 낙지 짜장을 오늘날까지 이어온 철수의 삶을 통해 시대의 아픔을 사람을 향한 믿음과 사랑으로 감싸 안은 민중의, 소시민의 진정성을 전하고 있다.
각본집을 통해 영화와는 또 다른 결의 <1980>을 접할 수 있었다. 미공개 현장 사진과 스틸컷, 배우들의 사인 등 볼거리와 제작 관련 정보가 담겨있어 소장각이다.
<1980>을 첫 번째 연출작으로 감독 출사표를 던진 강승용 감독의 마음을 헤아려보며, 국가와 권력의 존재 의미를 다시금 새기게 되는 시간이었다.
한겨레 하니포터 8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