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의원 이방원
이도형 지음 / 북레시피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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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이방원/ 이도형/ 북레시피







'태종'은 '나라의 기틀을 다진' 군주에게 붙이는 묘호다. 조선시대 3대 왕인 태종은 조선의 건국부터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올라서도 많은 이들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한 면이 두드러지는 냉혹한 왕이다. 하지만 신문고를 설치하고, 호패법을 실시하였고, 전국을 8도로 나누는 행정구역 제도를 개편하는 등 제도적으로 나라의 기틀을 다지고 안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노련한 정치가인 태종이

21세기 대한민국 초선 국회의원에 빙의된다면? "









이 기상천외한 설정은 오늘날 정치에 대한 바람을 담은 이도형 작가의 상상력에서 비롯되었다. 역사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3년의 기자 생활 중 8년을 정치부에 있었다. 역사와 정치 그리고 경제를 두루 아는 그의 손을 거쳐 탄탄하고 설득력 있고 공감 가는 작품 <국회의원 이방원>이 탄생하였다.






정치학과 교수 이동진은 국회의원이 되어 호기롭게 세상을 바꾸고자 정치적 이상을 펼쳤으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바른 소리는 흐름을 읽지 못하는 모난 소리가 되어 점점 더 그의 입지를 좁게 만들었다. 그러던 중 종묘에서 태종의 위패와 부딪친 후 기이한 일이 벌어진다. 몸은 이동진이나 알맹이는 600년 전 왕 태종 이방원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방원의 말대로 괴력난신이 아닌가. 그 후 이동진 측 보좌관들 대 국회와 기자들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같은 밀당이 진행된다. 




600년이 지난 현세의 문물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던 태종 이방원은 차츰 이 세상에 적응해나간다. 자신의 아이 충녕, 세종대왕의 업적을 살피며 흐뭇해하는 모습이 한 나라의 왕 이전에 자식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그를 보여주었다. 그리고 국회의원 이동진으로 국회에서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에서 '정세와 사람을 읽는'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었다. 


태종 이방원뿐 아니라 갑자기 왕을 모시게 된 보좌관 장선호, 류다혜, 김수찬 이 세 명의 캐릭터 또한 제각각 개성 넘치게 그려내고 있다. 모시고 있는 영감보다 여의도에서 오래 생활한 선호, 교수님을 믿고 따라 국회까지 함께 입성한 다혜 그리고 수찬 모두 세상을 더 좋아지게 만드는 정치를 지향한다.






"지금 우리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불통하는 것입니다.

서로 대립하는 것입니다."





태종 이방원과 함께 이동진 의원의 정치적 입지를 다져가는 여정을 흥미롭게 풀어냈다. 어안이 벙벙한 첫 만남부터 혼란스럽지만 절묘하게 들어맞는 이방원의 전략에 혀를 내두르며 감복하며 오늘날 민주주의와 정치 제도와 시민 사회 전반에 걸친 정보를 제공하며 협력하고 방향을 제시하기까지 서로의 간극을 좁혀가면서 각자 나아가고자 하는 '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힘쓰는 그들은 진정한 정치인이었다.






<국회의원 이방원>은 차기 대권주자를 놓고 치열한 힘겨루기와 머리싸움을 벌이는,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 속으로 빨려 들어갈 수밖에 없게 만드는 탄탄한 구성과 현실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정치부 기자 경험을 녹여낸 현장감 넘치는 생생한 정치세계의 묘사와 상황에 맞게 소환되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들이 극의 완성도와 재미를 높이고 있다.








태종 이방원이 사람들을 만나 그들 내면의 욕망과 야심을 읽어내거나 상황 설명을 듣고 정확하게 흐름을 잡아낼 때마다 그 통찰력에 한번 놀라고, 역사적 인물에서 적절한 수를 찾아내는 그 탁월함에 두 번 놀랐다. 삼봉 정도전, 포은 정몽주, 충녕 세종대왕에 관한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결코 물러서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옹골찬 인생을 그대로 증명하였다. 








하지만 지금은 왕의 정치가 아닌 국회의 정치가 필요한 시대다. 18년 동안 호랑이 등을 탔던 태종이 다시 현세에 나타나 호랑이 등에 올라타야만 했던 1여 년의 시간을 함께 한 이들은 그에게 '사람에 대한 믿음'을 근간으로 한 정치를 말한다. 






"결국 정치는 원칙과 현실을 조화시켜야 하네.

원칙이라는 좁디좁고 위험한 나무다리를

현실이라는 번듯한 돌다리로 만드는 것."





읽는 내내 재미있고 가슴이 뭉클하고 설렜다. 나라와 국민을 위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애쓰는 정치를 향한 갈망이 커졌다. 그리고 주권자로서 마땅한 책임을 다하고 있는가? 자문하게 되었다. 4?10 총선을 앞둔 시점에 이루어진 <국회의원 이방원>과의 만남,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왔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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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블루칼라 여자 -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박정연 지음, 황지현 사진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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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힘 좀 쓰는 언니들의 남초 직군 생존기 -




"일은 저를 당당하게 살아가게 해주는 힘입니다.

자부심이 있어요."






<나, 블루칼라 여자>에서는 남성이 대다수인 직군에서 일하고 있는 여성 노동자 10인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담고 있다.


생산 현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를 의미하는 '블루칼라'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이 화이트칼라, 그레이칼라 등 다른 여타 노동자들보다 부정적이다. 육체노동자라는 이유가 크게 작용한다. 흔히 '노가다'라는 말로 블루칼라 노동을 폄하한다. 특히 오늘날 우리 사회는 고학력 전문직을 선호하여 특정 직업과 기업에 취업인구가 집중되고 있다. 자연히 과열 경쟁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한정된 일자리에서 밀려난 이들은 패배감, 상실감 등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나, 블루칼라 여자> 속 노동자 10인은 달랐다. 자신의 일에 대한 자부심이 넘쳤다. 일을 하고 있는 지금을 즐기고, 안전하고 보람찬 일터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자신만이 아닌 다음 세대를 위해, 동료를 위해 평등하고 자랑스러운 일터를 일구는 그들의 연대가 가슴을 뛰게 하였다. 이렇게 멋진 여자들의 행보에 세상은 더디지만 조금씩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다.



인터뷰어 박정연 작가의 질문은 대동소이하다. 그만큼 여성노동자들에게 묻고 싶은 질문이 명확하다는 뜻일 거다. 

Q. 같은 직군에 여성 노동자 수는 얼마나 되나요?

Q. 일터에서 만난 편견과 차별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Q. 일터에서 마주쳤던 차별이나 불평등에 어떻게 대처했나요?

Q. 일하면서 자부심을 느끼는 순간은 언제인가요?

Q. 일터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나 꿈이 있나요?

Q.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 하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남초직군에서 인정받으며 자부심을 가지고 당당히 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도 '처음'은 있었다. 


여성 노동자가 '0'명이라서 시작했다는 당찬 주택 수리 기사 안형선 씨, 친구 소개로 배경지식 없이 현장에 바로 뛰어든 먹반장 김혜숙 씨, 13년째 용접사로 일하는 김신혜 씨, 호주 유학시절 건축의 길을 꿈꿔 답을 찾고자 다시 한국에 돌아와 집을 짓는 6년 차 빌더 목수 이아진 씨를 비롯한 모두가 같이 일하는 동등한 동료가 아닌, '여성'으로만 보는 게 힘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남성 중심 문화와 낮은 성인지 감수성에서 야기되는 성희롱, 성차별에 대한 어려움을 토로했다.


하지만 타인의 시선에 갇혀 포기하지 않고, 더 열심히 스스로를 증명해 보이며 기어이 동료로 인정받았다. 이런 인고의 세월을 거쳤기에 노동자들의 연대와 현장의 목소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당부한다. 자신만의 기술이 자원인 현장에서 다른 여성 노동자들이 욕 얻어먹지 않게, 살아남을 수 있게, 자신이 당한 설움을 똑같이 당하지 않게 알려준다는 말씀에 마음이 따뜻해졌다. 








점차 현장의 분위기, 제도, 환경들이 개선되어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은 미흡한 점이 많다.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여성 노동자들의 연대와 현장의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사실을 말하면서 철도차량 정비원 하현아 씨는 이런 먹먹한 한 마디를 남겼다. 



"그냥 여성들이 곳곳에서 계속 일을 하면서

생존했으면 좋겠습니다."

- 철도차량 정비원 하현아




정규직이고, 공기업의 직원이고, 노조도 있는 그와는 달리 비정규직에 젊은 여성이 부당한 상황이나 차별 앞에서 쉽사리 목소리를 내는 게 가능한 일인지 상기시키며 말이다.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를 수도 있었지만, 계속 도전하고 일하게 만드는 동기와 원동력은 비슷했다. 일이 재밌고, 경제적 여유로 당당해지고 자유로웠다고 한다. 블루칼라 여성으로서의 자부심이 강하게 전해졌다. 단단한 내공으로 무장한 그들은 자신의 일터를 소중히 여겼다. 


그들에게 현장은 안전하고 즐겁게 일하는 일터, 보람을 느끼는 일터, 막노동이 아니라 진귀하고 멋있는 일을 하는 일터였다. 위축되지 말고 배우라고, 여자라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라고, 자부심을 가지고 일하라고, 당당하게, 즐겁게 일하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더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2030세대들이 도전하기를 바라고 기대하고 있었다. 




<나, 블루칼라 여자> 속 주인공들의 직업은 생소했다. 들어본 듯한 일도 있지만 정확한 업무는 알지 못해서 이번에 많은 현장 지식이 쌓였다. 건설, 철도, 물류, 건축 등 넓은 범주를 대표하는 직업만 알았다. 세분화된 업무에 따라 파생되는 직업들은 몰랐다. 먹매김 노동자, 형틀 목수, 건설 현장 자재 정리·세대 청소 노동자, 빌더 목수 등 다양한 현장들을 접할 수 있었다.



인터뷰이 중 라이커스 대표이자 5년째 주택 수리 기사로 일하고 있는 안형선 씨와 6년 차 빌더 목수 이아진 씨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젊은 여성이라는 점과 일을 시작하게 된 계기 그리고 지향하는 바가 인상적이었다. 


안형선 씨는 '여성을 위한 일을 하고 싶다'라는 미션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첫 번째 사업으로 물류 업계의 유리천장을 깨고자 여성들로 구성된 물류팀을 만들어 물류창고를 운영했다. 그리고 두 번째 사업으로 '여성을 위해, 여성이 만든 여성 주택 수리 서비스'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1인 여성 가구가 맘 편히 집 수리를 받을 수 있는 여성 기술자로 구성된 주택 수리 사업 '라이커스(Like us)'를 론칭했다. 자신의 경험과 사회적 이슈가 된 1인 여성 가구를 대상으로 한 범죄에서 착안한 이 사업들은 사회를 바꾸고자 하는 마음이 담겼다. 여성 주택 수리 기사가 전무후무한 상황에서 그는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지고 5년째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여자도 할 수 있어? 여자라서 못 하는 거 아니야?' 같은 의심에 '여자도 할 수 있다. 경험이 부족해서 못 하는 거다.'라는 반박을 하며 대중적으로 인지하는 서비스 회사를 만들기 위해 오늘도 고군분투 중이다. 


이아진 씨는 호주 유학 시절 건축을 하고 싶어 건축학과로 대학 진학 1년 앞둔 시기에 고등학교를 자퇴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어떤 건축'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고민 중이던 그는 가족을 따라 방문한 건설 현장에서 목조 주택의 매력에 빠져서 빌더 목수가 되었다. 

열여덟 살 아진 씨는 목수를 바라보는 호주와 한국의 인식 차이에 힘들었다고 한다. 호주에서는 목수들 스스로의 프라이드가 높은데 비해 한국에서는 '노가다'라는 편견이 강했다. 그래서 SNS를 통해 스스로 돌파하고자 하였다. 작업복을 제대로 갖춰 입고 빌더 목수로의 정체성과 자긍심을 드러내어 일에 대한 사랑을 전달하고 있다고 한다. 그의 행보를 보고 도전하는 이들을 보면서 자신감이 생기고 안도감도 든다고 밝혔다. 사랑하는 일을 하면서 배우고 주위와 함께 성장하려는 그의 내일이 무척이나 기대된다. 








남초직군에서 살아남기 위해 힘들어도 힘들다 하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도전하는 여성 노동자 10인.

그들의 생생한 현장 목소리를 담은 박정연 작가와 그들의 멋진 현장 모습을 담은 황지현 작가 덕분에 좋아하는 일을 하는데 자부심을 가지고 물러섬이 없이 오히려 한발 더 앞서 나간 이들이 흘린 눈부신 땀방울을 볼 수 있었다. 그들이 다져놓은 길을 따르는 다음 주자들은 더 편하게, 더 넓게, 더 높게, 더 힘차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한겨레 하니포터8기 자격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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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구역
김준녕 지음 / 다산책방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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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구역/김준녕 장편소설/ 다산책방




"인간은 무엇일까?

인간은 왜 사는가?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철학자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질문을 마주하게 되는 순간들이 있다. 현실 앞에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되물어야 하는 순간에 하는 선택들이 그 답이 될 것이다. 



<빛의 구역>은 김준녕 작가가 질문에 대한, 그가 찾은 해답을 그린 소설이다. SF 소설 형식과 잘 짜인 구성이 흡입력 있게 주제를 이끌고 나간다. 


기후 위기로 거론되는 인류 멸망, 지구 멸망을 바탕으로 이야기 골격이 형성되었다. 파괴된 지구에서 오직 '인류의 생존'만을 목표로 철저히 통제되는 시스템 속에서 벌어지는 인간 군상들의 '혁명'을 그리고 있다. 


'생존'과 '자유'를 두고 갈등하는 인간들의 모습이 절실하게 그려져 두 집단의 입장 차를 충분히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죽음'을 불사르는 의지로 '자유'를 바라는 혁명파도, '죽음' 앞에 움츠려드는 '두려움'과 좌절 앞에 '자유의지'가 꺾여 동료를 폭력으로 막아설 수밖에 없는 반혁명파도 바라는 '희망'은 결국 하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은 지구 내 붉은 구역의 '이아'와 '피아'를 중심으로 통제된 시스템을 벗어나려는 움직임을 좇는다. 그들은 혁명 수장 바로 옆에서 혁명을 준비하며 점점 더 갈망하게 된다. 하지만 4-1세대가 주도했던 혁명도, 4-3 세대가 주도했던 혁명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고 만다. 혁명의 주역이었던 '이아'가 정부에 의해 '마름'이 되고, 4-4 세대인 '피아'에게 다른 구역으로 혁명의 불씨를 널리 퍼뜨려주기를 부탁하기까지 얼마나 비참하고 처절한 시간이 지나갔는지 우리만, 하늘만 안다.






이야기는 이제 피아의 험난한 여정을 따라 세계관을 풀어낸다. 정화를 담당하는 붉은 구역에서 들은 한정적인 정보로 세계를 인식하고 있던 피아는 새로운 구역을 경험하면서 많은 것을 깨우치게 된다. 남자만 있어 몰랐던 여자의 존재, 아기의 탄생 비화, 아카데미의 역할, 새로운 생명체 등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지독하고 악랄한 통제 시스템의 민낯을 마주하면서 피아와 인간들은 분노하고, 그 안에서 변화하려는 움직임 바로 '혁명'의 씨앗이 움트게 되었다.


마침내 피아가 죽음에 다다르려는 순간, 이야기는 모든 의문을 공개한다. 이야기 시작부터 인간이 극한의 두려움을 느꼈던 정부 그리고 인공위성의 비밀이 한 겹 한 겹 벗겨진다.





예상했던 바와 그를 뛰어넘는 반전은 김준녕 작가의 깊은 고뇌의 산물이었을 테다. 그가 밝힌 대로 이 소설은 그만의 해답이다. 그는 오늘날 우리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결과(지구의 파괴, 인류 멸종)를 감당해야 하는 죄 없는 후대의 고통을 생생하게, 처절하게 그려냈다.


읽는 내내 욕을 먹는 당사자로서 그들이 할당량을 채우기 위해 숨을 허덕일 때, 허벅지에 흑요석을 숨겨서 생긴 상처와 피를 볼 때, 서로 반목하여 폭력으로 해결하려 할 때, 서로를 먹이로 바라볼 때 숨이 턱턱 막혔다. "도대체 우리는 무슨 죄를 지은 겁니까?" 이 가여운 영혼들에게 차라리 "죽는 게 좋았을 텐데." 한탄스러운 말을 하는 마름조차 우리보다 더 인간적이었다.





그가 그린 극한의 인류의 미래가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이아와 피아, 하나 그리고 자유를 갈망하는 수많은 인간들의 함성은 결국 하늘에 닿지 않았던가. 뛰어난 양자컴퓨터의 계산을 거쳐 나온 예상일지라도 틀릴

수 있다, 예측불가한 '기적'이 존재하기에. '이성과 수치'를 넘어 '사랑과 유대'로 삶을 일구어나가고자 하는 그들의 투쟁에 힘찬 응원을 보낸다. 






한편의 영화처럼 다가오는 <빛의 구역>

인간에 관한 근원적인 질문을 SF 소설을 빌어 풍성하게 그려낸 작품으로, 날카로우면서도 감각적인, 인간 중심적 시선으로 파괴적이면서도 온기를 품고 있는, 다층적 매력이 돋보인다. 


마지막으로 등장인물의 이름 하나하나에 의미를 담아 신중하게 지었을 작가를 떠올리며 이름을 나직이 읊조려본다.

"이아, 피아, 상, 희, 관, 하나, 례, 해, 건, 곤, 감, 리……"






"우리가 사는 이 모든 것은

모두 우리가 만들어낸 거야.

그러니 우리 삶은 우리가 결정해야 해.

비록 그 끝이 멸망일지라도."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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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지음, 백선희 옮김 / 책세상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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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프레데리크 그로/ 책세상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

내가 생각하는 수치심이 맞나? 싶은 제목은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표지에 그려진 에곤 쉴레의 그림에도 마음이 끌렸다. 뒷모습은 앞모습을 상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렇게 '수치심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저자인 프레데리크 그로는 프랑스의 철학자로 '수치심'에 대해 왜 쓰고자 했는지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수치심'이 가지는 위치는 엄청났고 복잡했고 폭넓었다. 역사적 사실과 저서로 뒷받침되어 서술되는 '수치심의 세계'는 실로 놀라웠다. 

'세상에 대한 수치심'이 고결한 분노로 발현될 때 우리는 불복종할 힘을 가지게 된다는 그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순수한 분노로 정화된 수치심은 한계를 느끼는 감정이기에 언제나 변화를 향한 부름인 것이다.



저자는 수치심을 다양한 경로로 탐색한다. 그의 고찰이 들려주는 수치심에 관한 이야기는 흥미롭다.

수치심을 느끼게 되는 원인(사회적 가난, 정신적 치욕, 육체적 불결), 수치심에서 비롯된 태도(멸시, 분노, 혐오), 수치심을 받아들이기 힘겨운 이유를 비롯하여 야기하는 상황으로 수치심을 분류하여 논하고 있다. 좀 더 수치심을 면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으며, 다양한 근거와 예시들로 이해를 돕기 때문에 복잡한 수치심의 면면을 탐구할 수 있다. 



살아가면서 당연히 '수치심'을 느끼는 순간들이 있지만, 이토록 찬찬히 들여다볼만한 생각과 재능이 없는 나였기에 저자 프레데리크 그로가 보여준 '수치심' 도식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무리 생활을 하는 우리 인간은 '타인'에게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의식하고 소속감을 느끼고자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렇기 때문에 '수치심'은 큰 두려움이자 공포가 되는 것이리라. 


"헝가리 정신분석학자 임레 헤르만은 매달리는 원초적 본능을 '애착 욕구'의 구체적 지시대상 같은 것으로 가정하고, 단단히 매달릴 의욕을 꺾어놓는, 털의 결핍이 우리 종에 모든 불행(불안, 죄의식, 수치)의 모태가 되는 음험하고 지속적인 불안을 초래했다고 상상했다. 수치심의 번민은 버림받았다는 감정, 무리로부터 허공에 버려졌다는 슬픔, 모든 것에서 떨어져 나오고, 끈이 끊기고, 닻이 풀렸다는 감정에서 온다. - 우울 95~96쪽




'수치심'을 다룬 학자들 중 공자와 플라톤이 있다. 

그들은 수치심을 관망의 태도, 더불어 살기, 행복 추구를 위한 중요한 윤리적 자질로 받아들였다. 공자는 움츠림, 조심성, 신중함… 이것을 수치심으로 받아들였다. 수치심은 각각의 윤리적 힘을 제 고유의 본질 속에 지켜주며, 실제로 공정하고 공손하고 진지해지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플라톤은 "선한 인간을 인도하는 원칙은 추한 행동과 연계된 수치심, 그리고 아름다운 행동과 연계된 명예 추구다."라 말했다. 그는 수치심에 많은 힘을 부여한다. 그것이 함께 살아가기를 가능하게 만들고, 지혜를 요약하고, 용기를 준다고 말한다. 수치심은 구체적 위험 앞에서 우리를 사로잡는 그런 두려움이 아니라 우리의 공적 이미지를 변질시킬 수 있을 무엇 앞에서 느끼는 두려움이란다.







저자는 윤리적 수치심, 외상성 수치심, 철학적 수치심, 교차적 수치심, 계통적 수치심, 혁명적 수치심 등을 다루고 있다. 성폭행, 강간, 사회적 가난, 흑인, 아우슈비츠 수용소 등이 수치심을 유발하는 배경이 된다. 구분되어 명명되는 수치심에 관한 사유를 읽다 보면 어느새 수치심의 본질에 대해 조금씩 가까워진 느낌이다.



"분노란 우리를 향한 또는 우리 가족을 향한 공개적 멸시, 부당한 멸시를 마주하고 공개적 복수를 바라는 비통한 욕구다." - 아리스토텔레스 







수치심을 느끼지 위해서는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타인의 자리에 서 보게 하거나 가능한 다른 세상들을 고려해 보게 하는 움직임이 바로 상상력인 것이다. 이런 상상력을 좌절시키려는 시도들 앞에서 서 있는 우리는 '타인들이 저지른 잘못 앞에서 올바른 자가 느끼는 수치심'을 느낄 수 있어야 하며, 수치심을 분노로 바꿀 수 있어야 한다. 



"무구함의 반대는 죄의식이 아니라 '통찰력'이다.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통찰력이 있어 불의가, 불공정이 어떻게 법과 사법기관과 교회의 지지를 받는지 본다." - 계통적 수치심, 226쪽



프레데리크 그로는 우리에게 '수치심'의 본질적인 힘을 일깨워준다. 그 여정을 함께 하면서 만난 작품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다. 예전에는 감흥 하지 못한 채 덮어버렸던 작품들을 이제는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다. 

'수치심'을 단순히 부끄러움으로 아는 이들에게 더 넓고 복잡한 '수치심'을 보여준, 놀라운 <수치심은 혁명적 감정이다>를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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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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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소설집/ 한겨레출판



서수진 작가의 첫 소설집이다.

200페이지 분량의 두께에 8편의 단편이 담겨 있다.

강렬한 빛을 토해내는 태양이 자리한 하늘 그리고 그 빛을 고스란히 비추는 바다 그 사이에 나무를 둔 언덕에 앉은 두 사람의 뒷모습. 서수진 작가의 [골드러시] 표지이다. 해는 지기 전 찬란하게 빛나고 수평선 너머로 사라진다. 그 순간을 지켜보는 두 사람은 어떤 마음일까? 깜깜한 뒷모습으로는 가늠할 수 없다. 그래서 [골드러시]의 책장을 넘겨 두 사람의 마음을 좇기로 하였다. 



[올리앤더] 이후 두 번째 조우다. 이번 역시 호주를 배경으로 한국인이 주인공인 소설이 대부분이다. 한국'을 떠나 '호주'라는 생경한 나라를 자신의 터전으로 선택한 이들이 살아남기 위해 부단히 애쓰는 모습에서 소중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듯한 허무함이 읽혔다.


길 끝에 물웅덩이가 있었다. 신기루였다.

눈을 감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 골드러시, 58쪽





서수진 작가의 글을 읽을 때마다 술술 책장이 넘어갔다. 글이 머금고 있는 감정은 결코 가볍거나 밝지 않지만 신기하게도 직진으로 달려와 내 것이 되어 호흡하듯 당연하게 책장을 넘겼다. 감정의 결이 비슷한가? 생각하기도 했다. 


서수진 작가는 미묘하고 작은 어긋남을 특유의 문장으로 섬세하게 그려낸다. 마치 배우가 말보다 눈가 떨림이나 살짝 흘리는 시선 처리로 더 깊은 감정과 내용을 전달하는 것처럼 등장인물들의 호흡과 장면을 구성하고 있다. 



봉지를 열었다. 작고 까만 조약돌 세 개. 

그게 다였다. 그는 조약돌을 쥐고 눈을 감았다.

- 캠벨타운 임대주택, 53쪽



그녀는 자신이 광산을 뒤흔든 것처럼,

그래서 광산이 완전히 무너져내린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을 했다.

- 골드러시, 79쪽







호주에서 이주해 제2의 삶을 꿈꾸는 등장인물들은 익숙한 모든 것 대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자 노력한다. 생각과는 달리 녹록지 않은 현실에 지쳐간다. 한마음이 갈라져 틈이 생기고 외로워 힘겨워들 한다. 풍선처럼 부풀었던 희망이 하늘로 날아오르지 못한 채 찌그러진 풍선 속에서 사그라들고 그만큼 등장인물들도 생기를 잃어간다. <골드러시>의 진우와 서인처럼, <졸업 여행>의 승수처럼. 



호주 안의 한국을 소중히 여기고 지키는 세대의 이야기와 선택하지 않은 하지만 떼어낼 수 없는 딱지처럼 여기는 후대의 이야기도 펼쳐진다. 


이민 와서 자리를 잡기까지 지난한 시절을 보냈을 부모 세대들이 나온다. 

다니엘의 아버지는 청소업체 대표로, 임대주택을 청소하러 갔다 마찰이 생긴 여성을 고소하려 한다. 불쌍하다고 생각했던 한국인을 호주 내 한국인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임대주택 이민자로 만들기 위함이다.(캠벨타운 임대주택)

중국인 고객 덕분에 부동산 에이전트로 자리 잡은 혜선은 중국어를 배우고 중국 명절을 챙기는 등 중국인에 대해 호의적이다. 하지만 딸이 중국계 남자친구를 사귀고 홍콩 지지 반중 시위가 벌어지는 요즘 혼란스럽다.(헬로 차이나)

식당을 비울 수 없어 일정을 함께 할 수는 없지만, 딸의 모습이 마냥 대견하고 자랑스러운 클로이의 아버지는 한인회 임원이다. 그는 일식당을 운영하는데 일본인이 운영하는 진짜 일식당으로 비치기를 원해 한국어 사용을 금한다.(한국인의 밤)



한국인 부모 밑에서 태어났지만 호주에서 자란 후대의 모습들도 비추고 있다.




당신 같은 사람들 때문에!

한국인끼리 불쌍하다고?

- 캠벨타운 임대주택, 49쪽




한국어보다는 영어가 더 친숙한 세대로, 한국에 대한 그리움이 없거나 진하지 않다. 그들에게는 '한국'보다는 지금 여기서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서수진 작가의 독특한 미장센은 흡입력이 강하다. 그거다 싶은 갈등이나 원인이 힘을 잃고 상상치 못한 경우의 수가 펼쳐진다. 


<입국심사>의 유미는 입국하기 위해 미국인 남자친구와 진실한 연인의 모습을 강조하지만 분위기는 냉랭하다. 그리고 결혼을 하지 않겠다고 남자친구가 말하자 입국이 허가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펼쳐진다. 유미는 자신보다 먼저 심사를 시작하여 진짜 부부라 수차례 설명하고 있는 아랍인 부부를 뒤로 한 채 나오게 된다. 

거부당한 자로서 미국 땅을 밟은 유미는 미래 자체를 차단당한 채 현재의 진지한 사랑을 만나러 갈까? 당혹스러우면서도 쓰린 글이었다.



<외출 금지>의 은영과 희율이 이별을 하고 헤어지려는 순간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외출 금지령이 내려졌다. 이별 초기를 떠올려보면 얼마나 버거울지 상상하기조차 싫다. 지리멸렬한 상태로 감정의 찌꺼기들이 가라앉을 때까지 되씹어야 할 시기에 사랑이 기록된 공간에 함께 갇힌 전 연인들이라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우리 산책 나가자. 산책은 괜찮잖아.

그들은 손을 잡고 끝이 보이지 않는 통로를 걸었다.

- 외출금지






<배영>은 소설집에서 <입국심사>와 함께 배경이 호주가 아닌 작품이다. 오랜 세월 동거를 한 연인인 여진과 우현은 첫 캠핑을 떠난다. 


물 위에 누웠다. 달이 저 높이에서 하얗게 빛났다.

……

달이 사라졌다. 물속으로 천천히 가라앉았다.

차고 외로웠다.

이 기분을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 배영, 225쪽




서로 이해하지 못한 채, 사랑하지 않은 채 이어나가야 하는 관계만큼 시리고 외로운 건 없을 거다. 차라리 혼자라면 당연히 따라오는 그림자라고 감당하겠지만, 함께인데 외로우면 그 덩어리는 부풀기 마련이니까. 


서수진 작가가 모아 소중히 한 권에 담은 이들의 마음을 헤아려주는, 보듬아주는 우리들의 눈길에, 손길에 빛나는 순간을 다시 꿈꿀 수 있는 이들을 눈을 감고 떠올려본다. 


한겨레 하니포터8기 자격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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