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송필환 옮김 / 해냄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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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을 알지 못할 어느 도시의 공동 묘지에는 자살한 사람들의 무덤을 따로 모아둔 구역이 있다. 거대한 초원이 펼쳐진 것처럼 보이는 그곳은 무덤은 물론이고 비석조차도 눈에 잘 띄지 않는다. 마치 자연 초지처럼 보여 그곳이 공동묘지라는 것을 쉽게 알아볼 수 없을 정도이다. 설상가상으로 매장한지 얼마되지 않은 무덤엔 제대로 된 비석 대신 번호판을 꽂아두어 그 황량함이 더했다. 살아있는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이른 새벽, 양치기 노인은 양들에게 풀을 먹이러 이 구역을 찾곤 하는데, 그는 마치 장난처럼 무덤들의 번호판을 마구 뒤섞어 놓는다. 그런 행동은 죽은자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항변하는 주인공에게 노인은 궤변 아닌 궤변을 늘어놓는다. "내가 생각하기엔, 물론 그렇게 믿고 있기도 하지만, 자살한 사람들이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을 게 틀림없소, 선생이 말했던 내 악의에 찬 장난으로 인해서 그들은 더 이상 성가신 일을 치르지 않아도 된단 말일세."(253쪽) 라고.

 

자살하는 사람들에게는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목숨을 걸어서라도 밝히고 싶은 억울함이든, 죽을만큼의 원망이든, 또는 죽음으로써만 씻게 되는 죄책감이든 반드시 그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서 한장 남기지 않은 죽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이유를 알 수 없는 죽음에 대한 한탄은 남은자의 애도를 위한 무덤이 그렇듯 살아있는 사람들의 위안이며 호기심이고 이기일 뿐이다. 차라리 죽음을 택할 정도의 고통이었다면 그것에 대한 항변이나 핑계조차도 필요하지 않을 터, 그런 의미에서 노인의 궤변은 진리처럼 여겨진다. 자살한 사람들은 누구와도 만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그말은 남은 사람들이 흘리는 눈물이 누구를 애도하던 모두 같지않겠냐는 의미가 아닌가.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그 자리에 잠든 게 아니라오, 나는 천의 바람이 되어 찬란히 빛나는 눈빛 되어, 곡식 영그는 햇빛 되어, 하늘한 가을비 되어, 그대 아침 고요히 깨나면 새가 되어 날아올라, 밤이 되면 저 하늘 별빛 되어 부드럽게 빛난다오, 그곳에서 울지 마오, 나 거기 없소, 나 그곳에 잠들지 않았다오, 그곳에서 슬퍼 마오, 나 거기 없소, 이 세상을 떠난게 아니라오... 

김효근 역시, 양준모 노래 '내 영혼 바람되어'

주인공은 태어난 자와 죽은 자의 기록을 보관하는 중앙등기소에 말단 보조서기다. 그는 우연히 손에 들어온 '모르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다. 마치 그 여자를 찾는 것이 자신의 삶에 어떤 큰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그녀가 어린 시절 다녔던 학교를 뒤지고, 그녀가 살던 집 주위를 배회하는 모습은 지극히 변태적인 행위로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다는 것을 알고, 여전히 모르는 여자인 그녀의 물건을 쓰다듬으며 '세상은 의미가 없다' 라고 말하는 순간의 남자는 그 누구보다 인간적이다. 알건 모르건, 유명하건 유명하지 않건, 이름이 있건 없건, 누군가 기억하건 말건, 죽음은 너무도 공평하다. 그러니 '모르는 사람을 위해 눈물을 흘린다고 해서 억울할 건 없다' 라고 한 양치기 노인의 말 역시도 진리다. 어쨌든 모두가 가는 마지막엔 죽음이 있으니까.

 

'모르는 여자'의 흔적을 쫓는 남자의 삶은 고독했다. 나이가 오십이 되었지만 등기소에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말단의 보조서기이고, 마치 무덤과 같은 집에는 아파도 이마에 손을 짚어주거나 스프를 끓여줄 사람 하나 없다. 힘든 일을 상의할 친구나 지인도 없다. 남자의 유일한 취미는 유명인들의 신상 명세서나 신문 기사를 모으는 것이다. 서류나 신문지 상의 그들은 살아있지만 말을 나누고 체온을 나눌 실제의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거기 종이에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삶과 죽음의 경계가 필요치 않은 지점의 사람들이다. 그런 그가 모르는 여자를 쫓는 일에 대한 집착을 떨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렇지만 고독한 사람은 그뿐이 아니다. 그가 쫓는 '모르는 여자'의 경우 부모도 직장 동료들도 그녀가 자살한 이유를 모를 만큼 고독한 생을 살았다. '모르는 여자'의 대모인 일층에 사는 노부인이 어느날 구급차에 실려 갔지만 이웃들은 그후로 그녀의 소식을 모를뿐더러 그녀의 병세를 묻는 남자를 문전박대 할 정도로 그녀에게 관심이 없다. 모두 고독하기 때문이다. 자살한 여자도, 구급차에 실려간 노부인도, 딸이 자살한 이유를 모르는 부모들도, 구급차에 실려간 사람에 대해 관심이 없는 이웃들도 모두 각자가 살아남기에도 벅찬 인생들인 거다. 보통 이럴때는 각개 전투해야하는 현대인들은 고독하다고 표현하지만, 정말 과거의 사람들은 고독하지 않았을까? 옆집의 숟가락 갯수까지 알았다던 그 시절의 사람들은 정말 외롭지 않았을까?

 

이름없는 자들의 도시란 제목은 그저 <눈먼 자들의 도시>와 <눈뜬 자들의 도시>에 이어 시리즈로 묶기 위해서 지었던 출판사 '해냄'용 제목이었던 듯, 원제는 <All The Names>. 인간이란 존재가 고독을 사명처럼 받들고 살아갈 때, 세상 모든 이름들 만은 고독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름은 실체와 상관없이 언제고 존재하니까.

 

작가 주제 사라마구를 이제서야 알게 되었다니, 하고 억울해 하다가 이제라도 알게되었구나 하고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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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법 읽고 싶은 책들이 있는 3월의 시작이다. 단지 3월이기 때문인지, 드디어 제정신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인지, 취향에 맞는 책들이 많이 출판된 것인지 딱 꼬집어~ 말 할 수는 없지만~ 눈에 솔솔 책들이 들어온다.

 

 

그랜드 마더스/도리스 레싱 지음/강수정 옮김/예담

술주정뱅이인 아버지와 나약한 어머니 밑에서 자란 '메리'(풀잎은 노래한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정상적이라고 보여지는 기준에 부합하는 헤리엇과 데이비드가 낳은 비정상적인 아들 '벤'(다섯째 아이)의 작가 도리스 레싱의 소설집. '그랜드마더스'를 포함한 중편소설 네 편이 실려있다. 정혜윤은 <그랜드 마더스>는 사랑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아직 읽지 않았지만 이전에 읽었던 <풀잎은 노래한다>와 <다섯째 아이>, 그리고 <그랜드마더스>라는 제목으로 추측해 보건데, 레싱의 말년 작품이라는 이 책 역시 가족 안의 개인, 특히 여자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나름으로 추측한다.

 

 

 

왠만해선 아무렇지 않다/이기호 지음/박선경 그림/마음산책

왠만해선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을 남기는 습관이 있는 나는 이기호의 <차남들의 세계사>와 <독고다이>, <최순덕 성령충만기>를 연달아 읽고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아니, 안한 것이 아니라 못했다. 왜? 많은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을 정리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읽고 생각한 것에 대해 정리는 못했지만, 그러나 작가 이기호에 대한 생각 하나는 굳건히 다지게 되었다. 그의 이야기는 평범함에도 불구하고 새롭다는 것, 아무것도 가르치려하지 않지만 왠만해선 쉽게 잊을수 없다는 것. 좌충우돌 전전긍긍 갈팡질팡.. 이기호 소설에 대한 소설MD 김효선의 정의는 '참'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송경동/창비

나는 한국인이다 아니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나는 송경동이다 아니 나는 송경동이 아니다 나는 피룬이며 파비며 폭이며 세론이며 파르빈 악타르다 수없이 많은 이름이며 수없이 많은 무지이며 아픔이며 고통이며 절망이며 치욕이며 구경이며 기다림이며 월담이며 다시 쓰러짐이며 다시 일어섬이며 국경을 넘어선 폭동이며 연대이며 투쟁이며 항쟁이다 -나는 한국인이 아니다 중.

 

아무것도 안 하면서 마음으로라도 지켜주고 싶은 많은 것 중, 하나이니까.

 

 

 

 

지극히 내성적인/최정화/창비

온전해 보이는 세계 안에 스며 있는 불안의 기미를 내성적인 사람들의 민감한 시선으로 날렵하게 포착... 제목만으로도 충분히 꽉 차오르는<지극히 내성적인> 혹은 <내성적인 지극히>의 출판사 소개글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는다. 이건 내 얘기야. 작고 사소한 일에도 생각 속에서는 수십 번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바로 나의. 작가는 이 소설을 읽고 무뎌진 감각을 세련하고 싶은 것이 작가 자신의 소명이라 했지만, 나는 내 감각을 시멘트 바닥에 비벼서라도 좀 무디게 만들고 싶다. 너무 아프게 나무 세밀하게 느끼지 못하도록.

 

 

 

 

떠오르는 아시아에서 더럽게 부자 되는 법/모신 하미드 지음/안종설 옮김/문학수첩

 

오~ 모신 하미드. 미국이 세계에서 행동하는 방식에 늘 분개하고 있었다는 고백으로 나를 미치도록 공감하게 했던 <주저하는 근본주의자>를 쓴 작가의 작품으로, 우리나라에 출간된 모신 하미드의 소설 중 두번째 작품이다. 자기계발서를  흉내낸 책 제목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던 듯, 자기계발서를 비판하는 글로 각 장을 시작한다. 또 한번 심장이 두근두근. 아직 우리나라에 출간되지 않은 모신 하미드의 출세작 <나방 연기Moth Smoke>도 곧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영화 <동주>에서 동주는... '이런 시대에 태어나 시인이 되겠다고 한 자신이 부끄럽다'고 했다. 그 말.. 잊혀지지 않는다. 어딘가엔 꼭 적어놔야 겠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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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BBP 2016-03-03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이번달에는 꼭 됐음 좋겠는 책이 제법 꽤 많은 거 같다는..

비의딸 2016-03-04 17:49   좋아요 0 | URL
오늘은 정말 따뜻하네요. 점심시간에 벤치에 앉아 한참을 해바라기 했어요.
기네스 님 홈피에서 소설은 읽고나서 얼마간의 숙성기간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보았어요. 정말 그렇죠. 두고두고 느닷없이 떠오르는 게 소설이죠. 그런데 그러기엔 읽고 싶은 책이 정말 많아요. 그것이 행복한 고민만은 아닌 거 같아요. 어쩌면 읽고싶은 것이 많다는 것도 그냥 일반적인 욕심의 하나일 수 있을테니까요.

맥거핀 2016-03-04 1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송경동의 시집을 읽고 싶기는 한데..안되지 않을까 싶네요. 해당분야에 시는 제외한다고 되어 있어서..고르신 책 중에 어느 책이든 저는 다 좋을 것 같아요. 밑에 두 권은 저도 추천한 책이고, 위에 두 권은 마지막까지 고를까, 말까 망설였던 책이라서..^^

비의딸 2016-03-04 17:29   좋아요 0 | URL
`해당분야에 시는 제외한다`라고 되어있다는 맥거핀 님의 말씀에, `설마 그럴리가`라는 대답이 절로.. (정말로 소리내서 그렇게 말했어요, 설마 그럴리가아?)

소설/시/희곡 중 시, 희곡, 우리나라옛글, 잡지를 제외한 전 분야

라고 씌여있는 걸 저는 보지 않았군요. ㅠㅠ
송경동의 시집은 증정도서가 아니라 사서 보는게 맞다라고 고개를 끄덕끄덕..^^



에이바 2016-03-05 1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번달 신간중에 그랜드 마더스랑 피에로들의 집을 가장 기대해요. 레싱의 책은 읽을 것이고, 윤대녕 작가의 책은 이번이 처음인데 선정되지 않더라도 읽을 거예요ㅎㅎ 정말 읽고 싶어요. 그냥 이웃분들의 언급만으로도 호감이 생겨서요. 비의딸님은 그래도 돌아오셨군요 ㅠㅠ 저는 아직도 책이 썩 끌리지 않는데요. 그냥 신간체크하고, 정보 찾아보고 예전에 읽었던 소설을 다시 읽으면서 불을 지펴보려 하는데 잘 안 되네요.

비의딸 2016-03-07 14:33   좋아요 0 | URL
윤대녕 작가의 책은 저도 한 권도 읽어보질 않았어요. 예전의 저는 베스트셀러나 무슨무슨 수상작을 비롯해 많이 읽히는 작가들을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냥 그것도 일종의 반항인거겠죠. 나름 순응하지 않겠다는 객기 같은거..
저두 모든 책이 다 잘 읽히는 건 아니구요, 제가 나가는 책모임에서 <오베라는 남자>를 이번 책으로 정해 읽는데, 이건 또 엄청 힘들게 읽고 있어요. 지난번 <카인> 이후에 사라마구에 빠져 줄창 사라마구만 읽다가 오베를 읽으려니 힘든 것 같아요.
누가 그러던데요. 읽던 사람은 읽을 수 밖에 없다고. 조급해 하지말고 안 읽히는 그때도 즐겨보자구요.. ^^
 
눈뜬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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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을 빼고는 모두가 눈이 멀었던 익명의 도시. 눈이 멀었던 사람들이 다시 눈을 뜨고 4년 후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불리우는 국민 투표가 실시된다. 그러나 투표를 한 시민들 중 팔십 삼 퍼센트는 우 또는 좌 그도 아니라면 중도의 어느 한 정당을 선택하지 않고 백지를 투척한다. 유권자들 중 대다수가 낸 백지투표는 국민으로서의 권리 포기와는 다른 성격의 것으로, 이는 현 정부에 대한 불신 또는 투표의 대상인 정치권에 대한 환멸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이 백지로 투표권을 행사한 것은 단순히 투표라는 절차가 귀찮다거나, 정치에 관심이 없는 일반적인 게으름이나 무관심과는 확연히 다른 행동이었다. 이는 자신들은 현 정부와 정치권을 지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한 방식이었지만, 그것은 국가 전복을 꾀하는 혁명과도 완전히 다른 형태의 것이었다. 시민들은 일방적인 정부의 지침에 따르는 일개의 투표자가 아니라 아니라, 독자적인 자신의 의견을 표현하는 유권자로서 행동하길 원했지만 피를 부르는 방식을 택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백지투표를 하다니,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말이야.'(132)

정부는 유권자들의 백지투표 사태에 대해 반란, 또는 전염병이라는 견해를 피력하며 도시에 게엄을 선포한다. 경찰을 비롯한 모든 정치 기구가 백지투표 사태를 일으킨 도시, 즉 수도에서 철수함으로써 도시의 모든 것이 마비되기를 꾀하고, 도시에 갇힌 사람들이 끝내는 서로를 불신하고 소요를 일으키게끔 은밀한 작적을 펼치기도 한다.

 

이자들은 시위도 제대로 할 줄 모르네, 그들은 말했다. 돌이라도 몇 개 던져야 하는 거 아냐, 대통령 인형이라도 태우고, 창문 좀 몇 개 깨고, 낡은 혁명가도 부르고, 자신들이 방금 묻어버린 사람들처럼 죽은 몸이 아니라는 걸 세상에 보여주어야 하는 거 아냐. 시위는 그들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사람들이 도착해서 광장을 메웠다. 그들은 말없이 삼십 분 동안 눈앞의 대통령궁을 바라보며 서 있더니, 이윽고 해산했다. 어떤 사람들은 걸어가고, 어떤 사람들은 버스를 타고 갔다. 어떤 사람들은 마음씨 좋아 보이는 낯선 사람에게서 차를 얻어타기도 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갔다. (185)

 

무정부 도시에서 혼란을 예상했던 정부의 생각과는 다르게 '눈뜬 자들의 도시' 사람들은 침착을 잃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이익을 생각하며 행동한다. 이들은 눈먼 자들, 즉 눈을 뜨고 있으되 보지않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본 것을 알았고, 안것에 대해 행동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에 당황한 정부는 새로운 음모를 펼치는데, 이른바 백지투표를 주도한 주모자를 색출한다는 것이다. 정부가 지목한 주모자가 실제로 백지투표를 주도했건 안했건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백지투표라는 전국민적 행위를 전염병 쯤으로 돌리고, 15세기에 있었던 마녀사냥과 같은 희생양을 처단하는 과정을 통해 대국민 앞에 정부의 기능을 바로 잡겠다는 것이 권력자들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인할 수 없고, 빠져나갈 수 없고, 반박할 수 없고,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증거의 무게로 눌려버리기를 바라오.(322쪽)​

2002년 주한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숨진 두명의 여중생의 사인 규명과 추모를 위해 처음 열린 촛불집회는 그 후 2008년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문화제로 이어졌다. 이후 촛불 시위는 대한민국의 평화로운 시위문화로 자리잡았다.  또한 집회는 주도세력이 없이 시민들의 자발적으로 참여로 이뤄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정부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라는 것에 의문을 갖고, 주도세력을 색출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니, 눈뜬 자들의 도시가  바로 여기 서울이 아니었을까 하는 착각은 책을 읽는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주제 사라마구가 <눈뜬 자들의 도시>를 쓰기 9년 전에 발표했던 ​<눈먼 자들의 도시>가 눈을 뜨고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 였다면, <눈뜬 자들의 도시>는 본 것을 알고, 아는 것을 행동으로 옮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세상과 사람들에 대해 비관적인 편인 나는 눈뜬자들의 도시 사람들은 절대로 권력을 이길 수 없다고, 결국 언제나 승리는 저들의 몫이였다고 결론지었다 우리가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앞에서 결코 물러나지 않는 사람들은 언제나 있었고, 그리고 우리의 신념은 시간과 함께 무뎌지기 쉬우니까. 

우리가 사는 이 세계에서, 맹목적으로 비틀거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 시대에, 나이가 들면서 젊었을 때 꿈꾸던 것과는 달리 돈도 많이 벌며 편안하게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를 만나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그들도 열 여덟 살 때는 단지 유행의 빛나는 횃불이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신의 부모가 지탱하는 체제를 타도하고 그것을 끝내 우애에 기초한 낙원으로 바꾸어놓겠다고 결심한 대담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선택할 수 있는 수많은 온건한 보수주의 가운데 어느 것 하나로 몸을 덥히고 근육을 풀었다. 따라서 그들이 과거 혁명에 애착을 갖던 것처럼 지금 애착을 갖고 있는 그 신념과 관행들은 시간이 흐르면 가장 외설적이고 반동적인 종류의 순수한 자기중심주의로 변해갈 것이다. ​(143쪽)

주제 사라마구 역시 사람과 세상에 대해 낙관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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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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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도시에 갑자기 눈이 머는 전염병이 번진다. 전염성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하고 빠르다. 그러나 눈이 머는 원인은 알 수 없고, 처음으로 눈이 먼 사람이 어떤 경로로 눈이 멀게 된 것이지도 알 수 없다. 최초로 눈이 먼 사람과 한 공간에 있었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앞을 볼 수 없게 되고, 이것이 전염병 임을 인지한 정부는 눈이 먼 사람들과 함께 그들과 접촉한 보균자들을 격리시키기에 이른다. 강한 전염성으로 인해 수용소에는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도와줄 어떤 인력도 없으며, 수용시설인 폐건물은 눈이 멀지 않고서야 도저히 살아 갈 수 없을 정도로 열악하다. 다치거나 병이 들어도 약을 구할 수 없으며, 물도 제대로 나오지 않아 씻을 수도, 용변을 처리할 수도 없다. 하루 세번 정문에 두고가는 식사 또한 밖의 상황에 따라 점차로 불규칙해졌고, 그나마도 수용되는 인원이 많아짐으로써 공평하게 분배되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앞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끼리 수용된 그곳에서는 인간다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게 된 것다. '한밤중에 예절을 지키는 것이, 누군가 돼지들이라고 말한 사람들처럼 행동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던지.'(137쪽)

이러한 상태를 두 눈으로 보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는 소설의 마지막까지도 눈이 멀지 않은 유일한 사람으로, 이후 도시 전체가 눈이 보이지 않게되는 상황에서 그녀는 차마 눈으로 볼 수 없는 비참한 광경들을 목격하며 차라리 자신의 눈도 멀어버렸으면 하고 바라지만, 비관하지 않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과 때로는 할 수 없는 일도 감내하며 눈 먼 사람들과 함께 살기위해 발버둥친다.

 

도시 전체가 눈이 머는 대재앙은 인간의 악행을 더이상 참지못해 물의 심판으로 새로운 인류를 만들고자 했던 노아의 방주 시대에 있었던 창조주의 대심판 같기도 하고, 세계질서를 새로이 확립하고 싶어하는 어떤 권력기관의 대살상극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테면 제3세계의 내전을 조장하는 외부의 힘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그렇지않고서야 갑자기 눈이 머는 이런 황당한 전염병이 순식간에 번질리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최초로 눈이 먼 남자가 어떤 경로로 눈이 멀게 되었는지 궁금했고, 주인공격인 의사의 아내는 어째서 눈이 멀지 않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러한 궁금증은 이 소설을 이해하는데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눈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이기로 똘똘뭉친 인간의 본성을 발견하면서 부터 였는데, 주제 사라마구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이러한 비극이 생긴 원인이 아니라, 인간이 이미 구제불능의 잔인한 종이라는 것 아니였을까를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강도만 다를 뿐 눈뜬 자들의 세계에도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다만 보고싶지 않은 것을 보지않을 재주 또한 타고난 것이 인간이라는 것이다.

 

2차세계대전 당시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전범으로 이스라엘 정보부에 붙잡힌 아돌프 아이히만은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는다. 당시 이 재판 관정을 지켜보고,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그가 저지른 악행에 비해 지나치게 평범한 인상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악의 평범성'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평범한 인상의 아이히만이 저지른 가장 큰 악행은 '명령에 따른 것' 즉, 스스로 '생각하지 않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물론 아이히만의 경우는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명령에 따른 것으로 약간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하지 않는 것, 즉 일어나는 불의를 보고도 보지않은 척 눈을 가리고, 양심의 소리에 귀를 막는 것이 '인간다움'을 부르짖는 인간들이 평소 늘 하는 행동으로, 이것이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이 아닌가. 그렇다면 아렌트가 말한 악의 주체들은 히틀러나 아이히만 뿐만 아니라 유대인 학살을 보고도 못 본척  눈을 가렸던 당시의 모든 독일인, 유럽인들로 확대될 수 있겠다. 사실은 이들이 더 큰 악 일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주제 사라마구는 헐리우드판 재난극을 상상한 것이 아니라, 버젓이 눈을 뜨고 있으면서도 보고 싶은 것만 보는 개인주의, 혹은 이기주의 즉, 무관심이라는 '악'에 대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나는 우리가 눈이 멀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우리가 처음부터 눈이 멀었고, 지금도 눈이 멀었다고 생각해요. 눈은 멀었지만 본다는 건가. 볼 수는 있지만 보지 않는 눈먼 사람들이라는 거죠. (461쪽)

 

눈먼 자들의 수용소에 수용자가 늘어나자, 그들 중에서 착취를 일삼는 깡패들이 생겨났다. 깡패들은 외부로 부터 배급되는 식량을 탈취하고, 수용자들로부터 돈을 요구한다. 그들은 수용자들의 돈을 전부 빼앗고나자 이번에는 여자들을 요구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병실의 남자들은 여자들이 자발적으로 나서줄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여자들은 이를 뿌리치지 못한다. 거부할 경우 그 병실에는 음식이 공급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은 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너무 끔찍했는데 차라리 굶어 죽을 것을 다짐하거나, 악당들과 맞서지 않는 남자들의 무능함에 진저리가 났다. 죽는 것보다야 낫지않겠느냐는 생각이 정말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것은 정조 관념같은 그런 낭만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을 조금이라도 인간답게 해 주는 것은 '수치를 아는 것'이지 않은가. 이를 모른척하는 같은 병실의 남자들은 생존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짐승과 다르지 않다는 것에 몸서리가 쳐진다. 그들이 바로 '악인'이다. 소설에는 이러한 악인의 모습이 숱하게 등장하고, 그를 읽는 '나' 또한 다르지 않다는 것을 소설을 읽는동안 반복해서 느낀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보지않는다면 나 또한 '악인'인 것이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불의를 목격하고도 눈 감아왔는지, 그 용기없음에 대해 자책할 수밖에.

 

그러나 주제 사라마구가 구제불능인 인간의 이기에 대해서만 말하고 싶었다면 마지막까지 눈이 멀지 않는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지는 않았을 것 같다. 작가는 그녀를 통해 희생과 헌신 또한 인간이 가진 본질 중 하나이고, 이것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인간이 가진 최대의 장점이며, 희망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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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nulp 2016-02-23 17: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무엇보다 작가의 상상력이 맘에 들었습니다. 모두가 눈먼 사회, 그리고 한 명의 눈뜬 이.

비의딸 2016-02-24 15:33   좋아요 1 | URL
저는 그 한명이 왜 눈이 멀지 않는 것인지 계속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그 한 명이 없었다면 소설이 씌일 이유가 없었겠더라구요.
<카인>을 읽고 사라마구를 알게 되었는데, 지금까지 <눈먼 자들의 도시>를 읽지 않았던게 억울할 정도더군요, 현재는 <눈뜬 자들의 도시>를 읽고 있습니다. 주제 사라마구의 상상력은 정말 놀라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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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인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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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1월, 아시아 최대 가톨릭 국가인 필리핀을 방문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마닐라에서 12세 소녀에게 질문을 받았다. "많은 아이들이 부모에게 버림받고 나쁜 일들을 겪는다. 약물 중독이나 성매매에 빠지는 경우도 있다. 신은 왜 이런 일을 내버려두는가." 이에 교황은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들 때,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우리가 울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출처: 2015년 1월 18일 자 한겨레 신문)

 

죄 없는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살려달라다고 외칠 때, 아버지가 아들을 제물로 신께 제사를 지내고자 할 때, 신이 창조한 본성대로 호기심을 발현한 사람들이 소금 기둥으로 변해 버릴 때, 신에 대한 믿음을 시험받아 죄 없는 자가 고통당할 때, 애초에 신이 만든 존재인 인간이 그 존재 자체로 인해 시험당하고 고통받을 때 필리핀의 12세 소녀처럼 묻는 자가 여기 있다. 그는 동생 아벨을 죽임으로써 인류 최초의 살인자가 된 카인이다.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게 뭐요, 아브라함이 물었다. 불에 타버린 소돔과 다른 도시들에도 틀림없이 죄 없는 사람이 있었을 겁니다. 그랬다면 여호와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겠다고 내게 하신 약속을 지켰겠지요.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카인이 물었다. 아이들은 틀림없이 죄가 없었을 텐데요. 맙소사, 아브라함이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는 신음 같았다. 그래요, 노인장의 하나님일지는 모르나 그 사람들의 하나님은 아닌 거지요. (11쪽)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쉽게 죽지도 못하는 운명에 처한 카인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시공간을 초월하며 구약의 시대를 떠돈다. 아들 이삭을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바치기 위해 아이에게 막 칼을 들이대고 있는 아브라함을 만나기도 하고, 서로 다른 말을 하며 어수선해진 바벨탑을 방문하기도 하며,  인간의 타고난 본성이라고 할 수 있는 호기심 때문에 소금 기둥이 된 소돔의 여인을 만나기도 한다. 또한 카인은 강한 믿음을 가진 욥이 오히려 그 믿음 때문에 시험에 들어 열 명의 자식과 재산을 잃고, 그 자신 조차도 병들어 걸인처럼 거리를 떠도는 현장을 보기도 하며, 인간의 악행에 노한 하나님이 세상을 쓸어버릴 때 노아의 방주에 승선하기도 하는 등, 시간 순서와 상관없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하는 식으로 떠도는 것이다. 그러면서 카인은 어느 시간, 어느 현장에 있든 자신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 의문을 갖는다. 그러나 그 의문에 대해 돌아오는 답은 언제나 한결같다. "여호와가 일하는 방식은 신비하다."

 

가톨릭 신자인 나 역시도 진심으로 궁금하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괴롭히며 '신의 이름으로'라고 외칠 때, 창조주의 시험을 피할 수 없는 피조물인 인간들 중 어떤 사람들은 마치 자신이 신의 대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행세하며, 자기를 반대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라고 외치는 것에 대해,  불의가 진리인양 이 땅에 번지는 것에 대해 신은 어째서 참고만 있는 것인지.

뿐만 아니라 신이 만든 세상에서 벌어지는 그 모든 불의에도 불구하고 '역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라고 답하는 종교의 가르침을 거부하지 않는 인간들이 의아스럽다. 그것은 신을 경외해서라기 보다는 신의 저주가 발등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해 자신의 생각을 감추는 것에 지나지 않은가 말이다. 만물을 창조하고 세상을 있게 하며, 모든 것을 다 알고 계획하신 '신'이라면 적어도 강제된 경외를 기뻐하시지는 않을 것 같다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사라마구는 태어나면서 부터 이미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을 받아, 동생 아벨을 질투할 수 밖에 없었던, 그리하여 동생을 살해하는 죄를 저지른 불쌍한 인간 카인을 통해 부당하게만 보이는 구약성서의 사건들을 들어 하나님에게 딴지를 건다. "주여 어찌하여 그리 행하시나이까???"

 

왜 하필 카인이었을까. 하나님이 편애하셔서 그의 제사만 기뻐하셨다는 아벨이 아닌, 오히려 저주를 받은 카인이었을까. 그것은 그가 이미 동생을 죽인 살인자이며, 하나님으로 부터 버림받은 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본시부터 사랑을 받는 자는 사랑의 주체에 대해 의심 할 여지조차 갖을 기회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저주받은 카인도 결국에는 돌아온 탕아로 하나님께 받아들여 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왜냐하면, 두려움 속에 의심의 마음을 감추고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아벨이기 보다는 카인에 가까우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피조물인 인간을 사랑하실 것이라고 믿기에. 뿐만아니라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애초의 가르침을 거역하지 않기에.

<카인>은 2009년에 발표되었으며, 주제 사라마구는 그 다음해인 2010년 87세로 세상을 떠났다. 내가 읽은 사라마구의 작품은 <카인>이 처음이며, 따라서 그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포르투칼의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사라마구가 <죄악의 땅>, <수도원의 비망록>, <예수복음>에 이어 <카인>을 쓰기까지 그는 그 누구보다 신의 존재를 믿고 경외했음이 분명하며, 그러므로 그가 <카인>을 통해 품은 그 모든 불경스러운 상상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역시 돌아온 탕자로 받아들이시지 않았을까 추측을 한다. '믿는 자는 강하고, 의심하는 자는 약하다' 라고 한 종교 지도자는 말했지만, '의심하지 않으면 믿음도 없다'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벨이기 보다는 카인에 가까운 우리들은 세상의 부당함에 대해 조물주이신 하나님에게 묻기 전에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아이들이 약물에 빠져들 때, 강제노동에 시달릴 때 우리가 울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말하며 서로를 기만하는 대신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인간다움에 대해 물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되었든 알라가 되었든 인간을 창조한 신이 원하는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은 지나치게 낙관적인가?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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