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과 탐욕의 인문학 - 그림속으로 들어간
차홍규 엮음 / 아이템하우스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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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가가 그리는 대상은 당대의 욕망과 탐욕을 투사한다.’

‘사랑과 욕망의 간극은 종이 한 장 차이다. 그 간격의 틈새에는 우리가 섣불리 말하지 못하는 사실 혹은 진실이 숨어 있다. 그림 속 사실과 진실의 간극은 언제나 숨김과 드러냄, 감춤과 폭로 사이의 어느 지점을 가리킨다.’ - 머리말 中

 

소위 ‘막장 드라마’라고 불리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소재를 다룬 드라마들은 부정적인 평가를 받으면서도 대부분 높은 시청률과 많은 이슈를 만들어낸다. 지금도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황금의 화가’로도 불리는 클림트의 관능적이고 에로티시즘적인 작품 속 여성들은 그에게 대중들의 비판과 동시에 큰 영광을 안겨주었다. 파격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긴다. 긴 시간 주목과 사랑을 받아온 예술작품들과 이야기들 역시 강렬한 소재를 담은 작품들이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끌림, 광기, 유혹, 동경, 관음, 애증, 탐닉, 복수, 근친, 치정, 도발’이라는 11가지 주제를 통해 보여주는 46가지의 파격적인 러브로망은 이브를 시작으로 그리스, 로마시대, 중세, 르네상스를 지나 로코코, 이슬람의 하렘까지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팜므 파탈옴므 파탈의 모습과 정열적이고 탐욕적이며, 때론 헌신적이고 낭만적인 치명적인 사랑의 모습들을 풍부한 작품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성서에서 등장하는 이야기부터 신화, 유럽과 이슬람까지 여러 시대와 장소에서 ‘사랑’이라는 주제를 담은 다양한 이야기들은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

사랑과 욕망은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시대를 움직인다. 헨리8세의 6번의 결혼은 사랑과 욕망과 권력이 엃힌 말 그대로 막장드라마에 가깝지만, 동시에 이루어진 국교회 설립이라는 영국의 종교개혁은 그 이후 영국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세례자 요한을 죽이고 그의 잘린 머리를 감싸 안은 살로메와 조국을 지키기 위해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그의 목을 자른 유디트의 강렬함은 예술가들의 손에 의해 끊임없이 변주된다.

예술 속에는 그 시대의 사회적 인식과 동시에 욕망과 성문화 역시 담아내고 있다. 그러한 예술가의 작품들 속에는 많은 사용되어 왔던 소재 중 하나가 바로 ‘팜므 파탈’이다. 고대에서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남성위주의 성문화와 가부장적인 사상 속에서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성을 유혹하고 파멸로 이끌어가는 존재로 투영되는 경우가 많았다. 다윗왕과 밧세바의 설화, 트로이 전쟁의 원인이 되는 헬레네 등의 이야기 속 남성의 욕망의 희생자로도 볼 수 있는 인물들을 대부분 남성을 유혹해서 죄를 짓게 만든 가해자로서의 모습으로 더 많이 그려내고 있다. 또한 자신의 욕망에 충실했던 여성들은 타락한 존재로 표현되곤 했다.

이 책에서 그려내는 다양한 인물들과 그들을 표현한 작품들을 그 시대의 시선과 나 자신의 관점을 비교해가며 읽어나가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욕망이나 탐욕이라는 주제만큼이나 화려하고 감각적이며 훌륭한 미술 작품들을 많이 소개하고 있어서 읽는 내내 눈이 행복한 시간이기도 했다. 사랑과 욕망은 사람과 시대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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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나도 식물이 알고 싶었어 - 정원과 화분을 가꾸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식물 이야기
안드레아스 바를라게 지음, 류동수 옮김 / 애플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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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과 화분을 가꾸는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식물 이야기

- 식물들의 조용하고 영리한 생활 -

식물 가꾸기는 나에게 유독 ‘가까이 하기엔 너무 어려운’ 일 중에 하나이다. 꽃이나 화초, 선인장 같은 화분 키우기에 몇 번인가 도전을 해보았지만, 결과는 슬프게도 언제나 참패였다. 나에게 맞지 않는 일인가보다 하는 생각에 포기해버렸지만,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마치 내 마음 속에 있는 말을 대신해 준 것 같은 기분에 다시 도전해보는 마음으로 페이지를 열었다.

저자 안드레아스 바를라게는 독일의 원예학자이자 식물학자로 2014년에 이어 이 책으로 2019년 두 번째로 ‘독일 정원도서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식물의 특성부터 다양한 식물들에 대한 상식, 식물을 올바르게 보살피는 방법 등 체계적으로 나열된 글을 읽다보면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함께 식물에 대한 애정도 함께 느낄 수 있었다.

식물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한터라 너무 전문서인 경우에는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는데 반해 ‘가을이 되면 잎들은 왜 색이 변할까?’, ‘식물마다 꽃 피는 때가 제각각인 까닭은?’, ‘화분에서 키우기 가장 적합한 식물은 뭘까?’ 같은 식물 가꾸기에 관심이 있다면 한번쯤 궁금하게 생각했던 질문이나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지식, 화분이나 정원을 가꾸는데 유용한 팁들은 무척 흥미로웠다. 게다가 섬세하고 아름다우며 따뜻한 파스톤 색감의 삽화들을 보고 있자면 그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 든다.

키가 20미터 정도 되는 너도밤나무는 하루에 10명의 사람이 하루 동안 숨쉴 수 있을 정도의 산소를 생산한다. 수국의 색이 푸른빛이나 분홍빛이 되는 이유는 토양의 수소이온농도(pH) 지수에 따라 결정되며, 현존하는 최장수 나무인 브리슬콘소나무는 나이가 무려 5,066세나 된다고 한다. 커피 찌꺼기는 정말 좋은 비료이고, 소금을 뿌려서 잡초를 없애면 안된다. 재미있으면서도 활용도 높은 지식들이 가득이다.

빛 파장의 차이를 감지하고 분별해 꽃을 피우고 봉오리를 오므리는 시간을 조절하고, 사막에서 야생으로 자라는 담배가 애벌레 같은 적들에게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방어 조치를 하는 방법을 보면 식물들이 얼마나 영리한지 다시금 알 수 있다.

‘식물에게 말을 걸거나 음악을 들려주면 더 잘 자랄까’라는 물음에 말을 건넬 때 배출되는 이산화탄소나 음악의 음파가 도움이 된다는 의견과 동시에 식물에게 이러한 조치들을 해주는 이라면 자기가 아끼는 식물의 다른 요구에도 항상 주의를 기울였으리라는 문장에 나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이게 된다.

식물이란 알면 알수록 유연하고 영리하며, 효율적이고 강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고 잎이 떨어지는 과정은 모두 고도화된 생존 전력이다. 우리 눈에 비치는 아름답고 다양한 변화를 보이는 풍경들을 깊숙이 들여다보면 그 속에는 좀더 복잡하고 과학적인 이유를 담고 있다. 생태계는 역시 신비롭다.

식물을 가꾸는데는 노력과 애정만큼이나 그에 따른 지식 역시 무척이나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었다. 왜 지금까지 실패를 거듭해왔는지 알게 되었다고나 할까.

이번에야말로 화분 가꾸기에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하는 작은 희망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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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고흐 : 따뜻한 위로가 필요할 때 - 전통과 도덕적 가치를 허문 망치 든 철학자의 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스타북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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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질서와 전통, 도덕적 가치와 고정관념을 깨기 위해 기꺼이 망치를 든 매혹적인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

현재 서양 미술가 중 가장 위대한 화가들 중 한명으로 손꼽히지만 생전 단 한 작품도 팔지 못하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자신의 열정을 불태웠던 영혼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

<아름다움, 삶, 신앙, 지혜, 인간, 존재, 세상, 사색, 예술가, 니체>라는 10개의 주제로 이루어진 위대한 철학자 니체의 잠언과 고흐의 그림의 콜라보는 ‘명작과 명작의 만남’이라는 주제답게 가슴을 찌르는 명쾌한 문장과 묵직한 울림을 주는 작품들이 깊게 마음을 흔들며 사색과 위로의 시간을 전해준다.

그대는 다음과 같은 물음에 답해야만 한다.

“과연 그대의 마음 깊숙한 곳이 삶을 긍정하고 있는가? 그대는 만족하는가? 그대는 무엇을 바라는가?”

만약 그대의 대답이 진실이라면 이 잔인한 삶에서 해방될 것이다. - 반시대적 고찰 (P62)

수많은 철학자와 예술가들 중 왜 니체와 고흐일까.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점 이외에는 그다지 닮아 있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한명의 철학자와 또 한명의 화가의 조합은 조금은 낯설기까지 하다. 하지만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철학을 실천하고 삶과 현실을 사랑했던 니체와 우울증과 삶의 고통 속에서도 눈부신 정열로 자신의 모든 것을 예술에 바친 고흐, 두 사람이 추구했던 삶의 모습은 많이 닮아있었다.

기존의 가치를 부수고 스스로 깨어나야 한다고 말하는 니체의 사상은 두 세기가 지난 지금도 유효하다. 니체의 잠언들은 평소 잊고 있던 ‘나란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든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반시대적 고찰>, <즐거운 학문>, <이 사람을 보라>, <차리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선악의 저편> 등에서 발췌된 짤막한 글은 긴 생각의 시간을 가지게 만들고, 그 옆에 배치된 그림들은 그 시간을 더욱 깊게 한다. 좋은 잠언과 그림. 그야말로 호사스러운 책이 아닐 수 없다.

니체와 고흐의 만남이 주는 통찰과 위로는 하루가 다르게 과학이 발전하고 진보하는 지금 이 시대이기에 더욱 철학과 예술이 우리 삶에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시간이었다.

내가 동정을 비난하는 까닭은 그것이 수치에 대한 감정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타인을 동정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례한 짓이다. 동정은 운명을 파괴하고, 치명적인 고독에 특권을 부여하며, 거리낌 없이 죄를 용서한다. 인간은 자신이 누군가를 동정할 때 느껴지는 고귀한 감상 때문에 이 무례한 괴물에게 도덕의 관념을 덧씌웠다. - 이 사람을 보라 (P110)

현대인들은 인간의 고민을 위선이라고 비난한다. 우리는 너무 빨리 결정하고 있다. 고민이나 사색은 그저 걸어가면서 해치우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점차 품위를 상실하고 있다. 인간이 더 이상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단지 기계일 뿐이다. 어쩌면 우리 머릿속에 이미 기계가 자리 잡았는지도 모른다. 그 기계의 성능에 따라 우리의 생각과 품위가 결정되었는지 모른다. - 즐거운 학문 (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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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
박완서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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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그런 책이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기 전부터 이 책은 분명 좋아하게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드는.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은 박완서 작가의 9주기를 추모하기 위하여 1976년부터 2010년까지 출간된 소설, 산문, 동화에 수록된 서문과 발문, 작가의 말 67편을 모아 엮은 책이다.

 

2019년, 작가의 8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29명의 소설가들이 써내려간 단편들이 담긴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수록된 글 하나하나도 좋았지만, 무엇보다 후배 작가들의 작가에 대한 마음이 느껴지는 듯 해서 더욱 한문장 한문장 음미하며 읽어나갔던 기억이 떠오른다. 멜랑콜리 해피엔딩이 다른 작가들을 통해 박완서 작가를 떠오르게 한다면, 이번 책은 ‘작가의 말’을 통해 40년의 작가인생 동안 만들어온 그의 작품세계와 삶에 대한 생각들이 작가의 생생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듯 했다.

 

서문과 발문만을 모아 읽는다는 것이 이렇게나 재미있고 감동적일 줄을 몰랐다. 아직 읽어보지 못했던 작품을 상상해보게 되고, 예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애정과 만들어지기까지 노력, 쌓여 가는 충실한 삶의 시간들이 오롯이 담겨있는 작가의 말들이 정감 있고 솔직하게 다가온다.

 

데뷔작인 ‘나목’의 1976년, 1985년, 1990년 재출간된 발문들 속에는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는 첫 작품에 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한 작품의 재출간, 개정판의 각 서문, 발문을 연대별로 모은 구성은 작품을 처음 썼던 과거와 같으면서도 달라진 작가의 감정의 변화와 시간의 흐름이 볼 수 있게 해주어 좋았다. 무엇보다 소설전집을 비롯하여 '나목'뿐만 아니라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나의 아름다운 이웃' 같이 여러번 재출간되어 다양한 작가의 말을 만날 수 있는 작품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그가 오랜시간 꾸준히 많은 이들에게 읽히고 사랑받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일 것이다.

 

그때 내가 미치지 않고 온전한 정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로 그래, 언젠가는 이걸 소설로 쓰리라, 이거야말로 나만의 경험이 아닌가라는 생각이었다. 그건 집념하고는 달랐다. 꿈하고도 달랐다.

그 시기를 발광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고, 정신의 숨구멍이었고, 혼자만 본 자의 의무감이었다. (P47, 목마른 계절[1987년] - 발문)

 

아이들에게도, 남편에게도 집 밖에서의 일이 더 많이 있고, 그 일은 점점 확대되어 가는데, 나는 그들을 보살피고 기다리는 게 전부고 그 일이나마 하루하루 놓쳐가고 있다는 깨달음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나도 뭔가 나만의 일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같이 열정적인 여자가 계속 그 일정을 가족에게만 쏟는다면 종당엔 가족관계를 지옥으로 만들 것이 뻔했다. (P39, 창밖은 봄[1977년] - 서문)

 

1997년 출간된 소설집 ‘창밖은 봄’의 작가의 말 <작가 자신이 쓴 박완서 연보>에는 쓸쓸한 어린 시절부터 전쟁, 결혼, 출산, 여성, 어머니, 작가로서의 다양한 삶의 모습이 담겨있다. 과장하지 않고 덤덤히 풀어나가는 자신의 연보는 그의 작품과도 많이 닮아있었다. 슬프고 기쁘고 쓸쓸하고 따뜻하다.

 

가장 마지막에 수록된 2010년 여름에 출간된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서문에 담긴 한 문장이 마음속에 남는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 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 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 ' 40년의 작가로서의 인생 마지막 인사말은 여전히 한없이 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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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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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디자이너 해미는 문득 아이와 함께 오던 손님 은정이 자신이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선물 한 후 오랜 기간 미용실에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8개월 전 어느 날 아들 서균이가 의식불명에 빠진 후 워킹맘 은정은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들어줄 친구를 간절히 바란다.

 

딱 한 명만 있었으면, 은정은 종종 생각했다.

친구가,

마음을 터놓을 곳이 딱 한군데만 있었으면.(P22)

 

고등학교 친구인 두 사람,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게 카리스마 있고 강한 여성이 되기를 강요당해 오히려 통속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했으며 사랑에 항상 목이 말랐던 전업주부 진경과 학창시절 외모 강박으로 왕따를 당했던, 홀로 일을 하고 자신을 지탱해왔던 페미니즘 기획자이자 작가인 세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가지를 뻗어나가듯 헤어디자이너 해미와 은정, 워킹맘 지현, 교수의 추행사실을 고발한 채이와 혐오와 세상에 맞서 싸우려는 형은, 자신의 걱정이 혐오가 되어버리고, 시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마음에 점점 소극적이 되는 윤슬 등을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 책에는 남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여성들의 목소리뿐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만으로 세상은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 속에는 수 많은 '내'가 존재한다. 여성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싶어하는 10대와 20대의 지현과 채이, 형은이 있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30대와 40대의 해미와 진경, 세연이 있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혐오와 비난이 되어버리는 늙고 가짜 페미니즘이 되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소극적이 되어가는 50대의 경혜와 윤슬이 있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P68)

 

그 누구도 나쁘거나 틀리지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선을 긋는다. 각자의 삶에서 지향하는 가치와 추구하는 목표는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자들에게 하지 않는 기대를’하게 되고, 그렇기때문에 더 외로워하고 상처받는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손에 쥔 붕대를 서로에게 감아줄 수도 있다. 마치 진경의 머리를 감아주던 세연처럼 서툰 손짓으로 한번 더 감아 붕대가 모자랄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꽉 잡아당겨 고통을 남길지라도 서로의 상처에 붕대를 감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조금은 덜 외로워지지 않을까.

 

‘좀 기다려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참 이상해.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관계가 끝났을 텐데, 이상하게 세연이 너한테는 모질게 못하겠더라. 이해하고 싶었어, 너의 그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 (P154~155)

 

머리속으로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는 그들에게 진경이기도 했고, 세연이기도 했으며, 은정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로 얼룩지기도 하고, 멀어지기 싫었기에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 했었다.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손을 계속 잡고 간다는 것은 애정 만큼이나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상처받을 준비와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임과 동시에 서로 다른 '나와 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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