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감기 소설, 향
윤이형 지음 / 작가정신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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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어디자이너 해미는 문득 아이와 함께 오던 손님 은정이 자신이 재미있게 읽었던 책을 선물 한 후 오랜 기간 미용실에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기분이 나빠졌다. 8개월 전 어느 날 아들 서균이가 의식불명에 빠진 후 워킹맘 은정은 자신의 고통과 외로움을 들어줄 친구를 간절히 바란다.

 

딱 한 명만 있었으면, 은정은 종종 생각했다.

친구가,

마음을 터놓을 곳이 딱 한군데만 있었으면.(P22)

 

고등학교 친구인 두 사람, 어린 시절부터 엄마에게 카리스마 있고 강한 여성이 되기를 강요당해 오히려 통속적인 여자가 되고 싶어했으며 사랑에 항상 목이 말랐던 전업주부 진경과 학창시절 외모 강박으로 왕따를 당했던, 홀로 일을 하고 자신을 지탱해왔던 페미니즘 기획자이자 작가인 세연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마치 가지를 뻗어나가듯 헤어디자이너 해미와 은정, 워킹맘 지현, 교수의 추행사실을 고발한 채이와 혐오와 세상에 맞서 싸우려는 형은, 자신의 걱정이 혐오가 되어버리고, 시대를 따라갈 수 없다는 마음에 점점 소극적이 되는 윤슬 등을 통해 지금을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를 따라간다.

 

이 책에는 남성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직 여성들의 목소리뿐이다. 하지만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분법만으로 세상은 구성되어 있지 않다. 그 속에는 수 많은 '내'가 존재한다. 여성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는 부당함에 맞서 싸우고 싶어하는 10대와 20대의 지현과 채이, 형은이 있고, 자신이 선택한 삶을 감당하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는 30대와 40대의 해미와 진경, 세연이 있으며, 자신의 목소리가 혐오와 비난이 되어버리는 늙고 가짜 페미니즘이 되어버릴까 하는 두려움에 소극적이 되어가는 50대의 경혜와 윤슬이 있다.

 

‘사랑하는 딸, 너는 네가 되렴. 너는 분명 아주 강하고 당당하고 용감한 사람이 될 거고 엄마는 온 힘을 다해 그걸 응원해줄 거란다. 하지만 엄마는 네가 약한 여자를, 너만큼 당당하지 못한 여자를, 외로움을 자주 느끼는 여자를, 겁이 많고 감정이 풍부해서 자주 우는 여자를, 귀엽고 사랑스러운 여자를, 결점이 많고 가끔씩 잘못된 선택을 하는 여자를, 그저 평범한 여자를, 그런 이유들로 인해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구나. 네가 어떤 사람으로 자라나도 나는 너를 변함없이 사랑할 거란다.’ (P68)

 

그 누구도 나쁘거나 틀리지 않지만, 서로를 이해하기 힘들어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고, 선을 긋는다. 각자의 삶에서 지향하는 가치와 추구하는 목표는 모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남자들에게 하지 않는 기대를’하게 되고, 그렇기때문에 더 외로워하고 상처받는다. 하지만 반대로 우리는 손에 쥔 붕대를 서로에게 감아줄 수도 있다. 마치 진경의 머리를 감아주던 세연처럼 서툰 손짓으로 한번 더 감아 붕대가 모자랄지라도, 자신도 모르게 꽉 잡아당겨 고통을 남길지라도 서로의 상처에 붕대를 감는 손을 멈추지 않는다면 조금은 덜 외로워지지 않을까.

 

‘좀 기다려줄 순 없는 거니? 모두가 애써서 살고 있잖아. 너와 똑같은 속도로, 같은 방향으로 변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 사람들의 삶이 전부 다 잘못된 거야? 너는 그 사람들처럼, 나처럼 될까 봐 두려운 거지. 왜 걱정하는 거니, 너는 자유롭고, 우리처럼 되지 않을 텐데. 너는 너의 삶을 잘 살 거고 나는 너의 삶을 응원할 거고 우린 그저 다른 선택을 했을 뿐인데. .....참 이상해. 다른 사람이었으면 벌써 관계가 끝났을 텐데, 이상하게 세연이 너한테는 모질게 못하겠더라. 이해하고 싶었어, 너의 그 단호함을. 너의 편협함까지도.’ (P154~155)

 

머리속으로 내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나는 그들에게 진경이기도 했고, 세연이기도 했으며, 은정이기도 했다. 상대방의 아픔을 함께 하지 못했기 때문에 후회로 얼룩지기도 하고, 멀어지기 싫었기에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어 했었다. 그 손을 놓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누군가의 손을 계속 잡고 간다는 것은 애정 만큼이나 의지가 필요한 일이다. 자신과 다른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와 깊게 관계를 이어간다는 것은 상처받을 준비와 이해하고 공감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시한번 상기하게 된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임과 동시에 서로 다른 '나와 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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