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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렌트 읽기 - 전체주의의 탐험가, 삶의 정치학을 말하다 산책자 에쎄 시리즈 8
엘리자베스 영-브루엘 지음, 서유경 옮김 / 산책자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독서의 순간

   이 책의 원제는 『Why Arendt matters』, ‘왜 아렌트는 중요한가’ 이다. 즉, 그녀가 떠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의 시기에 아렌트를 다시 읽는 것이 왜 중요한지를 말하는 책이다. 바꿔 말하면 지금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뜻도 된다. 저자에게 아렌트는 지도교수였고 어찌 보면 아렌트 학파의 마지막 제자로서 스승의 업적을 계승, 완성할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는 아렌트 탄생 백주년(2005)을 기념해 이 책을 출간했는데 이 책은 스승인 아렌트를 말하는 책이기도 하지만 아렌트를 말함으로써 제자였던 자신의 의견과 판단을 사회적으로 전달하는 임무도 훌륭히 완수했다. 저자가 아렌트를 가이드하는 여행길은 곧 우리가 오늘을 반추하는 길이었던 것. 그러므로 (아렌트는 내가 잘 아는 바)아렌트를 이렇게 읽어야 한다고 주입하는 책으로서 무엇보다 ‘이렇게’의 논리를 세심하게 펼친 작품이라는 것이다. 저자의 성과는 바로 ‘이렇게’가 아렌트의 사상적 발전인 것으로 자가 안착시켰다는 것이다.

   나로선 아렌트의 책을 한 권도 안 읽고서 이 책 한권으로 아렌트는 물론이고 아렌트의 스승과 또 그녀를 스승으로 둔 현역 학자의 통찰까지 학습할 수 있었으므로 여간 반가운 게 아니었다. 특이했던 건, 사실 다분히 (정치를 말하는 것이므로)정치적인 논조를 예상하고 책을 펼쳤는데 저자가 철학, 정신분석학의 저서를 많이 출간했기 때문인지 이 책은 고스란히 철학과 정신분석학의 밀도높은 문체를 드러낸다는 것이었다. 외국의 어떤 철학자를 말하는 사람이 또 다른 철학자일 경우 독자는 필연적으로 이중철학의 고(苦)에 부딪힐 때가 있다. 몇 부분 이해가 안가는 문장들의 향연이 발견되기도 했는데 지난번 『데리다 평전』때도 겪은 일이지만 이것이 아렌트의 뜻인지 저자의 해석이 가미된 의견인지(아니면 한국의 번역자의 의역인지) 독자로선 주어진 문장만으로는 전혀 판단할 길이 없다는 것이다. 맥락에 묻어갈 수 밖에 없는 순간들이 사유의 기쁨을 선사할 수 있겠으나 공교롭게도 문장 내에서 빈번히 접하게 된 이중, 삼중의 부정형 그리고 수동태의 번역문은 이 원망이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를 일로 남겨져 ‘어렵고 짜증난다’는 식의 평가를 부를 확률이 있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한 일괄적 평가로만은 부족하다. 이 책은 내용상 어려운 컨텐츠를 담고 있는 것은 아니고 번역상으로 저자, 그리고 옮긴이 만의 독특한 문체가 매우 강렬해 중독성이 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그들 사유를 좇아가지 못하는 특성도 있다.(혹자들은 그런 게임식의 재미 때문에 철학을 좋아하는 것 아닐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이 경향은 두드러져 결국 저자의 특기(?)인 듯 해 보이는 개념의 사유와 표현방식의 인문학적 체계에 항복당하는 순간이 오게 되는데 막상 책을 덮고 나니 그러한 저자의 내재적 에너지에 압도당한 느낌이 싫지 않았달까. 결론적으로 뻐근한 사유의 재미에 흠뻑 빠져들던 시간이었다. 한마디로 정치와 철학이라는 재료가 정신분석학의 레시피로 요리된 듯한 흔치않은 느낌으로 충만한 순간. 저자는 자주 ‘아렌트적 순간’이라는 역사적, 상징적 순간을 언급했는데 내게 이 책은 한 여름 치열하게 기억할만한 ‘독서적 순간’으로 남을 듯하다.


운명의 순간

   저자는 아렌트의 주요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 『인간의 조건』(1958), 『정신의 삶』(1978)을 큰 축으로 구분해 놓고 그녀와 자신의 사유를 정리한다. 흡사 아렌트 대리인으로서 정당 대표의 대변인처럼 느껴지던 목소리는 깊고 심층적이면서도 생생하다. 마치 아렌트가 아직 살아있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저자는 아렌트를 75년 이후 계속 생존하도록 생명성을 유지시키는데 공헌을 한 것 같다. 저자는 아렌트 삼부작을 언급하면서 아렌트가 바란 것, 바라지 않은 것, 이룬 것, 이루지 못한 것을 피하지 않고 나열한다. 예를 들어 오늘날의 정치상황을 말할 땐 만약 ‘그녀가 아직 살아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와 같은 자문으로 그녀와 나누는 대화를 연상토록 한다. 그리고 이미 죽은 아렌트의 대답을 당당하게 호출하여 우리 앞에 정렬하는 자신감은 곧 그만큼 아렌트를 많이 아는 증인으로 인식되게 한다. 아렌트를 (제대로)읽으려면 나를(나부터) 읽어라, 그것이 저자의 할 말로 보였다.

   아렌트 삼부작을 지나쳐온 뒤 떠오르는 질문은 ‘개인과 국가와의 관계’였다. (생각 ‘없는’)개인의 악이 국가의 악으로 발전할 수 있듯이 (생각 ‘깊은’)개인의 선 역시 국가의 선으로 확대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이 희망적으로 느껴지지 않고 암울하게 와 닿았던 건 그렇기에 개인의 행복은 절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깨우침 때문이었다. 소개된 아렌트의 책을 연작으로 이어보면 결국 ‘인간으로서 인간적인 삶을 인간답게 살아가기’에 대한 평생의 고찰이라고 할 수 있다.

   아렌트는 공영역을 (사적 영역, 사회적 영역과 달리)정치영역으로 보았고 공영역의 역할과 비중이 현대인의 삶속에서 몹시 위축되어 있는 것을 지독히도 관찰했다. 사람들이 정치에 대해 만연적인 피로감을 호소하고 애정을 못느끼는 정치적 상황을 정치하지 않는 일반인과 뫼비우스의 띠처럼 하나인 몸으로 이해했다. 이에 아렌트는 무엇보다 정치적 기능을 회복하는 것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조건으로 보았다. 문장으로만은 당연해 보이는 이 결론이 철학으로 정치를 하는 정치철학자, 그렇기 때문에 정치 사상가로 알려진 학자의 주장으로 인식, 수용될 때 정치를 외면해온 나같은 독자에겐 상당히 충격적인 결론이라 할수 있다. 정치적이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 로 들리기 때문이다. (물론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는 우리가 당하는 통치개념의 정치는 아니라 말하는 듯 하지만 나는 같은 개념이라고 본다) 그동안 더 행복해지기 위해 정치적이지 않으려 한 것이 아렌트가 비판했던 하이데거의 모범적이지 못한 위선으로 간주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칸트의 고장, 유복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독일 철학의 심장부 하이데거, 후설, 야스퍼스에게서 교육받았다. 그러한 독일철학의 전통을 계승한 저자가 “해체할 것이 없을 때까지 해체하라”던 데리다의 주장 뒤에 남은 것이 무엇인지 정곡을 찌르듯 질문하던 것은 철학이 공허한 결론이 되지 않기 위한 자세로서 충분히 의미심장하다. 지난달 내가 『데리다 평전』을 읽었을 때 철학은 정치적이지 않을 때 인간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내가 리뷰를 정리하는 오늘의 시점에도 북한은 연평도에 포격을 하였고 일본의 잇따른 독도도발로 양국관계는 다시 냉기가 흐르고 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입으로는 정치에 관심없다는 냉소를 지어보지만 사실 우리 모두는 정치에 관심이 없어서는 안 될 시점이고 또 외면하기도 힘든 상황에 국면해있다. 내 생각에 한반도에 아렌트가 소환된 이 시점은 어느때 보다도 중요한 시기인 듯하다. 우리는 식민지국가였고 전쟁국가였으며 지금은 분단국가이기도 하다. 그것은 아무리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고 유럽에 K-pop이 유행이라고 해도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아렌트의 대표작 세권은 모두 유대인-나치-아이히만이라는 뼛속 공통분모를 함의한다. 전체주의로서의 반유대주의, 나치의 대리 수행인으로서의 만행, 악의 본질을 탐구케 한 인간의 본성, 이 세가지 연쇄사건은 결국 민족, 체제, 인간에 대한 탐구결과를 이룩했다. 다시 말해 한 인간이 어떠한 민족으로 태어나 어떠한 체제속에서 살아갔는지에 대한 시대적 회고성을 내재한다. 이 회고록을 그대로 한반도 남쪽에 살고 있는 남한의 독자인 내게로 비추어보면 결과적으로 아주 행복하지 못한 인간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판단을 할 수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폭우로 물가가 오르고 잘못된 부동산 정책 때문에 전세가 동나고 비싼 등록금을 내고서 아무리 학위를 따도 취직할 곳이 없다는 실질적인 행복지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한반도는 지리적 특수성과 국제관계의 역학적 구조상 긴장상태를 벗어날 확률이 거의 없는 나라에 속한다. 즉, 정치적으로 평안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다. 아렌트의 결론은 우리에겐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들린다. 어짜피 지구상에서 가장 정치적인 긴장을 안고 살아가는 구성원들이기에 우리에게 있어 행복은 곧 정치와 동일하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가장 정치적인 인간이 가장 행복할 수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 상태론 절대 행복해질 수 없다는 말인 것이다. 그렇담 이제라도 행복해지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책을 읽고 머리 맞대어 묘안을 짜내어야 할 질문이 바로 그것이 아닐까.


사유의 순간

   아렌트는 전체주의를 정치를 파괴하는 통치형태로 보았다. 전체주의 속에서 인륜에 반하는 범죄는 인간 공동체에 속할 권리를 공격하는 것으로 여겼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의 기원』을 통해 1920년대 무솔리니가 처음 만든 신조어 '전체주의totalitarianism' 를 새롭게 규정했는데 인상깊었던 건 9.11 이후의 미국과 미국이 전쟁상대로 삼은 테러주의는 모두 전체주의를 기반으로 한다는 시각이었다. 전체주의가 ‘이데올로기와 테러에 기초한 신종 정치 형태’라는 아렌트의 분석에 따라 결국 미국과 오사마 빈 라덴은 전체주의식 싸움을 이어온 것이다. 역자는 미국이 80년대 소련에 저항하는 아프간 세력, 빈 라덴 네트워크에 조력한 것이 결국 9.11 테러로 되돌아왔다고 말한다. “전체주의를 물리치기 위해 전체주의적 방법”인 테러를 사용한 것에 대한 인과응보라는 것이다. 특히, 빈 라덴의 국가 행정부를 상정하지 않는 테러주의는 반정치적인 초국가 목적으로 한데 뭉친 네트워크이므로 그가 죽었다고 해서 전쟁이 종결되었다거나 테러가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확신은 아렌트의 목소리를 빌린 저자의 유럽식 경고로 느껴졌다.

 『인간의 조건』은 최근 일어난 노르웨이 테러를 떠올리게 했다. 아렌트가 말하는 인간의 조건은 정치행위를 공적으로 수행하는 시민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뜻하는 것 같다. 정치를 개인 권력에의 투쟁으로 보지 않고 다수 행복을 향유하기 위한 소통의 과정으로 본 것이 그 핵심이다. 의견을 한데 묶어 약속하고 결합하는 비폭력적 언어로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공적인 행복을 도출한다고 보는 것이다. 여기서 새로운 개념으로 인식된 건 ‘용서’라는 조건이었다. 이것은 어떤 일을 저지른 자의 행위를 용서할 것인가, 그 행위를 저지른 사람을 용서할 것인가의 문제와도 같았다. 이는 필히 ‘용서할 만한 자’와 ‘용서할 수 없는 자’를 구분케 하고 법적인 처벌이 가능한지의 여부와 결부된다. 그리고 후차적으로 행위를 한 사람이 반성하였는가, 후회하고 있는가, 아무런 생각이 없는가를 검증하는 단계로부터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용서와 처벌, 반성이 만족할만한 성과를 도출했을 때 저자는 평화와 화해를 지향할 수 있다고 말한다. 아렌트의 논리에 배경이 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민적 우정이나 종교적 관용은 썩 신선한 재료는 아니었지만 용서의 일반화에 기여했다는 점에서 수긍할만 했고 악의 평범성, 인간의 무사유성이 인류의 질서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에서 대칭적 수사를 이루는 논리라 생각되었다. 무엇보다 용서를 정치의 ‘필수조건’으로 보고 하나의 근본적인 ‘정치적 경험’으로 성찰하는 체계는 인상깊었다. 용서가 화해를 전제로 하며 가해자나 희생자 역할보다는 공동체를 건강하게 하는 패러다임으로 규정한 것이 노르웨이를 연상시켰다. 76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해한 테러범을 대하는 노르웨이는 적어도 우리와는 달라 보였다. 주한 노르웨이 대사는 “브레이빅이 이번 테러보다 더 끔찍한 짓을 저지른다 해도 노르웨이는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 바 있다. 노르웨이가 주장하는 가치는 ‘관용과 사랑’이다. 테러범에 대한 극형이나 경찰의 늑장 대응을 질타하는 대신 극단주의자 한 명으로 무너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똘레랑스를 내세웠다. 이는 ‘범죄자의 처형이 그 범죄자나 희생자 모두에게 용서로부터 나오는 방면의 혜택을 볼 수 없게’ 한다는 저자의 논리와도 일치한다. 안타까운건 아직 ‘용서함과 약속함의 힘’이 불행히도 우리사회를 말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국에서 정치는 정치인의 것이지 시민의 것은 아닌 것이다.

  『정신의 삶』은 제목 그대로 가장 철학적, 정신분석학적으로 다가왔다. 저자는 아렌트의 사유함과 의지함에 이어지는 판단함의 개념을 완성하기 위해 열정을 쏟는 것으로 보였다. 구성상 책의 마지막 단락인 이 부분은 아렌트가 하이데거, 야스퍼스와 대화하는 방식과 유사하게 스승과 대화를 진행하는 것으로도 보여 저자에겐 하이라이트라 할수 있었다. 아렌트가 강조하는 '판단'은 반성적 판단을 기초로 한 칸트의 (사적인 영역이 아닌)'공통감각'과 유사하다. 저자는 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라는 능력은 ‘자신의 상상력을 사용해 타인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것’이라 해석한다. 판단의 반대가 바로 무사유라는 점에서 칸트가 언급한 “어리석음에는 치료약도 없는 법”이라는 비유는 한 사람의 어리석은 판단이 실은 가장 무서운 흉기가 될 수 있음을 상징하는 유머였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처럼 생각이 없고 판단하지 않는 관료들, 사유하지 않고 계산만 하는 조직원, 이론에만 의존하고 거짓을 만들어 내는 전문가들의 무사유성은 자기 내부의 대화가 부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형사고가 터질 때마다 공무원의 안이한 대처가 늘 도마에 오르지만 그런 무사유의 습관은 관행처럼 반복된다. 이러한 무사유적인 공무원은 자신에 대한 폭군이자, 세계 내에서의 폭군이 된다고 말한다. 이는 판단함이 일종의 공적 행복의 형태라면 판단하지 못함이 공적 불행의 지름길이라는 뜻과 같다.  이 사유가 중요한 것은 대통령, 시장같은 지도자가 아닌 평범한 사람도 생각없는 판단을 하면 모두가 불행해질 수 있다는 논리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기기만을 거부하는 정직한 인간’이 ‘좋은 판단자’라는 몽테뉴의 정의는 자기기만을 일삼는 위선적 인간이 곧 나쁜 정치인이라는 뜻이면서 그 정치인은 곧 한명의 시민일 수도 있다는 뜻이었다.


행복의 순간

   저자에 의하면 『정신의 삶』은 우리 시대 정신적 딜레마와 마주치게 한다는 주장이다. 저자가 현대에 가능한 질문으로 치환한 것은 다음과 같다.


- 다양한 도덕 전통을 가진 사람들이 동의할 정도로 설득력을 지닌 어떤 도덕철학이 존재 하는가?
- 의지를 조화시키는 사랑은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가?
- 우리가 어떻게 코즈모폴리탄 적 비판가와 관찰자로 이루어진 공영역을 상상할 수 있는가?          -268p


   저자가 해석해준 도덕철학은 예를 들어 내가 연쇄 강간살인범이라고 할 때 나는 연쇄살인을 한 나 자신과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하는 질문과 연결된다. 악행을 예방하는 길은 이 질문에 자신을 제대로 판단하는 일인 것이다. 이 올바른 판단의 과정이 곧 무사유를 차단하는 순간인 것이다. 나는 아렌트의 자기검열에 해당하는 이 질문이 이 책에서 가장 내 자신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도덕이란 남들이 말하는 기준이 아니라 나와 같이 살아갈 나를 위해 가장 절실하다는 걸 새삼 깨우쳤기 때문에.


   
 
“나는 내가 그것들을 한다면 더 이상 나 자신과 함께 살 수 없다고 생각하는 특정의 것들을 할 수가 없다.” 도덕은 자신에게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진실했던 것에-잊지말고-충실하는 것이다.       - 270p
 
   


    노르웨이 테러범은 노르웨이로부터 얻을 것은 모두 취하면서 많은 독서를 해온 인물이었다. 특히 경영, 역사등의 인문학적 독서를 즐겨온 그가 다문화주의, 세계시민으로서 공통되기를 거부한 것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이히만은 상명하복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만 누구보다 근면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은 비정치적 사유로 가장 정치적인 인물로 남았다. 나는 이들을 보면서 인간은 원래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오래된 명제를 떠올렸다. 서평가 故 최성일은 한나 아렌트를 두고 인간이 정치적 동물이었다는 점을 새삼 일깨운 정치철학자라 말했다. 아렌트 자신도 나치정권의 등장과 그에 조력한 하이데거로 인해 정통철학에서 정치철학에 눈을 뜨게 된 것처럼 인간은 정치를 분리시켜 그 본성을 관찰, 설명할 수는 없을 듯하다. 이제는 망각해버렸다고 생각되는 인간이라는 정치적 동물을 증명하는 시간, 아렌트의 시간은 우리에게 어떤 교훈적 순간을 제공하고 있는가. 이미 정치적 인간인 우리가 새삼 정치에 관심을 가지는 것이 정치를 위한 길의 모두인 걸까.

    사실 아렌트가 말하는 ‘악의 평범성’과 ‘무사유‘, 그리고 그 대응기제로서 ’용서‘와 ’판단‘은 굉장히 먼 미래로 느껴진다. 아니 너무 오래된 과거로 느껴진다. 사유를 멈추는 것이 악으로 가는 지름길임을 아무리 각성한다고 해도 사유한다고 해결될 문제로는 보이지 않는 구석이 있다. 악을 저지르는 건 평범해 보이고 용서를 행하는 것은 특별해 보이는 단순 이분법의 느낌도 든다. ‘용서함’이 ‘상호방면’하는 행위로서 지속적인 인간연계망을 수립하고 ‘판단력’은 세계시민이 되도록 준비시키는 능력이라는 최후통첩과 같은 메시지는 도처에 약속을 어기고 진실을 은폐하는 정치인이 난무하는 작금의 시대에 무기력한 결론으로 박제될 진부함을 인정하자. 이 책은 전체주의 비극을 조장, 관망하는 사회구조 및 체제의 변혁을 간과하고 모든 것을 행위 주체의 본성으로 돌림으로써 전체주의를 막는 유일한 방법이 주체의 변화인 것으로 오인될 소지도 있다. 그러나 아렌트는 말한다. "조직되지 않고 구조화되지 않은 대중, 절망적이고 증오로 가득 찬 대중은 지도자들에게서 구원을 기대한다."고. 그녀는 전체주의 기원을 대중에서 찾았다. 이명박 반대는 더 강력한 이명박에 대한 열망이라는 분석을 접한 적 있다. 더 완벽해보이는 미래를 제시해달라는 간절한 요청은 어쩌면 집단 무의식, 집단 기만의 무사유에서 비롯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지구촌 시대와 다문화주의의 맥락에서 아렌트가 제시한 조건들은 정치가 자신이 속한 공동체 안에서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방식 이라고 보았을 때 가장 우선적인 가치로 자리하기 충분하지 않을까. 이 책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반성과 회고를 통해 우리 스스로 판단의 상황에 처하면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사유하게 한다. 앞으로 우린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순간과 집단적으로 조우하게 된다. 우리가 무엇을 용서하고 약속할 것이며 그로인해 어떤 판단을 하는 것이 사유하는 한 명의 인간으로서 정치적 행동을 실천하는 일인지 생각한다. 우린 적어도 우리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기회를 놓치지는 말아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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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8-11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옷! 리뷰 쓰셨군요! 한사람님 리뷰 기다리고 있었어요~ 한사람님 리뷰는 일목요연하게 정리가 되어 있어서 좀 어려운 책 읽는데도 많은 도움이 되어요. ^^ 그러니까 리뷰 보고 퍼뜩 질렀다는 이야기 ^^

가연 2011-08-16 2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부족한건지 자꾸 턱턱 막혀서... 번역문제인가?? 한참 고심했더랬죠... 역자분께는 죄송하지만 별 네 개!ㅠ

비로그인 2011-09-06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렌트는 늘 무심한 언어 속에 절대관념을 넣는 사람 같아요. 가장 평범한 언어로 가장 쉽게, 가장 날카로운 뜻을 전달한달까요. 나무에서 물방울이 똑, 하고 떨어져서 화들짝 놀라듯이, 6년 전에 읽었던 진주조개잡이 생각이 났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