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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기본이란 무엇인가
이 책은 우선 기본기가 탄탄하다. 첫 페이지에서부터 마지막까지 한 치의 틈을 허용치 않는 저자의 변함없는 의지와 힘을 실어주는 텍스트 밀도는 나같이 국가나 시민, 진보와 보수의 개념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 정치 문외한에게는 아주 유용할 듯하다. 꼭 정치적인 시각이 아니더라도 아주 오래전 윤리 교과서와 대학 교양과목에서 스쳐 지나간 분들을 민망하지 않게 조우하도록 자리를 마련했으며 만남을 통해 새로운 끄덕임의 시간을 주었다는 것도 내겐 의미있었다. 국가론 듣다보면 철학과 윤리 및 경제, 사회학을 엿듣게 되기 마련이니까. 개념을 말하는 인문서적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니까, 요즘 세간엔 ‘**는 무엇인가’ 식의 막연하고도 직설적인 질문에 ‘나는 **이다’식의 분명하고 정직한 답변이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은 듯하다. 무엇이든 그 본질을 따져 묻고 해당하는 것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것이 마치 지금 우리가 당면한 공통의 과제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즉, 질문에 거론될 주제와 답변으로 언급될 역할은 곧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중요한 바로미터가 된다. 누구든 자주 질문하고 답으로 거론되는 것이 지금 우리의 화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엇을 물을 것인가는 어떻게 답할 것인 가만큼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총명한 질문이 곧 훌륭한 답으로 가는 길임을 말하는 책이다. 무릇 교육은 정답을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질문하는 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닐까.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 길들여진 내 세대는 ‘질문 하시오’라는 교사의 상투적인 인사에 ‘그런 건 없습니다’하며 정중히 고개숙여 화답하였다. 국가가 무엇인지, 어떤 국가가 좋은 국가인지, 좋은 국가의 시민은 어떤 사람인지, 감히 질문할 수 없었다. 아니 질문하기 이전에 궁금하지도 않았고 궁금할 수도 없었다. 이미 묻기 전에 친절히 정해진 정답을 알려주어 우리는 그것을 외우며 그런 줄 알면 되는 것이었다. 사람은 무엇인가. 행복은 무엇인가. 교육은 무엇인가. 철학은, 과학은, 종교는, 경제는....무엇인가에 질문한다는 것은 그들이 열심히 적고 가르쳐준 모든 것들을 제대로 알고 있지 않다는 뜻과 같았다. 국가처럼 절대적이고 최상위에 위치한 개념은 더더욱 당연한 (답으로 무장된)질문에 속했다. 국가를 모르고 어떻게 시민으로 살아간단 말인가. 아니 어떻게 국가에 속한단 말인가. 그러니 우리는 국가가 무엇인지 이미 아는 사람이어야 했고, 그랬기 때문에 결국 국가가 무엇인지는 알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이 책이 던지는 질문에 자신있게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학창시절 오답노트를 열심히 외운 사람일 것이다. 결론은 질문할 수 없다는 것은 질문할 내용을 모른다는 것이고 심지어는 이미 답을 아는 줄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역으로 내가 국가를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지 깨우쳐 주었고 그동안 몰랐던 나를 알려고 하지 않았던 나를 질책하기보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위로까지 더해주는 미덕을 가졌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알지 못하니 관심이 생길 리 없는 (나같은)정치 문외한이 이 책을 집어들 이유는 희박하다는 것이다.(국가가 무엇인지 알아야할 이유가 없기 때문에) 국가는 그들 다수가 그다지 부러 시간내어 알고 싶은 장르에 속하지 않는다.(내가 아는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그들은 대부분 보수이기 때문에) 확신하건대, 이 책의 저자를 잠시 잊어버린다면(?) 나 같은 꼴통 보수는 지금부터 국가를 다시 시작해도 늦지 않을 듯하다. (이 책은 절대 보수를 뭐라 하지 않는다)
먼저 이 책의 저자 유시민은 친노 대표주자로서 진보, 개혁진영의 국민 참여당 대표이다. 얼마 전 김해 재보궐 선거(4.27)에서 야권 단일화후보를 내세웠으나 (보기 좋게)패배했다. 대선을 일 년 반 남긴 이 시점에 야권 대통령 후보 선호도에서도 민주당 손학규에 밀려 차기주자로서 그 행보가 영 불안한 상황이다. 최근 들리는 소식에 의하면 향후 진보진영의 통합구상을 위해 칩거에 들어갔다고 한다.(혹시 칩거 중에 독자 리뷰를 보지 않을까 싶지만) 그동안 내가 가져온 유시민에 대한 선입견은 한마디로 ‘말빨’ 좋은 (철 안든)정치인이었다. (물론 그의 책은 단 한권도 읽지 않은 채로) 유시민은 이 책의 후기에 글을 쓰면서 되도록 정치인의 시각을 가지려 노력했고 정치인으로서 글쓰기를 대 국민과의 소통으로 인식하므로 이번 국가론을 탐구하는 자신의 책에 스스로 긍정적인 의미성을 부여했다.(대견한 일을 했다고 느끼는 듯) 알려졌듯이 이 책을 집필하게 된 가장 직접적인 계기는 ‘2009년 용산참사’였다고 밝힌 바 있다. 스스로 학자나 지식인으로서가 아니라 ‘악마성이 내재한 국가폭력’과 관계를 맺고 ‘그 폭력이 가져오는 특수한 결과’에 책임을 져야하는 현역 정치인으로서 국가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정치인인 자신의 역할을 기초부터 체계적으로 정리하지 않고서는 정치인생에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느꼈던 것일까. 책을 덮고 나서 이 책은 (국가를 알려야 할)일반시민을 위한 책이기도 하지만 (국가를 인식해야 할)유시민이라는 대한민국의 대표 진보정치인 자신을 다지는 일종의 자격 논문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정치인으로서 자기검열의 과정이라고 할까. 그런데 정치인으로서 솔직한 소망을 담았다고는 하나 외려 정치색이 느껴지지 않아 이 책은 그가 가진 (독자와의)인문학적 소통의 발판을 더욱 굳건히 해주는 밑거름이 될 듯하다. 정치인의 글을 많이 접해보지 않았지만 이 책에서 느낀 문학인 유시민은 논리(전개)의 속도감, 밀도의 일관성, 보편적 설득성이 뛰어나다고 느껴졌다. 자신도 배우면서 그것이 남에게 가르치는 것이 되고 끝내 상대를 설득하는 집요함도 가졌다. 한 권의 책을 독서했다기 보다 국가라는 과목을 이수한 느낌이다. 그러니까 그는 유려하고 화제성있는 ‘말빨’의 근본에 치밀하고 완성도 높은 ‘글빨’까지 소유한 정치인이었다.
1. 국가란 무엇인가
이 사람이 질문을 가지는 순서를 보자. 용산참사를 보면 절로 국가는 무엇을 하는 존재인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된다. 이로 인해 곧 국가가 할 일을 했건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했건 훌륭한 국가가 할 일은 아니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우리는 당연히 훌륭한 국가에서 살고 싶다. 훌륭한 국가 없이는 훌륭한 시민도 없고, 그렇담 행복도 없을 것이니까. 그런데 훌륭한 국가에 대해 말하려면 결국 국가의 본질과 역할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이것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탄생의 경위 및 배경이다. 이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다면 무엇이 이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논리이다. 그래야 이것이 아닌지 당신도 끄덕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하니 당신이라는 사람이 질문하길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나 하는 말이냐고 묻는 격이다. 그가 생각하는 훌륭한 국가란 ‘사람들 사이에 정의를 세우고 모든 종류의 위험에서 시민을 보호하며 누구에게도 치우치지 않게 행동하는 국가’이다. 물론, 현재 대한민국은 그가 바라는 바와는 거리가 한참 멀다.
이 책의 처음은 친절하게도 국가를 말하는 이론을 국가주의 국가론, 자유주의 국가론,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목적론적 국가론으로 구분해 설명한다.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전제 군주제를 이상으로 꼽았던 홉스와 그의 매뉴얼로 보이는 마키아벨리의 통치술은 분단이후 국가주의 국가론을 신봉해온 대한민국의 국가발전사의 배경이 되었다. 사회질서유지와 국가안전보장을 중요시하는 ‘이념형 보수’는 바로 국가주의 국가론을 토대로 한 것이며 한반도 분단체제가 계속되는 한 그들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세력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슬프지만 맞는 말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한국전쟁이 대한민국의 새로운 국가탄생의 시작이었다는 그의 해석은 자명하면서도 뼈아픈 현실이었다.
그는 평화주의자 러셀의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2010>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국가는 복종하지 않으면 안되는 무서운 존재로 군림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 국가는 전쟁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면 언제라도 건강한 남자들에게 목숨 걸고 전투에 나서라고 명령하며, 국가의 의도와 견해에 어긋나는 의견을 내놓는 사람을 배신자로 몰아 박해한다. 자국민을 살해하는 사람과 다른 국민 살해하기를 거부하는 사람을 모두 처벌한다. 민주주의 국가에서조차 국가는 때로 국민에게 맹목적이고 무조건적인 순종을 강요한다. 국가는 때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폭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그것이 폭정임을 은폐한다. ” 33p
“ 어른들은 국가에 대해 이야기 할 때 목소리를 낮추었다. .... 국가와 권력자를 큰소리로 욕했다가 구속되고 재판을 받고 사형을 당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신문에서 읽었다. ....그러면서도 국가는 나더러 자기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하겠노라는 맹세를 아침저녁으로 외치게 했다. 대학에 들어간 후 대통령과 정부를 비판했더니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가두어 놓고 두 달 동안 매를 때렸다. 학적부에서 내 이름을 지우고 교도소로 보냈다. 나는 조국을 사랑했지만 대통령들은 나 같은 시민을 미워했다. 나도 대통령들을 증오했다. 때로는 권력자를 미워하는 것인지 국가 그 자체를 미워하는 것인지 나 자신도 확실하게 알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국가는 그런 것이었다. 그때 대한민국 대통령은 홉스의 전제군주와 같았다. ” 34 p
이에 반해 존 로크, 애덤 스미스, 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주의 국가론은 비슷하면서도 돌아서면 난해한 구석이 있었다. 국가는 ‘세속의 신’이 아니라 ‘공공재 공급자’에 불과하다는 주장과 선이 아니라 악을 저지르지 않는 일에 집중하기 위해 법치주의가 필요하다는 논리가 가장 인상깊었다. 내가 알고 있던 법치주의와 정반대였음을 이 책을 통해 깨우쳤달까. 법치주의는 법과 형벌로 국민(통치 받는 자)을 다스리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통치하는 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진 개념이라는 것이다.
“ 일부 권력자들의 심각한 오용 때문에 대한민국에서 ‘법치주의’라는 개념이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법률과 형벌로 국민을 다스리는 데는 어떤 주의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권력 그 자체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법을 만들 수 있는 힘을 필수요건으로 한다. 법을 만들지 못하는 권력은 권력이 아니다. 법치주의는 권력이 이러한 속성을 제멋대로 발현하지 못하도록, 권력자가 자의적으로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기위해 만든 원칙이다. ” 50 p
법을 넘어서는 군주의 권력행사를 막으려고(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려고) 만든 것인데 나는 그 법을 지키지 않는 자를 처단하려고 만든 것이 법치주의인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안전과 평화를 최우선으로 하는 국가주의론적 피해의식에서 발생한 자발적 복종효과였다.(는 생각이다) 이보다 좀 더 급진적인 자유국가론을 펼쳤던 루소는 ‘법치주의에서 이탈한 독재정권과 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하는 쿠데타의 정치적 정당성을 모두 부정’하였는데 루소의 이론에 비추어 볼 때 우리의 4.19혁명, 5.18 광주민중항쟁, 6월 민주항쟁은 모두 법치주의를 위반하고 법위에 군림한 정부에 대한 정당한 행사라는 것이 그의 견해였다. 그 밖의 밀과 소로의 자유지상주의는 철학적으로 다가왔고 그런만큼 그 뿌리가 깊다고 느껴졌다. 톨스토이, 간디, 마틴 루터, 만델라가 그 길을 따라갔다는 대목에서 ‘어떤 이론의 정치적 성격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정치적 환경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이치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땐 혁신적인 진보이론이었던 것이 지금은 외려 국가가 해야 할 책임을 줄여주고 개인의 능력에 힘을 실어주는 보수적 이론이 되지 않았는가. 고전적 자유주의는 물론이고 자유주의 좌파, 진보자유주의, 신자유주의 모두 생소하기만 하던 내 수준에서 이 책은 기초부터 흐름과 맥락을 짚어주는 친절함이 있었다.
반면 한때 지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마르크스주의는 이 책에서도 여전히 국가를 가장 매력적으로 설명하고 있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국가의 소멸과 개인의 완전한 해방을 가져다 줄 것’이라는 마르크스의 전망을 ‘전제정치의 억압하에 살았던 청년 마르크스의 소망을 반영한 것’이라 부연했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심각학 부작용의 하나로 정치무용론과 정치적 냉소주의를 꼽기도 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무엇보다 근본적인 사회변화를 꿈꾸는데 이 사회혁명이 실패하고 좌절한 상처가 진보와 보수의 대결에 관조적인 자세를 유발한다고 말한다. 마르크스주의의 지적 향수가 가장 깊게 남아있는 곳은 언론, 출판, 학계이며 그들은 시민의 자유, 인권보장, 언론자유같은 문제에 ‘실질적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정작 정치와는 거리를 두는 성향을 보인다고 그것은 좌절한 인류의 꿈이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과 같다고 말한다. 유시민은 이렇듯 국가주의, 자유주의, 마르크스 주의를 살펴본 후 자신의 진보정치에 방향성을 제시하면서 새로운 국가론을 구축하기 위해 목적론적 국가론을 빌려온다. 이는 모든 국가론을 섭렵한 후 내려지는 꽤 합리적인 결론일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가는 길에 최우선 가치로 길잡이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배우고 익혔던 국가관이 어느 시기, 어느 지역에 위치해 있었는지 살펴볼 수 있었다. 나는 밥먹듯이 반공 포스터와 표어를 지어대던 그 시절, 1970년 후반과 1980년대 초반의 국기 게양대 앞에서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처지였다. 나에게 국가는 곧 대통령, 각하는 아니었을까.
2. 누가, 어떤 사람이 국가를 운영해야 하는가
그런가 하면 그는 도대체 시대에 따라 변하기만 하는 그 국가를 누가, 어떤 사람이 운영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짐으로써 대답을 좇아가며 각자 질문에 숨은 함의에 도달하도록 논리를 펼쳤다. 플라톤과 맹자, 트라시마코스의 입을 빌려 왕의 자격을 전했지만 궁극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당연히 훌륭한 사람이 국가를 다스려야 한다는 답이 정답일 수밖에 없는 최초 질문의 효용성에 의문을 제기한다. 그 질문은 이미 최악의 인물이 통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에 공허한 것이고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어떻게 정치제도를 조직할 수 있는가?” 즉, 어떤 제도를 만들어야 만에 하나 최악의 인물이 국가를 통치하더라도 악을 최소화 할 수 있는가와 같은 질문으로 명시화,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유시민은 이 해법으로 민주주의를 제시한 포퍼를 예로 들었고 법치주의에 대한 오해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설파한다. 이 사람이 오해를 지적하는 방법은 대체로 겸손했다. 우리는 민주주의가 ‘국가를 잘 통치할 훌륭하고 유능한 사람과 정당을 국민이 선택하는 제도’일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 하지만 어쩌다 히틀러처럼 최악의 인물을 민주적으로 선출한 사례도 숱하게 많으며 누구나 공평하게 선거한다고 유능한 사람을 뽑으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민주적이었다고 꼭 옳거나 좋을 수는 없다는 말씀.
“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 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 106p
우리는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 마음대로 악을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대가로 똑같이 역으로 훌륭하고 지혜로운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선한 일을 많이 할 수 없다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최선의 인물을 지도자로 뽑아 최대의 선을 행하게 하는 장치라는 오해를 하지 말라는 저자의 충고는 내가 이 책에서 발견한 가장 의미심장한 실용적 메시지였다. 이 말은 어쩐지 최선의 인물이었지만 권력분산과 상호견제로 선한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하는 느낌이었다. 또 비록 최악의 인물을 뽑아 악을 저지르고 있는 현 정부를 똑똑히 목격하고 있지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악하거나 무능한 지배자들이 너무 심한 해악을 끼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민주주의 정치제도’를 잘 발전시키는 것이지 누가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어짜피 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되었다. 곱씹을수록 의미심장한 그의 결론을 그대로 옮겨 적어 본다.
" 이렇게 생각하면, 뽑아 놓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지 않은 제도라고 불평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일시적으로 악을 저지른다고 해도 위축될 이유가 없다. 민주주의 정치제도는 원래부터 그런 위험을 적절하게 관리하기 위해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국민은 언제든, 임기가 정해져 있는 정부를 해고하고 새로운 정부를 세울 수 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이 가능성을 말살하면 독재정부가 된다. " 108 p
나는 이 문장을 읽고 (최악의 인물을 선택한)현 정부에 너무 실망말고 그럴수록 다음 선거를 포기하지 말고 주권을 행사해 어떡하든 정부를 교체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최선의)노무현이 되나 (최악의)이명박이 되나 (대한민국의 분단체제에서는)대단한 사회혁명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니(앞으로도 그럴 것이니) 중요한건 지금까지 어렵게 구축해온 민주주의를 다 같이 발전시키고 더욱 성숙한 사회, 정의로운 국가에서 앞으로의 행복을 찾아보자, 뭐 이런. 그러니까 역으로 너무 한 인물에 목메고 다른 인물을 배타하는 우를 범하지 말자고 말이다. 나는 유시민의 이런 솔직함이 신선했다. 논리를 만들었다기 보다 찾은 것이라 할 수 있는데, 발명아닌 발견은 찰나의 직관이 아니라 고민의 시간과 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서. 그러니까, 누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은 (그에게)운명이 아니다. 운명은 누가 되든지 포기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속, 발전시켜야 할 그의 사명인 것이었다.
3.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인가
국가를 공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가치가 애국심인데 저자는 애국심이 과연 선한 감정이고 장려할만한 가치인지 질문한다. 솔직히 내 세대는 애국심도 시험을 보는 마지막 세대였기에 애국하라는 말은 신물이 나는 선생님 잔소리 쯤으로 생각된다. 마치 지금 공부 열심히 하고 있는데 그러니까 더 공부하라는 부아치미는 말씀만 같아 영 곱게 들리지가 않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학창시절 여름방학, 공포영화를 보러 가서도 영화 시작하기 전에 모두 기립해(행여 앉아 있기라도 하면 그 눈총을 견딜 자가 누구였던가)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따라 부르던 기억은 코웃음이 절로 나올 지경이다. 우리는 모두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존재들이었다. 그랬기에 무슨 군가처럼 6.26 기념일 노래를 고무줄할 때도 힘차게 불러 제꼈다. 체육대회날 응원가마저도 ‘잘 살아보세’였다.
저자는 이 강요된 애국심의 이면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에 대한 증오심, 혐오감이 숨어있음을 꼬집는다. 애국심을 허위라 여겼던 톨스토이는 국가는 배타적인 공동체이기 때문에 애국심 역시 배타적, 파괴적이며 사악한 감정이라 말했다. ‘애국심은 어떤 대상을 위해, 즉 언어에 의해 규정되는 민족 집단을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려는 의지’라는 피히테의 견해는 국가주의자들이 선호하는 개념이라 말한다. 그는 ‘애국심은 어느 민족 또는 국가에 귀속되어 함께 어떤 가치를 실현하려는 자신의 의지에 대한 사랑’이라는 르낭의 견해를 선호했다.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 137p
르낭의 애국심을 발전시켜 정리한 저자의 애국심이다. 진보측에서 애국심이라는 단어를 기피하면 결국 보수측에 그 독점사용권을 허용하는 일이므로 정치인인 자신은 이러한 애국심의 의지를 북돋아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애국심을 정의하는 구절 속에 결국 국가와 삶이 사이좋게 섞여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핵심에 국가가 버티고 있고 그와 연결된 시민의 삶이 존재감을 드러낸다. 분명한 것은 타의적으로 희생하는 것이 애국심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사랑하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는 곧 의지가 빈약해 국가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인데 유시민에 의하면 의지를 북돋는 것은 정치인의 역할이다. 그러므로 정치에 관심이 없다면서(의지를 북돋을 일이 없으므로)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말은 틀린 말이 된다. 기본적으로 애국심에는 정치와 국가, 그리고 국가운영자의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는 뜻이다. 애국심 하나로 뜻하지 않게 점진적으로 애국(정치관심 및 참여)을 유도하는 그의 정치전략이 나는 나쁘지 않았다. 결국 애국심은 고귀한 감정이라기 보다 고집스런 이성이 아닐까. 감성에 호소하는 이념이 아니라 논리로 설득해야 할 전략이 아닐까.
4. 혁명이냐, 개량이냐
국가의 질서를 바꾸는 방법으로 근본적인 사회혁명과 점진적인 개선에 대해 질문하는 장이다.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 혁명주의와 개량주의 어느 것이 효과적인가? 어느 것이 옳은 것인가? 저자가 영리하다 생각된 것은 바로 질문하는 방법이었다. 이 질문의 답은 둘 중하나를 택하는 것이 아니다. 질문이 틀렸음을 말하기 위한 질문이다. 두 가지를 비교한 끝에 그가 제시한 답은 지속적으로 개량하지 못하면 한 번에 혁명으로 간다, 이다. 그러니까 혁명하는 꼴 안보고 싶으면 천천히 개량이라도 하라는 것을 주장하려고 혁명과 개량중 무엇을 선택할래 하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 차선을 답하기 위한 최선을 질문하기. 이때 남겨진 차선은 궁극에 떠밀려 답하는 것이므로 여지가 없다.
저자는, 인류역사상 자유롭고 평등하며 공정하다고 만인이 인정하는 사회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을 기억하자고 했다. 이것이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인간한계적 배경이다. 그런데 혁명의 길과 개량의 길을 따지기 전에 혁명이 일어나는 시점은 언제나 사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민중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인지한 후 라는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 러시아 사회주의 혁명, 중국혁명이 일어난 곳에선 모두 국가권력이 바닥으로 추락한 시점이었다. 하지만 국가조직이 붕괴한다고 국가가 소멸된 것은 아니고 사회혁명으로 탄생한 국가는 구체제보다 더 능동적인 힘을 발휘했다. 혁명의 순기능이다. 그렇더라도, 톨스토이는 혁명이 권력기관 자체를 없애지는 못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혁명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면 ‘혁명으로 탄생한 더 강한 국가는 혁명이 삼켜버린 옛 국가보다 언제나 더 정의로운 국가였을까?’ 정의로와 지는 것도 아닌데 혁명을 해야 하는가하는 원론적 질문에 저자가 제시한 철학자는 카를 포퍼였다. 혁명이 초래한 처참한 결과는 대개 숫자로 대변된다. 이에 포퍼는 ‘점진적 공학’이라고 이름붙인 사회개량의 길도 혁명의 다른 방법이라 제시한 것이다. 사회 근본적인 혁명은 폭력과 악을 초래할 소지가 많으므로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개량의 길이 점진적 공학이라는 것이다. 포퍼의 논리가 맞지만 저자는 혁명과 개량의 길은 양자택일 할 수 없다는 논리로 포퍼의 허점을 지적한다. 누구나 처음부터 폭력혁명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고 점진적인 단계가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점진적 공학으로 악을 해결할 수 없다고 판단될 때 비로소 혁명이 일어난나는 것이다. 즉, 개량의 길을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혁명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고 개량의 길이 막혀 있음이 널리 인식되었기 때문에 사회혁명의 길이 열리는 것이라는 것.
우리가 잘 아는 87년 6월 항쟁은 집회와 시위를 통해 국민의 요구가 드러난 상황에서도 변화의지가 없자 국민들은 폭력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시민들을 공권력으로 통제할 수 없게 되자 집권세력은 민주화와 직선제 개선요구를 받아 들였다. 국민들은 평화적, 합법적으로 독재를 종식할 수 있는 길이 열리자 더 이상 거리로 나오지 않았고 급진적 사회혁명이 아닌 민주주의 정치혁명의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곧 마르크스가 유난히 혁명을 좋아해서 그것을 선택한 것이 아니고 당시 자본주의는 노동계급이 착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점진적 개혁의 길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에 그 봉쇄된 막다른 길에서 사회혁명의 길이 열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는 논리의 방증이다. 그러므로 전체주의를 피하고 싶다면 혁명을 외면할 생각을 하지 말고 부지런히 점진적 개량을 시도하라는 말씀이다. 그것만이 사회혁명의 문을 잠그는 길이며 그 곳에서 마르크스의 길이 열릴 가능성은 없다는 것이다. 혁명을 외면하게 되면 혁명이 일어난다는 논리는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다웠다.
5. 진보정치란 무엇인가
진보는 보수와 어떻게 다르며 진보정치란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인가? 지금부터가 저자가 진짜 말하고자 하는 방향이 담겨있는 질문이다. 나는 사실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의 차이를 잘 모른다. 그저 운동권은 진보이고 여당은 보수이다, 수준에 지나지 않으며 교육과 환경에 의해 진보를 죄악시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지난 시절 내 세대에서 노란 저금통을 들고 노무현을 지지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때도 난 그에게 표를 던지지 않았다. 그가 대통령감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그가 대통령이 되지 않았으면 했다. 이 책에서 말하는 좌절한 마르크스주의자들처럼 나는 정부가 바뀌어도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쪽이었다. 그리고 그가 대통령이 되고나서는 뉴스를 거의 보지 않았다. 그가 죽었을 때 나는 그를 대통령으로 뽑은 적이 없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고 그를 대통령으로 뽑아준 사람들이 많이도 미웠다. 그래서인지 내가 느끼기에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는 내가 아는 진보보다는 보수적이었다. 이 책에 의하면 진보는 진화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이성에 의한 합리적인 전략일 뿐이었다. 그런데 언제든지 진보를 말하기 위해서는 보수도 같이 말해야 한다는 것. 진보를 규정하면 자연 보수도 그 의미가 정해지는 꼴이었다. 사실 보수쪽 사람들은 굳이 보수의 의미를 애써 규정지으려 하지 않는다. 그것이 보수의 특징이다. 언제나 의미를 규정짓고 문제점을 찾아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쪽은 진보였다. 보수는 뒷짐지고 변화하는 진보의 추이에 따라 대안을 마련할 뿐이다. 그런데 내가 인상깊게 느낀 건 이 책에서 진보를 규정하는 과정이다. 진보의 의미를 창출하는 과정이 꽤나 보수적이었다는 것, 어쩌면 현실적인 진보에 이르는 과정만큼은 보수보다 고전적이고 학문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물론, 진보를 추진하고 체현하는 과정과는 다른 이야기다) 유시민은 한때 역사교사로도 재직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최근에 진보진영 인사들은 (진보와 보수의 갈림길에 놓인)내 세대에 먹히는 베스트셀러들을 내놓고 있다. 그들에게서 나는 우연히도 실패한 마르크스주의자의 초상을 나란히 발견한다. 유시민을 비롯한 진보인사들은 진보집권이 현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는 대안이라 여기는 듯하다. 반가운건 이러한 책들이 학문적 각성과 함께 현실정치에의 실패를 교훈삼아 더 이상 계급혁명이나 운동권 세력이 아닌 대안적 집권세력으로서 (세대 구분없이)일반인에게 밀도높은 설득력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유시민은 그런면에서 자신의 할 일을 지략적으로 수행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였다는 결론이다.
먼저 진보는 당위적 요구나 지향이 아니라 ‘사회와 삶의 방식, 사유습성의 실제적이고 불가피한 진화’를 의미한다는 베블런에 의하면 인간은 모두 보수적이라는 말씀이다. 인간 삶에서 보수주의는 특정 계급의 독점적 특성이 아니라 인간의 보편적 속성, 즉 기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날 때부터 보수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환경에서 살아가느냐에 따라 계속 보수로 남는지 중간에 진보로 바뀌든지 하는 변화에너지 이동의 문제라는 것이다. 보수가 생물학적 본능이라는 베블런의 주장은 보수인 나로서는 고마운 개념이다. 진보는 ‘자본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라는 김상봉의 주장에 저자는 그렇다면 김상봉의 진보는 ‘사회주의’라고 해석한다. 진보를 제도적 문제가 아닌 인간적 문제로 볼 경우 ‘인간이 행복을 위해 자유를 확대해가는 과정’이라는 이남곡의 견해는 그러한 주의가 정치와 결합해 나타나는 것이 진보정치라는 저자의 논리를 뒷받침한다. 저자가 가장 선호하는 정치에 관한 답변은 막스 베버(1864-1920)였다. 베버에 의하면 정치는 ‘국가를 운영하거나 국가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이므로 저자는 다음의 질문에 답을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 그렇다면 진보주의자는 국가를 어떻게 운영하려 하는가? 국가를 직접 운영할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 국가운영에 어떤 영향을 어떻게 주려고 하는가? 그들은 국가가 무엇이며, 무슨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할까? ” 199p
저자가 꼬집는 것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국가주의 국가론은 거부하고 자유주의 국가론은 혐오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는 비현실성만 개탄하는 이른바 끝없이 방황하는 행보였다. 진보정치를 하고자 한다면 보다 진취적인 국가론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급기야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마지막 문장, “도덕에 개입하는 정치는 회피하는 정치보다 시민의 사기진작에 더 도움이 되며 더 정의로운 사회건설에 더 희망찬 기반을 제공한다”는 주장에 공감한다는 독서대중을 향한 보편성에의 호소는 이 책에서 느낀 진솔함이었다. 정의를 언급하고 싶었던 저자의 목적은 바로 정의가 국가의 목적이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국가관을 진보정치 국가관에 밑거름으로 삼고 싶었던 까닭이었다.
훌륭한 국가, 선을 행하는 국가,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 자유주의 국가론에 목적론적 국가론을 결합해 저자는 진보주의 국가론을 ‘미덕국가’, ‘선행국가’로 이름하자 주장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는 권력의 남용과 법의 악용을 막기 위한 제도이지만 이제는 국가가 선을 행하게 하자는 것이 진보정치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다음, ‘사회적 연대의 기능을 독점하는 기능국가’로서 복지국가를 실현하자는 것이다. 즉, 가능한 많은 서비스를 보편적으로 제공할 것을 요구하도록 앞장서는 것이 진보주의자라는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진보의 궁극적 목적은 바로 제도와 정책의 문제인 복지국가의 실현이다. 복지는 진보와 보수의 밥그릇 싸움이 아니고 이념투쟁도 아니고 제도적 문제다. 이는 곧 환경과 제도의 변화를 원하는 진보의 본질이기도 하다. 저자는 보수적 인간에서 시작해 진보로 이동하는 사회과정을 충분히 설명하며 이렇듯 진보의 중요성을 복지사회추구와 동일선상에 놓고 결론지었다. 진보정치는 무엇인가? 진보정치는 국가를 어떻게 바꾸려 하는가? 이것의 답을 정리하면 진보정치는 선을 행하는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이고 진보정치는 복지국가로 바꾸는 정치이다, 진보는 이상이고 꿈이었다.
6. 국가의 도덕적 이상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진보정치가 국가로 하여금 실현하게 하려는 선은 어떤 것인가? 진보주의자는 어떤 선을 실현하라고 국가에 요구하는가?
내가 생각하기에 점점 마지막 결론을 향하는 이 장에서 느낀 점을 솔직하게 적어본다.
(그동안 대한민국이라는)국가라는 집단은 (다양한 종류의)악마와 손을 잡았으므로 양심이 없고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집단이었다. (노무현)대통령은 아무리 선한 사람이라도 국가 정의를 위해 악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이다, (나같은)정치인도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미국의 지배를 받고 있는 우리)시장은 정의를 실현하지 않고 소득과 분배는 여전히 불평등하다. 대한민국은 정의로운 국가가 아니다. 그러므로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진보정치가 필요하다. 나는 자유주의자이다. 모든 종류의 절대주의를 거부한다. (기존의)진보정치는 광신주의적 태도를 버리고 (내가 언급한)자유주의 기풍의 철학을 받아들여 더욱 발전해야 한다.
7. 정치인은 어떤 도덕법을 따라야 하는가
이 책의 마지막은 칸트와 막스 베버이다. 진보정치인의 자질과 윤리를 말하기 위해 그는 다음의 마지막 질문을 던진다. 최후의 자격검증에 해당하는 윤리 강령이다.
국가권력이 선을 실현하는데 쓰이도록 하거나 적어도 악을 저지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치인이 지켜야 할 윤리에는 어떤 것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어떤 도덕법이 요구되는가?
칸트가 말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도덕법은 ‘자율적 인간’을 모델로 한다. 여기서 ‘자율’은 욕망대로 흘러가는 자유가 아니라 스스로 정한 목적을 향해 부여한 규칙에 따라 행동하는 자율을 말한다. 이성적 인간은 곧 자율적 행동을 하는 존재를 말하고 자율적 행동은 도덕적 법칙에 의거한다. 칸트가 말하는 도덕은 옳은 행동이라 생각하는 의무감이요 동기이다. 행복해지고 싶은 마음 때문에 도덕을 지키면 행복할 자격이 없다는 논리다. 동기가 순수하고 도덕이지 않기 때문에. 칸트의 도덕법은 공동체의 선을 자발적으로 추구하려는 진보주의자들의 윤리의식과 겹쳐진다는 저자의 해석은 자연스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진보주의자들의 행동원칙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정언명령’에 해당된다고 느낀다. 칸트의 도덕법은 모든 인간에 해당되지만 특히 정치인, 그중에서도 진보주의자에게 필요하다는 것인데 어짜피 동기만 우선시 할 경우 그 동기 때문에 참극을 불러올 수 있다는 한계를 알면서도 굳이 칸트를 베버위에 놓고 도덕법의 체계를 마련하려는 모습이 약간은 작위적으로 느껴졌다. 이것은 현장이 아닌 데스크에서 주로 논문쓰는 연구원들이 잘 사용하는 수법인데 뒤에 나오는 베버의 논리를 더 부각하기 위해, 혹은 베버 하나만으로는 부족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불러오는 이론의 희생이다. 실은 베버와 비교하려고 가져왔으면서 기본이라고 하는 점이 마음에 안들었달까. 이 책에서 유일하게 글감을 위해 잘 배치된 칸트가 철학이 아닌 도구로 전락한 느낌이 들었던 부분이다.
하지만 잘 희생된 칸트 덕에 베버는 이 책에서 가장 빛났다. 진보주의자는 대개 신념윤리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결과보다는 동기를 중요시 한다. 신념윤리만 중요시되고 베버의 책임윤리가 결여된 가장 극단적인 사건으로는 한국전쟁이었다 말한다. 저자는 신념윤리를 지키면서도 결과에 책임을 지는 정치를 이상으로 꼽았다. 베버가 말한 책임윤리는 행동의 예견할 수 있는 결과에 책임을 지는 태도이다. 칸트라는 이상에서 베버라는 현실을 인식하자는 뜻이었다. (미안하게도)나는 진보자유주의 연합정당과 같은 야권연합의 필요성이 바로 베버의 책임윤리를 따른 것이라는 생각은 해보지 못했다. 책임윤리를 따랐기 때문에 연합이 된다면 좋을 일이지만 우선에 연합이 먼저고 그 다음에 책임은 나누어 지자는 뜻으로 생각되었다. 그는 말한다. 연합정치가 설득력을 가지는 것은 정치인의 책임의식이라고. 내가 생각하기에 연합정치가 책임의식을 불러오는 것이 아니라 책임의식이 있어야 연합정치를 할 수 있다는 말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진보주의자들이 정치권내에서 입지가 강화되고 영향력이 커져야 소수 및 사회적 약자도 잘 살 수 있는 복지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는 논리는 더 이상 진보적인 이야기는 아니다. 범야권이 연대하면 정권교체를 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너무나 자명해 상투적이기까지 하다. 이명박 정부는 재임 중 보수세력의 영구집권을 위한 초석을 마련하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그 결과 합리적 보수들은 정의와 복지를 내세운 진보정당을 언제라도 지지할 준비를 끝마쳤다. 하지만 그들이 걱정하는 것은 진보세력이 집권정부가 되더라도 또 노무현정부의 전철을 밟지 않을까 하는 우려이다. 한국의 진보정당은 언제나 노동운동의 전통기반이 없으며 지지기반이 취약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정권교체후 진보의 추친 역량을 의심하는 것은 결코 보수측만의 기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아직 절망적인 것은 아니다. 최근의 선거에서 젊은 층과 여성층의 투표율은 점점 증가하고 있고 급변하는 시국에 일 년이라는 시간은 (알 수 없는)많은 일이 일어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다. 나는 이 책을 진보진영의 선거청치의 프레임에 속한 책이라고는 보지 않았지만 책을 덮고선 스스로 질문을 던질 수 밖에 없음을 통감한다. 마치 그에 적절한 답이라는 듯 유시민은 책의 마지막에 자신의 의지를 사인했다.
“ 진보의 힘이 ‘순수’에서 나오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진보의 힘은 ‘섞임’에서 나온다. 진보를 추동하는 근본적인 힘은 인간의 보편적 이성이다. 사회의 진보는 인간 이성의 발전과 함께 이루어진다.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성이 성장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이념이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정치조직에서도 이성의 힘이 자라기는 어렵다고 믿는다. 다양성을 내포하지 않고서는 정당도 정치도 국가도 인간도 성장하지 못한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연합정치가 지지를 받는 것은 국민들이 그 속에서 정치인의 책임의식을 보기 때문이다. 신념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지만, 책임윤리에 투철한 정치인은 존경과 믿음의 대상이 된다.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 ” 283p
기본적 의무란 무엇인가
이 책을 집필한 후 저자는 국가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존중하게 되었다 말한 바 있다. 나는 처음부터 국가에 대해 아무 생각이 없었으니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을 알 수도 없었다. 진보가 무엇인지 깊숙이 알지 못했으니 보수가 무엇이다 말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다. 이 책은 역으로 보자면 향후 진보주의 연합정치를 정당화하고 진보진영의 대표 정치인으로서 그것을 대국민에게 설득하기 위해 처음부터 국가와 국가 운영자 및 애국심, 혁명의 의미, 정치인의 도덕을 정의내리는 작업이었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정치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이론적이고 고전적이며 학구적이었다는 것이다. 처음엔 국가를 공부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펼쳤고 읽어 가면서는 유려한 필체의 논문을 만나는 느낌이었고 나중엔 순수 지식을 배운다는 즐거움도 느끼게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정치는, 정의는, 전쟁, 그리고 대통령은 바로 국가와 동일한 문제라는 생각이다. 국가가 회복되어야 국민이 회복된다. 그래야 훌륭한 국가도 그 속에서 훌륭한 국민도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에 살면서 국가가 무엇인지 성찰하는 일은 한국인으로서 피해선 안 될 의무에 가깝지 않을까. 비교적 쉬운 방법의 의무이행의 한 단계로서 이 책은 각자 의미있는 시간을 제공하리라 믿는다. 대선을 향한 그의 다음 행보가 퍽이나 궁금해진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아마도 나는 이 책의 모든 잣대로 그를 평가하게 될 것 같다. 하이에크 식으로 말하면 연합이라는 하나의 가치가 전일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는 정의나 평등이라는 단일가치가 지배하는 다른 전체주의 사회와 무엇이 다른지 의문이기 때문이다. 부디 연합이 그의 정치 이데올로기를 얽매는 유일한 덫이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이 책과 함께 읽으면 좋을 책으로 비타 악티바 시리즈 중 <복지 국가, 정원오(2010)>와 저자가 인용한 버트런드 러셀의 책 <왜 사람들은 싸우는가? Why Men Fight (2010)>을 추천한다. 악티바 시리즈는 작년에 읽었는데 얇으면서 정확하다. 러셀의 책은 아직 접하지 못했는데 꼭 읽고 싶다.
이 책에는 복지국가를 말하기 위해 원형국가, 발전국가, 민주국가의 국가 유형별 발전과정이 상세히 담겨있다.
이 책에서도 베버는 국가를 정의한 인물로 인용된다. 국가는 “독점적 강압력, 통일적 권위, 그리고 제반 법률적, 행정적 장치를 기초로 일정한 영토와 그 영토 내 주민을 배타적으로 지배하는 정치 조직 혹은 공동체”라는 것. 베버가 말하는 국가는 초기국가로서 원형국가가 가지는 최소한의 요건을 잘 설명해준다. 이 책의 끝에는 결국 우리도 미약하지만 복지국가라는 결론을 내린다. <국가란 무엇인가>의 제 7장에 비스마르크의 복지국가론과 함께 복지정책의 간략한 설명이 진부하고 부족하다면 이 책은 복지의 수준높은 대책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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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나는 무엇을 보았는가>에 보면 애국심 뒤에 숨은 배타적 증오심을 꼬집는 구절이 있다.
“ 좌절된 도덕성의 관점에서 볼 때 형법의 미덕은 도덕성으로 위장한 소심함 때문에 자연스러운 형태로 표출되지 못하는 공격적인 충동을 발산할 통로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전쟁 역시 똑같은 미덕을 가진다. 형법은 아무리 증오심이 끓어 올라도 이웃 사람을 죽이는 것을 금한다. 하지만 약간의 선전활동만으로도 이런 증오심을 다른 민족에게 돌릴 수 있다. 다른 민족에 대한 살해 충동은 애국적인 용맹성이 된다. ” - 변화하는 세계의 새로운 희망 77p
왜 사람들은 국가에 순종하는가? 하는 질문에 이 책은 해답을 제시할 듯하다. 러셀은 ‘국가의 폐해를 야기하는 주요한 원천은 국가가 권력을 주요한 목표로 삼는다는 데 있다’고 했다. 유시민은 ‘국가는 때로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억압하는 폭정을 성공시킴으로써 그것이 폭정임을 은폐한다.’는 러셀의 문장을 두 번이나 인용했다.
“ 이처럼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주로 전쟁과 전쟁에 대한 공포심을 통해서, 부분적으로는 내부적인 억압을 통해서 형성된다. 국가의 과도한 권력은 현대 세계에 고통을 안겨주는 주요한 원인이자 사람들의 정신적 성숙을 저해하는 무력감을 낳는 주요한 원인 중 하나이다 ” www.aladin.co.kr/shop/wproduct.as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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