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복
김준녕 지음 / 꿈공장 플러스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자차가 없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는, 오가는 시간을 이용하여 책 읽기를 즐겨한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흘러가는 음악에 맞춰 책에 집중하다보면 어느새 내가 가고자 하는 곳에 당도해있는 것이 즐겁다. 그리고 의미 없이 핸드폰만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기보다 이럴 때라도 책을 한권 더 읽어 보자는 마음가짐이 작용하기도 하고 말이다. 특히 올해는 이동이 잦아서, 많은 책을 읽을 기회가 있어 좋았다.

 

각설하고 그런 단편들 중에서도 즐겨 읽는 것이, 이상 문학상 수상집과 신진 작가들의 단편집이다. 문학상 수상집의 경우, 그간 잘 모르고 있었던 기성작가님들의 필력과 그들이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고, 신진 작가들의 단편집 같은 경우, 그들만이 가지는 재기발랄함과 신선함이 좋기 때문이다. 특히 생각지도 못한 소재를 들고 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주제를 풀어놓을 때를 보면 참 멋지구나하고 엄지를 척하니 올리기도 한다.

 

그런 내가 이번에 읽은 책은 신인 김준녕 작가의 단편집 ‘번복’이었다.

 

총 6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모든 이야기가 쓸쓸한 어조나 분위기를 띄는 반면 담담함 필체로 그려져 있어 소재나 주제가 가지는 우울함과 어두움이, 그 존재가 가지는 무게보다 다소 덜해 좋았다. 삼천포로 잠깐 이야기를 비껴내 해보자면, 안 그래도 힘들고 지친 인생살이에 무겁고 어두운 타인의 삶이 더해지는 것만으로도 그 일상이 더 지치고 힘들어 질 때가 더러 있기 때문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 6편의 단편 중,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것은 소설집 첫 자리에 위치한 <나무가 쓰러진 자리>였다. 죽음에 당도한 어머니를 소재로 하여 할미꽃이 되고 싶다던 엄마의 이야기를 듣는 ‘딸’이 화자로 등장한다. 이야기 자체에 특색이나 재기발랄함, 혹은 신선함은 없었지만 ‘죽음’이라는 상실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력과 비유가 뛰어난 글이었다. 특히 할미꽃과 어머니 얼굴에 띈 보라색을 매칭해 비유한 점도 좋았다. 작가는 이후의 단편들에거도 보라색이나 꽃, 나무와 같은 것들을 소재로 배치하여 은유 혹은 비유하였는데, 아마 작가가 좋아하거나 지향하는 소재이지 않나 싶었다.

 

이후의 나머지 다섯 편의 단편들은 재미 면에서는 사실 덜했다. 이야기의 심오함이나 비유, 은유가 간단히 읽기에는 난해하고 복잡한 구조를 띄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만들어 낸 이야기를 잘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작가의 재량이라 생각하기에 다소 아쉬운 부분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가 담는 철학적 사고의 깊이나 상실과 고독에 대한 작가 본인의 생각이 주관이 뚜렷해보여, 앞으로의 작품들이 더 기대가 되었다.

 

그런 기대감에 흐믓한 하루를 선사해 준 책이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꼬부기와 쵸비라서 행복해
김지아 지음 / 이덴슬리벨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애완동물을 곁에 둔 사람은 물론, 여건이 되지 않아 키우지는 못해도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애완동물들이 사람에게 건네는 행복한 에너지와 묘한 안정감을 말이다. 뿐 만이랴. 온갖 재롱으로 주인 –혹은 그를 지켜보는 누군가-을 웃게 만들기도 하고, 사회생활로 곤죽이 되어 집에 돌아왔을 때는 슬며시 다가와 위로를 건네기도 한다. 그들은 어떠한 상황에서든 무조건적으로 내 편이 되어준다. 그러니 그들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랴.


포토에세이 <꼬부기와 쵸비라서 행복해>는 동영상 채널 유트브에서 전세계에 있는 수 백 만명의 시청자에게 사랑을 받고 있는 고양이 ‘꼬부기’와 ‘쵸비’의 일상을 움직이는 영상이 아닌 정지된 컷으로 담고 있다. 하얀 털이 복슬복슬한 형 ‘꼬부기’와 어느새 형보다 더 거대한 몸집을 지니게 된 ‘쵸비’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담겨있다. 얼굴만 봐도 너무 예쁜 두 형제의 사랑스러운 애교와, 말없이 건네는 위로와, 주인을 향한 관심과, 무조건적인 애정이 책 안 가득 컷 컷을 채워, 사진만 봐도 힐링이 되는 기분이다.


특히 1년여간 친구가 맡기고 갔던 고양이 두 마리를 돌보았던 적이 있던 터라, 두 녀석의 묘생(?)일기를 보며 자꾸 주억거리는 고개를 바로 잡느라 힘들었다. 더불어 햇빛이 좋아 베란다 창에 껌딱지 마냥 달라붙어있던 녀석들을, 작은 박스 안으로 숨어들어가 몇 시간을 찾아 헤메던 녀석들이 부스스한 눈으로 상자 안에서 고개를 들이밀 때의 안도감과 당혹감 등, 잊지 못할 추억들이 둥실하고 떠올라 웃음 짓게 만들었다.


지금은 다시 애묘인으로 돌아와 포메라니안을 키우고 있지만 책을 보고 있자니 다시 집사로 거듭나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생각이 들었다는 것뿐이지, 아마 오랜 시간이 흘러도 내 성격 상 강아지의 친근함에서 벗어나지는 못할 것 같기도 하다.)


더불어 책에는 정지된 그들의 모습 뿐 아니라, QR코드를 연결해 두 냥이의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볼 수 있도록 만들어두기도 했다. 살아있는 녀석들이라 그런지 사진의 정적임보다는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이 훨씬 더 나를 미소 짓게 했다. 동영상을 통해 그들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서 계속 입을 귀에 걸고 있었다. 어쩜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는지 하고 말이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의젓하고 착한 형 ‘꼬부기’가 복막염으로 인해 1년여 간 아파하다가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것이다. 책 말미에 저자가 조심스레 건네는 이야기를 읽고 나니 책을 덮고도 내내 가슴이 아팠다. 책을 읽는 동안 마치 곁에서 나를 위로해주던 녀석이 훌쩍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였다. 저자의 말처럼 착한 아이였던 만큼 부디 좋은 곳으로 갔기를 바라는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좋은 집사들과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나중에 꼭 다시 그들과 만나 행복할 수 있기를 –저자의 말을 빌리자면- 빌었다.


여러모로 힐링은 물론, 행복을 느끼게 해준 책이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나몬 스틱
고은주 지음 / 문이당 / 2018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당장 결혼한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것 없는 나이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결혼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있다. 아마 미디어가 만들어 준 환상 때문일 것이다. 방송은 해피엔딩으로 끝난 드라마에 대해서는 결말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결혼에 대한 좋은 환상을 가지고 있는지고 모른다.


하지만 서른 중반의 나이가 되어 주변을 돌아보면 막상 결혼 후 부부들이 가지는 현실은 시궁창 같을 때가 많다. 겉으로 보기에 금술이 좋아 보이는 부부들도 그 이면에서는 속앓이를 많이 한다. 다만 웃음의 가면을 뒤집어 쓰고 말을 하지 않을 뿐이다. 혹은 그렇지 않음을 가장하기 위해 넘치는 화를 참을 뿐이다.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쇼윈도로 위장한 부부도 많고 서로의 약속 아래 관계를 지속하는 것 뿐이다.


소설 '시나몬 스틱'은 결혼 후의 상황은 물론, 인간 관계에서 일어나는 좋지 못한 상황들에 대한 '변주'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사람 간 서로 이어주는 마음이 항상 같을 수 없음을, 그 변화의 끝에선 두 사람의 관계가 결국 극단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음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이야기는 아름답지 못하다. 드라마가 아니다. 이것이 바로 현실인 것이다. 


표제작 <시나몬 스틱>은 남편의 외도를, 외도하는 상대 여학생의 전 남자친구로 부터 알게 되면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을 그린다. 다만 그 과정이 극적이지 않다. 여자의 말처럼 어른이란 그런 것인가 싶다. 더 많은 것들을 위해 그 정도의 일쯤은 감내하고 휘발할 수 있는 존재. 그리고 여자는 남편이 사랑하는 여핵생의 전 남학생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남편에게도 전 남자친구에게 아내와 두 사람의 일상에 대한 자세한 메세지가 오지만 여자는 남자에게 말한다. 믿으면 현실이고 믿지 않으면 그걸로 끝이라고.


<마스카라>는 다소 독특하고 난해하다. 남편의 외도나 기타의 문제들이 이혼의 사유가 아니라 마음이 끝았음을 고한 아내가 갑자기 집에서 사라지고 나서 남자는 아내의 향기-흔적-를 찾기 위해 노력한다. 아내의 채취가 남겨진 것들을 끌어모으며 급기야 자신이 하장을 하고 옷을 입어보는 기이한 행동도 서슴치 않는다. 그러나 어느 곳에도 아내의 향취는 없다. 그러다 구석 어느 곳에 찾게 된 아내의 스타킹에서 남겨진 아내의 향취를 느낀다. 그는 그 향취를 찾기 위해 스타킹에 코를 박고 써보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이 여전히 남겨진 아내의 향취인지 그의 기억에 남겨진 냄새인지는 그 자신도 답을 구하지 못한다.


<이식>은 남편의 간이식 후 급격히 기울어진 집 안을 위해 자신의 난자를 파는 여성의 모습을, <카메라 루시다>에서는 제주 4.3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두 모녀의 불행이 되물림되나 두 모녀는 거짓 미소를 지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듯 행동함 -자신들의 내면의 소리가 아니라 바깥의 모습에 눈치를 보는-을 보여준다. <불현듯이>는 사람을 믿지 못하는 여자가 아파트에서 일어난 사고를 계기로 옆집 남자와 친숙한 관계를 맺게되면서 자신의 어두운 기억을 되찾아가는 과정을 그린다. <표류하는 섬>은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잘사는 조부모 덕에 자신의 아이는 윤택하게 삶을 이어나갈 수 있을 거라는 엄마의 어두운 마음을, <너의 거짓말>은 절친이었던 두 여성이 속으로 서로를 질투해가며 그간 지내오다가 그것을 한번 터트리기 시작하며 둘 사이가 급격히 나빠지지만 결국 서로를 위하고 기댈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고 서로를 모질게 했던 그날부터 다시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시작해나가자는 이야기를 그린다.


이야기는 앞서 말한 것 처럼 환상을 가지거나 아름답거나 예쁘지 않다. 현실적이라 그래서 아프고, 어둡다. 하지만 그 묘사가 세밀하고 그 과정을 통해 우리는 내 삶의 어두움에 대해 공감받는다. 그리고 과정의 풀이보다 마음의 안식과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인간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모음집이었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랑하는 습관 - 도리스 레싱 단편선
도리스 레싱 지음, 김승욱 옮김 / 문예출판사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
당신은 그저 사랑하는 습관되었을 뿐이에요.
-
관성이란 물체가 외부로부터 힘을 받지 않을 때 처음의 운동 상태를 계속 유지하려는 성질을 말한다. 사랑을 겪어본 사람들에게도 관성이 작용한다. 사랑을 통해 얻은 따스함에 대한 상실은 그것을 계속 갈구하고 원하게 만들어, 연애를 끊지 못 하게 만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 뒤, 그 사람 때문이 아니라 허전함을 참지 못하여 습관적으로 사랑을 찾아 떠나기도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혹은 우리 중 일부는- ‘습관적’으로 누군갈 갈구하고 애정하고 사랑하고 이별하고 아파한다.


노벨상 수상작가 ‘도리스레싱’의 단편집 <사랑하는 습관>은 동명의 표제작에 이런 문제를 제기한다. 뿐만 아니라 깊은 통찰력으로 그 여자, 동굴을 지나서, 즐거움, 스탈린이 죽은 날, 와인, 그 남자, 다른 여자, 낙원에 뜬 신의 눈 등까지 총 9개의 단편을 통해 이야기의 질은 물론 독자가 사유할 수 있는 폭을 넓혔다.

 
다시 소설의 이야기로 돌아와, 표제작인 <사랑하는 습관>에서는 외로움 때문에 습관적으로 일탈을 즐기는 남자를 통해 사랑의 관성적인 측면을 부각시킨다. 결혼을 했음에도 여러 여자와 유희를 즐기는 조지는 진짜 사랑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사랑을 논한다. 그런 그에게 또 한 번의 사랑을 찾아온다. 상대는 서른살 차이나는 보비. 둘은 결혼을 하지만 그게 진짜 사랑으로 결혼을 한 것인지, 외로움에 기인한 습관적인 행위인지는 불명확하다. 하지만 결국 그건 고독과 쓸쓸함이 일으킨 환상적인 일들의 연속성에 기인한 마음이었음을 재차 확인할 뿐이다.


<그 여자>는 각 자 젊은 시절 두 사람이 현재 묵고 있는 호텔에서 만난 여성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여성을 말하는 듯하지만, 그 무렵 웨이트리스가 와서 (한명의) 여자가 두 사람의 추향에 맞추어 머리 색깔을 바꾼 것이 아니냐고 한다.


<동굴을 지나서는>는 외로움을 이겨내고 홀로 성장해가는 아이의 모습을, <즐거움>에서는 프랑스인 중년부부가 휴가를 떠나 영국인 젊은 부부를 만나 일어나는 일을, <스탈린이 죽은 날>은 스탈린의 죽음에 대한 기사가 일어나기 전날의 이야기를 소재로 하여 글을 엮었다. 외에도 남편의 외도를 바라보며 그가 돌아올 거라 생각하는 여자는 물론, 세상이 만들어 놓은 규칙을 거부하는 여자의 이야기도 나온다.

 
도리스레싱의 이번 단편은 1950년대 단편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파격적인 내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욱이 현재보다 더 여성들이 주체적이고 자주적이라 느꼈다.
 

다만 생각보다 이야기의 진도가 빨리 나가지 않아 고생했는데, 번역이 다소 딱딱했던 탓이거니와 이야기의 중간 중간 상황을 생각하고 작가가 읽어주길 바라는 생각들을 찾아내고 사유하느라 그랬던 것 같다. 그럼에도 많은 생각과 재미를 준 책이었고, 그녀가 쓴 나머지 11편의 단편이 실린 책 <2018년 7월 19호실로 가다>라는 책도 한 번 읽어보고픈 마음이 들었다. 사유와 성찰이 절실하고 조용한 혼자만의 공간이 필요할 때 읽으면 좋을 책 같다.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우 매거진 Nau Magazine Vol.3 : Berlin 나우 매거진 Nau Magazine Vol.1
로우 프레스 편집부 지음 / 로우프레스(부엌매거진) / 2018년 9월
평점 :
품절


언젠가의 일요일 저녁, TV에서 재방송하던 <꽃보다 할배 리턴즈>를 보고 베를린에서 지낸 일주일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지만 그때는 참으로 아찔했었다.

 

2002년 첫 해외여행 당시, 여행사 측의 실수가 있었다. 표를 받았는데 귀국일이 내가 요청한 날보다 일주일 뒤로 잡혀있었던 것이다. 자유여행이었던 내 티켓을, 같은 날 그 여행사를 통해 독일로 가던 단체여행객들의 표와 함께 구매한 탓에 문제가 생긴 것이다. 상황을 파악하고는 없는 시간을 쪼개 공항에서 변경하려 했지만 불가능하다 했다. 그러면서 독일 현지에서 표 변경 가능 여부를 물어보라했다, 시작부터 불안했지만 설마 여행사 측에서 실수를 했을까하는 생각에 일단 비행기에 올랐다.

 

그렇게 예정된 유럽여행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독일 베를린으로 들어왔다. 항공권에 대한 불안이 여전히 남아있었기에 도착하자마자 공항부터 찾았다. 그런데 현지에서도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듣게 되었다. 여행사에서 (아마도) 가장 저렴한 티켓을 일괄 구매했던 탓이었던 건지 내 티켓의 일정변경이 불가했던 것이다.

 

정말 눈앞이 깜깜해지는 순간이었다. 더욱이 유럽을 돌며 수중에 남은 돈도 거의 없었다. 약 일주일간  계획에도 없이 감금(?)아닌 감금을 당해야하는 상황이었다. 6일치의 숙박비를 제하고 나면 빵으로 연명해야할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발만 동동 굴리고 있을 때, 다행히 숙소에서 구세주를 만났다. 한국에서 같은 비행기에 올랐던 누나가 나의 상황을 알고 얼마간의 돈을 빌려준 것이다. 그렇게 나의 베를린 생활이 시작되었다.

 

사실 처음 계획한 일정상으로는 독일은 둘러볼 시간이 없었다. 부족한 여행기간 내에 여타 여행지에서 시간을 너무 소비한 탓에 도착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오도록 일정을 잡았던 탓이었다. 그래서 아무런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숙소 근처에 있는 볼거리 몇 개 정도만 잡아뒀었다. 그것도 시간이 맞지 않거나 여차하면 둘러보지 않아도 될 만한 것들로만 생각해두고 있었다. 그래서 여행지를 구하는 것도 어려웠다. 동독과 서독이 베를린 장벽을 가운데 두고 대치하고 있다는 사실정도 밖에 몰랐던 게스트 하우스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짧은 영어를 써가며 조악한 정보를 겨우 끌어 모아 여행을 시작했다. 그렇게 홀로코스트 메모리얼 공원을 위시하여 이스트사이드 갤러리, 체크포인트 찰리 등을 바라보았다.

 

짙은 회색이 그득한 가난한 도시는 굶주려보였고 여전히 적막해보였다. 그래서 처음에는 어색하고 무서웠다. 딱딱한 어조와 억양이 주는 강압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하루, 이틀 시간이 흐르고 그 분위기에 익숙해지자, 그곳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도시 전반에 깔린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는 가끔 나를 감성적으로 변하게 만들었고 나는 그때마다 무엇인가를 끄적이기 시작했다. 시간이 남았기에 다른 여행지와 달리 그냥 공원 벤치에 앉아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지나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네들의 삶을 관찰하기도 했다. 그렇게 베를린에게 마음을 열어갔고 귀국 날에서는 오히려 아쉽기 까지 했다.

 

그리고 <나우 매거진 : 베를린>편을 통해 며칠 상간으로 다시 만난 베를린은 방송을 통해 어렴풋하게 기억하던 그곳에서의 나의 기분과 추억을 상세히 꺼내주었다. 짙은 색감의 사진들에는 여전히 회색빛이 묻어, 어딘가 톤 다운된 느낌이었지만 그게 내가 느낀 베를린의 색이라 좋았다. 길지 않지만 생각할 거리를 던지는 글들 역시 읽고 느끼고 공감하기에 좋았다. 물론 짧은 시간 안에 그 도시에 대해 얼마나 내가 잘 알겠냐 만은, 그런 기억들이 내 안에 여전히 살아 숨쉬고 꺼내볼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원래 한번 여행 간 곳은 되도록 지양하는 편 –회사 생활을 하는 터라 긴 휴가를 득하는 것도 어려울뿐더러, 여행지에서 조차 여유를 부리지 못하기에 되도록 다양한 풍경을 보는 삼을 지향하기 때문이다-인데 시간도 어느 정도 흘렀겠다, 다시 한 번 베를린을 추억할 겸 떠나 보고싶다는 욕구가 치밀어 올랐다. 내년 여름휴가는 베를린으로 훌쩍 떠나볼까 보다. 나우 매거진 한 권만 살짝 들고, 훌쩍.  (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