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책은 깔끔하다. 땡기는 맛은 없다. 빠지는 맛도 없다. 폐끼치지 않는 문화랑 관련이 있는 걸까. 일본의 평균적인 독자라면 한국 책은 너무 뜨겁고 질척거린다고 느낄지도 모르겠다.그래도 역시 한 인간이 자신의 인생을 바쳐 연구한 분야에 대한 이야기에는 가끔씩 푹 찌르는 구석이 나온다. 사교적 웃음과 제스처로 아무리 감추려해도 애정이 결국 삐져나오고 말듯이. 그런 의미에서 융에 관한 입문서로는 아직 이만한 책이 없을 듯. 그게 좀 아쉽기도 한 대목이다.
채드 추천으로 읽기 시작. 채드가 추천한 책은 대체로 훌어보기라도 하는데 이 책은 훑어본 구역에 재미가 널려 있어서, 신형철의 추천에도 불구하고(문학 평론가의 추천책은 사지 않겠다는 다짐을 고이접어두고) 구매했다.책의 부작용은 도스토옢스키와 카프카가 읽고 싶어진다는 것.(정확하게는 조지프 프랭크의 도스토옢스키 전기가 읽고 싶어진다) 맞춤법상 도스토예프스키가 맞는건지 옢스키가 맞는건지 모르겠는데 책에서는 계속 옢스키라고 한다. 이름이 한글자라도 줄어서 외우기가 수월해지기를 바란걸까. 러시아에서는 애칭으로 줄여부르는 습관이 있는 모양인데(그나마 다행이다), 예를 들어 죄와벌의 라스콜리니코프의 애칭이 로쟈란다. 그럼 도스토옢스키도 도키나 도토라는 식으로 애칭이 있지 않을까 싶어 찾아보니 ‘페자‘란다. 도스토옢스키를 어떻게 부르면 페저가 되는 걸지 궁금하다. 이럴 바엔 그냥 처음부터 이름을 짧게 지으면 되는 거 아닌가 싶지만, 러시아인들도 사정이 있을테니 투정은 이쯤해야겠다.
말들이 많은 사람이지만, 집단 이데올로기에 반대한다는 입장만으로도 내겐 존재가치가 충분해보인다. 대의 아래 모두 무릎꿇고 머리박아, 가 이름만 바꿔서 창궐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하지만, 이건 인간 사회의 만성질환같다. 융에 관한 새로운 독법을 제시하는 이 책이 국내에서 별로 거론되는 일이 없다는 게 의아할 정도다. 이걸 좀 활용하면 라캉의 해괴망측한듯한 이론도 대충 엮어넣을 수 있는 신경생리학적 토대를 뽑아낼 수 있을 것도 같은데..지나친 희망이려나. 쉽진 않은 책이라 찬찬히 꾸준히 꼼꼼하게 읽는 중이다.
푸딩을 숟가락으로 떠먹는 것처럼 쉽다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인데 그게 다시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일부 학자들이 라캉의 프랑스적 난해함을 핑크가 미국적 실용주의로 깍뚝썰기 해버렸다고 핑크의 집 앞마당에서 시위하는 중인데 어슷썰기건 깍뚝썰기건 일단 맛은 좋다.
예전에는 작가들이 글을 쓰고 대중들이 그걸 읽었는데 요즘은 대중들이 글을 쓰고 그걸 아무도 읽지 않는다, 는 구절을 보고 샀다. 세태풍자 같기도 하고 겉멋든 중2의 일기장 같은 경구를 넘겨보다보면 아 나만 그런 건 아니구나 하고 안심이 되는게 이 책의 매력이다. 책을 본건 땡스북스였는데 정작 산 건 알라딘 중고서점이었다. 이래서 독립서점들이 어렵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