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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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_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  



#1. 은은한 조명, 나만의 공간, 책이라는 보물이 있는 곳_ 서점

 

 마지막 책장을 덮자,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 유수의 서점들이 내 마음에 안착했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한 책이었다. 집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도 난 반고흐가 그린 '밤의 까페테라스'에 앉아 노란 조명 아래, 뜨거운 커피 한 잔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한 처음 가본 아기자기한 거리에서 문득 발견한 서점으로 들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 사이에서 책 한권 뽑아들다 그 빈 공간 사이로 마주친 누군가의 시선에 놀라 살짝 미소 짓기도 했으며 금서가 되어버린, 누군가 슬쩍 놓고 간 책 한권을 구석자리에 앉아 때론 긴장하고 때론 낄낄거리며 읽어내려가는 내가 상상 속의 공간에서 춤을 추고 유랑하고 있었다.

 

 제목만으로도 무한한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이 책, '노란 불빛의 서점'. 이 책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점을 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머물 수 있는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보냈던 버즈비는 때론 이웃집 아저씨처럼 때론 박학다식한 전문가처럼 우리에게 책에 대해 재미나게 혹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느림'을 동반하는 '책'이라는 매개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떤 색다른 세계로 초대하고 이끈다. 어느 순간 버즈비는 책을 미친 듯이 갈구하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서점에서 책더미에 쌓여 일하는 직원이 되어 있었으며 책을 판매하며 유랑하는 외판원, 서점이라면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감탄하며 즐기는 서점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막연하게 나 또한 '서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품은 적이 있었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책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나누는 은밀한 대화들. 그것들이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가 늘 약속 장소로 정해서 만났던 단골서점은 육체적 노동에 찌들린 청년과 불친절한 금전출납기의 직원, 밤늦도록 유리창 너머의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있을 뿐이었다. 그건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줬고, 어떠한 것도 경험해보지 않은 채 그저 서점을 들락거리는 고객으로 머물게 했을 뿐이었지만 버즈비는 40년 간 서점이란 공간에서 즐기고 맛보고 경험하고 분노하며 지냈으니 그는 행운아였다.

 

 

  

#2. 책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버즈비는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가며 어떻게 책이 만들어지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우리는 그 여행길에 초대한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 생겨난 전자책, 인터넷 쇼핑몰, DVD와 라디오, 텔레비전. 그 모든 것들이 종이책과 서점이 사라질 거란 끊이지 않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점 매출은 조금씩 늘어가고, 여전히 사람들은 종이책을 사본다. 그것은 우체통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요즘 시대에 여전히 손글씨로 손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이 이 사회를 장악해도 여전히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듯이. 종이의 각기 다른 질감, 책장을 넘길 때의 사각거림, 밑줄을 그을 때의 그 짜릿함, 펜을 쥐고 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는 익숙한 손놀림. 우리가 아직도 그러한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3. 한 권의 책, 세상은 아주 서서히 변해간다. 영화, HELP

 

     

<스키터가 에이블린에게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유색인종 가정부의 입장에 대한 인터뷰를 권하고 있는 장면이다.>

 

"파트와란 제도는 독특하다.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책의 내용은 언제라도 삭제당하거나 정정될 수 있고, 금서로 묶이거나 불태워질 수도 있었다. 사정이나 어쨌든 간에, 작가와 출판인은 자기들이 출간한 저작물 때문에 추방당하거나 투옥될 수 있었다."(p.204)

 

 어느 나라건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금서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비단 책 뿐만 아니라 노래나 영화 많은 예술 영역에서는 사회, 문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도 우리가 보거나 읽혀지기가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수많은 투쟁과 죽음을 통해 왔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문득 인종차별의 이야기를 다룬 가정부 이야기 가 떠올랐다. 백인이지만 유색인종 가정부에 대한 차별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책으로 담고 싶어했던 스키터와 백인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잘 돌보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 그 둘의 만남으로 인해 라는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의 투쟁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힘겨움과 눈물과 아픔을 견뎌야 했는지를 알게 해준 영화였다.

 

 왜 우리는 이토록 힘겨운 싸움을 견디면서 책을 만들고 또 책을 읽는가. 버즈비는 말한다. '책'을 통해 우리는 아주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고. 느리지만 조금씩, 한 번에 한 발자국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가 보고 즐기는 문화와 예술 영역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무수한 '책'과 '사람'의 힘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4. 자본의 힘으로 등장한 대형서점은 작은 모퉁이 서점을 꿀꺽 삼켜 버리다.

                                                                             영화,You've got mail


 노란 불빛의 조명, 꽉 들어찬 책, 맛있는 빵과 함께 마실 와인.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 순간!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 두 남녀. 그들은 책을 사랑하고, 서점을 사랑하고, 그 속의 소통을 즐긴다. 서점에는 그런 낭만이 있다. 같은 책을 두 사람이 함께 집어들게 되는 희열의 순간.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련부터 찾아오게 되는 두 사람. 자본주의 사회에 소비자가 원하는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한 조 폭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하며 책과 하나되어 엄마가 물려주신 모퉁이 서점을 운영하는 케슬린 켈리. 거대한 폭스 서점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과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쉼터 및 벤치, 찬찬히 책을 읽는데 분위기를 더해줄 향긋한 커피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고 거대하게 만들어 놓았다. 얼마 간 홍보를 위해 할인정책과 맛있는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까지. 그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모퉁이 서점은 서서히 대형서점으로 인해 몰락해간다. 어린이에 관한 서적이라면 뭐든 읽고 진정으로 책을 사랑했던 케슬리 켈리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버즈비는 이 책에서 수많은 서점들을 비교하고 구석구석 나라마다 서점이란 서점을 다 구경하고 다니면서 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서점들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것은 단지 서점들의 개성과 특성에 의해 살아 남거나 그렇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고 꼭 큰 서점이라서 해서 좋은 것도, 꼭 작은 서점이라 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난 이 대목에서 이 영화를 떠올리며 과연 두 서점이 모두 살아남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해 보게 되었다.

 

 

#5. 지금 여기에, 이곳에서, 우리는 책과 소통한다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 환한 빛이 비춰진다. 조금씩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선명해진다. 살며시 손을 내민다. 감촉이 느껴진다. 부드럽다. 체온이 전해져 온다. 따뜻하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진다. 달콤하다.

 

 차갑고 단단하고 딱딱하고 어색하고 냉정한. 온기라고는, 감촉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ON LINE'이라는 불빛 속에서 우리를 연결해주는 긴밀하고도 촘촘한 섬세하고도 친밀한 'OFF LINE'이라는 숨결을 느낀다. 그 고리를 엮고 있는 단단한 실타래, 그건 바로 '책'이라는 마법이 아닐까.

 

 단지 '종이'라는 가볍고 하얀 질감의 나무가 검정 혹은 푸른 잉크와 여러 색채의 물감을 만나 단단히 묶어 놓았을 뿐인데, 책은 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당신의 손길이, 당신의 발길이, 당신의 숨결이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당신의 생각이, 느낌이, 마음이 나에게 전해져 온다.

 

 

#6.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_ 당신과 연결된 그 고리를 붙잡는 것!

 

우리는 때때로 외롭다. 책을 읽고 서점을 가고, 맛있는 것을 먹고, 거리를 걸어도 때로는 사무치도록 외롭고 혼자라고 여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마음을 단번에 이해해줄 한 사람의 말 한 마디, 따뜻한 위로 한 줌 그리고 꾸깃꾸깃한 종이에 정성스레 적어내려간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한 줄의 문장.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서점에서 우리는 타인 속에 홀로 서 있는 외톨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타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p.290)

 

#7.변화하는 너와 나 그리고 세상 속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잊혀지고 사라지고 버려지는 것들을 가슴 아프게 느낄 때, 부서지고 깨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맛보고 있는 것이리라.

 

 케슬린 켈리가 텅 빈 서점 안에서 엄마와 춤추던 추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변화란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마음을 다친 것이라고 아프게 말했듯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일이 아닐까.버즈비가 느끼는 서점이란 공간, 그리고 그의 마음을 울리는 책. 그것은 아마 그에게 외로움을 달래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그래서 자신의 삶이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도 버즈비처럼 서점을 일상처럼 드나드는 너와 나는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 물들어 변화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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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차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24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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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으로 가는 불수레란 뜻을 지닌 '화차'.

읽는 내내 무엇 때문에 이런 제목을 쓰게 되었을까, 궁금했다.

그리고 중간 지점을 넘어 거의 끝 무렵에 다가갈 때, 난 소름 돋도록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지닌다는 것, 그 굴레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때론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결혼을 앞두고 갑작스레 약혼자가 사라졌다. 그녀 이름은 세키네 쇼코.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약혼자를 찾으러 나선 은행원인 가즈야는 먼 친척뻘인 형사 '혼마'에게 염치불구하고 그녀의 행방을 부탁하게 된다.

혼마는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녀가 세키네 쇼코가 아닌 세키네 쇼코로 위장한 '신조 교코'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사실을 안 순간부터 가즈야는 분노하고 더이상 책 속에서 등장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과연 안다, 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갑자기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사라지고 만다면

이제까지의 일상처럼 녹아 있던 이 삶이 모두 거짓처럼 꿈처럼 여겨지지 않을까.

과연 내가 이제까지 제대로 살아온 걸까, 하며 자신의 존재마저도 흔들리게 될 것 같은 기분.

아마 가즈야도 그런 기분이었을 것이다.

 

도대체,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저버리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던.

아니 정확히 얘기하자면 결혼을 결심한 사람에게까지 속여가며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나는 마지막 장을 덮을 때까지 언젠가 신조의 마음 속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거란 희망을 놓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혼마가 신조 교코를 수사해 나가면서 내면적 변화를 겪는 것들을 함께 느끼며 나 또한 동화되어 갔던 것이리라.

 

신조 교코는 첫눈에 봐도 미인이라 불릴 수 있는 아름다운 여성이었고,

어떤 일을 하든 꼼꼼하고 야무지게 하는 성격이었고,

누구보다도 이 사회에서 행복하게 잘 살아보고 싶은 사람이었으며,

사소한 것들을 보면서 감탄하며 아름답게 여기는 존재였다.

 

그런 신조 교코가 세키네 쇼코를 죽이고, 세키네의 이름을 훔치고 어쩌면 다른 누군가를 죽였을 가능성까지

충분히 염두해 두면서도 형사 혼마가 그녀를 미워할 수 없었던 것은... 우리 사회의 슬픈 한 단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봉이 이 사회에서 카드빚이라는 것을 아주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는 현실.

아버지의 카드빚이 대물림되어 가족들은 흩어지고, 도망자의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신조 교코.

 

그저 평범하게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이루고 가끔은 맛있는 밥을 지어 먹고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살아가는 것.

그게 신조에게는 그토록 어려운 일이란 말인가.

아마 그녀 자신도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물었을 것이다.

이 사소한 것이 내겐 그토록 어려운 일일까.

한 번쯤은 나도 누릴 수 있는 것 아닌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새로운 삶을 살고자 훔친 세키네 쇼코.

피하고자 했던 운명의 수레 앞에 벗어날 수 없는 굴레를 만난 신조 교코.

그 둘은 이상하게도 닮아 있었다. 벗어나려고 했던 카드빚, 그 대물림을 막고 싶어 아버지가 제발 죽었기만을 바랐던 그녀.

신조 교코가 훔친 세키네 쇼코의 삶도 그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마치 오이디푸스왕의 운명처럼. 피하고자 했던 운명은 결국엔 그렇게 찾아오고야 만다는 것.

 

이름과 삶을 훔쳤지만 끝내 자신을 버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한 절대로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신조 교코는 그런 면에서는 아주 강하고, 단단한 뿌리를 가진 여성이었다.

 

이혼 경력이 있는 신조 교코는 자신 때문에 남편의 부동산으로 매일같이 찾아오는 빚쟁이들 때문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리자 급기야 전남편과 도서관에서 예전 신문들을 뒤지며 그녀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혈안이 되어 찾게 되는데... 남편은 아버지가 죽길 바라는 신조 교코의 모습을 보며 '악마' 같다는 말을 뱉는다.

그 일 이후, 그들은 이혼하게 된다.

 

이 장면을 읽는데,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어느 순간 변해있다. 나를 사람이 아닌 벌레로 보는 느낌이다.

바로 앞에 앉아 있는 졸음이 가득찬 누군가, 공부를 하고 있는 누군가, 책을 찾고 있는 누군가, 시원한 공기를 만끽하고 있는

누군가. 그렇게 많은 누군가는 알지 못한다. 신조 교코의 삶을. 한 발짝도 되지 않는 거리에서 그렇게 멀고 먼 삶을 살아간다.

너무도 다른 시간을 살아간다. 얼마나 잔인한 일인가, 생각했다. 그 슬픔 속에서, 그 버림 속에서 신조 교코는 강해져야 했다.

다른 돌파구를 찾아야 했다. 감상에 젖어 있으면 안되었다. 그것이 자신을 이끄는 힘이었다. 처절하게 혼자라는 느낌. 그 느낌 속에 빠져 있기 보다는 혼자 우뚝 서야만 했다. 새로운 삶을 향해 두손을 쫙 뻗고 힘차게 나아가야만 했다.

 

신조 교코의 첫 번째 대상 세키네 쇼코의 삶을 훔친 건 실패였다.

이제 다음 대상이 필요했다.

즉시 실행에 옮긴다.

마치 다시 태어난 것처럼 새롭게 시작하는 것이다.

슬픔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고, 계획대로 나아간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는 혼마가 있다.

그렇게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마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이다.

신조 교코는 어떤 말을 하게 될까.

침묵을 지킬까, 울게 될까.

아니면 부정하게 될까.

어쩌면 전혀 상상하지 못한 말을 하여 우리를 놀라게 할 지도 모르겠다.

 

무서운 장면이 딱, 집어 있었던 건 아니지만

밤에 읽는 내내 혼자 무서움에 떨었던 책, 화차.

 

인간이 지닌 운명 앞에 소름 돋고, 극단적인 방법을 이용하면서도 자신의 단단한 내부는 지켜가는 신조 교코에게 놀랐고, 우리 사회의 부정적인 속살을 낱낱이 밝혀놓아 씁쓸했고, 겉으로 보이는 치장과 치명적인 자극, 지독한 유혹의 구렁텅이 그리고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의 나락... 을 순차적으로 지켜보며 가슴 아팠던 책, 화차.

 

어쨌든 굉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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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교
박범신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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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잡을 수 없는 환상이었을까.  

 

 <은교>를 읽는 내내, 스무 살 때부터 쭈욱 이어져 온 무수한 나의 짝사랑들이 떠올랐다. 사랑인지, 환상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허기나 외로움, 오기였을지도 모를 내가 가진 나만의 것, 나만의 감정들. 누군가에겐 평범하고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이었을지 모를 빛깔이 한 사람에게는 이 세계를 비출만한 엄청난 빛을 뿜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 사랑과 환상을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닌 것. 환상이 빠진 사랑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2. 적요, 지우, 은교. 그들 세 사람은...

 

예순 아홉의 시인, 이적요.

평온한 그의 세계에 회오리 바람처럼 찾아온 열일곱의 소녀, 은교.

이적요 시인의 한 마디에 문학도의 길을 걷게 되는 삼십대 청년 서지우.

 

 이 책의 첫장은 죽음 앞에 놓인 이적요 시인의 충격적인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열일곱의 은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과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이야기가 이어진다.

 

 자신의 집에 우연히 찾아들어와 잠든 은교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이적요 시인. 적요가 은교를 보는 눈빛을 알아차린 제자 서지우. 그들 셋은 묘한 갈등 속에서 이상한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은교는 이적요 시인 집에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며 자주 왕래를 하고, 서지우와는 마치 남매처럼 투덜거리며 스스럼없는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다투기도 한다. 이적요 시인은 자신의 감정이 은교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육체적 폭발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적요는 은교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고, 터질 듯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반복했고, 서지우는 자신의 스승에게 갖은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존경할 수 밖에 없는 그를 끊임없이 질투했다. 그 둘은 은교라는 아이를 매개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를 죽일 수도 있는 감정에 다다른다.

 

 

#3.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만큼의 감정. 어쩌면 또다른 이름의 사랑일 지도 모른다.

 

 사랑을 배려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 적요는 그것을 은교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사랑을 자신이 소유하고 가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지우는 은교를 육체적으로 가지려고 든다. 하지만 그 둘은 모르는 게 있었다. 사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미 시작되고, 자신의 감정을 장악하며 스스로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감정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적요와 지우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배신 당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뒷통수를 치면서 질투하고 미워하고 멸시하며 거리를 두면서도 깊은 내면에서 거부할 수 없는, 그들의 감정적 소용돌이. 그것은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하는, 죽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던 거다.

 

 때때로 은교는 그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묘한 신경전. 그것은 미움 뒤에 감춰진 짙은 사랑이었다.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4. 진짜, 사랑은 뭘까...?

 

 나는 스무살 무렵, 매번 상대를 바꿔가며 짝사랑을 했었다.그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온 마음을 장악하는 내 마음의 불꽃같은 사랑.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의 손짓, 눈빛 하나에도 의미를 붙여가며 혼자 설레고 가슴 쿵쾅거려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에게 초콜릿을 건네면서도 한 치도 사랑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거쳐 진짜 누군가를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별 것 아닌 것에 화를 내며 싸우기도 하면서 내 속에 없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내 속에 있던 못된 마음, 분노, 화, 질투, 투정.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스스로 밀쳐내고 있었던 감정들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만큼 상대방에도 상처를 주고 싶은 못된 마음.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고통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말들을 상대에게 뱉아냈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처럼 상처를 받아야만 그도 나를 사랑하는 거라 믿었던 거다. 내 밑바닥을 들춰내며 헤뒤집고 내 존재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은 정작 짝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다. 내가 알지 못한 내 모습을 알게 해준, 나를 혼란에 빠뜨려놓아 나를 1미리쯤은 바꿔놓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은교를 읽고, 생각했다. 은교를 사랑한 적요의 마음도, 스승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눈물을 뚝뚝 흘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지우의 마음도, 자신이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죄책감으로 곡기를 끊은 지우에 대한 적요의 마음도 모두 진짜, 라고 말이다.

 

 그리고,

너무 어려서 무엇이 사랑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그저 다 잊고 살고만 싶은 젊음의 피, 은교가 보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피하고 싶었던 적요의 편지를 읽고 엉엉 울며 모든 것을 태울 수 밖에 없었던 그 마음도, 진짜라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무조건적으로 해주고 싶었던, 어떤 말이든 동의하고 싶었던, 무어라 해도 좋았던, 담배연기조차도 향기로웠던, 혼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너무도 떨려, 그의 앞에선 아무것도 먹을 수조차 없었던 그 때. 그를 바라볼 때면 나는 어느 새 눈빛이 흐릿해지고 멍해졌던 그 시절. 그건 과연 진짜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프고 아파서 울고 울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그에게 고백했던 날, 그는 내게 긴긴 이야기를 했다. 그의 첫사랑 이야기, 자신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마음들. 그 모든 이야기는 너와 내가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난 그만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고, 그는 당황하며 울지 말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너의 감정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환상일 뿐이지. 언젠가는 알게 될거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같다.

나의 마음을 어떻게 상대가 단박에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질투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치든 미치지 않든, 그게 무엇이든 사랑의 또다른 속살이다. 뭐라 표현하기도 전에 떠오르고, 떠오르기도 전에 꿈을 꾸고, 꿈을 꾸기도 전에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고 싶은, 놀랍고도 자동적인 감정.

 

 그건 '사랑'이다.

내 마음대로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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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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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약속 장소에서 오지 않는 누군갈 기다릴 때 나를 비춰주는 외로운 가로등 불빛이, 내 손을 놓고 떠난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내 앞에 툭 떨어진 슬픈 나뭇잎이,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며 만지작거리는 내 폰의 반짝이는 액정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괜찮아. 다 괜찮아. 울지마. 울지마."

 

 그러면 난 흐르는 눈물을 쓱싹쓱싹 닦아 버리고는 씩씩하게 걸어간다. 내게 펼쳐진 이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와볼 테면 와 봐란 듯이! 그리고 나도 가끔은 그 사물들에게 말을 건넨다.

 

"나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그들은 충실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때론 내 옆에 있는 누군가보다 훨씬 진지하고 깊이있게. 내 말의 작은 진동들을 따뜻하게 , 덕지덕지 붙어있는 먼지들을 섬세하게 헤아려 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면 어떤 일어날까? 책을 펼치기 전 제목에 대해 생각하면서 두 눈 반짝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모를 생각했고 누군가의 말을 흘려 들으며 기억하지 못한 숱한 방정맞은 시간들도 떠올렸다. 과거의 어떤 날,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헤아려주었다면 좋았을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랬다면 아마 모든 게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의 내 삶도. 그들의 삶도.

 

 이 책속에서도 어쩌면 달라졌을 세 가지 줄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저 조금 뒤쳐질 뿐이라 여겼던 아들 김일우가 저능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영미. 그녀는 김일우가 바보라는 사실과 동시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김일우의 담임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공무원인 줄 알았던 남편이 계약직이었고, 갑작스레 실직을 하게 되었으므로 하루하루 살기에도 벅찬 시간들이었다.

 

 세오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정기섭은 장사보다는 상인회에 목숨을 건다. 나날이 죽어가는 시장, 그의 앞에 나타난 숙이라는 유혹과 자신을 더 멋있게 포장하려는 허세. 그 허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이 나게 된다.

 

 한 때 잘 나가는 PD였으나 더이상 운도 실력도 따라가주지 않는 박상운. 큰 소리치며 부하직원을 깔보며 언제까지나 잘 나갈 것처럼 위풍당당했으나 죽어가고 있는 프로그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그다.

 

 그들 모두의 시작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랬기에 그 누구도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대박을 터뜨리는 프로그램 기획안이 필요했던 박상운. 세오시장을 어떻게든 살려야했던 정기섭.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김일우 가족들. 그들은 그 시점에서 서로 맞닥뜨리게 된다.

 

 세오시장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던 정기섭은 상인회 사람들과 시장을 살릴만한 것들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야바위게임을 쓰리컵대회라는 명칭으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뭔가 특별한 기획이 없을까 살피던 박상운은 세오시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큰 상금과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것으로 부풀려 일을 진행시킨다. 광고에 뜬 쓰리컵 대회, 가진 돈의 열배를 준다는 인생의 도박! 그것을 본 오영미는 자신의 아들 김일우의 특출난 소리감각에 기대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 대회에 도전한다.

 

 쓰리컵 대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소리로 공의 위치를 맞추는 김일우에게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삼천만원을 쏟아 부은 오영미와 김민구는 그 돈이 5억이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PD인 박상운은 드디어 재기할 수 있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반대로 정기섭은 참가자의 모든 돈을 합쳐도 5억이 되지 않아 애가 탔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모든 걸 엎어버리겠다고 박상운에게 말했다. 방송을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김일우가 스스로 우승의 기회를 놓치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는데, 막내작가의 예리함으로 소리를 통해 공의 위치를 알아 맞힌다는 걸 알게 된다.

 

 드디어 쓰리컵 대회의 당일날, 최종 라운드에 오른 김일우에게 쓰리컵대회 방식을 공이 있는 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이 없는 컵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무대에 오른 김일우. 모든 소리가 그에게 다가온다. 쨍그랑, 쨍그랑, 딸랑딸랑.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김일우를 장악했고, 김일우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경기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오영미, 김민구 가족은 동정심을 유발하여 원금인 오천만원을 돌려받았고, 그것이 소문이 퍼져 모든 참여자들이 돈을 돌려 달라고 하여 세오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쓰이려고 했던 돈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거기다 박상운이 조작한 홈페이지와 쓰리컵 협회에 대한 이야기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퍼져나가 방송계는 물론 시청자들에게 온갖 비난과 멸시를 받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한편 모든 소리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들을 수 있었던 김일우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말들, 언어들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 모든 말들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모든 사물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바람결에서도, 흔들리는 나무에서도,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도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모든 태풍이 지나가고, 비난과 자기합리화도 지나가고, 바닥을 내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또다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모의하고 그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려고 아둥바둥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또다시 만난 정기섭과 박상운은 이번엔 진짜로 쓰리컵 협회를 만들어 그들이 그것을 이끌어나간다. 또한 김일우를 끌어들어 쓰리컵 대회 그 이후라는 방송을 마련한다. 그 빛의 무대에서 김일우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 말, 말 대신 자신의 거대한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언어를 강하게 들었다. 도망쳐! 그는 벌떡 일어나 번쩍하는 커다란 빛을 향해 몸을 던졌다.

 

 

 조금만 더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더라면, 한 발자국만 먼저 양보하고 물러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차마 양보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조차도 각자 자신의 입장을 말하기에 바쁜 우리 사회의 일면을 지능은 떨어진다해도 진심으로 사물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김일우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가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면 김일우의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아도 될 비극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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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초 : 한 남자 사랑의 기초
알랭 드 보통 지음, 우달임 옮김 / 톨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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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모순 중 하나는, 우리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보다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결국은 훨씬 더 잘해주게 된다는 사실이다. (p.42-43)

 

누군가와 작정하고 싸우려면 먼저 그에게 아주 많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 법이다. 상대에게 욕을 하고 그 사람의 물건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마음을 먹으려면 먼저 깊고 유별난, 진정한 애정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p.43)

 

우리가 사랑에서 기대하는 것은 행복이라기보단 친밀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단순하게 그 자체로 좋은 것보다는 평범한 것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우리들 대부분은 이상적인 방식으로 양육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p.56)

 

벤이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것은 아빠를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었다. 아빠가 엄청 대단하지도 지독히 끔찍하지도 않은 사람임을 알게 되고, 언젠가는 아빠를 한쪽으로 말끔히 치워놓고 자기들의 삶을 살아가길 바랐다. (p.87)

 

어른의 사랑은 아이일 때 어떻게 사랑받았는지를 추억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우리를 사랑하기 위해 무엇을 희생했는지 상상해보는 것이어야 한다. (p.157)

 

 

정이현의 사랑의 기초_연인들을 단숨에 읽어냈을 때, 공감하는 부분들은 많았으나 너무도 현실적이고 지금 세대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낸 것 같아 아쉬움이 컸다. 평소에도 사랑에 관해서라면 미화하는 부분들, 의미를 부여하는 속성을 지닌 나로써는 그것이 그리 유쾌하지가 않았다. 어떤 극적인 것도, 운명적인 것도 없이 아주 조금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되었다가 밋밋하게 끝나 버리는 사랑. 불타오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그 사랑이 난 참 싫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알랭 드 보통의 사랑의 기초_ 한 남자 편을 읽었을 때는 읽으면서 좀더 많은 생각을 했다. 지금 내가 결혼을 한 상황이기도 하고, 생각해야 할 철학적인 부분들이 꽤나 많았다고 여겨진다. 난 대부분 밑줄을 그었다.

 

연애를 할 때는 늘 더 좋은 사람이, 지금보다 나를 더 사랑해주는 사람이 나타날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내 모든 마음을 주지 않았다. 줄 필요도 없었다. 내겐 크나큰 무기 하나가 있었으니까! 그건 '헤어지자' 라는 강력한 무기. 이제까지 쌓여왔던 모든 것들을 한 번에 무너뜨릴 수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만들어 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애를 쓰지 않아도 괜찮았다. 마음이 설레 날아오를 것 같을 때는 자연스럽게 표현했지만 아닐 때는 무책임하게 상대방의 마음따윈 신경쓰지 않았다.

 

그.러.나. 결혼은 달랐다. 결혼을 하고 나니 내 '무기'가 사라졌다. 결코 '헤어짐'의 다른 말인 '이혼'은 무기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한 남자 편이 내 상황에 더 와닿았을 지도 모르겠다.

 

때때로 우리는 남편이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유혹이 찾아올 수 있다. 언제 찾아오게 될 지 모른다. 여기서 벤이라는 남편은 가장 친밀한 자신의 아내를 사랑하면서도, 누구보다도 자신의 아이를 아끼면서도 유혹이 찾아왔을 때 그 기회를 포착한다. 자신을 합리화시키면서. 또한 아이에 잘 키우고 싶다는 욕심도 대단해서 아이가 불쑥 커버려 자신의 모든 단점들을, 뒤틀린 성격들을 알아차릴까 두려워하는 내면을 가지기도 했고, 자신보다 어리면서 잘 나가는 데다가 성격까지 좋으면 자살충동을 느끼기도 한다.

 

알랭 드 보통은 늘 여성의 편에 서 있었다는 평을 받아서 이번엔 남자의 시선으로 글을 썼다고 인터뷰에 나와 있었는데, 내가 느끼기엔 여기 나오는 주인공인 벤은 완전 내 마음과 같았다! 남자지만 여성의 마음과 흡사했다.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은 결국 여자가 아닌가 느낄 정도로 여자의 마음을 남자라는 육체에 입혀 표현한 것만 같았다.

 

우리는 가정의 그 안락함과 지루해지면 찾아오는 신선한 유혹을 함께 가질 수 없다. 또한 사소한 듯 보이지만 평범하게 살아가는 것. 잘 하는 것 하나 없지만 꿋꿋이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용기를 가진 것이라고 보통은 나에게 소리쳐 말하고 있었다.

 

알랭 드 보통씨, 고마워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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