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노란 불빛의 서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
루이스 버즈비 지음, 정신아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6월
평점 :
서점에서 인생의 모든 것을 배운 한 남자의 이야기_
루이스 버즈비, <노란 불빛의 서점>
#1. 은은한 조명, 나만의 공간, 책이라는 보물이 있는 곳_ 서점
마지막 책장을 덮자, 내가 가보지 못한 세계 유수의 서점들이 내 마음에 안착했다. 그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제 몫을 한 책이었다. 집안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도 난 반고흐가 그린 '밤의 까페테라스'에 앉아 노란 조명 아래, 뜨거운 커피 한 잔과 함께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소설을 읽으며 밑줄을 긋고 있는 내 자신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또한 처음 가본 아기자기한 거리에서 문득 발견한 서점으로 들어가 빽빽하게 들어찬 책들 사이에서 책 한권 뽑아들다 그 빈 공간 사이로 마주친 누군가의 시선에 놀라 살짝 미소 짓기도 했으며 금서가 되어버린, 누군가 슬쩍 놓고 간 책 한권을 구석자리에 앉아 때론 긴장하고 때론 낄낄거리며 읽어내려가는 내가 상상 속의 공간에서 춤을 추고 유랑하고 있었다.
제목만으로도 무한한 상상력과 감수성으로 우리를 이끄는 이 책, '노란 불빛의 서점'. 이 책은 가벼운 걸음으로 서점을 향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자신이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머물 수 있는 서점이라는 공간에서 자신의 모든 인생을 보냈던 버즈비는 때론 이웃집 아저씨처럼 때론 박학다식한 전문가처럼 우리에게 책에 대해 재미나게 혹은 진지하게 이야기를 건넨다. '느림'을 동반하는 '책'이라는 매개체는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우리가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어떤 색다른 세계로 초대하고 이끈다. 어느 순간 버즈비는 책을 미친 듯이 갈구하는 한 사람이 되어 있었고, 서점에서 책더미에 쌓여 일하는 직원이 되어 있었으며 책을 판매하며 유랑하는 외판원, 서점이라면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감탄하며 즐기는 서점 마니아가 되어 있었다.
막연하게 나 또한 '서점'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동경을 품은 적이 있었다. 매일 새롭게 태어나는 책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그곳에서 나누는 은밀한 대화들. 그것들이 있다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내가 늘 약속 장소로 정해서 만났던 단골서점은 육체적 노동에 찌들린 청년과 불친절한 금전출납기의 직원, 밤늦도록 유리창 너머의 세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있을 뿐이었다. 그건 나에게 좌절감을 안겨줬고, 어떠한 것도 경험해보지 않은 채 그저 서점을 들락거리는 고객으로 머물게 했을 뿐이었지만 버즈비는 40년 간 서점이란 공간에서 즐기고 맛보고 경험하고 분노하며 지냈으니 그는 행운아였다.
#2. 책은 결코 죽지도, 사라지지도 않는다
버즈비는 책과 관련된 모든 것의 역사를 찬찬히 살펴가며 어떻게 책이 만들어지는지를 소상하게 설명하고 우리는 그 여행길에 초대한다.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새로 생겨난 전자책, 인터넷 쇼핑몰, DVD와 라디오, 텔레비전. 그 모든 것들이 종이책과 서점이 사라질 거란 끊이지 않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점 매출은 조금씩 늘어가고, 여전히 사람들은 종이책을 사본다. 그것은 우체통이 조금씩 사라져 가는 요즘 시대에 여전히 손글씨로 손편지를 쓰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생각이 든다. 디지털이 이 사회를 장악해도 여전히 아날로그를 그리워하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듯이. 종이의 각기 다른 질감, 책장을 넘길 때의 사각거림, 밑줄을 그을 때의 그 짜릿함, 펜을 쥐고 책 귀퉁이에 그림을 그리고 글을 적는 익숙한 손놀림. 우리가 아직도 그러한 것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리라.
#3. 한 권의 책, 세상은 아주 서서히 변해간다. 영화, HELP
<스키터가 에이블린에게 백인 가정에서 일하는 유색인종 가정부의 입장에 대한 인터뷰를 권하고 있는 장면이다.>
"파트와란 제도는 독특하다. 합당한 이유만 있으면 책의 내용은 언제라도 삭제당하거나 정정될 수 있고, 금서로 묶이거나 불태워질 수도 있었다. 사정이나 어쨌든 간에, 작가와 출판인은 자기들이 출간한 저작물 때문에 추방당하거나 투옥될 수 있었다."(p.204)
어느 나라건 어느 시기를 막론하고 금서에 대한 논란이 있어왔다. 비단 책 뿐만 아니라 노래나 영화 많은 예술 영역에서는 사회, 문화, 정치적인 입장에 따라 문학적, 예술적 가치가 있는 것들도 우리가 보거나 읽혀지기가 어려운 것들이 있었다. 한 권의 책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수많은 투쟁과 죽음을 통해 왔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었다. 문득 인종차별의 이야기를 다룬 가정부 이야기 가 떠올랐다. 백인이지만 유색인종 가정부에 대한 차별 이야기를 인터뷰를 통해 책으로 담고 싶어했던 스키터와 백인 아이들을 누구보다도 잘 돌보지만 정작 자신의 아들을 하늘나라로 보내버린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 그 둘의 만남으로 인해 라는 한 권의 책이 나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피의 투쟁이 있었는지! 얼마나 많은 고통과 힘겨움과 눈물과 아픔을 견뎌야 했는지를 알게 해준 영화였다.
왜 우리는 이토록 힘겨운 싸움을 견디면서 책을 만들고 또 책을 읽는가. 버즈비는 말한다. '책'을 통해 우리는 아주 서서히 변해가고 있다고. 느리지만 조금씩, 한 번에 한 발자국씩 그렇게 나아가고 있다고. 우리가 보고 즐기는 문화와 예술 영역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무수한 '책'과 '사람'의 힘으로 변해가는 것이다.
#4. 자본의 힘으로 등장한 대형서점은 작은 모퉁이 서점을 꿀꺽 삼켜 버리다.
영화,You've got mail
노란 불빛의 조명, 꽉 들어찬 책, 맛있는 빵과 함께 마실 와인. 모든 게 완벽해 보이는 그 순간! 서로에게 호감을 갖는 두 남녀. 그들은 책을 사랑하고, 서점을 사랑하고, 그 속의 소통을 즐긴다. 서점에는 그런 낭만이 있다. 같은 책을 두 사람이 함께 집어들게 되는 희열의 순간. 하지만 사랑이 시작되기도 전에 시련부터 찾아오게 되는 두 사람. 자본주의 사회에 소비자가 원하는 욕구를 정확하게 파악한 조 폭스. 어린 시절부터 책을 사랑하며 책과 하나되어 엄마가 물려주신 모퉁이 서점을 운영하는 케슬린 켈리. 거대한 폭스 서점에는 다양한 분야의 책들과 사람들이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쉼터 및 벤치, 찬찬히 책을 읽는데 분위기를 더해줄 향긋한 커피까지! 모든 것을 완벽하고 거대하게 만들어 놓았다. 얼마 간 홍보를 위해 할인정책과 맛있는 커피를 무료로 제공하는 서비스까지. 그 길 모퉁이에 있는 작은 모퉁이 서점은 서서히 대형서점으로 인해 몰락해간다. 어린이에 관한 서적이라면 뭐든 읽고 진정으로 책을 사랑했던 케슬리 켈리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었다. 버즈비는 이 책에서 수많은 서점들을 비교하고 구석구석 나라마다 서점이란 서점을 다 구경하고 다니면서 자본에 의해 잠식되어 가는 서점들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좋다, 나쁘다를 떠나 중립적인 입장을 고수한다. 그것은 단지 서점들의 개성과 특성에 의해 살아 남거나 그렇지 않음을 보여줄 뿐이고 꼭 큰 서점이라서 해서 좋은 것도, 꼭 작은 서점이라 해서 나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난 이 대목에서 이 영화를 떠올리며 과연 두 서점이 모두 살아남는 길은 어떤 것이 있을까 고민해 보게 되었다.
#5. 지금 여기에, 이곳에서, 우리는 책과 소통한다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통로. 환한 빛이 비춰진다. 조금씩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지고 선명해진다. 살며시 손을 내민다. 감촉이 느껴진다. 부드럽다. 체온이 전해져 온다. 따뜻하다. 향긋한 냄새가 풍겨진다. 달콤하다.
차갑고 단단하고 딱딱하고 어색하고 냉정한. 온기라고는, 감촉이라고는 느낄 수 없을 것 같은 'ON LINE'이라는 불빛 속에서 우리를 연결해주는 긴밀하고도 촘촘한 섬세하고도 친밀한 'OFF LINE'이라는 숨결을 느낀다. 그 고리를 엮고 있는 단단한 실타래, 그건 바로 '책'이라는 마법이 아닐까.
단지 '종이'라는 가볍고 하얀 질감의 나무가 검정 혹은 푸른 잉크와 여러 색채의 물감을 만나 단단히 묶어 놓았을 뿐인데, 책은 그 이상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당신의 손길이, 당신의 발길이, 당신의 숨결이 그 속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다. 당신의 생각이, 느낌이, 마음이 나에게 전해져 온다.
#6.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_ 당신과 연결된 그 고리를 붙잡는 것!
우리는 때때로 외롭다. 책을 읽고 서점을 가고, 맛있는 것을 먹고, 거리를 걸어도 때로는 사무치도록 외롭고 혼자라고 여긴다. 그럴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나의 마음을 단번에 이해해줄 한 사람의 말 한 마디, 따뜻한 위로 한 줌 그리고 꾸깃꾸깃한 종이에 정성스레 적어내려간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한 줄의 문장. 그거면 충분하지 않을까.
"서점에서 우리는 타인 속에 홀로 서 있는 외톨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 타인들과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p.290)
#7.변화하는 너와 나 그리고 세상 속에서 우리가 알아두어야 할 것!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때, 잊혀지고 사라지고 버려지는 것들을 가슴 아프게 느낄 때, 부서지고 깨어져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었을 때, 우리는 '변화'를 맛보고 있는 것이리라.
케슬린 켈리가 텅 빈 서점 안에서 엄마와 춤추던 추억을 떠올리며 사람들은 변화란 좋은 거라고 말하지만 중요한 건 내가 마음을 다친 것이라고 아프게 말했듯이, 우리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건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고 어루만져주는 일이 아닐까.버즈비가 느끼는 서점이란 공간, 그리고 그의 마음을 울리는 책. 그것은 아마 그에게 외로움을 달래주고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하게 만드는, 그래서 자신의 삶이 이 정도면 괜찮다고 여기게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었을까 싶다.
오늘도 버즈비처럼 서점을 일상처럼 드나드는 너와 나는 아주 천천히 아주 느리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 물들어 변화의 주체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