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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 - 제17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조남주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가끔 사물이 내게 말을 걸어올 때가 있다. 약속 장소에서 오지 않는 누군갈 기다릴 때 나를 비춰주는 외로운 가로등 불빛이, 내 손을 놓고 떠난 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내 앞에 툭 떨어진 슬픈 나뭇잎이, 오지 않을 연락을 기다리며 만지작거리는 내 폰의 반짝이는 액정이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괜찮아. 다 괜찮아. 울지마. 울지마."
그러면 난 흐르는 눈물을 쓱싹쓱싹 닦아 버리고는 씩씩하게 걸어간다. 내게 펼쳐진 이 세계를 향해. 보란 듯이. 와볼 테면 와 봐란 듯이! 그리고 나도 가끔은 그 사물들에게 말을 건넨다.
"나 잘 하고 있는 거 맞지?"
그들은 충실하게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준다. 때론 내 옆에 있는 누군가보다 훨씬 진지하고 깊이있게. 내 말의 작은 진동들을 따뜻하게 , 덕지덕지 붙어있는 먼지들을 섬세하게 헤아려 준다.
우리가 누군가에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이면 어떤 일어날까? 책을 펼치기 전 제목에 대해 생각하면서 두 눈 반짝이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모모를 생각했고 누군가의 말을 흘려 들으며 기억하지 못한 숱한 방정맞은 시간들도 떠올렸다. 과거의 어떤 날, 내가 그 사람의 말을 진심으로 헤아려주었다면 좋았을 그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랬다면 아마 모든 게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지금의 내 삶도. 그들의 삶도.
이 책속에서도 어쩌면 달라졌을 세 가지 줄기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저 조금 뒤쳐질 뿐이라 여겼던 아들 김일우가 저능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오영미. 그녀는 김일우가 바보라는 사실과 동시에 남들이 듣지 못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김일우의 담임을 통해 알게 되었지만 공무원인 줄 알았던 남편이 계약직이었고, 갑작스레 실직을 하게 되었으므로 하루하루 살기에도 벅찬 시간들이었다.
세오시장의 아들로 태어난 정기섭은 장사보다는 상인회에 목숨을 건다. 나날이 죽어가는 시장, 그의 앞에 나타난 숙이라는 유혹과 자신을 더 멋있게 포장하려는 허세. 그 허세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고 끝이 나게 된다.
한 때 잘 나가는 PD였으나 더이상 운도 실력도 따라가주지 않는 박상운. 큰 소리치며 부하직원을 깔보며 언제까지나 잘 나갈 것처럼 위풍당당했으나 죽어가고 있는 프로그램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는 그다.
그들 모두의 시작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걸었다. 그랬기에 그 누구도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대박을 터뜨리는 프로그램 기획안이 필요했던 박상운. 세오시장을 어떻게든 살려야했던 정기섭.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김일우 가족들. 그들은 그 시점에서 서로 맞닥뜨리게 된다.
세오시장을 어떻게든 살려야 했던 정기섭은 상인회 사람들과 시장을 살릴만한 것들에 대해 의논을 하다가 야바위게임을 쓰리컵대회라는 명칭으로 행사를 진행하기로 한다. 뭔가 특별한 기획이 없을까 살피던 박상운은 세오시장 행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큰 상금과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것으로 부풀려 일을 진행시킨다. 광고에 뜬 쓰리컵 대회, 가진 돈의 열배를 준다는 인생의 도박! 그것을 본 오영미는 자신의 아들 김일우의 특출난 소리감각에 기대어 자신의 전 재산을 털어 그 대회에 도전한다.
쓰리컵 대회는 그야말로 대성공이었다. 소리로 공의 위치를 맞추는 김일우에게 우승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삼천만원을 쏟아 부은 오영미와 김민구는 그 돈이 5억이 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고, PD인 박상운은 드디어 재기할 수 있다며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반대로 정기섭은 참가자의 모든 돈을 합쳐도 5억이 되지 않아 애가 탔고, 이 문제를 해결해 주지 않으면 모든 걸 엎어버리겠다고 박상운에게 말했다. 방송을 엎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결국 김일우가 스스로 우승의 기회를 놓치길 바라는 수 밖에 없었는데, 막내작가의 예리함으로 소리를 통해 공의 위치를 알아 맞힌다는 걸 알게 된다.
드디어 쓰리컵 대회의 당일날, 최종 라운드에 오른 김일우에게 쓰리컵대회 방식을 공이 있는 컵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공이 없는 컵을 맞추는 것으로 바꿔버린다. 무대에 오른 김일우. 모든 소리가 그에게 다가온다. 쨍그랑, 쨍그랑, 딸랑딸랑. 세상의 모든 소리들은 김일우를 장악했고, 김일우는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모든 경기는 허무하게 끝나버렸다. 오영미, 김민구 가족은 동정심을 유발하여 원금인 오천만원을 돌려받았고, 그것이 소문이 퍼져 모든 참여자들이 돈을 돌려 달라고 하여 세오시장의 활성화를 위해 쓰이려고 했던 돈들이 모두 날아가버렸다. 거기다 박상운이 조작한 홈페이지와 쓰리컵 협회에 대한 이야기가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퍼져나가 방송계는 물론 시청자들에게 온갖 비난과 멸시를 받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한편 모든 소리를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들을 수 있었던 김일우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말들, 언어들을 잃어 버리고 말았다. 순간 모든 말들이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모든 사물들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바람결에서도, 흔들리는 나무에서도, 지나가는 자동차에서도 그는 들을 수 있었다.
모든 태풍이 지나가고, 비난과 자기합리화도 지나가고, 바닥을 내치고 난 뒤에도 사람들은 그다지 많이 변하는 것 같지는 않다. 또다시 자기들만의 방식으로 모의하고 그 세계에서 여전히 살아가려고 아둥바둥하게 마련이니까 말이다. 또다시 만난 정기섭과 박상운은 이번엔 진짜로 쓰리컵 협회를 만들어 그들이 그것을 이끌어나간다. 또한 김일우를 끌어들어 쓰리컵 대회 그 이후라는 방송을 마련한다. 그 빛의 무대에서 김일우는 그들이 떠들어대는 말, 말, 말 대신 자신의 거대한 심장에서 터져나오는 언어를 강하게 들었다. 도망쳐! 그는 벌떡 일어나 번쩍하는 커다란 빛을 향해 몸을 던졌다.

조금만 더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더라면, 한 발자국만 먼저 양보하고 물러섰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차마 양보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조차도 각자 자신의 입장을 말하기에 바쁜 우리 사회의 일면을 지능은 떨어진다해도 진심으로 사물의 언어에 귀를 기울일 수 있었던 김일우를 통해 보여주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만약 우리가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고 온 마음으로 상대방을 받아들인다면 김일우의 이야기는 일어나지 않아도 될 비극이 아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