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잡을 수 없는 환상이었을까.
<은교>를 읽는 내내, 스무 살 때부터 쭈욱 이어져 온 무수한 나의 짝사랑들이 떠올랐다. 사랑인지, 환상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허기나 외로움, 오기였을지도 모를 내가 가진 나만의 것, 나만의 감정들. 누군가에겐 평범하고 사소한, 아무것도 아닌 그 무엇이었을지 모를 빛깔이 한 사람에게는 이 세계를 비출만한 엄청난 빛을 뿜어낼 수 있는 것. 그것은 사랑이 아닐까. 누군가 사랑과 환상을 정확히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랑이 아닌 것. 환상이 빠진 사랑을 무어라 말할 수 있을까.
#2. 적요, 지우, 은교. 그들 세 사람은...
예순 아홉의 시인, 이적요.
평온한 그의 세계에 회오리 바람처럼 찾아온 열일곱의 소녀, 은교.
이적요 시인의 한 마디에 문학도의 길을 걷게 되는 삼십대 청년 서지우.
이 책의 첫장은 죽음 앞에 놓인 이적요 시인의 충격적인 고백으로부터 시작된다. 열일곱의 은교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것과 자신의 제자 서지우를 자신이 죽였다는 것. 과연 그것은 진실일까, 하는 의문으로부터 이야기가 이어진다.
자신의 집에 우연히 찾아들어와 잠든 은교의 모습을 보고 첫눈에 반해버린 이적요 시인. 적요가 은교를 보는 눈빛을 알아차린 제자 서지우. 그들 셋은 묘한 갈등 속에서 이상한 관계로 발전해 나간다. 은교는 이적요 시인 집에서 유리창을 닦으며 청소를 하며 자주 왕래를 하고, 서지우와는 마치 남매처럼 투덜거리며 스스럼없는 육체적 관계를 가지고, 다투기도 한다. 이적요 시인은 자신의 감정이 은교에게 해가 될까 두려워하면서도 주체할 수 없는 감정적, 육체적 폭발을 다스리려고 애를 쓰며 사랑을 키워나간다.
적요는 은교를 생각하며 끊임없이 시를 썼고, 터질 듯한 자신의 감정에 대해 스스로 질문하기를 반복했고, 서지우는 자신의 스승에게 갖은 멸시와 모욕을 당하면서도 존경할 수 밖에 없는 그를 끊임없이 질투했다. 그 둘은 은교라는 아이를 매개로 끊임없이 갈등하고, 서로를 죽일 수도 있는 감정에 다다른다.
#3.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을만큼의 감정. 어쩌면 또다른 이름의 사랑일 지도 모른다.
사랑을 배려하고 자신의 소중한 것을 나누어 주는 것이라 생각한 적요는 그것을 은교에게 행동으로 보여주고, 사랑을 자신이 소유하고 가질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한 지우는 은교를 육체적으로 가지려고 든다. 하지만 그 둘은 모르는 게 있었다. 사랑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이미 시작되고, 자신의 감정을 장악하며 스스로에게 가장 고통을 주는 감정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들이 모르는 사이에 적요와 지우는 서로를 사랑하고 있었다. 배신 당하고 서로를 의심하고 뒷통수를 치면서 질투하고 미워하고 멸시하며 거리를 두면서도 깊은 내면에서 거부할 수 없는, 그들의 감정적 소용돌이. 그것은 그들이 일찍이 알지 못하는, 죽어서도 알지 못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었던 거다.
때때로 은교는 그 둘 사이에 끼어들 수 없는 어떤 기운을 느꼈다고 했다. 묘한 신경전. 그것은 미움 뒤에 감춰진 짙은 사랑이었다. 서로를 가장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은 진정으로 서로의 마음을 알지 못했다.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게 아닐까?
#4. 진짜, 사랑은 뭘까...?
나는 스무살 무렵, 매번 상대를 바꿔가며 짝사랑을 했었다.그것이 사랑이라 믿었다. 온 마음을 장악하는 내 마음의 불꽃같은 사랑.말 한 마디 건네보지 못했지만 그 사람의 손짓, 눈빛 하나에도 의미를 붙여가며 혼자 설레고 가슴 쿵쾅거려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그에게 초콜릿을 건네면서도 한 치도 사랑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여러 사람을 거쳐 진짜 누군가를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별 것 아닌 것에 화를 내며 싸우기도 하면서 내 속에 없는 나를 만나게 되었다. 내 속에 있던 못된 마음, 분노, 화, 질투, 투정. 내가 생각해 보지 못했던 스스로 밀쳐내고 있었던 감정들이었다.
처음으로 누군가로 인해 상처를 받으면서 알았다. 내가 받은 만큼 상대방에도 상처를 주고 싶은 못된 마음. 그 사람도 나와 똑같이 고통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는 생각해낼 수 있는 가장 고통스러운 말들을 상대에게 뱉아냈고 그에게 상처를 주었다. 나처럼 상처를 받아야만 그도 나를 사랑하는 거라 믿었던 거다. 내 밑바닥을 들춰내며 헤뒤집고 내 존재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은 정작 짝사랑이 아니라 진짜 사랑이었다. 내가 알지 못한 내 모습을 알게 해준, 나를 혼란에 빠뜨려놓아 나를 1미리쯤은 바꿔놓을 수 있는 존재. 그것이 진짜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은교를 읽고, 생각했다. 은교를 사랑한 적요의 마음도, 스승에게 버림받았다는 이유로 눈물을 뚝뚝 흘려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지우의 마음도, 자신이 제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는 죄책감으로 곡기를 끊은 지우에 대한 적요의 마음도 모두 진짜, 라고 말이다.
그리고,
너무 어려서 무엇이 사랑인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는, 그저 다 잊고 살고만 싶은 젊음의 피, 은교가 보고 싶지 않았던 어쩌면 피하고 싶었던 적요의 편지를 읽고 엉엉 울며 모든 것을 태울 수 밖에 없었던 그 마음도, 진짜라고 느꼈다.
마지막으로, 무조건적으로 해주고 싶었던, 어떤 말이든 동의하고 싶었던, 무어라 해도 좋았던, 담배연기조차도 향기로웠던, 혼자 오랫동안 짝사랑했던 선배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너무도 떨려, 그의 앞에선 아무것도 먹을 수조차 없었던 그 때. 그를 바라볼 때면 나는 어느 새 눈빛이 흐릿해지고 멍해졌던 그 시절. 그건 과연 진짜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아프고 아파서 울고 울어서 도무지 견딜 수가 없어서 그에게 고백했던 날, 그는 내게 긴긴 이야기를 했다. 그의 첫사랑 이야기, 자신이 생각하는 나에 대한 마음들. 그 모든 이야기는 너와 내가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음을 말하고 있었다. 난 그만 어린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고, 그는 당황하며 울지 말라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리곤 내게 말했다.
"너의 감정은 나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야. 그저 환상일 뿐이지. 언젠가는 알게 될거다."
하지만 난 지금도 그 말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앞으로도 알지 못할 것 같다.
나의 마음을 어떻게 상대가 단박에 단정지을 수 있단 말인가.
누구나 똑같이 사랑할 수는 없다. 연민이든, 동정이든, 질투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미치든 미치지 않든, 그게 무엇이든 사랑의 또다른 속살이다. 뭐라 표현하기도 전에 떠오르고, 떠오르기도 전에 꿈을 꾸고, 꿈을 꾸기도 전에 고개를 흔들며 아니라고 부정해 버리고 싶은, 놀랍고도 자동적인 감정.
그건 '사랑'이다.
내 마음대로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