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경꾼들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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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끝나지 않는 이야기 _ 윤성희, '구경꾼들'

 


 

모든 것은 작은 점 하나로 시작되는 것 같다. 책을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을 했다. 보이지 않는 끈 하나가 단단히 우리들을 엮어 놓았는데, 때론 그것이 떨어진 줄 알고 주위를 헤매기도 하고, 때론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연결이 되어 내 눈앞에 의미있는 것들로 놓여진다.  

 

 

 

 

이야기는 모텔에 찾아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커튼'이 없는 방안에서, 왜 커튼이 없을까, 하는 의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야기의 마지막은 꿈인듯 몽롱하게 부신 햇살을 바라보는 '나'가 누군가  '커튼'을 쳐주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끝이 난다. 어쩌면 '나'라는 존재가 콩알만한 존재로 탄생했을 당시 그 방의 사라진 커튼을 찾듯이, 누군가의 따스한 손길을 기다리듯이.

 

 

매일 매일 새겨지는 일상들이, 우리들만의 역사를 내면에 새긴다. 그렇게 새겨진 것들을 디딤돌 삼아 우리는 우리의 것들 타인과 나눈다. 타인이 삶속으로 불쑥 들어가기도 하고, 빠져나오기도 하고,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면서. 그러다 평생, 영원히 함께 할 것 같은 존재가 '죽음'이라는 형태로 갑작스레 사라지기도 한다. 살아가는 것이 죽음을 향해 간다고는 하지만 죽음은 언제나 갑작스럽다. 나눌 것이 많은, 쌓아갈 것이 많은 누군가가 내 인생에서 영영 사라진다는 것은 내 존재가 흔들릴 정도로 극심한 고통으로 인식된다. 생각지도 못한, 어처구니 없는 일로 큰삼촌은 죽음을 맞이한다. 그조차도 상상할 수 없는 순간에 들이닥친 누군가의 몸뚱이로 인한 죽.음.

 

 

죽음을 받아들이는 형식은 모두가 다르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 사람을 기억하고, 삶을 살아가기 위해 각자의 방식으로 견뎌낸다. 끊임없는 독백과 생생한 기억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할머니가 있는가 하면, 우연히 발견된 신문 귀퉁이에 큰삼촌과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남자는 지구 저편에서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듣고 놀랐다. 남자는 아버지에게 큰삼촌이 사고를 당한 날짜와 시간을 물으려다가 참았다. 그런 식으로 세상의 균형이 유지된 것이라면 자신은 평생 누군가를 사랑하며 살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평생 누구를 미워하며 살 수도 없을 것만 같았다. 착하게 사는 것이, 그렇게 단순한 일이, 자신에겐 세상에서 가장 힘든 일이 될 것만 같았다. -p.111

 

아버지와 어머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듣고, 사진을 찍으며 끊임없이 그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속에서 어쩌면 자신을 이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죽음 끝에 간신히 매달린 삶을 찾아서 사람들을 만나고, 편지를 쓰고 아이에게 사진엽서를 보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여행에 가 있는 동안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을 가진 빵봉지에 적힌 이름을 찾아 빵 공장에 찾아갔다. 경비일을 하고 싶어하던 할아버지는 성추행을 당하는 여자 아이를 구하려다 죽어갔다. 진정으로 관심을 가져주는 남자와 연애를 하고 싶었던 고모는 사소한 것들을 견뎌내지 못한 채 수많은 이별 후 일에 전념하고, 작은삼촌은 고모의 연애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을 자신의 이별 후에야 깨닫게 된다. 회사를 관둔 아버지는 편의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고, 자신의 여행기를 글로 쓰겠다고 큰소리를 치기도 했다. 할아버지를 잃어버린 할머니는 외할머니와 통화를 하면서 또 잠시나마 함께 살아가면서 서로의 일상을 채워나갔다.

 

 

끊임없이 타인의 이야기를 쫓아가는 이 책속의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어쩌면 이 책 안엔 진정한 주인공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인공의 비중 만큼이나 그 주변 인물들의 이야기가 풍성하다. 목수가 자신이 만드는 가구마다 'ㅎㅇ'을 새겨넣는 사소한 행동이 고모로부터 운명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이야기가 되고, 새벽마다 초콜릿을 먹으러 나오는 여자를 위해 함께 라면을 먹으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가족들의 따뜻함으로부터 각자의 이야기가 채워져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흩어진 별조각을 각자가 이어 붙이듯 사진과 몇 개의 문장들로 완성된 아버지의 책이 잘 팔려나갈 때쯔음 아버지는 또다른 이야기에 목말라 했고, 어머니와 나를 데리고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쫓아 떠난다. 그 특별한 여행기가 '죽음'으로 완성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과연 나는 내 삶에 있어 구경꾼인가, 아니면 주인공인가에 대한 생각을 해봤다. 책속의 '나'는 아버지가 끊임없이 타인의 삶을 뷰파인더로 바라보는 '구경꾼'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완벽하게 타인의 삶에 느끼고 이해할 수록, 자신의 삶을 더 가깝게 느낄 수 있다는 점이다. 나는 주인공이 따로 없는 이 책의 모든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인물들을 구경꾼처럼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본다. 나는 어떤 사람일까, 무얼 이해하고, 무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일까. 세상엔 수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져 있고, 멀리 떠나지 않아도, 바로 가까이에 그 이야기들을 열어 보일 색다른 사람들이 존재한다.

 

평생 외롭지 않기 위해 달려온, 가게의 한 자리를 지키며 평생을 살아온 외할머니처럼. 결국엔 삶이란 무언가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가장 오랫동안 한 곳을 지키는 자가 삶의 진실에 가장 가깝게 가닿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고 내가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본다.

 

 

끝나지 않은 것 같던 이야기가 끝이 나자, 나는 그 이야기들에 이어서 타인의 삶을 끄적거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타인과 뒤섞여 나는 온전한 나로 다시 태어난다.

 

 

 

책은 마지막장이 있지만 아마 이야기는 내내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우리의 삶이 끝나도 이야기는 계속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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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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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혹의 고통은 종종

새의 가벼운 육체를 꿈꾸게 한다

하여 나의 질투는 공기보다 가볍다

난 사랑하고 있으므로, 사라지고 싶은 것이다

        -유하, '휘파람새 둥지를 바라보며' 중에서

 

 "사람은 딱 두 종류야. 다른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과 죽일 수 없는 사람. 어느 쪽이 나쁘냐면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이 더 나빠. 그건 K도 마찬가지야. 너희 둘은 달라 보이지만 사실은 같은 종자야. 누군가를 죽일 수 없는 사람들은 아무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못해." -49

 
 

 그렇게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채. -53

 

 그를 나락으로 밀어넣은 것들은 언제나 그를 매혹시켰던 존재들이었다는 사실을 그는 잊지 않고 있었다. -102
 
 

 단 한 번도 나를 들여다본 적이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어디론가 계속 도망치고 있는 기분으로 나는 평생을 살아왔던 느낌이었어. 여기가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나는 이러저러한 것들로부터 계속 도망치고 있었던 거지. 나는 그 남자에게 그 얘기를 다 했지. 그러자 그 남자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나를 안아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었어. 너무 아늑하고 포근해서 아마 죽음의 냄새를 맡았던가봐. 그 남자를 만나서 나는 내가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지 알게 됐어."-125

 

 

 

 고등학교 무렵이었나.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고통 없이 죽어가는 법을 알아 냈다고. 나는 진심 궁금했다. 나에게도 알려 달라고, 애절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챘지만 그런 건 절대 알려주는 게 아니라고 매정하게 말했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죽음'이라는 것에 매혹되었던 것 같다. 지금이야 산다는 것이 때때로 지치고 지루하고 의미없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는 건 안다. 그치만 삶을 놓아버리고 싶을 만큼은 아니다. 하지만 그땐, 한 발만 성큼 다가서면 옥상에서 떨어질 때처럼 그렇게 죽음과 가까이 살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좋아했던 작가 아멜리 노통브는 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누군가를 정말로 사랑하면 죽일 수 있는 거라고. 순수하고 맑은 그 무언가가 사라지는 것이(어른이 되는 것이) 견딜 수 없어서 그 자체로, 젊음 그 자체로 남게 하기 위해 죽이는 거라고. 나는 그녀의 언어에 매혹되었고, 가끔은 죽이고 싶을 만큼의 사랑 혹은 증오를 스스로에게서 발견하기도 한다. 뭐 어쩌다 보니, 그녀와도 꽤나 멀어졌는데 얼마 전에 읽었던 한강의 연작소설 <채식주의자><몽고반점><나무불꽃>을 이어서 보고, 얼마간 잊고 지냈떤 다시 한 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누군가는 살고 살아서 '사람'이라는데, 왜 사람은 그 삶을 견뎌내지 못하고 '죽음'을 사랑하게 되는 걸까. 자신의 목숨을 끊는 일은 늘 금기시되어 왔고, 나쁜 것이라고 배워왔다. 하지만 그 판단을 과연 인간이 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연결해서, 김영하의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읽고, 미미가 물감통에 머리카락을 치렁치렁 집어 넣고 몸으로 표현하는 예술을 보며, 나는 <몽고반점>의 영혜를 떠올렸다. 어느 날, 꿈 때문에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고,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고, 이혼하게 되었고, 삶이 망가졌다. 그런 영혜에게 찾아온 형부. 형부는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영혜의 몽고반점에 매혹되어, 그녀의 온몸에 살아있는 꽃을 그려넣어 작업을 한다. 식물.... 그녀는 나무가 되고 싶었다. 그래서 사람이 먹는 걸 먹지 않고, 뼈가 앙상해질 때까지 견뎌냈다. 나무가 되는 길이, 죽음과 맞닿아 있다면 기꺼이 그것을 해내고 싶었던 거다. 온몸에 꽃이 활짝 피어날 때의 그 열망과 생기..... 그것은 미미가 마지막으로 온몸을 다해 작업을 한, 생이 꺼지기 전에 행한 어떤 불꽃 같은 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다. 죽음도 그렇다고 배워왔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책이었다. 삶, 그것은 과연 늘 옳다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죽음, 그것은 그저 어둠뿐인 통로일까. 이 매혹적인, 알 수 없어서 더 끌리는 죽음에의 손길을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이토록 인생은 무의미하게 반복되기만 하는데, 금기로 가득차 있는데!

 

 

 이 글을 보는 사람들 모두 일생에 한 번쯤은 유디트와 미미처럼 마로니에공원이나 한적한 길모퉁이에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나는 아무 예고 없이 다가가 물어볼 것이다. 멀리 왔는데도 아무것도 변한 게 없지 않느냐고. 또는, 휴식을 원하지 않느냐고. 그때 내 손을 잡고 따라오라. 그럴 자신이 없는 자들은 절대 뒤돌아보지 말 일이다. 고통스럽고 무료하더라도 그대들 갈 길을 가라. 나는 너무 많은 의뢰인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제는 내가 쉬고 싶어진다. 내 거실 가득히 피어 있는 조화 무더기들처럼 내 인생은 언제나 변함없고 한없이 무료하다. -134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134
 
마지막 구절을 읽고 생각했다. 좋은 작품이란 모두가 아는 간결하고도 간단한 진실을 알려주기 위해,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라고. 정말 공감한다. 왜, 멀리 떠나가도 변하는 게 없을까. 인생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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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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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아침 눈을 뜨면 내게 펼쳐진 새로운 아침, 긴긴 하루가 시작된다. 남편은 내가 일어나기도 전에 깨어 회사로 가고, 이제 막 걷기 시작한 아이는 온몸과 마음을 내게 의지하며 살아간다. 아이의 밥과 반찬을 만들고, TV를 보고, 아이가 낮잠 자는 시간에 잠시 자유시간을 누리고, 매일 똑같은 일상이다. 그러다가 문득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아이의 머리를 쓸어내리며 아이의 미래를 그려본다. 그 미래엔 늘 내가 있다. 피곤에 찌들어 잠든 남편도 보인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서, 늘 함께 하고 싶어서 결혼한 남편은 일상을 나누기엔 너무 지쳐있고, 휴일이 되면 각자의 시간을 보내기 바쁘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서로를 구원해줄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연애시절이 끝나고,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묶여지면서 우리는 어린시절 겪었던 상처를 되풀이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앞으로 내게 펼쳐질 시간들이 나는 늘 궁금했다.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쭈욱-. 그리고 아이와 늘 함께지만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아진 요즘은 더더욱 그랬다. 그런 내게 올리브 키터리지란 여성이 잔잔한 물결에 돌멩이를 던지듯 내게 다가왔다.

 

 

 

 소금기 머금은 작은 바닷가 마을, 일상처럼 그럭저럭 살아가고 있는 듯 보이는 사람들. 그렇지만 그속을 들여다 보면 누구나 각자의 파도가 일렁이고 있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고, 꼭 그래야 한다고 가슴 속에 굳건히 새겨놓고 있는 사람조차도 때때로 죽음을 생각한다. 올리브 키터리지와 그 주변의 이야기로 구성된 이 책을 한 장 한 장 곱씹어 읽으면서 내 삶의 순간순간들이 스쳐지나갔다. 또한 아직 오지 않은 시간들을 미리 앞당겨 경험하고 느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올리브가 살아가면서 겪는 위기와 사건들, 감정과 시간들.... 모든 것들이 온전히 내게 흡수되어 어렴풋하게나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선명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눈부신 세상에 우리는 이렇게 왔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눈부신 세상에 울음을 터뜨리며 온다. 우리의 탄생을 환호로 지켜보는 부모님이 있는가 하면 태어나는 순간 바로 버려지는 아이들도 있다. 그 무엇도 우리가 선택하지 않았다. 화사한 웃음을 건네며 가득 안아주면 세상이 다 내것처럼 포근하고 아늑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부모도 처음에는 아이였으나 세상 속에서, 가족 안에서 상처받고 부서져 내린 여린 존재들이었다. 완벽하지 않은, 삶을 배우는 그런 사람일 뿐이라는 것.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것.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

 

 올리브와 헨리는 부부다. 그들 사이에서 태어난 크리스토퍼. 헨리는 약사이고, 올리브는 학교 선생님이다. 각자의 생활방식이 있고, 그것을 존중해왔다. 또한 아이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며 사랑한다. 크리스토퍼는 너무도 다른 엄마와 아빠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자라난다. 그러던 어느 날, 헨리는 약국 보조로 일하는 데니즈가 남편이 죽었기에 그녀를 보살펴 주고 싶어진다. 그리고 그의 아내, 올리브는 같은 학교에 근무하는 짐 오케이시를 사랑하고 있다. 그렇게 그들 부부 사이에 파도가 일렁인다. 그 누구도 가정을 포기하지 않는다. 다른 누군가에게 정신이 팔려 있지만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가끔은 아이에게 화를 내고 몰아붙이지만 그렇다고 크리스토퍼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듯이. 때론 사랑하는 것들이 전혀 무관심한 혹은 미움의 형태로 나타난다. 감정은 뚝 끊어낼 수도, 사랑과 사랑 이외의 것으로 구분해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당신이 알기나 해? 종일 애들 가르치지. 염병할 교장이라는 작자하고 멍청한 회의는 줄줄이지. 장 보고 요리하고 다림질하고 빨래하고. 크리스토퍼하고 같이 숙제하고! 그런데 당신은......"

.

.

당신은, 고작 다른 사람들 눈이 무서워서 날더러 일요일 아침을 포기하고 교회에 가서 궁뎅이 붙이고 앉아 있으라는 거잖아!"

.

.

"죽도록 지겨워." 

-p.20

 
친밀해질수록 멀어지는 것들
 
 가족이기 때문에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나이를 먹어갈수록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다. 가장 친밀한 관계일수록 '어떤 말'들이 치명적인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가까울 수록 더 조심해야 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때론 내밀한 곳에 숨겨둔 비밀을 가장 친숙한 가족에게 털어 놓고 싶지만 그것이 위기가 되고, 문제를 일으키게 될 때가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가슴 속에 비밀을 만들게 되고, 가끔은 감정을 억누르며 살아간다. 올리브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도 있다고 생각한 남자가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했을 때, 혼자서 슬픔을 꺼억꺼억 삼키며 헨리의 저녁을 준비했던 잔인한 그날처럼. 헨리가 데니즈에게 온통 정신이 팔려,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슬픔을 보고, 기쁨을 보려고 했을 때, 데니즈 외엔 아무것도 눈과 귀에 들어오지가 않아 올리브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눈을 치켜뜨려고 했던 노력처럼. 생에 찾아오는 어떤 유혹들을 뿌리치고 자신의 가정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무수한 나날들은 조금씩은 서로에게 거리감을, 가슴 속에 조그만한 구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그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를 안을 수도, 젖은 이마에 키스를 할 수도, 슬리퍼스가 죽던 밤처럼 소녀 같은 플란넬 파자마를 입은 그녀 곁에서 잠들 수도 없었다. 올리브를 떠난다는 건 제 다리 한쪽을 톱으로 썰어내는 것만큼이나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p.49

 

 올리브에게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 (평생 말하지 못할 것이다). 데니즈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던 그 오랜 세월 동안, 데니즈에 대한 작은 미련 한 톨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었다는 걸.

 -p.56

 

 

인생이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내 할머니라고 해서 내가 꼭 당신을 사랑하란 법은 없잖아요"(p.224)라고 말하는 아이를 낳게 될 수도 있다. '할머니' 대신 '엄마'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올리브 곁에서 늘 함께 할 줄 알았던, 때때로 모든 걸 놓아버리고 싶어했던 아들 크리스토퍼가 아내 수잔을 따라 다른 도시로 가서 살게 된다. 올리브를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 그렇게 멀어져간다. "수잔이 콱 죽어버렸으면 좋겠어. 그냥 오늘 바로 죽어버리지."(p.258) 이런 말을 서슴지 않고 하게 되는 순간이 올지도 모른다. 어떤 부모가 자식과 그렇게 떨어져 살 거라고 예상할 것인가. 일수를 세가며 아내와 나눈 대화가 식사 메뉴밖에 없다는 걸 알았을 때 밀려오는 당혹감에 하먼은 일요일 아침마다 만나는 친구인 데이지를 사랑하게 된다. 문득 사랑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놀라움이란. 어느 겨울, 보비와 제인은 늙었고, 모든 일상을 함께 나눴고, 너무 행복했다. 제인은 보비가 자신의 곁에 있는 것이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어떤 과거에 보비가 다른 여인을 만났다는 사실-사랑은 아니었지만-을 알게 된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는 일이지만 어둠의 터널에서 빠지나오지 못한 듯 그렇게 부엌에 앉아 한숨과 눈물을 토하며 멍해지는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허기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니나를 만난 올리브가 한 마디의 말 때문에 문득 눈물을 흘리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니나와 찌릿한 마음을 나누게 된다. 또한 일상처럼 옆에 있을 줄 알았던 헨리가 뇌졸중으로 요양원으로 가게 되는, 결국엔 먼저 죽고 혼자 남게 되는 상황이 펼쳐지는 것.  예상할 수 없는 것들과 맞닥뜨리며 우리는 조금씩 삶을 배워나간다.

 

그녀는 외로움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여러가지 방식으로 사람을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올리브는 생이 그녀가 '큰 기쁨'과 '작은 기쁨'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다. 큰 기쁨은 결혼이나 아이처럼 인생이라는 바다에서 삶을 지탱하게 해주는 일이지만 여기에는 위험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해류가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작은 기쁨도 필요한 것이다. 브래들리스의 친절한 점원이나, 내 커피 취향을 알고 있는 던킨 도너츠의 여종업원처럼. 정말 어려운 게 삶이다.

-p.124

 

 

 극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던 밤이 흐르고 나면

 

 인생을 살아가다 보면 도무지 극복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들이 찾아온다. 올리브와 헨리가 병원 화장실 인질사태를 겪고, 서로를 마음을 헤집는 심각한 '어떤 말'들 때문에 결코 그들은 그 밤을 극복하지 못할 거라 여겼다. 헨리가 죽고, 크리스토퍼가 두 번째 아내 앤이 크리스토퍼의 아이를 낳았을 때, 크리스토퍼는 엄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찾아간 그들의 집에서 조금의 관심도 받지 못한 올리브는 화가 났고, 크리스토퍼는 '엄마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더이상은 맞추지 않겠다고, 택시를 불러 드릴 테니 가고 싶으면 가도 좋다는 말을 했다. 잔인한 아들을 뒤로 한 채, 후들거리는 다리를 이끌고 집으로 돌아온 올리브는 그것 또한 극복하지 못하리라 여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나면, 삶이 뒤바뀌듯 많은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알게 되는 것 같다. 무엇도 극복되지 못할 것은 없다는 것을. 그래도 여전히 헨리를 그리워하고, 크리스토퍼를 사랑하는 올리브라는 것을 우리가 느낄 수 있듯이.

 
때때로, 지금과 같은 때, 올리브는 세상 모든 이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얼마나 분투하는지를 느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 필요한 그것은 점점 더 무서워지는 삶의 바다에서 나는 안전하다는 느낌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 그 일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고, 어쩌면 그 말은 사실이었다.
-p.378

 

 

우리에겐 어느 때이든 동행할 사람이 필요하다

 

 

 죽음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올리브. 일상이 매일 똑같다. 죽음처럼 고요하고 조용하다. 살아있다는 것은 아침에 눈을 뜨며 느낀다. 하지만 변하는 건 없다. 지옥이다. 함께 할 사람이 없기에. 그러던 어느 날, 거리에서 쓰러져 힘겨워하는 잭 케니슨을 만난다. 그를 데리고 간 병원 대기실에서 올리브는 처음으로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렇게 그들은 날을 잡아 저녁 식사를 하고, 대화를 나눈다. 때로 정치적 성향과 성적 소수자에 대한 의견으로 충돌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한다. 끔찍했던 순간들을 함께 나눈다. 가장 고통스러운 건, 자식들이 등을 돌리는 것. 아니 등을 돌리기 전에 부모인 자신들이 먼저 그들에게 가한 상처가 너무 크다는 걸 인정하는 일. 모든 것이 상처가 된 그들이 만나 서로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끔찍한 모습도 스스럼없이 털어 놓을 수 있는 인생의 동반자이자 친구, 우리에겐 언제나 그것이 필요하다. '사랑' 없는 삶이 지옥이듯이.

 

 

오, 젊은 사람들은 정말로 모른다. 그들은 이 커다랗고 늙고 주름진 몸뚱이들이 젊고 탱탱한 그들의 몸만큼이나 사랑을 갈구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내 차례가 돌아올 타르트 접시처럼 사랑을 경솔하게 내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모른다. 아니, 사랑이 눈앞에 있다면 당신은 선택하거나, 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그녀의 타르트 접시는 헨리의 선량함으로 가득했고 그것이 부담스러워 올리브가 가끔 부스러기를 털어냈다면, 그건 그녀가 알아야 할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알지 못하는 새 하루하루를 낭비했다는 것을.

-p.483

 

 

 

 

 그녀의 생은 이상한 방식으로 내게 삶의 어떤 지혜를 선물해 준 것 같다. 그저 펼쳐보여준 이야기가 앞으로 내 생에 마주치는 선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버스를 타고 창가를 바라보며 문득 문득 그녀가 했던 말들을 떠올릴 것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 투성이지만 일상을 잘 살아내야겠다는 결심들이 내 속에 가득가득 채워졌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지친 그녀는 파도를 느꼈다. 감사의, 그리고 회환의 파도를,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햇살 좋은 이방을, 햇살이 어루만진 벽을, 바깥의 베이베리를. 그것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 세상이. 그러나 올리브는 아지 세상을 등지고 싶지 않았다.

-p.483,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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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수꾼들
발따사르 뽀르셀 지음, 조구호 옮김 / 책으로보는세상(책보세)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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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속에는 언제나 어떤 상황이 펼쳐진다. 가끔은 공간 하나만으로도 대단한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걸 안다. 잘 묘사된 공간, 그 속에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행동과 대화와 감정들. 그것들은 충분히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 독자가 마치 그 속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느낄 수만 있다면.

 

나는 등장인물이 많은 소설을 꽤나 힘들어 하는 독자다. 거기다 다른 나라 언어로 된 익숙하지 않은 긴 이름들도 여전히 낯설다. 책장을 다 덮고도 다 외울 수 없는 이름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름이 아니다. 그 속에 펼쳐진 그들의 삶이다. 물론 그들에게 펼쳐진 일상은 지중해다. 지중해 속에서 짠내를 맡으면서, 파도와 싸우면서 항해한다. 때론 분노로 끓어오르고, 때론 추억으로 시간을 때우고, 때로는 지독한 그리움과 싸움을 한다. 어쩌면 그곳은 갇힌 공간이다. 더이상 나아가지 않는 일상이다. 끊임없이 떠오르는 기억들, 소중한 사람들, 가슴 속에 간직한 꿈과 희망들은 자주 사람들을 괴롭힌다.

 

 

나는 한 번도 내가 살고 있는 도시를 떠나본 적이 없다. 가까운 다른 도시에 잠깐씩 여행을 간 기억은 있다. 하지만 완벽하게 벗어나 일상처럼 살아본 일이 없다. 그래서 다른 공간, 내가 가보지 못한 색다른 공간이 배경이 되는 작품을 좋아한다. 그속에서 한껏 공기를 들이마시며 심호흡을 준비한다. 완전히 빠져들 때쯤 이야기는 끝이 난다. 책장을 덮으면 한동안 그 여운들로 가득해진다. 눈을 감거나, 창문을 열고 풍경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나는 책 속의 어느 장소에 가 있는 듯 하다. 하얗게 부서져 내리는 하얀 풍랑들, 마치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떠오르는 태양빛, 그 사이사이로 비춰드는 햇빛, 잔잔하게 일렁이는 바다의 잔물결..... 이따금씩 떠오르는 물보라..... 나는 그곳을 항해하고 있는 한 명의 밀수꾼이 되어 있었다. 그들은 과거의 어떤 시간들을 그리워한다. 나는 일상을 살아내면서 미래의 어떤 시간들을 갈망한다. 이곳이 아닌 저곳으로 떠나기를. 여기가 아닌 거기로 훌쩍 갈 수 있기를. 이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멀리멀리 떠나가기를. 금세 외로워지고, 그리워질 걸 알지만. 그렇게 일상 속에서 뭔가를 그리워하고, 떠난 후에는 그 일상을 그리워하는 게 사람이 아니던가.

 

 

그렇게 나는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 속에서 지독스럽게 술을 마시기도 했고, 버럭 화를 내기도 했으며,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가슴 속에 열망을 따뜻하게 쓰다듬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지중해의 푸르른 물결을 느끼고 싶어 안달난 사람처럼 그의 묘사에 빠져들었다.

 

가끔 떠나고 싶은 다른 세상 속으로 책을 통해 달려 들어간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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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의 아이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욱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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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건'들로 그득한, 미미여사의 소설집 '눈의 아이'를 만났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다섯 편의 단편들을 순식간에 다 읽어 버렸다. 인간의 진득한 욕망들이, 구석구석 마주하고 싶지 않은 상황들이, 일어나지 말았으면 좋았을 일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첫번째 단편, '눈의 아이'

서른 살이 된, 어느 날 함께 하게 된 동창 모임. 늘 함께 하던 네 명이 모였다. 늘 함께였던 한 명은 그 자리에 없었다. 열두 살에 살해된 유키코. 그녀만 빼고 그들은 모였다. 각자의 시간과 공간에서 잘 살아 있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마음 속에서 유키코를 완전히 떨쳐낸 적은 없었으리라. 빨간 머플러, 빨간 코트, 빨간 장화를 신고 눈 속에 파묻혀 시체가 된 아이, 유키코. 그날은 우연처럼, 필연처럼 눈이 내렸고, 유키코의 발자국이 눈에 찍혀갔다. 모두가 떠난 자리에 홀로 남은 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나, 저주 받은 나, 열두 살, 유키코가 죽던 순간에 함께 죽어버린 나, '나'는 바로 유키코를 살해한 장본인이었다. '질투'라는 감정은 누군가를 죽일 수도 있다는 걸.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척 살아왔지만 결코 아무렇지 않을 수 없다는 것.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자기 속의 누군가를 죽이는 것과 같다. 어떤 감정이든 느끼려면 자신의 어떤 내면이 필요한 법. 그 아이가 나였고, 나가 그 아이였다. 끔찍한 진실이다.

 

두번째 단편, '장난감'

한 완구점을 지키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리고 그 완구점에 관한 괴상한 소문이 돈다. 안주인인 할머니는 죽었고, 그 이후로 소문은 더 심각해진다. 할머니에 재산을 둘러싼 자식들의 분쟁이 이어진다. 그리고 진실이든 아니든 소문과 나쁜 기운은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장난감처럼 내팽겨쳐진다. 할아버지마저 사라진 후, 한 아이는 그의 영혼을 본다. 마치 그 영혼을 달래듯, 함께 하듯. 그렇게 함께 많은 시간들을 보내고 나면 분명 현실에서 찾게 되는 무엇이 있으리라.

 

세번째 단편, '지요코'

한 아이가 테마공원에서 핑크색 토끼 인형탈을 쓰고 풍선을 나눠주는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다. 더러워진 인형탈을 꾸역꾸역 입고 그 토끼의 눈으로 사람들을 바라보니 기이한 일이 생겼다. 사람들이 인형 혹은 장난감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모습을 거울로 비춰본다. '지요코'다. 어린시절 가장 사랑했던 인형. 지금은 안부조차 물을 수 없이 멀어진 그 인형. 그랬다. 이 토끼 인형탈을 쓰면 사람들이 어린시절 좋아했던 인형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것만 어쩌면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보여주고, 또 그 추억을 간직했기 때문에 삶을 건강하게, 정직하게 살아낼 힘을 주는 것이란 생각을 한다. 그리고 도둑질을 한 아이와 엄마를 본다. 그들은 사람의 모습이다. 어떤 인형으로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사라질 때 뒷모습엔 검은 손이 그들을 따라다닌다. 나는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며 내 자신에게도 묻는다, 내게 가장 소중했던 인형은 무엇일까. 나는 그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일까.

 

네번째 단편, 돌베개.

돌베개라는 전설이 있다. 나그네가 쉬었다 가면 온갖 정성으로 보살펴 주면서 잠이 들면 돌베개 위에서 그들을 죽이고 물품들을 빼앗가 가는 부부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것을 지켜보는 딸이 못마땅하게 생각하여 나그네 대신 그 자리에 누워 있었고, 그 부부는 자신의 손으로 딸을 죽인다. 인과응보에 대한 이야기. 사건이 발생한다. 사람들은 그 사건이 으레 어떤 것 때문에 일어났닥 단정짓는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도 않고, 모든 것이 다 밝혀지는 것도 아니며 인과응보라는 방식대로 진행되지도 않는다. 그러나 믿고 싶은 것이다. 어떻게든 자신이 끼친 모든 일들은 그대로 자신에게 돌아온다고. 꼭 그렇게 된다고.

 

다섯버내 단편, 상흔

험난한 세상을 자신이 생각하는 '정의'대로 살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 정의를 자기방식대로 실천하고 싶었던 한 사람이 진심으로 원하는 세계를 온라인에 구축했다. 진심으로 원하면 정말 그렇게 되는 것일까. 신은 존재하는 것일까. 때론 거짓 같고, 끝내 진실을 알 순 없지만 누군가는 상처를 받고, 끝내 그것에 헤어나오지 못하기도 하고, 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또 단번에 누군가를 죽이는 결단을 내리기도 한다. 그것이 비록 잘못 되었다는 걸 나중에 깨닫는다 할지라도. 어떤 일이든 결국엔 상흔은 남는 법이리라.

 

 

다 읽고 나니, 그녀가 남겨놓은 흔적들이 내 마음에 내려 앉았다. 선명하게 보이는 장면 장면들이 나를 조금은 괴롭힌다. 무엇이 진실인지, 무엇이 옳은지 헷갈리는 세상 속에서 그녀가 펼쳐놓은 이야기들은 그래도 삶의 긍정적인 기운에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나 사건은 일어나고, 사람의 감정과 욕구는 변함없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그속에서 맑고 좋은 기운들을 만나 힘차게 세상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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