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민자, <손바닥 수필>

 

 

 

 


나처럼 시적인 문장을 쓰지 못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책 같아서

 

밑줄을 그으며 읽고 있다.

 

이런 글을 좋아한다.

 

 

 

 

어디에 숨어 있다 나타나는 걸까.
가끔 나는 그가 궁금했다. 몸 안에 유숙하는지 몸 밖에 서식하는지 그조차 도시 알 수가 없었다. (...)
엊저녁, 욕실에서 비누칠을 하다가 우연찮게 그의 은신처를 알아냈다. 무심코 돌아본 벽거울 속, 뭉게구름 화창한 등판 한가운데에 어스름한 그의 그림자가 보였다. 아무리 애를 써도 만져지지 않는 견갑골 등성이 아래 후미진 골짜기, 허리를 구부려도 어깨를 젖혀 봐도 내 손이 닿지 않는 비탈진 벼랑 외진 그늘막에, 출구를 찾지 못한 한 마리 짐승처럼 그곳에 내 외로움이 산다. 나 아닌 타자만이, 오직 그대만이 어루만져 줄 수 있는 한 조각 쓸쓸한 가려움이 산다.(30~31쪽, ‘외로움이 사는 곳’ 중에서)

삶은 농담 같은 진담, 목숨은 예외 없는 필패必敗. 그보다 더 쓸쓸한 일은 무심한 척, 쾌활한 척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속으로만 진땀을 흘려야 한다는 것이다. 사는 일의 시름과 덧없음마저 춤으로 환치할 줄 아는 저 가을 억새들처럼.(39쪽, ‘진땀’ 중에서)

시간이다.
시간은 고요를 가만두지 못한다. 사막의 바람이 모래알을 훔치듯 시간은 은밀히 고요를 부식시킨다. 시간이라는 괴물은 정적을 파먹고 온갖 부산스러운 것들을 흐름 위에 쏟아놓는다. 날이 밝으면 숭숭한 구덩이마다 숨겨놓은 시간의 알들이 왁자하게 부화할 것이다. 밤의 휘장을 찢어 햇덩이를 꺼내고 침묵을 휘저어 소음을 흩뿌리는 시간의 영묘한 연금술에 고요는 난폭하게 유린될 것이다. 시간이 흐른다고 사람들은 말하지만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 제 꼬리를 물고 맴을 도는 태극처럼 제자리에서 순환할 뿐, 시간은 어디로도 흐르지 않는다.(88~89쪽, ‘시간의 환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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