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
소 알로이시오 지음, 박우택 옮김 / 책으로여는세상 / 2009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6.25가 끝나고 말할 수없이 참혹한 한국, 그 춥고 배고픈 나라의 아이들 얼굴에서 사라진 웃음과 희망을 되찾아 준 파란 눈의 미국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자서전이다.  

1930년 미국 위싱턴에서 태어난 그는 1957년 12월 8일 한국에 오셔서 부산교구 소속의 신부로 30여년을 봉직했다. 스물 일곱의 잘 생긴 신부님이 평생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살다가 1989년 루 게릭병을 얻어 3년을 투병하다 1992년 3월 16일 필리핀 소녀의 집에서 영면하셨다. 지극히 청빈한 삶으로 간소한 식사와 검소함이 몸에 배었고, 신자들이 살던 참혹한 천막집에서 5년이나 사셨다니 놀랍다. 혹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은 것들이 쌓여 몹쓸 병을 얻어 돌아가신 듯하여 안타까움이 더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신부가 되고 싶어 소신학교에 들어갔다. 일반인보다 좋은 환경에서 부유하게 사는 수도회 신부는 엉터리라고 생각해 선교신부를 꿈꾸었고, 그에 더하여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교구신부가 되고 싶었다. 14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마침내 서제 서품을 받고 가난한 나라 한국으로 왔다. 루벵의 원장님은 건강을 생각해 좀 더 따뜻한 태국을 권면했지만, 신학교에서 만난 한국인 신부와 평신도에게 한국 이야기를 들었기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당시 한국은 이보다 더 굶주리고 가난할 수 없는 참혹한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신부님은 밤하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예쁘고 쾌활하고 뽐내지 않으며 때 묻지 않은 천진난만한 아이들을 한국의 보물이라 생각했다. 

 

신부님은 기후와 음식의 적응이 어려웠는지 점점 건강이 나빠져 급성간염으로 쓰러졌다. 10개월 동안 회복을 위해 노력했고, 일본에서 3개월 요양도 했지만 결국 고향으로 돌아 갔다. 그곳에서도 여전히 가난한 한국을 위해 모금활동을 했고, 나중에 합류한 최재선 주교님과 6개월간 미국 전역을 돌며 모금했다. 함께 모금활동을 하며 문화의 차이와 언어 문제로 황당하고 재밌는 에피소드도 많았지만, 역시 가난한 이들을 위한 돈을 축내지 않으려는 최주교님의 일화는 눈물겨웠다. 

"소 신부, 한국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리리고 있는데 내가 어찌 이 귀한 돈을 식당에서 쓸 수 있겠습니까? 그냥 냉장고에 있는 빵과 우유로 때웁시다."(114쪽) 

항공사에서 허용한 무게를 초과해 물게 될 24달러를 아끼기 위해 겨울 외투를 두 개나 껴입고 주머니마다 무게가 나갈 물건들을 채워 마치 우주인처럼 뒤뚱거리며 비행기에 오른 최주교님, 오늘날 종교인들에게 이런 모습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 같아 더욱 아름답게 느껴졌다. 

 

소 알로이시오 신부님은 요양과 모금활동을 끝내고 1961년 12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았지만 여전히 가난했다. 1962년 6월, 부산 송도 성당의 본당신부로 정식 발령을 받고, 아이들을 제대로 교육시켜야 겠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미국에서 만난 그레이샨 마이어씨의 도움으로 우편모금을 알았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손수건에 수를 놓아 우편 모금 편지에 선물로 넣어 보낼 손수건 사업을 시작했다. 수를 잘 놓는 부녀자들이 천을 가져다 수를 놓아 오면 수고비를 지불했는데, 당시 공장 노동자들 월급 3천원보다 더 많은 오천원을 벌 수 있었다. 손수건 사업은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살아갈 수 있게 한 좋은 일거리였다. 구호사업은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손수건 사업은 여자들이 수를 놓아 돈을 벌기도 했지만, 우편 모금 봉투에 손으로 주소를 쓰는 일로 2~3백명의 야간학교 여학생이나 졸업생들도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손수건 사업으로 모금한 돈은 처음엔 구호기관에 현금 지원을 했지만, 구호금을 최대한 알차고 쓸모있게 사용하기 위해 직접 구호사업을 하게 되었다. 마리아 수녀회를 조직해 훈련받은 수녀들의 책임하에 고아들을 거두어 가정을 만들고 보육원을 세웠다. 1970년 10월 25일, 부산에 무료로 운영될 구호병원을 개원해 매일 150명 이상의 환자를 진료했다. 1982년엔 서울에 '도티기념병원'이란 무료 병원을 서울 소년의 집 안에 세웠다. 이보다 앞서 거리의 아이들을 잡아다 비참하게 수용한 희망원에서 아이들을 인수해 소년의 집과 소녀의 집을 설립했다. 이 아이들이 다닐 수 있는 초.중.고등학교를 세워 직업교육을 시켜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키워냈다.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은 악기 연주를 배워 소년의 현악합주단 발표회도 매년 열었고, 운동을 좋아한 아이들을 위해 축구선수단도 만들었다. 골키퍼 김병지 선수가 부산 소년의 집 고등학교 축구부 출신이란다. 사회에 나가 직장을 얻은 졸업생들은 수입의 10%를 기부해 소년의 집 운영비를 충당했고, 아이들에게도 기쁨과 희망이 되게 했다. 



신부님이 4년 9개월이나 거처했던 천막집은 악취와 추위, 연탄개스의 위험과 재래식 변소의 불편함 등 최악의 조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원해 감당하셨고, 온갖 사업계획서를 들고 후원금을 얻으러 왔던 사람들은 신부님의 이런 생활을 보곤 스스로 물러났다고 한다. 세계 기업에 버금 갈 사업 규모와 후원금을 관리하면서도 출장길엔 항상 이코노미클래스만 탔고, 한번도 아버지를 한국에 모셔다 사업성과를 자랑하지 않았다. 낮은 곳으로 임하여 가난한 사람들을 주님처럼 섬겼던 신부님은 진정한 그리스도의 현존이라 할만한 분이셨다. 필리핀과 멕시코까지 구호사업을 펼쳤고, 마리아수녀회는 그분의 유지를 받들어 브라질과 과테말라까지 구호사업을 확장 관리하고 있다. 이 땅에 살면서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일생을 바치신 신부님은 이제 천국에서 편히 안식하리라 위로를 삼는다.  

"여기 있는 형제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다."
(마태복음 25장 37절~ 4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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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9-12-08 00: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읽은 단순한 기쁨의 저자 피에르 신부님은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셨는데 재산 포기 각서를 쓰시고 맨 몸으로 수도사가 되어 헌신적인 삶을 사셨더라고요. 보통 길이 아닌데 그같은 길을 거침 없이 가는 분들이 이렇게 있어요. 단지 성품의 문제가 아니라, 그런 사람들은 정말 날개 없는 천사가 아닐까 싶어요. 소록도에서 헌신하신 수녀님들도 같이 떠오르네요.

순오기 2009-12-09 10:00   좋아요 0 | URL
단순한 기쁨은 한비야, 공지영 두 분이 추천하던데 언제 봐야지요.
이런 분들이 계셔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겠죠.^^

메르헨 2009-12-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에 올려주신 성격구절처럼...모든 일을 주께 하듯...한다면 세상이 이렇지는
않을텐데...하면서도 주변에 좋은 분들을 보면 참 괜찮은 삶이다 싶습니다.^^

순오기 2009-12-09 10:00   좋아요 0 | URL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는 것이 그분께 하는 것이란 것~ 알면서도 잘 실천되지 않는 항목이에요.ㅜㅜ

같은하늘 2009-12-08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이런 분들의 이야기를 볼때마다 정말 존경스러워요.
정말로 날개 없는 천사라는 말이 딱이예요.

순오기 2009-12-09 10:01   좋아요 0 | URL
사람은 누구나 종교적 심성을 갖고 있어요. 내게 맞는 종교가 어떤 건지 아직 안 닿았을 뿐이지요.^^
우리도 누군가에겐 날개없는 천사가 될 수 있을까요?

blanca 2009-12-09 1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동적이네요...저는 임신중에 세례를 받았어요. 함세웅 신부님께요. 그 분도 너무 존경스러워서....설교를 듣다 펑펑 운 적도 있어요. 종교의 타락에 대하여 말이 많지만 그 속에서도 정말 꽃처럼 피어나는 종교인들이 있어 세상은 살 만한가 합니다. 아이들과 손잡고 찍은 사진 뭉클합니다.

순오기 2009-12-10 11:25   좋아요 0 | URL
함세웅신부님~ 존함은 익히 들었지요. 존경할만한 성직자와 종교인도 많이 있는데 우리가 잘 모르기도 하고, 안좋은 것들만 드러나서 그렇기도 하겠지요.
결혼전에 친구 언니한테 꽃꽂이 배우면서 성당 행사에 여러번 참여해 성당도 제겐 친숙하지요~ 시부모님과 남편은 카톨릭 신자이기도 하고요. 성당에선 설교라고 안하고 '강론'이라고 하던데...^^

blanca 2009-12-10 2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리하십니다. 냉담중인 나이론 신자랍니다.--;

순오기 2009-12-11 00:05   좋아요 0 | URL
하하하~ 그렇게 되나요?
냉담중이라는 말도 제가 알아 먹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