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해록 : 조선 선비가 본 드넓은 아시아 샘깊은 오늘고전 10
방현희 지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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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의 청소년들의 모습을 지켜보면 왠지 목표를 잃어버린 채 표류하고 있는 듯 한 인상을 받게 된다. 자신의 타고난 소질개발이나 머릿속에 그려 보았던 희망은 무시된 채 시험을 통한 내신과 종국적으로는 수능에서 고득점을 받기 위한 판에 박힌 교육만을 강요받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배움과 마찬가지로 어려서부터 차근차근 키워야 하는 주변인과의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한 소통을 이끌기 위한 예절범절이나 규범 따위는 관심 밖으로 밀린지 오래다. 이런 아이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성적을 통한 치열한 경쟁과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들뿐이다. 간혹 아이들의 과외수업을 하는 친구의 입을 빌자면 예전에는 보통 직업적인 특성과 메리트를 생각해 자신이 되고 싶은 직업을 얘기했었다면, 요즘 아이들의 직업선택의 기준은 무조건 돈을 얼마나 쉽고 많이 벌 수 있느냐로 자신의 희망직업으로 머릿속에 그려간다는 것이다. 가령 어디서 들었는지 장의사의 하루 일당이 괜찮다는 소리를 들었는지 장의사가 되고 싶다는 아이도 있단다. 이러한 요즘 아이들이 갖고 생각의 변화를 만든 것은 심각한 물질만능주의와 더불어 지나치게 과장된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또 무엇보다 가정교육의 부재에서 생기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의 사교육 부담을 해결하기 위해서 바쁘다보니 아이들과 저녁 한 때라도 식사를 함께하며 아이들이 갖고 있는 생각이나 고충들을 들어들어 주고, 대인관계에 꼭 필요한 생활예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교육의 기회마저 찾지 못하게 된다. 직접적인 체험교육이 아니면 양서를 통한 간접경험의 기회를 통해서 그 길을 열어갔으면 좋겠지만, 이마저도 국, 영, 수 과목에 열을 올리다보면 가치관을 기를 수 없는 책과 만남의 기회는 요원하기만 하다.

<표해록>, 보통은 ‘표류기’가 우리의 귀에는 익숙하다. 그리고 표류기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하멜표류기’일 라고 생각한다. <표해록>은 제주도에서 경차관을 맡아보던 조선시대 선비 최부가 부친상을 당해 좋지 않은 날씨 속에서 뭍으로 가기위해 배를 띄웠다가, 여러차례의 풍랑을 만나, 표류해 당시 조선인들의 발길이 미치지 않았던 중국 강남지방으로 흘러가 이르게 되고, 여러 번의 곤경을 극복하며 결국에는 중국 황제까지 만나고 조선땅으로 귀환하는 과정을 그린 내용을 담고 있다. <표해록>과 여타의 다른 표류나 탐험일지 같은 것을 접할 때마다 느끼는 것은 먼저 때로는 목숨을 위협받기도 하는 급박한, 정신적인 여유마저도 그리 녹녹하지 않았을 위기상황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던 기록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그리고 특히 <표해록>에서도 눈여겨 볼 것은 최부의 리더로서의 역할이다. 리더십은 역시 위기상황에서 빛을 발하는 다는 것을 다시금 일깨워준다. 또 최부가 표류해서 귀환하기까지 보여준 몸에 밴 예의가 묻어나는 자신감이다.

지금의 어떤 사람들의 생각이나 행동들을 조선시대의 선비들과 비교해봤을 때 어쩌면 다소 고지식하고 융통성이 없게 비춰질 수도 있다. 하지만, <표해록>에서 최부의 말과 행동을 보다 면밀히 들여다보면 무엇보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생각하고,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임금을 칭송함에 있어 늘 마음속 깊이 예(禮)를 먼저 생각해 행실을 가다듬고, 목숨을 내놓더라도 쉽게 생각을 바꾸지 않는 굳은 절개를 배울 수 있다. 따라서 이 책을 통해서 아이들이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겪게 될 어려운 상황에서 무조건 엄마를 찾는 것이 아닌 자기 스스로 어려움을 슬기롭게 개척해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다듬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세상은 독불장군 식으로 자신만 잘났다고 해서 어떠한 삶의 행복을 그려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주변인과의 호흡을 위해서 먼저 배려하고 감사한 마음을 가질 때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으면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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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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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사회를 비롯한 지구촌은 어느덧 ‘자본주의’ 라는 상표의 옷도 유행이 지난 것처럼 느껴지는지 ‘신자유주의’ 라는 상표를 바꿔달기 시작한지 오래다. 하지만 우리는 유명브랜드의 가치를 상표만으로도 판가름하는 것처럼 제대로 그 브랜드가 갖고 있는 차별화된 가치를 꼼꼼히 살펴보지도 않고, 그 브랜드를 지목하고 입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현 사회의 흐름은 이렇듯 대중들의 꼼꼼한 살펴봄이 없이 생활 속에 들어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전의 ‘자본주의’와 다르게 ‘신자유주의’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것 같다. 물론 나 역시도 단지 경제학이나 행정학의 흐름에 있어서 이전 단계의 정책에 대한 보완 개념이 더해져서 이름 붙여졌겠지 라며 생각했으니 말이다.

문제는 경제전반을 통해서 신자유주의 물결이 사회구성원들에게 어떠한 혜택을 골고루 나누어 줄 것인가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 오를 때 쯤, 김칫국 마시지 말라는 식으로 세상을 경제공황의 위기로 몰아세웠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위기 극복을 위한 다양한 처방들이 나오는데, 정신적이든 경제적이든 최종적으로 고통을 떠안는 사람들은 늘 지금까지 안간힘으로 버텨왔던 서민들이다. 헌법에 분명히 명시된 의사표현의 자유를 앞세워 이러한 고충을 외부에 표출이라도 할라치면 얼토당토아니한 갖가지 이유를 들이대며 공권력으로 이를 막고 나선다. 결국 서민들의 피 끓는 서러움의 목소리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게 되는 세상인 것이다.

아침 출근길에 버스와 지하철에 길게 줄로 늘어선 회사원들의 모습을 좀 유심히 살펴보았다. 모두가 바쁘다. 이런 발걸음을 가볍게 해주는지, 무겁게 해주는 건지 모두들 귀에는 휴대폰DMB, PMP, MP3플레이어 등에서 연결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시선 역시 작은 액정화면으로 집중되어 있고, 그리고 집어 드는 무료 아침신문에는 얼굴에 미소를 지을만한 유쾌한 뉴스는 별로 없다. 국회에서는 논의내지는 협상이 실종된 권력다툼이 끊이지 않고, 점차 환율과 주가는 제자리를 찾아가고 있는데, 있던 일자릴 잃거나 걱정하는 사람들은 늘어만 가고 있는 현실, 결국 내 앞가림이나 잘해야지 하는 심정으로 오늘도 묵묵히 직장에서 불의에 대한 항거의식은 접어둔 체 일에만 열중한다. 이는 현재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안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들이 지켜보며 큰 웃음을 짓고 있을 상황이다. 마치 그들 맘대로 떡 주무르듯 하고 있으니 말이다.

최근의 정책 및 경제 현안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는 집회현장을 멀리서 또는 방송 등의 매체를 통해서 지켜보며 이런 생각을 할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정치에 대해서 잘 모르니까, 경제에 대해서도 잘 모르고, 법에 대해서 잘 모르는데 내가 나설 일이 아니지!’ 라며 말이죠. 사실은 자신은 크게 직접적인 피해를 입지 않았다는 걸 말하는 겁니다. 면밀히 그 속을 들여다보면 자신과 전혀 무관하지 않은 일임에도 모르쇠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것도 문제가 될 수는 있다. 어차피 국가와 기업에서 내놓은 정책과 방침들이 모든 국민들과 직원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본질적인 자유와 인권까지 유린되는 것에 눈감고 있어서는 앞으로 더 큰 화까지도 감내해야 한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비록 만화를 통해서 의미전달을 꾀하는 <어린왕자의 귀환>은 앞으로 우리가 추가적으로 겪을 수 있는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적인 모순점들을 쉽게 이해하고, 이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써 지녀야 할 생각을 일깨워주는 좋은 지침서가 된다고 생각한다.

7개의 장으로 나뉘어 정리된 책의 내용과 부록에서는 경영합리화와 자유무역 이라는 허울 좋은 시장논리가 낳은 비정규직과 노동자의 분할통제, 그리고 FTA협정과 공기업의 민영화 문제점, 여기에 신자유주의 시장을 지배하는 자본가들의 횡포 등 우리가 최근 사회적인 문제로 지적하고는 있으나 자세한 내막까지 들여다보지 못했던 것들을 만화 그림을 통한 쉬운 접근과 여기에 붙여진 전문가의 간략하면서도 명확한 해제를 통해서 이러한 문제점들에 한 걸음 다가 설수 있게 도와준다.

분명한 것은 국가나 사회, 또는 자신이 소속된 공동체 조직으로부터 받고 있으며, 받을 수 있는 불의나 불합리에 대해서 알고 받느냐, 아예 모르고 받느냐 에 따라서 그 해결방법은 다르게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아예 모르고 받는 불의나 불합리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고충과 더불어 시간과 금적적인 노력까지도 필요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어린왕자의 귀환>을 통해서 전해 듣는 현 신자유주의 사회에 대한 얘기들을 귀 담아두었을 때, 비록 지금이 세대가 겪고 있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다. 오늘의 상황을 거슬러 올라가볼 때, 무엇보다 예전에 가족을 중심으로 한 유대관계가 주는 끈끈한 정이 사라진 개인주의와 이기주의가 인터넷망처럼 국경을 초월하여 대중들의 내면에 깔려 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문명의 발전을 물질과 기술적인 발전을 통해서만 꾀한다면 그 폐해는 곧 반인륜이라는 거대한 폭풍 앞에 무너지리라 생각한다. 물질과 기술 앞에 무엇보다 인간의 가치에 대한 소중함이 있을 때 참된 문명과 사회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그때 또다시 어린왕자도 그러한 아름다운 변화로 가꾼 세상을 축복하기 위해 귀환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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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 - 사는 재미를 잃어버린 아저씨들의 문화 대반란
이현.홍은미 지음 / 글담출판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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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이 말은 꽤 오래된 SUV형 자동차 광고 카피의 문구이다. 나는 대한민국의 중년들에게 말하고 싶다. “그동안 그저 앞만 보고 열심히 일하면 내달렸던 대한민국의 40,50대 중년남성들이여! 이제는 자신만의 삶의 멋을 찾아 떠나라!” 라고 말이다. 나 역시 어느덧 불과 몇 년 후면 40대로 접어든다. 부르기 좋은 말로 중년, 인생이란 마라톤 코스의 반환점을 도는 시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반환점을 돈다는 것은 어쩌면 그동안 자신이 밟아온 길은 되돌아간다는 의미이도 하다. 왔던 길 돌아가는 것 그게 바로 인생이 아니던가. 하지만 돌아가는 길은 그래도 자신이 한 번쯤 밟고 지나 온 길이기에 처음 지나면서 겪었을 시행착오를 두 번, 세 번 반복하지 않게 되며, 그러면서 나름의 성숙된 자아와 더불어 인생의 의미 좀 더 완벽히 깨달아가는 게 아닐까? 그런데 왠지 돌아가는 발걸음이 처음 지날 때보다 무겁다. 반환점까지 무조건 앞만 보고 달린 탓에 돌아가는 길에 자신의 주변을 둘러봤을 때 선 듯 눈길이 머무는 것들이 그림의 떡처럼 느껴진다. ‘왕년의 혈기만 있다면 한 번 해보고 싶은데...’ 하는 마음은 있지만 20여 년 동안 자신을 가꾸는 일에 눈을 돌려 본 적이 드물었던 중년들은 그저 바라보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지난 날 가정과 직장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졌던 의지와 신념은 다 어디 갔던가? 무언가에 다시 빠져 그동안 접고만 살아왔던 자신의 삶과 인생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찾겠다고 도전한다면 가능할까? 이렇게 주저하는 사이에 또 머리 숱은 줄고 눈가와 이마에 주름은 늘어간다. 서룰러 삶의 무게로 축쳐져 진 채 돌고 있었던 체바퀴에서 나와 인생에 활기를 불어넣어 반환점을 돌아 삶의 종착역으로 향하는 발걸음에 향기로운 미소와 더불어 흥겨운 어깨춤을 만들어 보라. 특히 남성들에게 있어 나이를 불문하고 “도전”이란 단어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는 먿은 듯 잔잔했던 마음과 가슴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이다. ‘조금 더 여유가 생기면’, ‘다음주부터’ , ‘다음달부터’ 라며 미루고 있었던 남은 인생에 활력을 불어넣어 줄 취미에 도전을 해보자. 왕년에 한번쯤 악기를 만져봤거나, 노래에 소질이 있었다면 과감히 밴드에 도전장을 던져보고, 요즘 젊은이들과의 소통을 원한다면 관심있는 분야의 인터넷 카페에 가입하고, 개인 블로그를 꾸며보는 것도 좋다. 아니면 일단 굳어진 몸과 늘어진 뱃살을 줄여 볼 생각만으로 아침마다 배드민턴을 치는 것으로 변화의 물고를 터보는 것도 좋다.

그리고 책 <아저씨 록밴드를 결성하다>에서 전하는 여덟 명의 섹시한 아저씨들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여 본다면 더욱 자신감이 넘칠 거라 생각한다. 혹 책안에서는 비교적 성공한 중년의 인생의 권태탈출기를 다루고 있어, 취미활동도 시간과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 분명 시간도 필요하고 돈도 필요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투자된 시간과 돈의 가치는 그동안 살아오면서 느낄 수 없는 인생의 색다른 성취감을 가져다 줄 수도 있고, 자신이 만들어가는 인생임에도 불구하고 늘 빠져있던 주인공인 자신의 진정한 가치를 재발견 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도 있기 때문에 시간과 금전적인 소비를 두려워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책의 두 번째 파트에서는 멋을 지닌 중년으로 가꾸는 옷과 음식과 화장품, 모발관리, 성형수술에 이르기까지 다루며 코치해 주고 있어 책 안에 있는 모든 것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닌 적어도 갖춰 입는 옷의 색깔과 헤어스타일에만 신경을 써도 남다른 멋을 발산시킬 수 있고, 멋을 지닌 중년으로 거듭날 수 있다.

세상이 변하면서 사람들이 생각하며 행동하는 문화와 가치 또한 변하기 마련이다. 물론 지나치게 외형적인 측면에 국한된 화려함으로 사람들 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풍조이긴 하지만, 작은 관심의 시작이 변화의 물고를 터줄 수 있듯이, 변화하는 세상의 다양한 문화와 트랜드에 부지런히 관심을 기울이고, 호기심을 키워간다면 결코 단절된 세대의 장벽에 가로막혀 초라하거나 쓸쓸한 중년을 보내진 않을 거라 생각한다. 인생의 궁핍과 풍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요소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과의 원활한 소통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소통을 열어가는 것은 물론 자기 자신의 말과 행동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때문에 끝없는 도전과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다양한 취미생활을 통해 자신을 가꿔나갈 때, 인생의 반환점을 돌아 황금기로 향하는 발걸음은 끝없이 가벼워 질 수 있다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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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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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죽음 앞에서 자신이 지나온 발자취를 살아있는 이들에게 남길 수 있는 흔적들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단연 일기장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 친구와의 술자리에서 내가 요즘 부쩍 만날 때마다 디카로 사진도 많이 찍고, 다이어리에 짤막하게나마 만남에서 나눈 주된 얘기들을 남긴다고 했더니, 친구는 참 팔자 좋구나 하는 반응이었다. 그리곤 나 나름대로의 지금 쓰는 일기와 사진이 내포할 의미와 가치에 대해서도 얘기를 했다. 물론 100% 공감을 이끌어내지는 못했지만, 작은 생각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 위한 노크로써는 충분했다는 생각이다. 매일매일 다이어리에 지난 일상 중 오래 기억하고 싶은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 등을 적고, 여기에 오늘은 영화나 연극을 보거나, 야구관전을 했다면 티켓과 사진을 붙이고, 그날의 살아있는 느낌까지 덧붙인다면 그날의 일들은 지나갔음에도 나의 다이어리 속에서 추억이란 옷으로 갈아입고서 다시금 나만의 역사로 재탄생된다. 내 친구처럼 ‘내가 유명한 사람도 아닌데 그런게 무슨 소용이 있겠어!’ 라며 개인의 기록에 대한 의미나 가치를 하찮게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개인적인 역사는 인체의 대동맥과 같은 커다란 역사의 흐름에서 마치 모세혈관정도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모세혈관이 없이 대동맥 또한 원활하게 흐름을 이어갈 수 없는 법, 그래서 개인의 역사의 의미와 가치 또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이 시대의 생활상이며, 문화의 단면을 돌아볼 수 있는 기준으로써 작지만 알찬 역사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혁명이란 이름을 내걸고 이념과 거대한 권력에 맞서 싸운다는 것은 무척이나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이 선행되어야 이어갈 수 있는 고행이라고도 할 수 있다. 더욱이 체 게바라가 꿈꾸는 혁명의 고행 끝에서 자신이 꿈꾸며, 누릴 수 있는 유토피아는 단지 대중들의 자유와 행복뿐이었다. 그리고 그가 꿈꾸는 대중의 자유와 행복을 위한 혁명의지는 일기장과 작은 노트에 마치 혁명가처럼 마음으로 되뇌이며 적어 내려간 시의 한 구절 한 구절 속에 깃들어 있었는데, 그 생각의 행적을 따라가며 진정한 혁명의 의미와 가치를 일깨워봤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은 체 게바라가 쿠바혁명 성공의 달콤함을 뒤로하고 끊임없이 또 다른 혁명을 이끌다 미완의 세상과 이별을 고하기 근 3년 동안 혁명의 다짐처럼 때로는 고행을 견뎌낼 수 있는 희망의 씨앗에 대한 기록을 그의 지나온 행적에 기초하여 재구성한 발자취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혁명의 길목 길목에서까지 마음에 담아가며 암송했다던 세사르 바예호, 파블로 네루다, 니콜라스 기옌 그리고 레온 펠리뻬의 시 69편들은 체 게바라의 필사를 통해서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듯 느껴진다. 특히 필자는 중남미시인답게 시 한편 한편에 담긴 의미를 연대적인 해석들 덧붙여 이해를 돕는다. 그리고 시속에 함축된 체 게바라의 생각의 행적들에 마치 영화의 한 장면, 한 장면을 이어주는 시간의 연속성을 부여해 줌으로써 시공을 초월해 그와 함께 시를 읽으며, 함께 고민하는 듯 한 환상에 빠뜨린다.

체 게바라의 혁명적인 삶의 이야기와 그가 아끼던 시 구절에 담겨 있는 민중들의 자유와 행복을 향한 항거의식들이 40년이 지나 지구상에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온전한 뿌리를 내렸다는 오늘날에 다시금 대중들의 마음을 자극하며, 다른 사회주의 이념과는 다른 보다 는 무엇일까? 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비록 세상은 자본주의와 뿌리를 같이한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보기에는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이 열린 듯 보이지만, 보다 깊은 내면을 들여다보면 어쩌면 예전의 없고 가난한 시절의 고통에 버금가는 빈부차이로 인한 고충과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 가져다주는 정신적인 고통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다. 더욱이 최근 대한민국 사회에서 일어나는 권력의 주체와 인권을 둘러싼 여러 갈등들은 40여년 전에 멈춰진 체 게바라가 부르짖던 자유의 외침소리가 울리고 멈춰진 혁명의 시계를 다시금 돌아가게 만들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이제는 마치 전설적인 혁명가가 남긴 홀쭉한 배낭 안에 담겨진 시를 통해 그가 꿈꾼 이상향의 세상을 위한 고뇌를 되짚어보고, 그가 자식들에게 전하는 마지막 편지에서 전한 이 한마디를 가슴에 담아 오래토록 간직하고 싶다.

“아빠는 너희들이 이 세상 어디서든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다. 그것이 바로 혁명가가 지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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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재 부모의 오답백과
앨리사 쿼트 지음, 박지웅 외 옮김 / 알마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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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느 덧 불혹을 앞둔 나이가 되어 가고 있는 지금, 나 역시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나 주위 어른으로부터 확실성이 없는 가능성에 대한 능력을 높이 평가 받았던 탓에 쉽게 자신의 특별함을 세상의 보편함속에 내 던지지 못하고 있다. 이는 바로 마치 특별한 자아의식이 오래 된 중독처럼 내면 깊숙이 박혀 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그 중독에는 나와 가족들과 친구들과 모두가 빠져 있는 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 특별함이란 중독에서 빠져나와 평범한 햇볕에 자신의 몸과 마음을 노출 시켰을 때 사회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신의 가치과 행복을 찾을 수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요즘의 아이들은 예전의 아이들에 비해 외국어를 익히고, 셈을 하는 능력과 더불어 예체능적인 능력에 이르기까지 보다 다양한 능력계발과 적성을 키워가며 살아가고 있다. 다행히도 다양한 능력 중 어떤 한 분야에서 독특한 자신의 소질과 능력을 일찍이 발견하여 키워가고 있다면 다른 능력의 발견을 위한 기울이는 노력을 한 곳에 집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아이들 다양성의 추구를 넘어 지나치게 많은 능력을 강요받고 있는 탓에 자신의 순수한 능력이 때로는 퇴색될 때가 많을 거라는 생각이다. 가령 아이는 문학적인 소질이 있어도 영어 수학 등의 보편화 된 측정과목을 통과하지 못하면 누구에게도 인정을 받지 못하는 탓에 책을 맘껏 읽을 만한 시간적인 여유를 찾지 못한다. 결국 이러한 자신의 소질은 한동안 묻혀버린 채 살아가게 되고, 다행히 대학 등의 전공 선택을 통해서 직업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생긴다면 다행이지만, 그마저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평생 자신의 소질이나 능력은 날개를 펴보지도 못하게 되는 셈이다.

그로인한 공허함과 좌절감이 바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모들도 그리고 자신도 크게 문제 삼지 않지만,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그것은 결국 삶에 큰 의미였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고, 지금 자신 처한 삶을 너그럽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부터는 심한 좌절과 미련은 오래토록 인생의 그림자로 남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영재부모의 오답백과>를 통해 영재교육의 허와 실들을 보면서, 교육의 어려움을 또 다시 통감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이 어느 덧 경제적인 상품가치로까지 빗대어 설명되는 요즘, 아이와 부모와 학교들은 성적을 위한 그야말로 총칼 없는 전쟁을 매일매일 치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전쟁의 한 축을 이루는 것이 바로 영재교육열이다. 과학적인 효과가 비확실성에도 불구하고 “모차르트 효과”로 포장된 비싼 영재교재와 교구들은 부모들의 욕망을 자극해 봇물을 이루고, 어느 덧 2세 교육은 “문화자본” 이라는 이름이 덧붙여져 부의 되물림은 풍족한 능력개발 열기로 이어진다.

모두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엘리트주의를 표방하는 상위계층의 위화감이 더해지면서 발생하는 일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오히려 그 파급효과가 전반적인 사회교육흐름에까지 그 잘못된 파도지만 몸을 싣지 못하게 되면 부모로부터 받는 멸시와 친구들로부터 받는 따돌림까지 사회의 어두운 그림자를 일찌감치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순수함에서 비롯되어야 할 인생의 가치나 목표마저도 흐리 멍텅하게 만들어 버린다.
                                                                                                                                무엇보다 지금의 부모들이 <영재부모의 오답백과>에서 지적하는 여러 가지 비효율적이며, 비감성적인 교육 열기에서 조금은 벗어나 아이들을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한 수단이나 과시용으로 키우지 말고, 지극히 보편적인 삶의 행복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랑의 지혜를 맘속에 담을 수 있도록 아이들 스스로 날개를 펼칠 수 있는 자유스러운 공간의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은 이러한 자유로운 공간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가치와 능력을 스스로 깨닫게끔 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우리 아이들 모두를 각자 독특함을 갖고도 순수하며 보편적인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영재로 키우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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