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번은 아내가 바퀴 달린 장바구니를 들고 나갔다 십 분 만에 돌아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길 본다고, 나는 안 그러냐고 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자 아내는 사람들이 자꾸 쳐다본다고, 아이 잃은 사람은 옷을 어떻게 입나, 자식 잃은 사람도 시식 코너에서 음식을 먹나, 무슨 반찬을 사고 어떤 흥정을 하나 훔쳐본다고 했다. - P23

물론 우리에겐 단 일원도 건드리지 않은 보험금 통장이 있었다. 하지만 그건 한푼도 써서는 안 되는 돈이었다. 한 번도 상의한 적 없지만 아내도 나도 암묵적으로 그렇게 약속하고 있었다. - P24

그랬다. 잠이 안 올 정도로 좋았따. 어딘가 가까스로 도착한 느낌. 중심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튕겨진 것도 아니라는 거대한 안도가 밀려왔었따. 우리 분수에 이 정도면 멀이 온 거라고. 욕심부리지 말고 감사하며 살자고 다짐한 게 엊그제 같은데. 영우가 떠난 뒤 갑자기 어마어마하게 조용해진 이 집에서 아내와 금방이라도 찢어질 것 같은 도배지를 들고 있자니 결국 그렇게 도착한 곳이 ‘여기였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우리가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힘들게 뿌리 내린 곳이,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한 곳이 허공이었구나 싶었다. - P32

우리는 알고 있었다. 처음에는 탄식과 안타까움을 표한 이웃이 우리를 어떻게 대하기 시작했는지. 그들은 마치 거대한 불행에 감염되기라도 할 듯 우리를 피하고 수군거렸다. 그래서 흰 꽃이 무더기로 그려진 벽지 아래 쪼그려앉은 아내를 보고 있자니, 아내가 동네 사람들로부터 ‘꽃매‘를 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많은 이들이 ‘내가 이만큼 울어줬으니 너는 이제 그만 울라‘며 줄기 긴 꽃으로 아내를 채찍질하는 것처럼 보였다. - P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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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 되지 않을 수 없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기는 어렵지만 사랑한다는 말을 해놓고 사랑하지 않기는 더욱 어렵다. - P143

누구도 그를 진정으로 보살펴주지 않았으므로 그는 누구에게도 진정으로 의지하지 않고 사는 법을 터득해야 했다. 그것은 혼자 사는 것이었다. 세상에 자기 혼자밖에 없는 것처럼 사람들 속에서 사는 것이었다. 아무도 믿지 않고, 그러나 아무도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고 사는 것이었다. - P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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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해보니 혜인과는 2011년, 그녀가 졸업할 때 만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럼에도 오랜 친구와의 만남은 이토록 허무하고, 쉽고, 단박에 잡혔다. 안부도 기별도 없이 용건만 말하고 끊었지만 그게 부족했다거나 미안하지 않았다는 점마저 익숙했다. - P12

누군가에게 고백을 들은 것도 누군가의 첫 연인이 되는 것도 처음이었으며, 무엇보다 연애나 사랑 같은 건 먼 훗날의 것이었지 그게 내 것이 될 거라고는 단 한번도 상상해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시원하게 좋아, 하고 말해줄 수 없었다. 그때의 나는 심각하게 보수적이었거나 심각하게 조심스러웠거나 이미 심각한 게이였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걸 다 떠나서 나는 그저 상상력이 턱 없이 부족한 모범생이었다. - P33

봄밤의 불가해한 기운 속에서 혜인과 나는 손을 잡았다. 봄밤의 부드러운 바람이 없었어도 우리는 충분히 그랬을 것이다. 어른이 되고, 또 어른이 되어 좋은 점은 누군가의 손을 잡는 일이 더는 열없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먼저 어른이 된 친구들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것들. - P45

조금은 서글픈 기분 속, 여전하게 뛰는 이 심장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일까 나는 생각했다. 닿았다 떨어진 가슴의 감촉 역시 여전히 저릿한 감각으로 끈질기게 맴돌았다. - P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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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화가 이불 밖으로 뻗어나온 이수 맨발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전에는 집을 나설 때 이수 발등에 자주 입맞춰줬다. 한 손 가득 발을 감싼 뒤 털 난 발가락을 쓰다듬다 이불 안에 도로 넣어주곤 했다. 도화는 그 발, 자신과 많은 곳을 함께 간 연인의 발을 응시했다. 그러곤 결국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섰다. - P87

도화가 이별을 준비할 때면 두 사람 사이에 꼭 무슨 일이 생겼다. 이수가 새 직장의 면접을 앞두고 있건, 도화가 승진을 하거나, 이수의 생일이거나, 누가 아픈 식이었다. 미래를 예측해 결론 내리기 좋아하는 도화는 벌써부터 오늘 하루가 빤히 읽혀 울적했다. 과음한 이수는 하루종일 앓을 것이다. 술과 담배 냄새로 이불을 더럽히고 땀에 전 몸으로 오후 느지막이 일어나 두통을 호소하겠지. 그러다보면 우리는 오늘도 헤어지지 못할 것이다. - P94

선의나 온정에 기댄 나눔이 아닌 기술과 제도로 만든 공공선. 그 과정에 자신도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다. 그것도 서울의 중심 이른바 중앙에서. - P90

도화는 이수 옆에 비스듬히 누워 오랜 연인의 잠든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헤어지더라도 잊어버리지는 않겠다는 듯. - P96

당시 이수를 가장 힘들게 한 건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걸,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낸느 걸 감내하는 거였다. - P99

-나는 네가 돈이 없어서, 공무원이 못 돼서, 전세금을 뺴가서 너랑 헤어지려는 게 아니야.
-......
-그냥 내 안에 있던 어떤 게 사라졌어. 그리고 그걸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 같아. - P115

도화는 노량진이라는 낱말을 발음한 순간 목울대에 묵직한 게 올라오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에 여러 기억이 섞여 뒤엉키는 걸 알았다. 서울시 동작구 노량진동 안에서 여러 번의 봄과 겨울을 난, 한 번도 제철을 만끽하지 못하고 시들어간 연인의 젊은 얼굴이 떠올랐다. - P117

나는 내게 괜찮은 필기구가 있다는 걸 기억해낸 뒤 서랍을 뒤져 만년필을 꺼냈다. 그러곤 자기만의 필기구를 가진 많은 사람들이 그렇듯 종이 위에 제일 먼저 내 이름을 써봤다. 그뒤 통장을 새로 만들고, 혼인신고서를 작성하고, 전세 계약을 할 때마다 그 만년필을 썼다. 그래서 곽교수와 함꼐 ‘그 일‘을 겪고 며칠 뒤 경찰서에서 조서를 작성할 때도 습관적으로 품안에서 그 펜을 꺼냈다. 그러곤 조서에 서명하기 전, 만년필을 다시 주머니에 넣은 뒤 책상 위에 있던 모나미 볼펜으로 내 이름을 적었다. - P181

휴대전화 속 부고를 떠올리며 문득 유리 볼 속 겨울을 생각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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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 중요하고 필요한 제도라는 걸 부정하지 않는다. 내 말은 결혼은 제도로서 중요하다는 것, 그러나 사랑은 결혼이라는 제도에 예속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 제도의 유지를 위해 사랑응ㄴ 왜곡되고 희생을 강요받았다. 결혼은 사랑이 전혀 관여하지 않거나 아주 조금밖에 관여하지 않는 분야이다. 전혀 다른 층위에 있는 둘을 섞어 인과관계로 연결하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 P84

사랑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상대적으로 사랑에 대해 더 진지하다. 더 진지하기 때문에 함부로 하지 않는다. 함부로 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에 시도하지 못한다. -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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